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원
1. 개요
이사원은 사타족 출신으로, 이극용의 양자가 되어 이사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후량 토벌 등에서 공을 세웠고, 이존욱 사후 무장들의 추대를 받아 926년 후당의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 개봉으로 수도를 정하고 풍도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했으며, 검소한 생활과 세제 정비를 통해 오대십국 시대의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즉위하여 측근들을 죽이고 무장들을 우대하여 권력을 준 것이 후당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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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샤투어 이름: 먀오지리에(邈佶烈) 중국 성씨: 이(李) 중국 이름: 사원(嗣源), 927년 2월 5일에 담(亶)으로 변경됨 |
|---|---|
| 재위 기간 | 926년 6월 3일 – 933년 12월 15일 |
| 연호 | 천성(天成): 926년 6월 3일 – 930년 3월 2일 장흥(長興): 930년 3월 3일 – 934년 1월 17일 |
| 묘호 | 명종(明宗) |
| 시호 | 약칭: 화무황제(和武皇帝) 전체: 성덕화무흠효황제(聖德和武欽孝皇帝) |
| 능호 | 휘릉(徽陵); 현재의 허난성 낙양시 맹진현에 위치 |
| 왕조 | 후당 |
|---|---|
| 역대 | 후당 황제 |
| 즉위 | 926년 6월 3일 |
| 퇴위 | 933년 12월 15일 |
| 선대 황제 | 이존욱 |
| 후대 황제 | 이종후 |
| 배우자 | 가족 섹션 참고 |
|---|---|
| 자녀 | 이종영 후진의 황후 이씨 이종후 기타 (가족 섹션 참고) |
| 출생 | 867년 10월 10일 |
|---|---|
| 출생지 | 당나라 영주 (현재의 산시성 잉현) |
| 사망 | 933년 12월 15일 (66세) |
| 사망지 | 후당 낙양 (현재의 허난성 뤄양) |
| 매장일 | 934년 6월 11일 |
| 아버지 | 이니(李霓) (친부) 이극용 (양부) |
|---|---|
| 어머니 | 유씨(劉氏) (친모) |
| 왕가 | 이(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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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당의 성덕군절도사 -
이종후
이종후는 후당 명종 이사원의 아들로, 933년 황제에 즉위했으나 이종가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살해당했으며, 후진의 석경당에 의해 추존되었다. -
천평군 절도사 (후당) -
석경당
석경당은 사타족 출신으로 후당 시대에 활약하며 이종가의 견제를 받다가 거란과의 동맹을 통해 후진을 건국했지만, 요나라에 연운 16주를 할양하고 조공을 바치는 외교 정책을 펼치다 매국노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선무군 절도사 (후당) -
석경당
석경당은 사타족 출신으로 후당 시대에 활약하며 이종가의 견제를 받다가 거란과의 동맹을 통해 후진을 건국했지만, 요나라에 연운 16주를 할양하고 조공을 바치는 외교 정책을 펼치다 매국노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선무군 절도사 (후당) -
이종후
이종후는 후당 명종 이사원의 아들로, 933년 황제에 즉위했으나 이종가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살해당했으며, 후진의 석경당에 의해 추존되었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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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원은 사타족 출신으로, 어릴 적 이름은 묘길례였다. 이극용의 양자가 되어 '이사원'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이극용을 섬기며 군사적 재능을 드러냈다. 거란족과 후량과의 전투에서 활약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장종이 즉위한 후에도 이사원은 계속 활약했다. 장종이 술에 빠져 정치를 멀리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장종은 살해되었다. 이사원은 군대의 추대를 받아 926년 60세의 나이로 후당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사원은 수도를 개봉에 정하고, 글을 몰라 모든 상주문을 안중회에게 읽게 하고, 풍도를 재상으로 등용했다. 환관을 억제하고, 토지 측량을 실시해 세제를 정비했다. 사치를 금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궁녀 수를 줄이고 공물을 받지 않았으며, 탐관오리는 엄벌하고 청백리는 포상했다. 삼사도를 창설하는 등, 이사원의 치세 동안 국내는 안정되었고, 오대십국 시대의 훌륭한 군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이사원은 늦은 나이에 즉위하여 분별력이 흐려져 측근이었던 안중회와 임환을 죽였다. 또한 무장에게 추대된 탓에 무장들을 우대하여 권력을 주었는데, 이는 무장들의 오만과 전횡을 불러일으켜, 933년에 명종이 죽은 후 3년 뒤에 후당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2.1. 초기 생애 및 배경
이사원은 867년 산시성 잉저우(應州)에서 사타족 이름인 묘질례(苗吉烈)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예(李霓)는 당나라에 공을 세워 황실 성씨인 이(李)씨를 하사받은 이국창 휘하의 장군이었다. 묘질례는 돌궐 조상들처럼 성이 없었다.
878년, 이국창과 그의 아들 이극용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880년에 절도사 이탁(李琢)과 토욕혼 추장 흘련탁의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사타족 군대는 북쪽으로 도망쳐 음산산맥에서 말갈 부족에게 의탁했다. 12세(879년)에 이예가 사망하자, 이국창은 묘질례의 뛰어난 기마 궁술 실력에 감탄하여 그를 호위병으로 삼았다. 묘질례가 사냥에서 공중에 나는 새를 겨냥하면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이극용은 묘질례를 아들로 삼아 이사원(李嗣源)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사원은 젊어서부터 무용이 뛰어나고 신망이 두터웠으며, 당시 군벌 사이에서 유망한 부하를 양자로 삼는 관행에 따라 이극용의 가자(양자)가 되었다.
2.2. 이극용 휘하에서의 활약
이사원은 사타족 출신으로, 어릴 적 이름은 묘길례였다. 그는 이극용의 양자가 되어 '이사원'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이극용을 섬기며 군사적 재능을 드러냈다.
883년, 이극용은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하동 절도사가 되었다. 이사원은 이극용의 아들로 입양되어 그의 밑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884년, 이극용은 주전충이 베푼 연회에 참석했다가 암살 위협을 받았다. 이때 16세였던 이사원은 이극용이 탈출하도록 돕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사건 이후 이사원은 이극용의 친위 기병 지휘를 맡게 되었다.
890년, 이극용의 오랜 숙적 흘련탁이 하동 북부를 공격했을 때, 이존신이 패배하자 이사원이 지원군을 이끌고 가 적을 격퇴하고 흘련탁의 사위를 사로잡았다.
896년, 이존신이 주현과 주진을 지원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이사원은 300명의 기병만 이끌고 최전선에서 주전충의 군대를 격파하고 주진을 구출했다. 이후 나홍신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존신의 주력군과 함께 귀환했다.
898년, 이사조가 게총주에게 패배하자, 이사원은 증원군을 이끌고 도착하여 용감하게 싸워 적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이사원은 온몸에 피를 흘리고 네 군데나 화살을 맞았지만, 진 왕으로 책봉된 이극용은 그의 용기를 칭찬하며 직접 치료해 주었다.
902년, 주전충이 타이위안시를 포위했을 때, 이극용은 도시를 포기하려 했으나, 이사원은 이사조, 주덕위와 함께 도시를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며 이극용을 설득했다. 이사원과 이사조가 이끈 기습 작전은 선무 군의 식량 공급을 방해했고, 결국 주전충은 퇴각했다.
907년,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자, 이사원은 진 왕 이극용을 계속 섬겼다.
2.3. 이존욱 휘하에서의 활약
李嗣源중국어은 이극용이 죽고 그의 아들 이존욱이 진왕의 자리를 계승한 후에도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910년, 박상 전투에서 후량군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고, 912년에는 옌을 멸망시키는 원정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916년, 위주 전투에서 후량군을 격파했고, 이후 앙구오 회로(安國)의 절도사가 되었다. 917년, 거란족의 유주 공격을 막아냈으며, 918년에는 후량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921년, 이존욱의 후량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명예로운 재상 직함인 '통 중수 문하 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받았다. 923년, 이존욱이 후당을 건국하고 황제 자리에 오르자, 李嗣源중국어은 운주 기습 공격을 성공시켜 후당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이후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2.4. 후당 황제 즉위
926년, 장종이 술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장종이 살해되고, 이사원은 군대의 추대를 받아 60세의 나이로 후당의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수도를 개봉으로 정하고, 연호를 천성(天成)으로 정했다.
2.5. 치세
이사원은 환관 세력을 억제하고, 지배지에 대규모 측량을 실시해 세제를 정비하였다. 스스로 사치를 금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궁녀 수를 줄이고 공물을 받지 않았다. 탐관오리는 엄벌하고 청백리는 후한 상을 주었으며, 삼사도를 창설하는 등, 이사원의 치세 동안 국내는 안정되었고, 오대십국 시대 굴지의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풍도(馮道)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국정 운영에 힘썼다.
927년, 자신의 이름에 들어가는 흔한 글자인 "사원" 중 "원" 자는 피휘 대상에서 제외하여 백성의 불편을 줄였다. 같은 해 스스로를 이단(李旦)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이사원은 무장 출신으로 즉위한 탓에 무장을 우대하여 권력을 주었다. 이는 무장들의 오만과 전횡을 불러 일으켰고, 933년 명종 사후 3년 만에 후당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거란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 태조(야율아보기)에게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거란 황제가 영토를 요구하며 야오쿤(姚坤)을 체포하여 완전한 평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형남, 오, 오월 등 주변국과의 관계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2.6. 말년 및 사망
930년, 연호를 장흥(長興)으로 변경하였다. 933년, 이사원은 병으로 쇠약해졌고, 후계자 문제로 혼란이 발생했다. 장남 이종영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이종영은 살해되었다.
이종영은 동생 이종후가 더 총애받는 아들이라 여겨 왕위가 동생에게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여 군사 행동을 통해 권력을 잡으려 했다. 이사원은 이종영의 반란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의붓아들 이종가의 아들 이중기(李重吉)에게 "총영이 감히 이토록 사악한 짓을 저지르다니!"라고 한탄했다. 결국 황궁 경비병들이 이종영과 그의 가족을 죽였다.
이사원은 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재상 풍도와 다른 신하들에게 "이런 비극적인 가족 상황에서 신하들을 만나 뵙게 되어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엿새 후인 933년 12월, 이사원은 병사하였다. 그의 사후, 아들 이종후가 민제(閔帝)로 즉위했다.
3.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및 묘호, 시호 |
|---|---|
| 조부 | 열조(烈祖) 효정황제(孝靖皇帝) 이염(李琰) |
| 조모 | 효정목황후(孝靖穆皇后) 하씨(何氏) |
| 부친 | 덕조(德祖) 효성황제(孝成皇帝) 이예(李霓) |
| 모친 | 효성의황후(孝成懿皇后) 유씨(劉氏) |
| 양부 | 태조(太祖) 무황제(武皇帝) 이극용 |
| 양모 | 황태비(皇太妃) 유씨(劉氏) |
|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별칭 | 생몰년도 | 비고 |
|---|---|---|---|---|---|
| 숙비(淑妃) | 왕씨(王氏) | 황태비(皇太妃) | ? ~ 947년 | ||
| 소의(昭儀) | 왕씨(王氏) | 제국부인(齊國夫人) | |||
| 소용(昭容) | 갈씨(葛氏) | 주국부인(周國夫人) | |||
| 소원(昭媛) | 유씨(劉氏) | 조국부인(趙國夫人) |
* 노왕(潞王) 이종가 - 본성은 왕씨. 선헌황후 위씨가 명종에게 재가 하기 전에 태어남. 후당 제4대 황제 말제.
4. 평가
이사원은 혼란스러운 오대십국시대에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쳐 굴지의 명군으로 칭송받는다. 검소함과 성실함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내치에 힘써 국가를 안정시켰다. 그는 글을 거의 알지 못했지만, 안중회와 풍도 등 유능한 신하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환관 세력을 억제하고, 토지 측량을 통해 세제를 정비했으며, 사치를 금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탐관오리를 엄벌하고 청백리에게는 상을 내렸다.
사타족 출신인 이사원은 한족 위에 군림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며, 밤마다 하늘에 향을 피우고 한족 출신 천자의 탄생을 기원했다고 한다. 이러한 인품과 겸손함으로 인해 후당은 안정되었고, 이사원은 오대 굴지의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이사원은 무장을 우대한 정책은 훗날 후당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본인이 무장들에게 추대되어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즉위 후 무장들에게 권력을 주었고, 이는 무장들의 오만과 전횡을 불러와 933년 그가 죽은 후 3년 만에 후당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