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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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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종후는 후당 명종 이사원의 3남으로, 933년 이사원의 사망으로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어 군의 대권은 추밀사 주홍소와 풍윤 등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종후는 이종가의 반란으로 낙양을 탈출하여 위주로 피신했으나 결국 폐위되어 살해당했다. 시호는 민제이며, 후진의 석경당에 의해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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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민황제 이종후
後唐閔帝
칭호황제
전체 이름이종후(李從厚)
보살노(菩薩奴, 어린 시절 이름)
묘호없음
시호민황제(閔皇帝, "신중한")
출생명보살노(菩薩奴)
출생일914년 12월 17일
출생지타이위안
사망일934년 5월 24일
사망지안양
매장지뤄양
가문
왕조후당
아버지이사원
어머니하씨 부인
통치 정보
통치 기간933년 12월 20일 – 934년 5월 19일
이전 통치자이사원
후임 통치자이종가
배우자공황후
배우자 유형황후
자녀이중철 (李重哲), 아들
이름 미상의 아들 셋
연호응순(應順)
연호 기간934년
기타 정보
송왕 재위 기간930년 9월 20일 ~ 933년 12월 20일

2. 생애

이종후는 이사원(후당 명종)의 3남으로 태어났다. 930년(장흥 원년)에 송왕(宋王)으로 봉해지고 (鄴)으로 이주하였다.[4]

933년(장흥 4년), 이사원의 사망으로 황제에 즉위 한다. 어리석어서, 군의 대권은 추밀사 주홍소와 풍윤 등에 의해서 정권이 장악을 하게 되었다. [4]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사원의 양자인 이종가봉상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이종가의 반군을 대항하는 세력을 형성을 못하고, 낙양을 탈출하여 위주로 피했다.[4]

그 후, 폐위되어서 악왕(鄂王)으로 봉해졌지만, 결국 이종가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았다.[4] 시호인 민제는 후진의 석경당이 그에게 추봉한 시호이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이종후는 914년에 태어났으며, 아버지 이사원은 당시 이존욱 휘하의 진 (후당의 전신 국가) 장군이었다.[4] 어머니 하씨 부인은 이사원의 첩이거나 조씨 부인의 동반자였다.[5] 이종후는 이사원의 셋째 아들(《구오대사》에 따르면)[4] 이거나 다섯째 아들(《신오대사》에 따르면)[6]이었다. 그는 당시 진의 수도였던 태원에 있는 이사원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춘추》를 읽고 그 일부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외모가 아버지와 닮아 이사원의 총애를 받았다.[4]

2. 2. 이사원 재위 기간

926년, 이존욱이 반란으로 사망한 후 이사원이 황제에 즉위했다. 927년, 이종후는 하남부윤(시장)에 임명되었고, 명예 재상 직위인 동중서문하평장사를 받았으며, 친위대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는 형 이종영의 불만을 샀다. 928년, 이종후는 선무군 절도사가 되었고, 계속해서 친위대를 지휘했다. 그는 공씨 부인과 혼인했다.

929년, 이종후는 하동절도사로 임명되었고, 이종영은 하남부윤 겸 친위대 사령관이 되었다. 930년, 이종후는 송왕에 봉해졌다. 931년, 이종후는 천웅군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932년, 이종후는 더 높은 명예 재상 직위인 중서령을 받았다. 이종영은 조정에서 지배적인 인물이었으나, 이종후가 자신보다 더 나은 평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꼈다. 그러나 이종후는 형에게 겸손했고, 그들의 관계는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완전히 손상되지 않았다.

2. 3. 즉위 과정

933년 말, 이사원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이종영이 황실 정부를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살해되었다.[3] 이사원은 이종후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 이종후는 이후 도착하여 황제에 즉위했다.[3] 이종후가 즉위하자, 주홍조와 풍윤은 자신이 황제가 되도록 도왔다고 믿고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다.[1]

이종후는 930년에 송왕에 봉해져 업도로 옮겨졌다. 933년 명종이 붕어하면서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군대의 대권은 추밀사인 안사회나 주홍소 등이 장악하고 있었다.[4] 이러한 상황에서 명종의 양자인 이종가봉상에서 거병하자, 이종후는 이에 대항할 수단을 찾지 못하고 낙양을 탈출하여 위주로 도망쳤다.[4]

3. 통치 기간

이종후가 즉위하자, 주홍소와 풍윤은 자신이 황제가 되도록 도왔다고 믿고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또한 이종후의 불만을 무릅쓰고 그의 측근들을 조정에서 배제했다. 한편, 이종후는 이사원의 아내인 조황후를 태황태후로, 왕비 왕씨를 태비로 존중했다(그녀가 이종경과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1]

== 이종가의 반란과 몰락 ==

주홍조와 풍윤은 이종후가 즉위하는데 도움을 준 대가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이종후의 측근들을 조정에서 배제했다.[1] 이들은 이종후의 양형인 노왕 이종가와 그의 매형인 하동절도사 석경당을 견제하기 위해, 934년 봄, 이종가를 봉상(鳳翔, 현재 바오지, 산시성)에서 하동으로, 석경당을 하동에서 성덕(成德, 현재 스자좡, 허베이성)으로, 성덕 절도사 범언광을 천웅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이들은 이 조치를 정식 칙령 없이 추밀원의 명령으로 시행했다.[3]

그러나 이는 이종가가 자신을 겨냥한 조치라고 믿게 만들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종가는 주홍조와 풍윤이 정부를 잘못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군사를 일으켰다.[3] 이종후는 장군 왕사통에게 군대를 지휘하게 했으나,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황실 군대는 붕괴되어 대부분 이종가에게 항복했다. 이후 이종가는 낙양으로 진격했다.[3]

이종후는 강의성에게 남은 군대를 맡겼으나, 강의성 역시 이종가에게 항복했다.[3] 이종후는 낙양을 탈출하여 위주(魏州)로 피신했으나, 석경당의 부하들에게 고립되었다.[3] 얼마 후, 조태후의 칙령으로 이종후는 폐위되고 어왕으로 강등되었으며, 이종가가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종가는 왕란(王巒)을 보내 이종후를 목 졸라 죽였다.[3]

== 죽음 ==

이종후는 제2대 황제인 이사원(명종)의 3남으로, 933년 이사원의 사망으로 황제에 즉위했다.[3] 어리석어서, 군의 대권은 추밀사 주홍소와 풍윤 등에 의해 장악되었다.[1]

이종가는 왕란(王巒)을 독주와 함께 위(衛)로 보냈다. 왕란은 이종후에게 술을 권했지만, 이종후는 그 술에 독이 든 것을 알고 마시기를 거부했다. 결국 왕란은 이종후를 목 졸라 죽였다.[3] 이종가는 또한 공황후와 이종후의 네 아들을 죽였다.[3]

이종후는 이사원의 무덤 남쪽에 왕자에게 맞는 의식만 치르고 매장되었다.[3] 석경당이 후에 이종가를 전복하고 새로운 후진의 황제를 선포한 후에야 이종후는 황제로 추존되었다.[4]

3. 1. 이종가의 반란과 몰락

주홍조와 풍윤은 이종후가 즉위하는데 도움을 준 대가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이종후의 측근들을 조정에서 배제했다.[1] 이들은 이종후의 양형인 노왕 이종가와 그의 매형인 하동절도사 석경당을 견제하기 위해, 934년 봄, 이종가를 봉상(鳳翔, 현재 바오지, 산시성)에서 하동으로, 석경당을 하동에서 성덕(成德, 현재 스자좡, 허베이성)으로, 성덕 절도사 범언광을 천웅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이들은 이 조치를 정식 칙령 없이 추밀원의 명령으로 시행했다.[3]

그러나 이는 이종가가 자신을 겨냥한 조치라고 믿게 만들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종가는 주홍조와 풍윤이 정부를 잘못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군사를 일으켰다.[3] 이종후는 장군 왕사통에게 군대를 지휘하게 했으나,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황실 군대는 붕괴되어 대부분 이종가에게 항복했다. 이후 이종가는 낙양으로 진격했다.[3]

이종후는 강의성에게 남은 군대를 맡겼으나, 강의성 역시 이종가에게 항복했다.[3] 이종후는 낙양을 탈출하여 위주(魏州)로 피신했으나, 석경당의 부하들에게 고립되었다.[3] 얼마 후, 조태후의 칙령으로 이종후는 폐위되고 어왕으로 강등되었으며, 이종가가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종가는 왕란(王巒)을 보내 이종후를 목 졸라 죽였다.[3]

3. 2. 죽음

이종후는 제2대 황제인 이사원(명종)의 3남으로, 933년 이사원의 사망으로 황제에 즉위했다.[3] 어리석어서, 군의 대권은 추밀사 주홍소와 풍윤 등에 의해 장악되었다.[1]

이종가는 왕란(王巒)을 독주와 함께 위(衛)로 보냈다. 왕란은 이종후에게 술을 권했지만, 이종후는 그 술에 독이 든 것을 알고 마시기를 거부했다. 결국 왕란은 이종후를 목 졸라 죽였다.[3] 이종가는 또한 공황후와 이종후의 네 아들을 죽였다.[3]

이종후는 이사원의 무덤 남쪽에 왕자에게 맞는 의식만 치르고 매장되었다.[3] 석경당이 후에 이종가를 전복하고 새로운 후진의 황제를 선포한 후에야 이종후는 황제로 추존되었다.[4]

4. 가족 관계


  • 조부 : 효성황제 이예
  • 조모 : 효성의황후 유씨
  • 부친 : 명종 화무황제 이사원
  • 모친 : 소의황후 하씨
  • 부인 : 공황후 (934년 이종가에 의해 처형됨)
  • 자녀
  • * 이중철 (934년 이종가에 의해 처형됨)
  • * 아들 3명, 이름 미상 (934년 이종가에 의해 처형됨)

4. 1. 황후

애황후 공씨(哀皇后 孔氏)는 934년까지 황후였다. 이사원의 딸이며, 노국부인(魯國夫人)으로도 불렸다. 934년 이종가에 의해 처형당했다.

봉호시호이름(성씨)별칭재위년도생몰년도비고
황후(皇后)애황후(哀皇后)공씨(孔氏)노국부인(魯國夫人)934년? ~ 934년이종가에게 처형당함.


4. 2. 황자

이사원과 소의황후 하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중철은 934년 이종가에게 처형당했다. 공황후는 4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이중철을 제외한 다른 세 아들 역시 같은 해에 이종가에게 처형되었으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5. 연호

934년 후당민제는 장흥 5년 및 응순 원년을 사용하였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Old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5] 서적 Old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6]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7] 서적 Zizhi Tongjian
[8]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927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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