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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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 덕종은 당나라의 황제이다. 779년 즉위하여 재정을 개선하고 양세법을 시행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으나, 절도사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환관을 중용하는 폐단을 낳았다. 잦은 반란과 토번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말년에는 재물 축적에 힘썼다. 그의 통치는 중앙 집권 약화와 당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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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덕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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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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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이괄(李适) |
묘호 | 덕종(德宗) |
시호 | 신무효문황제(神武孝文皇帝) |
출생일 | 742년 5월 27일 |
사망일 | 805년 2월 25일 |
매장지 | 숭릉(崇陵) |
아버지 | 대종 |
어머니 | 심씨 |
배우자 | 왕황후(사망 786년) |
가문 | 이씨 |
왕조 | 당나라 |
연호 | 건중(建中) 780년–783년 흥원(興元) 784년 정원(貞元) 785년–805년 |
즉위 및 계승 | |
즉위 | 779년 6월 12일 |
전임자 | 대종 |
후임자 | 순종 |
황태자 | 764년 2월 23일 ~ 779년 6월 12일 |
황태자 전임자 | 대종 이예(李豫) |
황태자 후임자 | 순종 이송(李誦) |
재위 중 작위 | |
옹왕 | 762년 9월 21일 ~ 764년 2월 23일 |
노왕 | 762년 5월 24일 ~ 762년 9월 21일 |
봉절군왕 | 742년 ~ 762년 |
기타 | |
묘호 | 덕종(德宗) |
2. 생애
758년 아버지 이예가 황태자에 책봉되자 이괄은 황태손에 책봉되었고, 764년 황태자가 되었다. 779년 아버지 대종이 붕어하자 당나라 황제로 즉위하였다.[4] 즉위 후 당나라 재정 재건에 힘쓰며, 780년 재상 양염의 건의에 따라 조·용·조 제도에서 양세법으로 세제를 바꾸었다. 또한 절도사(節度使)를 억제하기 위해 병력 감축 및 세습 금지 등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절도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하삭삼진·하남이진 반란으로 장안에서 쫓겨났다.[15] 이 때문에 784년 『죄기조』를 발표하여 절도사에 대한 불개입을 약속하고 혼란을 수습하였다.
주비가 황제를 참칭하자, 군사를 보내어 한중에서 반란군을 격파하는 등 잦은 반란에 직면했다. 중앙 집권을 강화하려 힘썼고, 수도 장안의 상업을 늘려, 어떤 사람들은 이때를 '중흥의 치'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환관들을 많이 등용하는 폐단이 발생하여, 이는 훗날 당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15]
805년 64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황태자 책봉
이괄(李适)은 742년 당 현종 재위 시절, 장안의 동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 숙종의 장남 당 대종(당시 광평왕)이었고, 어머니는 대종의 후궁 신비(沈氏)였다.[4] 같은 해, 봉계현(奉節縣) 왕에 책봉되고 특진(特進)이라는 칭호를 받았다.[5]755년 안사의 난 발발 당시, 현종은 성도로, 숙종과 대종, 이괄 등은 영무(靈武)로 피난했다.[6] 이괄의 어머니 신비는 안사의 난 중에 실종되었고, 이후 대종과 이괄이 여러 차례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7]
756년 장안 탈환 후, 대종은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762년 숙종 사망 후 황제가 되었다.[9] 대종은 이괄에게 삼군사(三軍使) 직책을 주고 낙왕(潞王), 이후 용왕(雍王)으로 책봉했다.[10]
이괄은 회흘의 등리카한 야로격이지건(藥羅葛移地健)을 동등하게 대우했다가 그의 분노를 사, 부하들이 태형을 당하는 사건을 겪었고, 이로 인해 회흘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9][11] 763년 낙양 탈환 후, 이괄은 상서령(尚書令) 칭호를 받고 영연각(凌煙閣)에 초상화가 걸렸다.[12] 같은 해 토번 제국 침입으로 대종이 장안에서 도망쳤을 때, 이괄은 관중 지역 명목상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실질적 지휘는 부사령관 곽자의가 맡았다.[13]
764년, 이괄은 황태자로 책봉되었다.[13] 765년에는 이괄의 생모를 사칭한 비구니가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다.[13]
황태자 시절 이괄은 778년 재상 원재(元載)의 부패를 폭로했고, 779년 대종이 병석에 눕자 잠시 섭정을 맡았다.[14]
2. 2. 즉위와 개혁 시도
758년에 아버지 이예가 황태자에 책봉되자, 이괄은 황태손에 책봉되었고, 764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779년에 부황 이예가 붕어하자, 바로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780년에 재정을 개선시켰고, 재상 양염의 건의에 따라 조·용·조 제도에서 양세법(兩稅法)으로 바꾸었다. 그 때에도 반란은 잦았으며, 장군인 주비가 황제를 참칭하자, 이괄은 군사를 보내어 한중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였다.[15]중앙 집권을 강화하려 힘썼고, 수도 장안의 상업을 더욱 늘려, 어떤 사람들은 이 때를 '중흥의 치'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환관들을 많이 등용하는 폐단이 발생하여, 이는 훗날 당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15]
덕종은 즉위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버지와의 정치적 차이를 분명히 하는 여러 조치를 취했다.[14]
- 덕종은 권력이 지나치다고 의심했던 장군을 귀양 보내고 최유복으로 대체했다. 이후 최유복의 추천으로 양언도 재상이 되었다.[14]
- 상당한 군사 권한을 가지고 있던 곽자의는 많은 명예 칭호를 받았지만 사실상 강제로 은퇴를 당했고, 그의 권한은 리화이광, 상겸광常謙光|상겸광중국어, 혼검渾瑊|혼검중국어에게 분산되었다.[14]
- 덕종은 황궁의 동물들을 풀어주고, 많은 궁녀들을 궁궐 밖으로 내보냈으며, 황제의 사자로 일하는 환관들이 선물을 받는 것을 금지했다.[14]
- 10년 넘게 서천절도사(西川, 현재 쓰촨성 청두에 본부를 둔)를 다스리며 명목상으로만 황실의 권위에 복종했던 최녕은 장안에 구금되었지만(명목상으로 승진했지만) 황실은 서천의 통제권을 되찾았다.[15]
- 양언의 제안에 따라 세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는 지주와 농민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 이전에는 세금을 내지 않던 상인들을 세금 체계에 포함시키려는 의도였으며, '두 세법'(兩稅法, ''Liangshui Fa'')으로 알려진 새로운 세법에 따라 시행되었다.[15]
덕종은 또한 그의 어머니인 신황귀비를 추존하여 황태후로 추봉하기 위한 수색을 재개했다. 그는 관리들과 신씨 일족 구성원들에게 수색을 담당하도록 임명하고, 신씨 일족 구성원들에게 많은 영예를 안겨주었다. 781년, 수색자들은 현종 때 권세를 휘두른 환관 고력사의 양녀가 신황태후라고 잘못 생각하여 그녀를 장안으로 데려와 황태후로 추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 고승열高承悅|고승열중국어이 이 사실을 덕종에게 알렸고, 그녀는 자신이 진짜 신황태후가 아니라고 인정했다. 덕종은 어머니를 찾는 데 지장을 초래할까 두려워 그녀나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의 통치 후반기에도 다른 사람들이 신황태후라고 주장하는 사건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모두 사기꾼으로 밝혀졌고, 진짜 신황태후는 결국 찾지 못했다.[15]
한편, 덕종은 양언의 제안에 따라 안사의 난 당시와 그 직후 토번에 빼앗긴 서쪽 주들을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가혹한 지휘관으로 알려진 리화이광을 이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780년 경원절도사(涇原, 현재 간쑤성 평량에 본부를 둠)에서 병사들의 반란을 야기했다. 덕종은 결의를 보이기 위해 경원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토번에 대한 작전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15]
아버지 대종이 즉위하자 대원수(大元帥)에 임명되어 안사의 난 수습에 힘썼다. 764년(광덕(廣德) 2년) 황태자가 되었고, 779년(대력(大暦) 14년) 대종의 붕어(崩御)와 함께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당(唐)의 재정 재건에 힘쓰며, 양염의 진언에 따라 양세법(兩稅法)을 시행하여 세제 개혁에 착수하였다. 또한 절도사(節度使)를 억제하기 위해 병력 감축 및 세습 금지 등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절도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하삭삼진(河朔三鎮)·하남이진(河南二鎮) 반란으로 장안에서 쫓겨났다. 이 때문에 784년에 『죄기조(罪己詔)』를 발표하여 절도사에 대한 불개입을 약속하고 혼란을 수습하였다. 반란 진압 후, 국민들이 난에 휘말린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며 사과하였다. 덕종의 개혁은 단기간에 실패로 돌아가 더욱 어려운 재정적 상황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절도사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고, 당의 권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덕종의 치세는 양세법 개혁 등으로 중흥의 치(中興之治)라 일컬어지지만, 구체적인 성과는 미흡하다. 그러나 후세의 현종에 의한 절도사 억제의 성공은 덕종 시대의 실패 경험이 살아난 결과라고도 말해진다.
2. 3. 잦은 반란과 진압
779년 아버지 대종이 붕어하자 덕종이 당나라 황제로 즉위하였고, 그의 치세에는 잦은 반란이 일어났다. 780년 재상 양염의 건의에 따라 조·용·조 제도에서 양세법으로 세제를 바꾸어 재정을 개선시키려 하였으나, 이 시기에도 반란은 계속되었다. 장군 주비가 황제를 참칭하자, 덕종은 군사를 보내 한중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였다.[15]덕종 즉위 당시, 평로(平盧, 현재 산둥성 타이안 부근), 위보(魏博, 현재 허베이성 한단 부근), 성덕(成德, 현재 허베이성 스자좡 부근), 산남동도(山南東道, 현재 후베이성 샹판 부근)의 네 군현은 사실상 군벌에 의해 독립적으로 통치되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세습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781년, 성덕의 군벌 이보천(李寶臣)이 죽자 덕종은 그의 아들 이위약(李惟岳)의 성덕 계승을 허락하지 않았고, 평로의 이정기(李正己)가 죽자 그의 아들 이나(李納)의 평로 계승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네 군현은 황실 정부에 맞서 전쟁을 준비했다.[16]
덕종은 화이시(淮西, 현재 허난성 주마뎬 부근)의 군벌 이계렬(李希烈)에게 산남동도를 공격하게 하고, 마수이, 이보진(李寶珍), 이승에게 위보를 공격하게 했으며, 뤄룽(盧龍, 현재 베이징 부근)의 주도(朱滔)에게 성덕을 공격하게 했다. 마수이, 이보진, 이승은 천약(田悅)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위주(魏州)에 포위했고, 이계렬은 양충의(梁崇義)를 격파하여 자살하게 했다. 주도는 이위약의 장교 장효충(張孝忠)을 설득하여 이위약을 공격하게 했고, 압박을 받은 왕무군(王武俊)은 이위약을 죽이고 항복했다. 이나는 복주(濮州, 현재 산둥성 허쩌 부근)에 갇혔다. 782년 봄까지 덕종은 군벌 세력을 제거하고 통일된 제국을 재건하는 듯 보였다.[16]
그러나 덕종이 주도와 왕무군에게 그들이 받아야 할 것을 주지 않으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주도는 성덕의 심주(深州, 현재 허베이성 허러우 부근) 통제를, 왕무군은 군벌 칭호를 원했다. 덕종은 성덕의 7개 주를 3개 군현으로 나누고 장효충은 3개 주를 관할하는 군벌이 되었으나, 왕무군은 2개 주를 관할하는 낮은 직책인 단련사(團練使)가 되었다. 또한 덕종은 이나의 항복을 받지 않았다. 결국 주도와 왕무군은 천약과 동맹을 맺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위주 포위를 풀었다. 이나는 황실군의 함정에서 벗어나 윤주(鄆州)로 돌아갔고, 네 명의 반란 장군(주도, 왕무군, 천약, 이나)은 각자 왕을 칭하며 당 황실로부터 단절을 보였다.[16]
이때 육기가 양염을 모함하여 죽게 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육기의 부추김으로 덕종은 지나치게 가혹해졌고, 새로운 세금인 주택 재산세(稅間架)와 거래세(除陌錢)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학자 노지는 이러한 세금과 전쟁에 반대하며 나라가 반란에 빠질 위기에 처했음을 지적했으나, 덕종은 듣지 않았다.[17]
783년, 정원군(靖遠軍) 병사들이 상을 받지 못하고 채식 위주의 식사를 제공받은 것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18] 이들은 주자를 지도자로 삼았고, 주자는 스스로 진(秦)나라 황제를 선포했다. 덕종은 봉천(奉天, 현재 시안)으로 피신했고, 주자는 봉천을 포위 공격했다. 위보의 이회광(李懷光)이 봉천으로 진군해 오자 주자는 장안으로 후퇴했다.[19][20]
덕종은 이회광을 만나지 않고 장안 탈환을 명령하여 불만을 샀다. 이회광은 낙기 등의 파면을 요구했고, 784년 덕종은 반란을 자책하며 주자를 제외한 모든 장군과 병사들을 사면하는 사면령을 발표했다. 왕무군, 천약, 이나는 왕의 칭호를 포기하고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이사열은 스스로 초(楚)나라 황제를 선포했고, 주도는 주자와 합류하려 했다. 천약이 암살당하고 천서가 계승하자, 천서는 왕무군, 이보진과 동맹을 맺고 주도에 저항하여 주도를 패퇴시켰다.[20][22][23]
이회광은 주자와 비밀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다.[24] 덕종은 양주(梁州, 현재 한중)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회광 휘하 장교들은 이회광을 따르지 않고 이성의 명령을 받았다. 이승은 784년 장안을 공격하여 탈환했고,[25][26] 주자는 도주 중 살해당했다.[27][23] 덕종이 이회광에게 다시 충성을 맹세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이회광의 병사들이 사절 공소부(孔巢父)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회광은 계속 당나라에 저항하다 785년 자살했다.[23][28]
이사열은 계속 확장 시도를 했으나 당나라 장군들에게 좌절되었고,[23][28] 786년 병사한 이사열은 진선기에게 독살당하고, 진선기는 오소성에게 암살당했지만 오소성은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천하는 명목상 다시 덕종의 지배 아래에 있게 되었다.[28]
784년, 절도사들의 반란이 진압된 후, 덕종은 국민들이 난에 휘말린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며 사과하였다. 덕종의 개혁은 단기간에 실패했지만, 절도사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고 당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2. 4. 환관 중용과 폐단
780년 재상 양염의 건의에 따라 조·용·조 제도에서 양세법으로 바꾸었다. 덕종은 중앙 집권을 강화하려 힘썼으나, 집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환관들을 많이 등용하는 폐단이 발생하여, 이는 훗날 당나라의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28]두문창(竇文昌)과 곽헌명(霍賢明)을 시작으로 강력한 환관들이 신책군(神策軍)의 지휘관이 되었고, 군벌들이 대부분 처음에는 신책군 군인이었기 때문에 환관들의 권력과 권위가 점점 더 중요해졌다고 전해진다.[32]
덕종은 아버지인 대종 황제 시대에 환관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대종 자신도 환관들의 지원으로 즉위하였다. 덕종은 환관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황제가 된 후에는 환관들을 일정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782년 반란을 일으킨 절도사들에 의해 수도에서 쫓겨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덕종의 환관들에 대한 생각은 급격히 바뀌었다. 심지어 자신의 장군들조차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덕종은 버림받았다고 느꼈고, 탈출하는 동안 두문창(竇文昌)과 곽헌명(霍賢明) 등 소수의 환관들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덕종은 환관들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후, 덕종은 두문창과 곽헌명의 충성에 대해 큰 상을 내렸는데, 그중에는 군사 및 정부 요직도 포함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환관의 권력은 당나라 정부의 불가분의 일부가 되었다. 후대에 일부 환관들은 그 권력이 너무 커져서 마음대로 황제를 옹립하거나 폐위할 수 있었다. 덕종의 아들인 순종과 손자인 현종을 비롯하여 경종과 문종과 같은 후대 황제들도 환관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폐위되었다.
2. 5. 말년과 죽음
이괄은 779년 부황 이예가 붕어하자, 바로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780년 재정을 개선시켰고, 재상 양염(楊炎)의 건의에 따라 조·용·조 제도에서 양세법(兩稅法)으로 바꾸었다. 그 때에도 반란은 잦았으며, 장군인 주비(朱泚)가 황제를 참칭하자, 이괄은 군사를 보내어 한중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였다.중앙 집권을 강화하려 힘썼고, 수도 장안의 상업을 더욱 늘려, 어떤 사람들은 이 때를 '중흥의 치'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환관들을 많이 등용하는 폐단이 발생하여, 이는 훗날 당나라의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괄은 805년에 64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3. 가족 관계
봉호(시호)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비고 |
---|---|---|---|
폐귀비 | 왕씨 | ||
현비 | 위씨 | ||
덕비 | 무씨 | 충용 | |
혜비 | 조씨 | ||
소의 | 왕씨 | 대소의 | |
소의 | 왕씨 | 소소의 | |
수의 | 조씨 | ||
소용 | 왕씨 | ||
소원 | 왕씨 | ||
수용 | 왕씨 | ||
수용 | |||
충용 | 최씨 | ||
충의 | 양씨 | ||
재인 | 왕씨 | ||
미인 | 왕씨 | ||
미인 | 위씨 | ||
김정란 | 신라인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자식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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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황태자 | 이송 | 761년 ~ 806년 | 소덕황후 왕씨 | 23남 13녀[39] | 순종. | |
차남 | 서왕 | 이의 | 763년 ~ 805년 | 2남[40] [41] | |||
3남 | 통왕 | 이심 | 771년 ~ 798년 | ||||
4남 | 건왕 | 이량 | |||||
5남 | 숙왕 | 이상 | 779년 ~ 782년 | 요절함. | |||
6남 | 자왕 | 이겸 | |||||
7남 | 진운군왕 | 이인 | [42] [43] | ||||
8남 | 옹왕 | 문경황태자 | 이원 | 782년 ~ 799년 | [44] [45] | ||
9남 | 조왕 | 이계 | |||||
10남 | 흠왕 | 이악 | |||||
11남 | 진왕 | 이함 | 801년 ~ 833년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부마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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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 한국공주 | 정목 | 762년 ~ 784년 | 소덕황후 왕씨 | 위유[46] | ||
위국공주 | 헌목 | 왕사평[47] | |||||
정국공주 | 장목 | 장무종[48] | |||||
임진공주 | 설쇠 | ||||||
영양공주 | 최인 | ||||||
보령공주 | 요절함. | ||||||
연국공주 | 양목 | ? ~ 808년 | 장수 가한 약라갈 돈막하달간[49] | ||||
의천공주 | 요절함. | ||||||
5녀 | 의도공주 | 772년 ~ 803년 | 류욱 | ||||
진평공주 | 요절함. | ||||||
11녀 | 문안공주 | 793년 ~ 828년 |
4. 평가 및 영향
덕종의 통치는 후대 당나라 황제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세 가지 잘못된 통치로 요약할 수 있다.[15] 대종 때 안사의 난 수습에 힘썼으며, 764년 황태자가 되었고, 779년 대종의 죽음과 함께 즉위하였다. 즉위 후 당나라 재정 재건에 힘쓰며 양염의 건의로 양세법을 시행, 세제 개혁에 착수하였다. 절도사 억제를 위해 병력 감축 및 세습 금지 등 개혁을 시도했으나, 절도사들의 반발로 하삭삼진, 하남이진의 반란이 일어나 장안에서 쫓겨났다. 784년 『죄기조』를 발표, 절도사에 대한 불개입을 약속하고 혼란을 수습했다. 반란 진압 후 백성들이 난에 휘말린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며 사과했다.
덕종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 재정 상황은 악화되었고, 절도사의 권력은 더 강해졌다. 양세법 개혁 등으로 중흥의 치(中興之治)라 일컬어지지만, 구체적인 성과는 미흡하다. 그러나 훗날 헌종의 절도사 억제 성공은 덕종 시대의 실패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평가받는다.
4. 1. 긍정적 평가
덕종 초기의 통치는 안사의 난 이후 제국 국경 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장악한 지역 군벌, 즉 절도사들이 형성한 환진의 세력을 제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들 절도사는 중앙 정부의 임명이 아닌 세습으로 권력을 이어받아 세금을 징수하고 군대를 유지하는 권한을 부여받았기에 당 왕조 중앙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이익에 부합할 때만 중앙 정부에 충성했다. 781년 초, 절도사 이보천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이위약은 관례에 따라 중앙 정부에 후임 절도사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덕종은 이 요청을 군벌들을 제거할 기회로 삼아 이위약의 임명을 거절했다. 이러한 행동은 덕종을 위협으로 여긴 다른 군벌들의 분노를 샀다. 782년, 가장 강력한 네 명의 군벌이 연합하여 중앙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비록 소규모였지만 내부 쿠데타로 인해 덕종은 수도 장안에서 도망쳐야 했다. 이는 당나라 황제 중 세 번째로 궁궐에서 탈출한 사례였다. 결과적으로 군벌 제거 계획은 모두 폐기되었다. 784년 초,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덕종은 그들의 권력을 제한하지 않겠다고 선포하고, 반란의 원인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 덕종의 굴욕적인 패배 수용은 덕종 자신과 왕조 모두에게 치명적이었다. 덕종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추진하지 않았다. 덕종이 환진을 통제하지 못한 것은 당나라의 중앙 집권적인 권력을 약화시켰고, 9세기 중반의 일련의 반란에 기여하여 결국 10세기 초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다.4. 2. 부정적 평가
덕종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실정을 저질렀는데, 이는 훗날 당나라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번진(藩鎭) 통제 실패: 덕종은 안사의 난 이후 각지에 할거한 번진 세력을 억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번진은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고, 이는 당나라 중앙 권력 약화로 이어졌다.[15] 781년, 덕종은 번진의 세습을 막으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번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5][16] 결국 덕종은 번진에 대한 불개입을 약속하며 굴복했고, 이는 번진 세력 강화로 이어졌다.[17]
- 환관(宦官) 중용: 덕종은 환관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그들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특히, 두문창(竇文昌)과 곽헌명(霍賢明) 등의 환관은 군사 요직을 차지하며 권력을 남용했다.[32] 이는 후대 환관들이 황제를 옹립하거나 폐위할 정도로 권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32]
- 재정 정책 실패: 덕종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양세법(兩稅法)을 시행했지만, 오히려 백성들의 부담만 가중시켰다.[15] 또한, 덕종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재정을 낭비했고, 지방 관리들의 뇌물 수수를 조장하여 부정부패를 심화시켰다.[32]
이러한 실정들은 당나라의 국력을 약화시켰고, 결국 9세기 중반 이후 일어난 일련의 반란과 왕조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Li Kuo's biography in the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779-06-12
[2]
서적
Li Kuo's biography in the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742-05-27
[3]
서적
Li Kuo's biography in the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805-02-25
[4]
서적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5]
서적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6]
서적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7]
서적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8]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9]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0]
서적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11]
서적
Outlines of the History of the Chinese
[12]
서적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13]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4]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5]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6]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7]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8]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783-11-02
[19]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783-12-18
[20]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21]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784-01-27
[22]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23]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24]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784-03-20
[25]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784-06-12
[26]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784-06-20
[27]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784-08-03
[28]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29]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787-07-08
[30]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31]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32]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33]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34]
서적
New Book of Tang
New Book of Tang
[35]
서적
New Book of Tang
New Book of Tang
[36]
서적
The Ageless Chinese: A History
Charles Scribner's Sons
[37]
문서
숙비(淑妃)
[38]
문서
숙비의 불치병으로 덕종이 특별한 명으로 서거 전 며칠 동안 황후가 됨.
[39]
문서
선성군왕(宣城郡王)/선왕(宣王)
[40]
문서
보왕(普王)
[41]
문서
당 대종의 2남 소정태자(昭靖太子) 이막(李邈)의 아들.
[42]
문서
대왕(代王)
[43]
문서
사후 대왕으로 추존됨.
[44]
문서
운왕(鄆王)
[45]
문서
사후 황태자로 추존됨.
[46]
문서
당안공주(唐安公主)
[47]
문서
의양공주(義陽公主)
[48]
문서
의장공주(義章公主)
[49]
문서
함안공주(咸安公主)
[50]
뉴스
세월호의 악마들, 대한민국의 악마들…
http://www.hani.co.k[...]
한겨레 신문
201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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