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키 시게타카 (센고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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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와키 시게타카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이와키 씨의 당주이다. 형인 이와키 나리타카 사후 가문을 계승했으며, 처음에는 시라카와 유키 씨와 동맹하여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다테 씨, 소마 씨, 타무라 씨 등 주변 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다테 가문의 내분인 덴분의 난에 참전하여 다테 하루무네 측을 지원했다. 이후 다테 씨, 아시나 씨, 사타케 씨 등과 외교 전략을 펼치며 가문의 생존을 도모했지만, 사타케 씨의 세력 확장을 막지 못하고 1569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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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키 시게타카 (센고쿠 시대) | |
---|---|
기본 정보 | |
씨명 | 이와키 씨 |
이름 | 이와키 시게타카 |
이명 | 지로 |
다른 이름 | 이로타로 |
법명 | 겟산메이테쓰안주 |
계명 | 겟소메이엔 메이테쓰 |
생몰 | |
출생 | 불명 |
사망 | 에이로쿠 12년 6월 14일 (1569년7월 27일) |
관직 | |
관위 | 종5위하 |
관직 | 좌경대부 |
가문 | |
씨족 | 이와키 씨 |
부모 | 아버지: 이와키 요시타카, 어머니: 사타케 요시시게의 딸 |
형제자매 | 나리타카 시게타카 지로 호마 (호마 쿠마노 신사)의 실 쿠보타 야마시로노카미의 실 나스 다카나오 (나스 다카스케의 양자) |
배우자 | 에도 단바노카미의 딸 |
자녀 | 쿠보히메 (다테 하루무네의 정실) 미야마 타마요시 (사타케 요시아키의 정실) |
양자 | 지카타카 (다테 하루무네의 장남) |
시대 | |
시대 | 센고쿠 시대 |
기타 | |
주군 | 없음 (자립적인 무사) |
2. 약력
이와키 요시타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나리타카 사후 가독을 이어받아 당주가 되었다. 초기에는 시라카와 유키 씨와 동맹을 맺고 소마 씨, 타무라 씨 등 주변 세력에 대항하려 했으나, 장녀 쿠보히메의 혼처 문제로 다테 씨 및 소마 씨와 군사적으로 충돌하여 패배하고 쿠보히메를 다테 하루무네에게 시집보냈다.[7] 덴분 10년(1541년)에는 교토로 상락하여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8]
덴분 11년(1542년) 발발한 덴분의 난에서는 다테 하루무네 측에 가담하여 카케다 토시무네, 소마 아키타네, 타무라 타카아키 등을 공격하고, 모토미야 무네요리를 보호하는 등 활약했다.[9][11] 또한 사타케 요시아키와 에도 타다미치의 화해를 중재하기도 했다.[10]
덴분의 난이 종결된 덴분 17년(1548년) 이후에도 타무라 씨, 소마 씨와의 항쟁을 계속하는 한편, 다테 씨, 아시나 씨, 사타케 씨 등과 외교 관계를 맺으며 가문의 생존을 도모했다. 이 시기에 다테 씨로부터 츠루치요마루(후의 치카타카)를 양자로 맞이했다. 그러나 주변의 이시카와 씨와 시라카와 유키 씨가 점차 사타케 씨에게 종속되자, 치카타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사타케 요시아키의 딸과 혼인시켜 사타케 씨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럼에도 사타케 요시아키와 요시시게 부자의 남오슈(南奥州) 진출을 막지 못했으며, 일족인 후나오 씨가 사타케 씨에게 종속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에이로쿠 12년(1569년)에 사망했다.
2. 1. 가독 상속과 초기 활동
이와키 요시타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으로는 나리타카(마사타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이와키 씨의 혈통과 계승 관계는 명확하지 않으나, 부친 요시타카의 뒤를 나리타카가 잇고, 시게타카는 분가하여 시라토 성을 칭했다고 한다. 나리타카는 히타치국의 히타치 에도씨와 손잡고 사타케 씨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며 히타치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나리타카가 사망한 후, 시게타카가 가독을 상속받아 당주가 되었다.시게타카는 초기에 시라카와 유키 씨와 동맹을 강화하여, 다테 타네무네의 외척이 되어 세력을 키우던 인근의 소마 씨와 타무라 씨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장녀 쿠보히메의 혼처를 둘러싸고 다테 씨 및 소마 씨와 대립하게 되었고, 이는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시게타카는 결국 쿠보히메를 다테 하루무네(타네무네의 장남)에게 시집보낼 수밖에 없었다.[7] 쿠보히메를 둘러싼 분쟁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시기도 명확하지 않지만, 이때 하루무네와 쿠보히메 사이에서 태어날 자녀를 이와키 씨의 양자로 삼기로 약속했다고 전해진다. 덴분 10년(1541년)에는 교토로 상락하여 조정으로부터 서위 및 임관을 받았다.[8]
2. 2. 덴분의 난 참전
덴분 11년(1542년)에 다테 씨 가문 내부에서 덴분의 난이 발발하자, 시게타카는 다테 하루무네 측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이듬해인 덴분 12년(1543년)에는 다테 타네무네 측인 다테군 카케다 성의 성주 카케다 토시무네를 공격했다. 덴분 15년(1546년)에는 타네무네 측의 니혼마츠 요시우지에게 모토미야 성을 빼앗기고 도망쳐 온 모토미야 무네요리(하루무네 측)를 보호했다.[9]덴분 16년(1547년), 시게타카는 사타케 요시아키와 에도 타다미치 사이의 화해를 중재했다.[10] 같은 해 6월, 하루무네의 요청을 받아 아시나 모리우지와 함께 아사카구치 방면으로 출병했다.[11] 10월에는 타네무네 측의 소마 아키타네를 공격했고, 다음 해인 덴분 17년(1548년) 3월에는 타무라 타카아키를 공격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시게타카는 아시나 모리우지와 함께 하루무네로부터 그 용맹함을 칭찬받았다. 또한 하루무네와 연락을 취하면서 타무라 씨와 니혼마츠 씨의 내부 분열을 유도하여 세력을 약화시키는 책략도 구사했다.
2. 3. 주변 세력과의 관계
시게타카는 초기에 시라카와 유키 씨와 동맹을 맺어, 다테 타네무네의 외척으로서 세력을 키우던 소마 씨와 타무라 씨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장녀 쿠보히메의 혼처 문제로 다테 씨, 소마 씨와 대립하여 군사적 충돌까지 벌어졌고, 결국 패배하여 쿠보히메를 다테 하루무네(타네무네의 장남)에게 시집보내야 했다[7]。 이 과정에서 하루무네와 쿠보히메 사이의 자녀를 이와키 씨의 양자로 삼기로 약속했다고 전해진다.덴분 11년(1542년) 발발한 덴분의 난에서는 다테 하루무네 측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덴분 12년(1543년)에는 다테 타네무네 측인 카케다 성주 카케다 토시무네를 공격했다. 덴분 15년(1546년), 타네무네 측 니혼마츠 요시우지가 하루무네 측인 모토미야 무네요리의 모토미야 성을 함락시키자, 패주한 무네요리를 보호하기도 했다[9]。
덴분 16년(1547년), 사타케 요시아키와 에도 타다미치 사이의 화해를 중재했다[10]。 같은 해 6월, 하루무네의 요청으로 아시나 모리우지와 함께 아사카구치 방면으로 출병했다[11]。 같은 해 10월에는 타네무네 측의 소마 아키타네를 공격했으며, 이듬해 덴분 17년(1548년) 3월에는 타무라 타카아키를 공격했다. 이러한 활약에 대해 하루무네는 아시나 모리우지와 더불어 시게타카의 용맹함을 칭찬했다. 또한, 하루무네와 연계하여 타무라 씨와 니혼마츠 씨 내부의 갈등을 조장하여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책략을 사용하기도 했다.
덴분 17년(1548년) 덴분의 난이 종결된 후에도 타무라 씨, 소마 씨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시게타카는 다테 씨, 아시나 씨, 사타케 씨 등 주변 세력과의 외교를 통해 가문의 생존을 도모했다. 이 시기에 다테 씨로부터 츠루치요마루(후의 치카타카)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이후 주변의 이시카와 씨와 시라카와 유키 씨가 사타케 씨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키자, 시게타카는 아들 치카타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그의 정실로 사타케 요시아키의 딸을 맞이하여 사타케 씨와의 우호 관계를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사타케 요시아키와 요시시게 부자의 남오슈(南奥州) 진출 야심을 막지는 못했으며, 일족인 후나오 씨가 사타케 씨에게 종속되는 일도 발생했다.
2. 4. 다테 가문과의 관계 변화와 사타케 가문과의 갈등
덴분 17년(1548년)에 덴분의 난이 종식되자, 시게타카는 타무라 씨와 소마 씨와의 항쟁을 지속하는 한편, 다테 씨, 아시나 씨, 사타케 씨와의 외교 전략을 통해 가문의 생존을 모색했다. 이 무렵 다테 씨로부터 츠루치요마루(훗날의 치카타카)를 양자로 맞이했다.그러나 주변의 이시카와 씨와 시라카와 유키 씨가 점차 사타케 씨에 종속되면서 이와키 씨의 입지는 점차 어려워졌다. 이에 시게타카는 치카타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그의 정실로 사타케 요시아키의 딸을 맞이하여 사타케 씨와의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타케 요시아키와 그의 아들 요시시게 부자의 남 오슈(南奥州) 지역 진출 야심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결국 일족인 후나오 씨마저 사타케 씨에게 종속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2. 5. 사망
에이로쿠 12년(1569년)에 사망했다.참조
[1]
서적
大日本史料』第10編之2 733頁
[2]
서적
伊達氏四代治家記録
[3]
서적
系図纂要
[4]
서적
班寅集
[5]
서적
亀田岩城家譜
[6]
서적
伊達氏四代治家記録
[7]
서적
史料綜覧』第9編之909 465頁
[8]
서적
史料綜覧』第9編之910 121頁
[9]
서적
史料綜覧』第9編之910 242頁
[10]
서적
史料綜覧』第9編之910 257頁
[11]
서적
史料綜覧』第9編之910 261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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