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주 경왕 (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주 경왕은 주 영왕의 손자이자 주 경왕의 아들로, 형인 도왕이 왕자조의 반란으로 살해된 후 기원전 520년에 즉위했다. 재위 기간 동안 왕자조의 난과 담편의 난 등 여러 반란이 일어났으며, 왕자조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도성을 성주로 천도했다. 기원전 476년에 사망하였으며, 아들 원왕이 뒤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6세기 중국의 군주 - 초 영왕
    초 영왕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왕으로,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후 쇠퇴한 초나라의 패권을 재건하려 했으나, 쿠데타로 자결했다.
  • 기원전 6세기 중국의 군주 - 합려
    합려는 춘추시대 오나라의 군주로, 오자서와 손무를 등용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초나라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시키는 등 오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 후 부상을 입고 사망하며 아들에게 복수를 맹세하게 했다.
  • 기원전 5세기 중국의 군주 - 위 문후
    위 문후는 전국시대 위나라의 군주로서 이회, 오기 등 인재를 등용하고 법가적 개혁을 통해 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법치를 통해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여 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기원전 5세기 중국의 군주 - 주 위열왕
    주 위열왕은 기원전 425년부터 기원전 402년까지 재위한 주나라의 왕으로, 삼가분진을 단행하여 춘추 시대를 마감하고 전국 시대를 시작하게 했다.
주 경왕 (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경왕(敬王)
왕조주나라 (동주)
아버지경왕
어머니왕후 목(穆)
자녀주 원왕
사망일기원전 477년
계승주나라의 왕
선대 왕주 도왕
후대 왕주 원왕
재위 기간기원전 519년 – 기원전 477년
기타
희(姬) 개(匄)
시호경왕
묘호없음
수도성주

2. 생애

경왕은 주나라 경왕의 아들로 태어났다.[1] 기원전 520년 경왕의 서장자인 희조가 도왕을 살해하자 진이 파병하여 희조를 토벌하고 희구(경왕)를 왕으로 세웠다.[1] 그 후에도 경왕과 희조 사이의 충돌이 계속되어 기원전 516년, 희조는 초로 피신했지만 기원전 505년 봄, 경왕은 자객을 초나라로 보내 희조를 살해하였다.[1] 이에 희조를 지지하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경왕은 주나라 수도를 탈출했다가 기원전 503년에 진나라의 원조를 받아 수도로 복귀하였다.[1]

평왕 때부터 낙읍을 도성으로 정해 왕성으로 부르고 있었지만, 경왕 대에 희조의 세력이 강해 도왕 때까지의 수도를 피해 동쪽(한나라 시대의 낙양성, 즉 현재의 한위 고성 근처)으로 천도했다. 이로써 새로운 도성은 성주(成周), 옛 도성은 왕성(王城)으로 불리게 되었다.

기원전 476년, 경왕은 사망[9]했고, 아들인 인 (원왕)이 뒤를 이었다.[1]

2. 1. 왕위 계승

기원전 520년 11월, 경왕의 형인 도왕이 왕자조의 반란으로 살해되자, 경왕이 즉위하여 자려씨(子旅氏)의 관(館)에 몸을 의탁했다.[2] 경왕의 군대는 경초(京楚)에 포진하여, 왕자조가 거점으로 삼은 경(京)을 공격하여 그 서남쪽을 파괴했다.[2]

기원전 519년, 주 경왕의 군대와 진나라는 왕자조 측의 교(郊)를 포위하여 격파했다. 정세가 호전되자 진나라는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왕자조는 윤씨(尹氏)의 지원을 받아 저항을 계속하여 왕성을 점령했다. 경왕은 단목공과 유문공의 보호를 받아 유(劉)로 몽진했다.[3]

기원전 516년 4월, 유문공의 군대가 왕자조의 군대를 시씨(尸氏)에서 격파했다. 7월, 경왕은 유문공과 함께 유를 나와 거(渠)에 숙영했다. 경왕은 저씨(褚氏)로 진군하여 환곡(萑谷)에 숙영했다. 더 나아가 서미(胥靡)에 들어가 활(滑)에 숙영했다. 10월, 경왕이 활에서 기병하여 교에 들어가 시에 숙영했다. 11월, 진나라 군대가 왕자조 측의 곤(鞏)을 함락시켰다. 소간공이 왕자조를 추방했고, 왕자조는 초나라로 망명했다. 소간공은 경왕을 시로 맞이하여, 단목공과 유문공과 맹약을 맺었다. 경왕의 군대는 어택(圉澤)으로 진군하여 제상(隄上)에 숙영했다. 경왕은 성주(成周)에 들어가 양궁(襄宮)에서 맹약을 맺었다. 12월, 경왕은 장궁(莊宮)에 들어갔다.[4]

기원전 513년, 경사(京師)에서 소백영과 윤씨고 및 원백로의 아들이 살해되었다. 왕자조거가 추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음불녕이 이를 격파했다.[5]

기원전 504년, 주나라 담편이 왕자조의 잔당을 이끌고 정나라 사람들의 협력을 얻어 성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경왕은 담편의 난을 피하여 고유(姑蕕)에 머물렀다.[6] 다음 해, 담편은 의율(儀栗)에 들어갔다. 단무공과 유환공은 담편을 도운 윤씨를 궁곡(窮谷)에서 격파했다. 단무공과 유환공은 고유의 경씨(慶氏)에게서 경왕을 맞이하고, 진나라의 적진이 경왕을 호송했다. 경왕은 왕성에 들어가 공족의 당씨(黨氏)의 관에 머물렀고, 그 후에 장궁에서 군신들의 조견(朝見)을 받았다.[7] 기원전 502년, 단무공은 곡성(穀城)을 공격했고, 유환공은 의율을 공격했다. 더 나아가 단무공은 간성(簡城)을 공격했고, 유환공은 맹(盂)을 공격하여 담편의 난을 평정했다.[8]

주는 평왕 때부터 낙읍을 도성으로 정하고 '''왕성'''이라고 칭했지만, 경왕의 대에 왕자조의 세력이 강했던 도왕까지의 도성을 피하여 동쪽(나라 시대의 낙양성, 즉 현재의 한위고성 근처)으로 천도했다. 천도한 새로운 도성을 '''성주''', 옛 도성을 '''왕성'''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2. 2. 왕자조의 난과 진압 과정

기원전 520년, 도왕이 왕자조의 반란으로 살해되자 경왕이 즉위했다. 경왕은 자려씨(子旅氏)의 관(館)에 몸을 의탁하고, 군대를 경초(京楚)에 포진시켜 왕자조가 거점으로 삼은 경(京)을 공격하여 그 서남쪽을 파괴했다.[2] 기원전 519년, 주 경왕의 군대와 진나라는 왕자조 측의 교(郊)를 포위하여 격파했다. 정세가 호전되자 진나라는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왕자조는 윤씨(尹氏)의 지원을 받아 저항을 계속하여 왕성을 점령했다. 경왕은 단목공과 유문공의 보호를 받아 유(劉)로 몽진했다.[3]

기원전 516년 4월, 유문공의 군대가 왕자조의 군대를 시씨(尸氏)에서 격파했다. 7월, 경왕은 유문공과 함께 유를 나와 거(渠)에 숙영했다. 이후 저씨(褚氏)를 거쳐 환곡(萑谷), 서미(胥靡), 활(滑)에 차례로 숙영했다. 10월, 경왕이 활에서 기병하여 교에 들어가 시에 숙영했다. 11월, 진나라 군대가 왕자조 측의 곤(鞏)을 함락시켰고, 소간공(召簡公)이 왕자조를 추방하여 왕자조는 초나라로 망명했다. 소간공은 경왕을 시로 맞이하여, 단목공, 유문공과 맹약을 맺었다. 경왕의 군대는 어택(圉澤)을 거쳐 제상(隄上)에 숙영했다. 경왕은 성주(成周)에 들어가 양궁(襄宮)에서 맹약을 맺고, 12월에는 장궁(莊宮)에 들어갔다.[4]

기원전 513년, 경사(京師)에서 소백영(召伯盈), 윤씨고(尹氏固), 원백로(原伯魯)의 아들이 살해되었다. 왕자조거(王子趙車)가 추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음불녕(陰不佞)이 이를 격파했다.[5]

기원전 504년, 주나라 담편(儋翩)이 왕자조의 잔당을 이끌고 정나라 사람들의 협력을 얻어 성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경왕은 담편의 난을 피해 고유(姑蕕)에 머물렀다.[6] 다음 해, 담편은 의율(儀栗)에 들어갔다. 단무공과 유환공은 담편을 도운 윤씨를 궁곡(窮谷)에서 격파했다. 단무공과 유환공은 고유의 경씨(慶氏)에게서 경왕을 맞이하고, 진(晉)나라의 적진(籍秦)이 경왕을 호송했다. 경왕은 왕성에 들어가 공족 당씨(黨氏)의 관에 머물렀고, 그 후에 장궁에서 군신들의 조견(朝見)을 받았다.[7] 기원전 502년, 단무공은 곡성(穀城)과 간성(簡城)을, 유환공은 의율과 맹(盂)을 공격하여 담편의 난을 평정했다.[8]

2. 2. 1. 진(晉)나라의 개입

진은 군대를 파병하여 희조를 토벌하고 희구를 왕으로 세웠다.[1] 왕자조의 난 진압 이후에도 경왕과 희조 사이의 충돌은 계속되었다.[1] 기원전 516년, 희조는 초로 피신했지만, 기원전 505년 봄, 경왕은 자객을 보내 희조를 살해하였다.[1] 이에 희조를 지지하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경왕은 주나라 수도에서 탈출했다가 기원전 503년에 진나라의 원조를 받아 수도로 복귀하였다.[1]

2. 3. 성주 천도

기원전 520년 형인 도왕이 왕자조의 반란으로 살해되자, 경왕은 자려씨(子旅氏)의 관(館)에 몸을 의탁하고 군대를 경초(京楚)에 포진시켜 왕자조가 거점으로 삼은 경(京)을 공격했다.[2] 이후 왕자조는 초나라로 망명하였으나,[4] 기원전 504년 왕자조의 잔당을 이끈 담편(儋翩)이 정나라의 협력을 얻어 성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6] 경왕은 담편의 난을 피해 고유(姑蕕)에 머물렀으나,[6] 단무공과 유환공이 담편을 돕던 윤씨를 격파하고, 진나라의 도움으로 경왕은 왕성에 돌아와 난을 평정하였다.[7]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경왕은 도읍을 옮기기로 결심한다.

2. 3. 1. 천도 이전의 도읍: 낙읍(왕성)

평왕 때부터 낙읍을 도성으로 정하여 왕성으로 불렀으나, 경왕 대에 이르러 왕자 희조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도왕 때까지의 수도를 피해 동쪽(오늘날의 한위 고성 근처)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새로운 도성은 성주(成周)라 불리게 되었고, 옛 도성은 왕성(王城)이라 불리게 되었다.

2. 3. 2. 새로운 도읍: 성주

평왕 때부터 낙읍을 도성으로 정해 왕성으로 부르고 있었지만, 경왕 대에 희조의 세력이 강한 도왕 때까지의 수도를 피해 동쪽(한나라 시대의 낙양성, 즉 현재의 한위 고성 근처)으로 천도했다. 이때 천도한 새로운 도성을 성주(成周)라 하고, 옛 도성을 왕성(王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2. 4. 말년

경왕은 재위 후반기에 여러 차례 반란에 직면했다. 기원전 513년에는 소백영, 윤씨고, 원백로의 아들이 살해되었고, 왕자조거가 추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음불녕이 이를 진압했다.[5] 기원전 504년에는 담편이 왕자조의 잔당을 이끌고 성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경왕은 담편의 난을 피해 고유에 머물렀다.[6] 다음 해, 단무공과 유환공이 담편을 돕던 윤씨를 격파하고, 진나라의 적진이 경왕을 호송하여 왕성으로 돌아왔다. 경왕은 공족 당씨의 관에 머무른 후 장궁에서 군신들의 조견을 받았다.[7] 기원전 502년, 단무공과 유환공은 담편의 난을 완전히 평정했다.[8]

주는 평왕 때부터 낙읍을 도성으로 정하고 '''왕성'''이라고 칭했지만, 경왕 대에 이르러 왕자조의 세력이 강했던 도왕까지의 도성을 피해 동쪽(현재의 한위고성 근처)으로 천도했다. 이로써 새 도성은 '''성주''', 옛 도성은 '''왕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기원전 476년, 경왕은 사망[9]했고, 아들인 인(원왕)이 왕위를 계승했다.[1]

3. 가계

관계이름
아버지주 경왕
증조부주 영왕
고조부주 간왕


참조

[1] 서적 史記 周本紀
[2] 서적 春秋左氏伝 昭公22年
[3] 서적 春秋左氏伝 昭公23年
[4] 서적 春秋左氏伝 昭公26年
[5] 서적 春秋左氏伝 昭公29年
[6] 서적 春秋左氏伝 定公6年
[7] 서적 春秋左氏伝 定公7年
[8] 서적 春秋左氏伝 定公8年
[9] 서적 史記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