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흥군 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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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인흥군 묘 및 신도비는 조선 후기 종실 인흥군 이영(李瑛, 1604~1651)의 무덤과 신도비(神道碑)입니다.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산18-6에 위치하며, 1986년 4월 9일 포천시 향토유적 제2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인흥군 이영
- 선조의 열두 번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입니다.
- 자는 가온(可韞), 호는 취은(醉隱)·월창(月窓), 시호는 효숙(孝肅)이었다가 정효(靖孝)로 바뀌었습니다.
- 1610년(광해군 2년) 인흥군에 봉해졌습니다.
-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겪었으며,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습니다.
- 1649년(효종 즉위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가서 국방 문제와 척화파 기용에 관한 외교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인흥군 묘
- 1652년에 조성되었으며, 30년 후 부인 여산 송씨(1608~1681)가 사망하자 합장되었습니다.
- 묘역은 기와지붕을 올린 곡장(曲墻) 안에 인흥군과 여산군부인을 합장한 둥근 봉분이 있고, 그 앞에 묘갈(墓碣)과 혼유석(魂遊石), 좌우에 망주석(望柱石)이 있습니다.
- 곡장 아랫단에는 상석(床石), 향로석, 장명등(長明燈), 양석(洋石) 1쌍 등이 배치되어 있고, 양관조복(梁冠朝服)의 문인석(文石人)은 아래쪽에 자리 잡았습니다.
- 특이하게 상석, 혼유석, 장명등, 망주석 등에 글을 새겨 넣었습니다.
신도비
- 인흥군의 시호가 바뀌면서 두 개의 신도비가 세워졌습니다.
- 1655년에 세워진 '인흥군 효숙공 신도비명(仁興君孝肅公神道碑銘)'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인흥군의 아들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俁)가 글씨를 썼습니다.
- 1682년에 세워진 신도비는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낭선군이 글씨를 썼습니다.
묘계비인흥군 묘역 입구에는 묘의 경계를 표시하는 묘계비(墓界碑)가 있는데, 한글 고어체로 "이비가극 히녕검하 니성심도 사람이거 오디말라"라는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이는 "이 비가 극히 험하니 정성껏 돌보 사람이여 오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현재 한국에 단 4기밖에 없는 한글 고비로서 높은 금석학적 가치를 지닙니다.
인흥군과 그의 두 아들은 모두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낭선군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쓰기로 유명하여 17세기 금석문 연구에 도움이 됩니다.
인흥군 묘 및 신도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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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산18-6 |
문화재 정보 | |
유형 | 향토유적 |
지정 번호 | 28 |
지정일 | 1986년 4월 9일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전주이씨인흥군파종회 |
기타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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