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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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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희열은 당나라 말기 회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군벌로, 안사의 난 이후 이충신의 부하로 시작하여 회서 절도사를 거쳐 스스로 초나라 황제를 칭하기에 이른 인물이다. 그는 이충신을 축출하고 회서 절도사가 되었으며, 당나라 조정에 협력하는 듯했으나 결국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를 건국했다. 이후 당나라 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부하 진선기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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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희열(李希烈)
원래 이름이희열(李希烈)
작위초(楚) 황제
재위 기간784년 ~ 786년 5월 9일
연호무성(武成, 784년 ~ 786년 5월 9일)
출생일미상
출생지연주(燕州, 지금의 길림성 사평시) 요서
사망일786년 5월 9일
사망지채주(蔡州, 지금의 하남성 주마점시)
왕조초(楚)
통치 정보
직업군사 장군, 군주, 정치인
묘호없음
시호없음
능호없음
생애
생년미상
몰년정원 2년 (786년)
기타 정보
성(姓)이(李)
희열(希烈)
자(字)없음
소자(小字)없음

2. 생애

이희열은 안록산의 난 때 이충신을 따라다니며 그의 부장이 되었다. 779년 이충신이 횡포를 부리자 그를 쫓아내고 스스로 절도사가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당나라 조정에 순종하는 척하며, 781년에는 반란을 일으킨 산남동도 절도사 양숭의를 제거하기도 했으나, 이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계략이었다.[2]

양숭의를 제거한 후, 이희열은 산남동도를 당나라 조정에 반환하지 않고 자신의 사유지처럼 통치했다. 782년, 덕종이승을 산남동도 절도사로 임명했지만, 이희열은 이승의 부임을 방해하고 위협했다. 같은 해, 덕종은 이희열을 평로절도사로 임명하여 이납을 공격하게 하려 했으나, 왕무준, 전열, 주도 등 다른 반역 세력들과 은밀히 연락하며 당나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엿보았다. 783년 봄, 루저우를 점령하고 인근 주들을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노기의 제안으로 안진경이 파견되었으나, 이희열은 안진경을 가택 연금하고 황실 복귀 요구를 거부했다.

783년 가을, 경원절도 군인들의 반란으로 덕종이 봉천으로 피신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반란군은 주차를 지도자로 추대했고, 주치는 스스로 진나라 황제로 선포했다. 이 틈을 타 이희열은 상성을 함락시키고, 뤄양으로 진격했다. 784년 봄, 덕종은 대사면령을 선포하여 반란 세력들에게 황실에 복종하면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희열은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 초나라 황제로 선포하며 개봉을 수도로 삼았다.[6]

786년 봄, 이희열은 소고기를 먹고 병에 걸렸다. 그의 장군 진현기의 아내의 친구였던 후궁 두씨의 권유로, 이희열의 의사가 그를 독살했다. 이후 이희열의 아들이 절도사를 장악하려 했으나, 진현기가 그와 이희열의 가족들을 죽이고 당나라에 다시 복종했다.

2. 1. 배경

이희열의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가문은 연주(燕州, 현재 지린성 쓰핑 시) 출신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대정(大定)이었다. 그의 성씨는 원래 동(董)씨였을 수도 있다.[3] 그는 평로군(平盧, 당시 본부는 현재 랴오닝성 차오양에 위치)에 입대했다. 안사의 난 당시, 평로군의 일부는 동진(董秦)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희열의 아버지의 사촌으로 추정되는 이충신이 이끌고 보하이 해를 건너 반란군인 연(燕)나라에 대항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이후 이충신이 회서군(淮西, 현재 허난성 주마뎬 시에 위치)의 절도사(節度使)가 되자, 이희열은 그를 따라가 섬겼다.

2. 2. 회서 절도사로서

이희열은 안사의 난 때 이충신을 따라 전전하며 그의 부장이 되었다. 779년 이충신이 횡포를 부리자 그를 쫓아내고 스스로 절도사가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당나라 조정에 순종하는 척하며, 781년에는 반란을 일으킨 산남동도 절도사 양숭의를 제거하기도 했다.[2] 그러나 이는 이희열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양숭의를 제거한 후, 이희열은 산남동도를 당나라 조정에 반환하지 않고 자신의 사유지처럼 통치하기 시작했다. 782년, 덕종이승을 산남동도 절도사로 임명하여 파견했지만, 이희열은 이승의 부임을 방해하고 위협했다. 급기야 자신의 병사들을 시켜 상주를 약탈하게 한 후 회서로 돌아갔다.[6]

같은 해, 덕종은 이희열을 평로절도사로 임명하여 이납을 공격하게 하려 했으나, 이희열은 오히려 왕무준, 전열, 주도 등 다른 반역 세력들과 은밀히 연락하며 당나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희열은 이납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본부를 허주로 옮기고, 개봉에 주둔하고 있던 영평절도사 이면에게 자신의 영토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면이 의심하여 경계를 강화하자, 이희열은 공격을 포기했다. 대신, 이희열은 덕종에게 받지 못한 무력 최고 사령관, 삼공 중 하나인 태위, 건흥왕 등의 칭호를 스스로 칭하며 자신의 세력을 과시했다.[6]

783년 봄, 이희열은 루저우를 점령하고 인근 주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노기의 제안으로 덕종은 안진경을 보내 이희열을 설득하려 했으나, 이희열은 안진경을 가택 연금하고 황실 복귀 요구를 거부했다. 또한 장안과 양쯔강-회허 지역 사이의 통신선을 차단하여 당나라 관리들의 통신을 방해했다. 당나라 장군들의 저항으로 확장이 주춤해지자, 이희열은 덕종에게 사과하며 자신의 반란을 부하 주증의 탓으로 돌리고, 채주로 본부를 옮기는 등 화해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속임수였을 뿐, 이희열은 계속해서 황실 군대와 교전하고 주변 주들을 약탈했다.[6]

783년 가을, 경원절도 군인들의 반란으로 덕종이 봉천으로 피신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반란군은 주차를 지도자로 추대했고, 주치는 스스로를 진나라 황제로 선포했다. 이 틈을 타 이희열은 상성을 함락시키고, 뤄양으로 진격했다. 783년 말, 이희열은 이면의 본거지인 변주를 공격했으나,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는 민간인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성을 포위하게 하고, 제때 해자를 채우지 못하면 산 채로 매장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784년 설 무렵, 이면은 결국 변주를 포기했고, 이희열은 변주를 점령하여 자신의 본부로 삼았다. 이면의 부하였던 이징 또한 화주를 이희열에게 항복시켰다. 이 소식에 양쯔강-회허 지역은 큰 충격을 받았고, 회남절도사 진소유는 부하를 보내 이희열에게 충성을 맹세하기까지 했다.[6]

784년 봄, 덕종은 대사면령을 선포하여 주도, 왕무준, 전열, 이납, 이희열 등 반란 세력들에게 황실에 복종하면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왕무준, 전열, 이납은 스스로 칭했던 제후 칭호를 포기했지만, 이희열은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초나라 황제로 선포하며 개봉을 수도로 삼았다.[6]

2. 2. 1. 조정에 봉사하다

이희열은 여러 절도사들의 사실상 독립을 종식시키고 싶어 했던 덕종에게 여러 차례 건의하여 총애를 받았다. 당시 절도사들은 다음과 같았다.[1]

절도사명본부 위치절도사
평로산둥성 타이안시이정기
위보허베이성 한단시전열
성덕허베이성 스자좡시이보진
산남동도후베이성 샹양시양충의



이희열은 양충의를 공격하여 산남동도를 황실에 반환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제안했다. 781년 이보진이 사망한 후, 덕종은 그의 아들 이유열이 지위를 계승하는 것을 거부했고, 서로 연합했던 사실상 독립된 절도사들은 황실에 대항하여 전쟁을 준비했다. 양충의는 전략적 위치가 가장 열악하고 세력이 약했으며 황실에 복종하는 절도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다른 절도사들만큼 도발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덕종은 양충의를 수도 장안으로 소환하여 항복할지 싸울지를 선택하게 했다. 양충의는 고심 끝에 거부하고 전쟁을 결정했다.[1]

781년 여름, 덕종은 이희열을 남평왕(南平王)으로 봉하고 양충의에 대한 작전을 지휘하게 했다. 이는 재상 양염이 이희열을 신뢰할 수 없다고 경고했음에도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덕종은 이희열의 충성을 공개적으로 칭찬했지만, 관리 이승(李承)은 이희열이 양충의를 물리치면 거만해지고 반항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희열의 진격이 폭우로 지연되자, 노기는 덕종에게 이희열이 양염에 대한 불만으로 작전을 늦추고 있다고 은밀히 제안했고, 덕종은 양염을 재상직에서 해임했다. 한편 양충의는 강릉을 점령하여 남쪽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사왕(四望, 현재 샹양시)에서 패배하여 샹주로 후퇴했다. 그는 군대를 샹주와 등주에 집중시켰고, 이희열은 한수를 따라 샹주로 향했다. 양충의는 린한(臨漢, 샹주 근처)의 이희열군 일부를 공격하여 학살했지만, 이후 이희열의 주력이 도착하자 양충의의 장군 채휘(翟暉)와 두소성(杜少誠)은 만강(蠻水, 현재 샹양시를 흐름)과 서구(疎口, 현재 샹양시)에서 이희열에게 패배했다.[1]

채휘와 두소성은 이희열에게 항복했고, 이희열은 그들에게 군대를 이끌고 샹양(샹주의 수도)으로 먼저 진입하도록 명령했다. 양충의는 저항을 명령했지만, 군대는 성문을 열고 도망쳤다. 양충의는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이희열은 그의 시신을 우물에서 꺼내 머리를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 또한 양충의의 친척과 친구들, 린한 전투에 참여한 3,000명의 병사들을 학살했다. 덕종은 이희열에게 명예 재상 직함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수여했다.[1]

이후 이희열은 안사의 난에 동진(후의 이충신)을 따라 전전하며 이충신의 부장이 되었다. 이충신이 횡포를 부리자, 대력 14년(779년)에 그를 쫓아내고 스스로 절도사가 되었다. 표면상으로는 공순을 맹세하고, 건중 2년(781년)에는 반란을 일으킨 산남동도 절도사 양숭의를 멸하였다.[2]

2. 2. 2. 조정의 통치에 등을 돌리다

이희열이 양숭의를 상대로 승리한 후, 산남동도를 황제에게 돌려주지 않고 사유지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덕종은 이승을 산남동도 절도사로 임명하여 파견했지만, 이희열은 이승이 통치를 맡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위협했다. 이승이 떠나기를 거부하자 이희열은 자신의 병사들이 상주를 약탈하도록 허용하고 회서로 물러났다.[6]

782년, 덕종은 이희열을 평로절도사로 임명하여 이납을 공격하게 하려 했으나, 이희열은 왕무준, 전열, 주도 등 네 반역자들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고 당나라에서 독립하려 했다. 이희열은 이납을 공격하는 척하며 본부를 허주로 옮기고, 개봉에 위치한 영평절도사 이면에게 그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이면은 이희열의 의도를 의심하여 허가는 하였지만 경계를 강화했다. 이희열은 이면이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희열은 덕종으로부터 받지 못한 무력 최고 사령관, 삼공 중 하나인 태위, 건흥왕 등의 칭호를 스스로 칭했다.[6]

783년 봄, 이희열은 루저우와 그 직무대행 이원평을 점령하고, 자신의 군대를 인근 주에 보내 약탈했다. 노기의 제안에 따라 덕종은 안진경을 회서로 보내 이희열에게 황실에 복귀하도록 설득하게 했다. 이희열은 안진경을 가택 연금하고 황실 복귀 요구를 거부했다. 이희열은 장안과 양쯔강-회허 지역 사이의 통신선을 차단하여 당나라 관리들의 통신이 양쯔강 중부 지역을 거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그의 후속 확장은 당나라 장군 가숙요와 조왕 이고에게 저지당했고, 그의 작전은 중단되었다. 그의 부하 주증이 그를 몰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주증의 실패를 고려하여, 이희열은 덕종과 화해를 시도하여 자신의 반란을 주증의 탓으로 돌리는 사과를 보내고, 채주로 본부를 옮겼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는 황실 군대와 교전하고 주변 주를 약탈했지만, 확장을 위한 실질적인 기동은 하지 않았다.[6]

783년 가을, 경원절도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덕종을 봉천으로 도망치게 했다. 그들은 주차를 지도자로 지지했고, 주치는 스스로를 진나라 황제로 선포했다. 혼란 속에서 가숙요가 방어하던 상성이 이희열에게 함락되었고, 가숙요는 뤄양으로 도망쳤다. 783년 후반, 이희열은 이면의 본거지인 변주를 공격했지만, 충분히 빨리 점령할 수 없었다. 그는 강제로 민간인을 징집하여 성을 포위하는 데 참여시켰고, 그들이 변주 주변의 해자를 제때 채우지 못하자 그들을 산 채로 매장했으며, 그들을 "젖은 나무"라고 불렀다.[6] 784년 설 무렵, 이면은 변주를 포기했고, 변주는 이희열에게 함락되었으며, 그는 본부를 변주로 옮겼다. 이면의 부하 이징 또한 화주를 이희열에게 항복시켰다. 양쯔강-회허 지역은 이 전개에 모두 충격을 받았고, 회남절도사 진소유는 그의 부하 문술을 이희열에게 보내 충성을 맹세했다.[6]

덕종은 784년 봄에 대사면령을 선포했는데, 그 범위에는 주도, 왕무준, 전열, 이납, 이희열까지 포함되었고, 그들에게 명목상 황실 권위에 다시 복종하면 그들에게 다시 간섭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했다. 왕무준, 전열, 이납은 모두 스스로 칭한 제후의 칭호를 포기했다. 그러나 이희열은 거부하고 스스로를 초나라 황제로 선포하고 개봉을 수도로 삼았다.[6]

2. 3. 초나라 황제로서

781년 이희열은 반란을 일으킨 산남동도 절도사 양숭의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초나라 황제를 칭하며 연호를 무성이라 하였다. 그는 사신을 보내 장건봉 수주 자사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장건봉은 이를 거부하고 사신들을 죽였다. 이희열은 장군 두소성을 보내 장건봉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이고와 악주 자사 이겸 역시 이희열의 세력 확장을 저지했다. 이희열은 령릉을 공격하며 이성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한황 절서 서도 절도사의 지원을 받은 유창으로 인해 령릉 포위를 풀고 철수해야 했다.

784년 말, 이성이 장안을 탈환하고 당나라 황제가 장안으로 돌아오자 이희열의 동생 이희천이 처형되었다. 이에 분노한 이희열은 안진경을 처형했다. 진주 점령에 어려움을 겪던 중, 이성은 공개적으로 이희열에게 반기를 들고 당나라에 다시 항복했다. 이성, 유흡, 곡환의 당나라 군대가 변주에 집결하자 이희열은 변주를 떠나 채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이희열의 장군 전회진은 변주를 당나라 군대에 항복시켰다. 785년 봄, 이희열은 등주를 점령했으나 이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같은 해 가을, 당나라 황제는 노지의 조언에 따라 이희열에게 항복하면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조서를 내렸으나 이희열은 응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이희열의 공격은 계속 격퇴되었고, 영토는 줄어들었다.

786년 봄, 이희열은 소고기를 먹고 병에 걸렸다. 그의 장군 진현기의 아내의 친구였던 후궁 두씨의 권유로, 이희열의 의사가 그를 독살했다. 이후 이희열의 아들이 절도사를 장악하려 했으나, 진현기가 그와 이희열의 가족들을 죽이고 당나라에 다시 복종했다.

2. 4. 사망

이희열은 안록산의 난에 이충신을 따라 전전하며 그의 부장이 되었다. 이충신이 횡포를 부리자, 779년에 그를 쫓아내고 스스로 절도사가 되었다. 표면상으로는 공순을 맹세하고, 781년에는 반란을 일으킨 산남동도 절도사 양숭의를 멸하고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말 은상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켜 초국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무성으로 하였다. 주차에 호응하여 동도(낙양)를 공격했다. 784년에 여러 진이 귀순한 후에도 항복하지 않고 싸웠다. 위유 특사로 안진경이 파견되었는데, 그를 사로잡아 부하가 되도록 설득했으나 따르지 않자, 안진경을 죽였다. 786년에 이르러 열세가 되자 부하 진선기에 의해 살해되었다.[1]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이대정[3]
아내미상786년 진선기에 의해 살해됨
주요 후궁두량의 딸 두씨786년 오소성에 의해 살해됨
아들미상 (5명)786년 진선기에 의해 살해됨[8]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2]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www.sinica.ed[...]
[3] 서적 Zizhi Tongjian
[4]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www.sinica.ed[...]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Old Book of Tang
[8] 서적 Old Book of Tang
[9]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10] 웹사이트 음양력 변환기 http://sinocal.si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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