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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마사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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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노우에 마사모토는 하마마츠 번의 다이묘 이노우에 마사사다의 장남으로, 1786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문을 계승했다. 1802년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의 소샤반(의전 담당)으로 막부에서 활동했으나, 1816년 센다가야에서 농가의 아내를 강간하고 남편에게 상해를 입힌 사건으로 인해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타나가와 번으로 좌천되었지만, 에도에 머물며 은둔 생활을 하다가 185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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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마사모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노우에 마사모토
한자 표기井上正甫
다른 이름가와치노카미
출생일1778년 12월 24일
사망일1858년 3월 11일
국적일본
직업다이묘
생애
출생안에이 4년 (1775년) 또는 안에이 7년 11월 8일 (1778년12월 24일)
사망안세이 5년 2월 26일 (1858년4월 9일)
어릴 적 이름무사부로
다른 이름마사모토
통칭신노스케
시모사 입도, 아와지 입도
계명안주인덴엣카이니치큐다이코지
묘소도쿄도분쿄구무코가오카의 조신사
관위종5위하, 가와치노카미
막부에도 막부소샤반
섬긴 주군도쿠가와 이에하루 → 이에나리
가문이노우에 씨
가족 관계
아버지이노우에 마사사다
어머니사쿠라이 씨
배우자사나다 유키히로의 딸
마쓰다이라 다케히로의 딸
오다 노부카쓰의 장녀 기히메'''
자녀마사하루
이노우에 마사타미
이노우에 마사카네
도이 도시요시
마키노 나루시게 정실
미야비히메
도모코 등
경력
도토미하마마쓰번 번주, 무쓰다나구라번 번주
관직 계승
하마마쓰번 번주전임: 이노우에 마사사다
후임: 미즈노 다다쿠니
임기: 1786년 ~ 1817년
다나구라번 번주전임: 오가사와라 나가마사
후임: 이노우에 마사하루
임기: 1817년 ~ 1820년

2. 생애

이노우에 마사모토는 하마마츠 번의 다이묘 이노우에 마사사다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문을 이었다.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 밑에서 소샤반(의전 담당)으로 일하며 막부 행정부에 참여했다.[1] 그러나 1816년 농민 여성 강간 사건을 일으켜 다나쿠라 번으로 좌천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에도에 머무르며 은둔 생활을 했다.[1]

시나노국 마츠시로 번의 다이묘 사나다 유키히로의 딸과 결혼했다. 마츠다이라 타케히로(타테바야시 번의 다이묘)와 오다 노부치카(타카하타 번의 다이묘)의 딸을 첩으로 두었다. 1820년 장남 이노우에 마사하루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1]

그의 묘는 도쿄 분쿄구에 있는 이노우에 가문의 사찰 조신지에 있다.[1]

2. 1. 가문 계승과 초기 활동

이노우에 마사모토는 하마마츠 번의 다이묘 이노우에 마사사다의 장남으로, 1775년(안에이 4년)에 태어났다. 1786년(덴메이 6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미카와 이노우에 가문의 8대 당주가 되었고 하마마츠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곧 종5위 하위의 조정 관위를 받았고, 가와치노카미라는 경칭을 받았다.[1]

1802년(교와 2년),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 재임 시기에 소샤반(의전 담당)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행정부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 주자반이 되었다.[1]

2. 2. 농민 여성 강간 사건과 좌천

1802년, 이노우에 마사모토는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 밑에서 소샤반(의전 담당)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행정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1816년에 에도 센다가야에서 매사냥을 하던 중 농민 여성을 강간하고, 이를 목격한 남편의 팔을 자르는 사건을 일으켰다.[1] 이 사건과 그 여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이 사건으로 마사모토는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1817년 후쿠시마현에 있는 다나쿠라 번(6만 곡)으로 좌천되었다.[1] 그러나 그는 병을 핑계로 에도를 떠나지 않고, 1858년 사망할 때까지 에도 저택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2. 2. 1. 사건의 전말

분카 13년(1816년) 가을, 이노우에 마사모토는 동료인 시나노국다카토 번주 나이토 요리모치의 초대를 받아 다카토 번 시모야시키(현재의 신주쿠 교엔)에서 매사냥을 즐겼다. 마사모토는 사냥에 열중하여 저택 옆의 센다가야 마을에 길을 잃었다. 거기서 우연히 발견한 농가에서 집을 보고 있던 여자를 덮쳤는데[1], 그곳에 귀가한 남편에게 발각되었다. 남편은 지겟다리를 휘둘러 여자 위에 있던 마사모토를 때렸고, 마사모토는 칼을 뽑아 남편의 팔 하나를 잘랐다. 뒷수습을 가신에게 맡기고 농가 부부는 영지인 하마마츠 번으로 이송하여 입막음을 했지만, 이윽고 소문은 에도 시중에 퍼져, 마사모토가 등성할 때는 등성하는 다른 다이묘의 아시가루들로부터 "밀부 다이묘!", "기다렸습니다! 강간 다이묘!", "백성 여자 맛은 어떠십니까"라며 놀림을 받았다.

막부의 어좌에서 다이묘 가문 당주가 일으킨 이 사건은, 이윽고 막부 중추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23일, 마사모토는 소샤반에서 면직되었고, 분카 14년(1817년) 9월 14일무쓰 다나쿠라로 처벌적인 이봉 명령을 받게 되었다.[1] 그러나 마사모토는 병을 이유로 다나쿠라에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나쿠라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마사는 규슈의 히젠국가라쓰 번으로 전봉되었고, 하마마츠에는 지금까지의 가라쓰 번에서 에도에 가까운 위치로 전봉을 계획하고 있던 미즈노 타다쿠니가 대신 들어가, 이후 막각에서 출세하게 된다.[2] (삼방 영지 교체).

2. 2. 2. 사건의 여파

1816년, 이노우에 마사모토는 에도 센다가야에서 매사냥을 하던 중 농가의 아내를 강간하고, 이를 목격한 남편의 팔을 잘랐다. 그는 가신들에게 부부를 하마마츠 번으로 데려가 입막음하도록 명령했다.[1] 그러나 이 사건은 에도 전역에 알려져 마사모토는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동료들에게도 외면받았다. 심지어 등성할 때 다른 다이묘아시가루들로부터 "밀부 다이묘!", "기다렸습니다! 강간 다이묘!", "백성 여자 맛은 어떠십니까"라는 야유를 받았다.[1]

결국 이 사건은 도쿠가와 막부 중추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23일, 마사모토는 소샤반에서 면직되었다.[1] 1817년 9월 14일에는 다나쿠라 번(6만 곡)으로 좌천되는 처벌을 받았다.[1] 그러나 마사모토는 병을 핑계로 다나쿠라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오가사와라 나가마사는 가라쓰 번으로 전봉되었고, 하마마츠에는 미즈노 타다쿠니가 들어와 이후 막부에서 출세하게 되었다.[2]

마사모토는 전봉 후에도 병을 핑계로 귀국하지 않았다. 1820년 4월 16일, 장남 이노우에 마사하루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1845년, 이노우에 가는 하마마츠로 복귀했다. 마사모토는 아들보다 오래 살았고, 1858년 1월 26일에 84세로 사망했다.

2. 3. 좌천 이후

1816년, 이노우에 마사모토는 현재의 센다가야에도에서 매사냥을 하던 중, 젊은 농가의 아내를 강간했다.[1] 그녀의 남편에게 발각되자, 칼을 뽑아 남편의 팔을 잘랐다. 가신들에게 부부를 납치하여 하마마츠 번으로 데려가 입막음하라고 명령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야기는 에도 전역에 퍼졌고, 마사모토와 그의 부하들은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동료들에게 외면받았다. 마사모토가 등성할 때는 다른 다이묘아시가루들로부터 "밀부 다이묘!", "기다렸습니다! 강간 다이묘!", "백성 여자 맛은 어떠십니까"라며 놀림을 받았다.[1]

같은 해 12월 23일, 마사모토는 소샤반에서 면직되었고, 1817년 9월 14일에는 후쿠시마현 다나쿠라 번(6만 곡)으로 좌천되었다.[1] 그러나 병을 핑계로 에도를 떠나지 않고, 1858년 사망할 때까지 에도 저택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다나쿠라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마사규슈의 가라쓰 번으로 전봉되었고, 하마마츠에는 미즈노 타다쿠니가 대신 들어가 이후 막부에서 출세하게 된다.[2]

분세이 3년(1820년) 4월 16일, 가독을 장남 이노우에 마사하루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마사하루 시대인 고카 2년(1845년), 이노우에 가는 하마마츠로 복귀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이노우에 마사사다
어머니사쿠라이 씨측실
정실사나다 유키히로의 딸
계실마쓰다이라 다케히로의 딸
계계실희희오다 노부우키의 장녀
장남이노우에 마사하루
차남이노우에 마사타미
8남이노우에 마사카네
9남도이 도시요시[3]
부인마키노 나리미 정실
부인미야비히메신게츠인, 사나다 유키무네의 양녀, 사나다 유키츠라 정실
부인이노우에 유코마쓰마에 아키히로의 양녀, 마쓰마에 미히로 정실, 후에 다카이 기요아키 정실


참조

[1] 서적 八幡和郎
[2] 문서
[3] 문서 土井利祐の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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