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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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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조중회(趙重晦, 1711년 ~ 1782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익장(益章), 본관은 함안(咸安)입니다.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동했으며, 생육신 중 한 명인 조려(趙旅)의 후손입니다.
주요 활동:


  • 관직: 1736년(영조 12년) 과거에 급제하여 설서(說書),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시작으로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郊理), 헌납(獻納) 등을 역임했습니다. 1751년에는 사은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이후 승지, 대사간, 대사성, 병조참의, 영변부사, 양주목사 등을 거쳐 1770년에는 개성부유수, 이듬해에는 도승지, 대사헌, 예조판서를 역임했습니다. 정조 즉위 후에는 함경도관찰사를 지냈고, 1779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었습니다.
  • 성품과 간언: 성품이 곧고 결백했으며,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죽음을 불사하고 간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영조의 잦은 사묘(私廟) 참례와 사도세자(장헌세자) 처분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을 때에는 왕에게 그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무장으로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 탕평책 반대: 1749년에는 탕평책을 반대하는 윤급(尹汲)을 변호하다가 파직되기도 했습니다.
  • 충렬서원 원장: 1781년부터 1782년 사망할 때까지 경기도 용인 지역 충렬서원의 제32대 원장을 지냈습니다.
  • 기로소: 1780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습니다.
  • 사후: 홍국영이 죽은 뒤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습니다.

기타:

  • 조중회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에 있으며, 1990년 11월 22일 용인시 향토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조중회의 영정(影幀)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중회
기본 정보
조중회
조중회 선생
본관풍양 조씨
동암(東庵)
출생1885년 12월 27일
사망1941년 10월 13일 (향년 55세)
학력
최종 학력보성전문학교 법과 졸업
경력
주요 경력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독립운동
주요 활동3.1 운동 참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한국독립당 조직 참여
서훈
훈격건국훈장 독립장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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