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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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구령은 당나라 현종 시대의 재상으로, 678년에 태어나 740년에 사망했다. 702년 진사에 급제하여 한문 출신임에도 재상 장설의 인정을 받아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현종의 치세에 상서우승상까지 올랐으나, 이림보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형주로 좌천되었다. 그는 안록산의 반란을 예견하고 이를 막아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개원 마지막 현상'으로 칭송받았으며, 맹호연, 왕유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시에도 능하여 '감우시' 12수, '망월회원'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저서로 『장곡강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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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현종 시대의 관리이자 재상인 한휴는 강직한 성품으로 현종의 존경을 받았으며, 재상으로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사후 묘지 발굴을 통해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장구령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장구령 |
로마자 표기 | Zhang Jiuling |
자 | 자수(子壽) |
시호 | 문헌(文獻) |
작위 | 시흥현백(始興縣伯) |
생애 | |
출생 | 678년 |
사망 | 740년 |
시대 | 당나라 |
출신지 | 광동성 사오저우시 취장구 |
관직 | |
직업 | 정치가, 시인, 문학가 |
주요 관직 | 중서령 집현원 학사 |
가족 | |
아버지 | 장홍유(張弘愈) |
2. 생애
장구령은 702년 진사에 급제하여 한문(寒門) 출신이었지만 재상 장설에게 인정받아 교서랑, 우습유, 중서시랑을 역임하고, 현종 개원 21년(733년)에는 상서우승상에 올랐다. 과거 출신 관료였기에 이임보 등 귀족 관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황태자 문제를 둘러싸고 이임보와 갈등을 빚어 형주(荊州)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현종은 장구령을 높이 평가했고,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고향에서 문학과 역사서에 몰두했다. 안록산(安祿山)의 "늑자야심(狼子野心)"을 간파하고 현종에게 그를 주살해야 한다고 간언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개원(開元) 마지막 현상(賢相)"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맹호연(孟浩然)과 왕유(王維)에게 희망을 안겨주기도 했다.[3] 왕부지(王夫之)는 그의 『독통감론(讀通鑑論)』에서 장구령을 청렴하고 화합하며 명예와 부를 멀리한 인물로 칭송하며, 그가 조정에 염치를 알리고 개원 시대를 번영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2. 1. 초기 생애
장구령은 678년 당 고종 재위 시절에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당시 당나라 제국의 비교적 외딴 지역이었던 령남(嶺南)(岭南중국어)의 소주(韶州)(韶州중국어, 현재의 광둥성 韶關시와 거의 일치) 곡강(曲江)(曲江중국어) 출신이었다.[3] 증조부 장군정(張君政)(張君政중국어)은 소주 서기(secretary general), 조부 장자주(張子冑)(張子冑중국어)는 현령(county magistrate), 부친 장홍유(張弘愈)(張弘愈중국어)는 현 서기(county secretary general)를 지냈다.[4] 그의 가계는 진(晉)나라(266~420)의 재상 장화(張華)와 그의 장남 장의(張禕)(張禕중국어)로 거슬러 올라간다.장구령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문장에 능했다고 한다. 685년, 12세 때 광주(廣州)(廣州중국어, 현재의 광둥성 광저우와 거의 일치) 태수였던 왕방청에게 편지를 썼는데, 왕방청은 "이 아이는 앞으로 큰일을 할 것이다"라며 칭찬했다. 관리 장열(張悅)(張悅중국어)이 이 지역으로 유배되었을 때,[5] 장구령을 만나 감명을 받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장구령은 후에 시인 심전기(沈佺期)(沈佺期중국어) 휘하에서 급제(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최고 점수를 받았다. 712년 좌사의(左拾遺)(左拾遺중국어)로 임명되었다.[3]
그는 홍문관(弘文館)(弘文館중국어) 교서랑(校書郎)(校書郎중국어)이 되었다. 당 현종인 이륭기가 당 예종(재위 710~712)의 황태자였을 때, 문장에 뛰어난 사람들을 불러 직접 시험을 보았는데, 장구령은 이 시험에서도 최고 점수를 받았고, 중서성(中書省)(中書省중국어) 고문인 우사의(右拾遺)(右拾遺중국어)가 되었다.[6]
2. 2. 현종 시대
712년, 현종 즉위 후, 장구령은 천지 제사를 지낼 것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했다.[3] 713년경, 재상 요충에게 청렴한 관료 시스템의 중요성을 지적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장구령은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현종과 조동희와 함께 관리 임명을 결정하며 공정하고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722년, 사훈원외랑이 되었고, 재상 장약은 그를 형제처럼 여기며 "가장 뛰어난 시인이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723년, 중서사인이 되어 장약 밑에서 입법부 중급 관리로 일했다.[6]
725년, 현종의 태산 봉선 의식 후, 장약은 총애하던 관리들을 고위직으로 승진시키려 했으나, 장구령은 이를 반대하며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킬 것을 경고했다. 장약은 유문융을 경계하라는 장구령의 조언을 무시했다가, 726년 유문융의 고발로 실각했다. 장구령은 태상소경을 거쳐 기주 태수가 되었다. 장구령은 노모 봉양을 위해 양자강 남쪽 부임을 요청, 현종은 칙서를 내려 홍주 도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계주 도독 겸 영남 도순찰사가 되었고, 현종은 그의 형제들을 그 지역 태수로 임명하여 명절에 모친을 방문할 수 있게 했다.
장약은 집현원 원장 시절 장구령의 재능을 추천했고, 731년 장약 사후 현종은 장구령을 비서소감 겸 집현원 학사 겸 원장으로 임명했다. 발해 칙서를 작성하고, 공부시랑을 거쳐 중서시랑이 되었다. 732년, 모친상을 당해 소주로 돌아가 3년 상을 치렀다.
733년, 현종은 소송, 한휴를 파면하고 배요청과 장구령을 재상으로 임명, 동중서문하평장사 직을 부여했다. 장구령은 백성 주화 주조를 제안했으나 배요청과 유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같은 해, 중서령이 되었다. 10도 순찰사 직책 재설치, 황하 남쪽 벼농사 제안은 실패했다. 장구령은 성격이 급하고 화를 잘 내어 명성에 손상을 입었으나, 정직하고 황제의 행동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735년, 장수귀 장군이 거란을 물리친 후, 현종이 재상직을 주려 하자 장구령은 부적절함을 지적하며 반대했다. 현종은 장수귀에게 재상직을 주지 않았다. 같은 해 장구령은 금자광록대부를 받고 시성백에 봉해졌다. 엄정지, 원인경, 양승청, 노이와 돈독한 우정을 유지했다.
736년, 장수귀의 부하 안록산이 명령 불복종으로 패배하자, 장구령은 안록산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안록산의 반역 기질을 경고했으나, 현종은 안록산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백성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군에 남도록 했다. 같은 해 현종 생일에 장구령은 역사적 통치의 예를 논한 5권짜리 책 '천추금감록'을 지어 바쳤다. 현종은 칙서를 내려 그를 칭찬했다.
736년까지 이린부가 배요청과 장구령을 능가하는 총애를 받았다. 장구령의 직설적 성격은 현종과 이린부를 불쾌하게 했다. 현종의 낙양 출발 연기, 우선객의 병부상서 및 작위 수여, 황태자 이영 문제, 엄정지 사건 등으로 이린부와 갈등했다. 이린부는 장구령과 배요청이 파벌을 짓는다고 모함, 737년 현종은 두 사람을 재상직에서 해임하고 승상으로 임명했다. 우선객이 이린부와 함께 재상이 되었다. 이는 현종 치세의 전환점으로, 이후 당나라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737년, 주자량의 우선객 탄핵 상소 사건으로 장구령은 형주 자사로 좌천되었다. 장구령 좌천 후에도 현종은 그의 정직함을 기억하고 관리 천거 시 "장구령과 비교하면 어떠한가?"라고 질문했다. 740년 소주에서 부모 묘소 참배 중 사망했고, 사후 벼슬이 추증되었다. 755년 안록산의 난 발발 후, 현종은 장구령의 경고를 기억하고 그의 공적을 추증, 사자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3. 저서 및 작품
진자앙(陳子昂)의 시와 함께 "신미초일(神味超逸)"의 풍격이 있으며, 원적(阮籍)의 "영회시(詠懷詩)"의 계보를 잇는 "감우시(感遇詩)" 12수의 연작과 "망월회원(望月懷遠)"이 유명하다. 저서로는 『장곡강집(張曲江集)』 20권이 있다.
자군지출의(自君之出矣) | 그대 떠난 이후로 |
불복리잔기(不復理残機) | 다시는 베틀에 실을 꿰지 않네 |
사군여만월(思君如滿月) | 그대를 생각하니 둥근 보름달처럼 |
야야감청휘(夜夜減清輝) | 밤마다 맑은 빛이 줄어드는 듯하네 |
숙석청운지(宿昔青雲志) | 옛날 푸른 구름 같은 뜻을 품었건만 |
차타백발년(蹉跎白髮年) | 세월만 허송세월하여 백발이 되었네 |
수지명경리(誰知明鏡裏) | 누가 알리오, 밝은 거울 속에 |
형영자상련(形影自相憐) | 그림자와 형체 스스로 서로 불쌍히 여기는 것을 |
해상생명월(海上生明月) | 바다 위에 밝은 달이 떠오르고 |
천애공차시(天涯共此時) | 하늘 끝까지 이 시간을 함께하네 |
정인원요야(情人怨遙夜) | 연인은 먼 밤을 원망하고 |
경석기상사(竟夕起相思) | 밤새도록 그리움에 잠 못 이루네 |
멸촉련광만(滅燭憐光滿) | 촛불을 끄니 빛이 가득한 것을 불쌍히 여기며 |
피의각로자(披衣覺露滋) | 옷을 걸치니 이슬이 차가운 것을 느끼네 |
불감영수증(不堪盈手贈) | 가득찬 마음을 전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며 |
환침몽가기(還寢夢佳期) | 다시 누워 좋은 날을 꿈꾸네 |
4. 평가
장구령은 "개원(開元) 마지막 현상(賢相)"으로 불리며,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왕부지(王夫之)는 『독통감론(讀通鑑論)』에서 "정관 시대에는 재능 있는 신하가 있었지만 청렴한 자는 없었다. 다만 개원 시대에 등장한 송경(宋璟)·노회신(盧懷慎)·장구령은 청정(清貞)이라는 덕으로 재상에 올랐다. 장구령은 청렴하고 화합하며,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부를 멀리하며, 조정에 염치를 알리고 개원 시대를 번영하게 했다"라고 극찬했다.
진자앙(陳子昂)의 시와 함께 "신미초일(神味超逸)"의 풍격이 있으며, 원적(阮籍)의 "영회시(詠懷詩)"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감우시(感遇詩)" 12수의 연작과 "망월회원(望月懷遠)"이 유명하다. 저서로는 『장곡강집(張曲江集)』 20권이 있다.
다음은 장구령의 대표적인 시이다.
그대 떠난 이후로 |
다시는 베틀에 실을 꿰지 않네 |
그대를 생각하니 둥근 보름달처럼 |
밤마다 맑은 빛이 줄어드는 듯하네 |
옛날 푸른 구름 같은 뜻을 품었건만 |
세월만 허송세월하여 백발이 되었네 |
누가 알리오, 밝은 거울 속에 |
그림자와 형체 스스로 서로 불쌍히 여기는 것을 |
바다 위에 밝은 달이 떠오르고 |
하늘 끝까지 이 시간을 함께하네 |
연인은 먼 밤을 원망하고 |
밤새도록 그리움에 잠 못 이루네 |
촛불을 끄니 빛이 가득한 것을 불쌍히 여기며 |
옷을 걸치니 이슬이 차가운 것을 느끼네 |
가득찬 마음을 전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며 |
다시 누워 좋은 날을 꿈꾸네 |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and New Book of Tang
[2]
서적
Zhang Jiuling's epitaph (《唐故尚书右丞相赠荆州大都督始兴公阴堂志铭并序》) and inscription (《文献张公神道碑铭》)
[3]
논문
Zhang Juling and the Lychee
2012
[4]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5]
서적
Old Book of Tang and New Book of Tang
zh:s:旧唐书/卷97
[6]
서적
Old Book of Tang and New Book of Tang
zh:s:旧唐书/卷99
[7]
문서
[8]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14
[9]
문서
[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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