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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영공 (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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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 영공(희진)은 춘추 시대 진나라의 군주로, 아버지 진 양공의 사망 후 대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목영의 읍소로 즉위했다. 조돈이 섭정하며 정치를 주도했으나, 영공은 사치와 폭정을 일삼아 조돈과 갈등을 겪었다. 결국 조돈의 사촌 조천에게 시해당했으며, 조돈은 흑둔을 옹립하여 성공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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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영공 (희진)
기본 정보
작위진나라의 공
계승 순서진나라의 공
통치 기간기원전 620년 – 기원전 607년
이전진 양공
다음진 성공
섭정조돈(조선자)
이고(夷皋)
아버지진 양공
어머니목영(穆嬴)
사망일기원전 607년 8월 19일
시호영공(靈公)
희(姬)
나라진(晉)

2. 생애

진 영공의 이름은 이고(夷皋)이다. 아버지 진 양공이 기원전 621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아직 어린 나이였던 이고는 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즉위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다.[4][5] 당시 진(晉)나라 정치를 주도하던 조돈은 처음에는 다른 공자를 추대하려 했으나, 이고의 어머니 목영(穆嬴)의 간청과 국내 여론에 따라 결국 어린 이고를 군주로 옹립했다.[4][5] 이 과정에서 조돈은 기존에 추대하려던 공자 옹을 호송하던 진(秦)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양국 관계가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다.[4][5]

어린 영공을 대신해 조돈이 섭정을 하며 국정을 이끌었으나,[6] 성장한 영공은 점차 사치와 폭정을 일삼으며 조돈과 갈등을 빚었다.[4] 영공은 곰 발바닥 요리가 제대로 익지 않았다는 이유로 요리사를 죽이는 등 잔혹한 면모를 보였고, 충언하는 조돈을 암살하려 시도하기도 했다.[4] 기원전 607년, 결국 영공은 조돈의 사촌인 조천에게 시해당했다.[4] 영공 사후, 망명길에서 돌아온 조돈은 진 양공의 동생인 흑둔(黑臀)을 새로운 군주(성공)로 세웠다.

2. 1. 즉위 과정

아버지 진 양공이 기원전 621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태자였던 이고(夷皋)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4][5] 당시 진(晉)나라는 조부인 진 문공패자의 지위에 올랐으나 재위 9년 만에 사망했고, 아버지 양공 또한 즉위 7년 만에 요절한 상황이었다. 이에 나라의 안정을 위해 장성한 공실의 어른을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정경(正卿) 조돈은 패권 유지를 위해 대부들과 논의하여, 당시 진(秦)나라에서 명성이 높던 공자 옹(公子雍)을 새로운 군주로 추대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른 유력 신하였던 호역고(狐射姑)는 진(陳)나라에 있던 공자 낙(公子樂)을 지지하며 조돈과 대립했다.[4][5] 권력 투쟁 과정에서 조돈은 자객을 보내 공자 락을 암살했고, 정치적 기반을 잃은 호역고는 결국 망명했다.

공자 옹 추대가 결정되자, 진(秦)나라의 진 강공은 군대를 보내 공자 옹을 진(晉)나라로 호송하기 시작했다.[4][5] 하지만 상황은 다시 급변했다. 태자 이고의 어머니인 목영(穆嬴)이 아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대부들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그녀는 여러 날 동안 조정을 찾아 읍소했고, 이에 대부들의 마음이 흔들렸다. 목영의 간청과 더불어 국내 여론(國人)을 의식한 대부들은 결국 기존의 결정을 번복하고 어린 태자 이고를 군주로 옹립하니, 이가 바로 진 영공이다.[4][5]

조돈 역시 반대 세력의 움직임을 경계하고 목영의 설득에 넘어가 입장을 바꾸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국경으로 나아가 공자 옹을 호위하던 진(秦)나라 군대를 기습하여 물리침으로써 영공의 즉위를 확정지었다.[4][5]

2. 2. 조돈의 섭정

영공은 아직 어렸으므로, 아버지 진양공 시절부터 정경(正卿)을 지낸 조돈이 영공을 대신하여 집정하며 진(晉)나라의 정치와 외교를 주도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621년(진양공 7년), 조돈은 영공 즉위 후 제후들과 회합했으며, 기원전 620년(진영공 원년) 진(晉)나라가 위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준 것도 조돈이 극결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6] 기원전 618년(진영공 3년), 조돈의 반대파인 기정보(箕鄭父), 선도(先都), 사곡(士縠) 세 경(卿)과 양익이(梁益耳), 괴득(蒯得)이 반란을 일으켜 조돈파 경인 선극(先克)을 죽였으나, 진(晉)나라에서는 이들을 모두 처형하며 반란을 진압했다.[7]

한편, 영공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진(秦)나라를 배신했으므로 진(晉)나라와 진(秦)나라는 서로 분쟁 상태로 들어갔다. 기원전 620년(진영공 원년), 진(秦)나라는 진(晉)나라의 무성(武城)을 점령하여 전년도 영호(令狐) 싸움에 대한 보복을 했다.[8] 기원전 617년(진영공 4년), 진(秦)나라는 진(晉)나라의 소량(少梁)을 점령했으며, 진(晉)나라는 보복으로 진(秦)나라의 북징(北徵)을 점령했다.[4][9] 기원전 615년(진영공 6년), 진(秦)나라가 진(晉)나라의 기마(羈馬)를 점령하자, 영공은 분노하여 조돈, 조천(趙穿, 조숙의 아들이자 조돈의 종제), 극결에게 군대를 맡겨 진(秦)나라를 막게 했고, 양국 군대는 하곡(河曲)에서 교전했다.[4]

2. 3. 영공의 폭정과 조돈과의 갈등

어린 진 영공은 즉위 초 조순의 말을 잘 따랐으나, 점차 성장하면서 그의 뜻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기원전 607년 (진 영공 14년), 완전히 성인이 된 영공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을 함부로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도안가를 총애했으며, 수도 강성(降城)에 호화로운 정원인 도원(桃園)을 만들어 그곳에서 정사를 보기도 했다. 성인이 된 영공은 제나라를 치기 위한 회맹을 열었으나, 제나라가 바친 뇌물을 받고 토벌을 중단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 이에 실망한 정(鄭)나라는 진나라를 더 이상 맹주로 섬길 가치가 없다며 초(楚)나라를 새로운 맹주로 삼았다.

어느 날 영공은 곰 발바닥 요리가 제대로 익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요리사를 죽이고, 그 시체를 궁녀에게 들려 옮기게 하는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 마침 그 광경을 조순과 사회가 목격하게 되었다. 조순이 직접 나서 간언하려 하자, 사회는 자신이 먼저 간언하겠다며 영공에게 나아갔다. 영공은 사회를 무시하려 했으나, 사회가 끈질기게 간언하자 마지못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영공의 폭정은 계속되었다.

결국 조순과의 갈등이 깊어지자, 기원전 607년 영공은 마침내 조순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자객 저예를 보냈다. 그러나 조순의 집에 잠입한 저예는 그의 청렴하고 충성스러운 모습에 감명받아 차마 죽이지 못하고, 스스로 나무에 머리를 박고 목숨을 끊었다. 영공은 포기하지 않고 연회 자리에 자객을 숨겨 조순을 다시 죽이려 했으나, 조순은 주변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고 망명을 시도했다.[4] 한편 영공은 조순이 사라지자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망루에 올라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며 그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2. 4. 시해와 최후

기원전 607년(진영공 14년), 장성한 영공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4] 그는 도안이(屠岸夷)의 손자인 도안가(屠岸賈)를 총애했으며, 수도 강성(降城) 안에 화려한 정원인 도원(桃園)을 만들어 그곳에서 정사를 보았다.[4] 조돈과 사회가 이러한 영공의 행태를 비판하며 간언하자, 영공은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겨 조돈을 암살하려 했다.[4] 조돈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달아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영공은 조돈의 사촌인 조천에게 시해당했다.[4]

영공이 시해된 배경으로는 그의 사치와 폭정에 지친 백성들의 민심 이반이 지적된다. 검소함으로 백성을 아우르던 조돈과 대비되어 시해가 비교적 용이했다는 평가가 있다.[4] 또한, 조천이 영공의 조돈에 대한 무례한 처사에 격분하여 직접 살해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영공이 시해되었을 때, 조돈은 아직 진나라 국경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와 양공의 동생인 공자 흑둔(黑臀)을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니, 이가 바로 성공이다.

참조

[1] 서적 The Grand Scribe's Records — Volume V.1: The Hereditary Houses of Pre-Han China, Part I Indiana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http://www.guoxue.co[...] 2012-04-12
[3] 서적 The Grand Scribe's Records — Volume V.1: The Hereditary Houses of Pre-Han China, Part I Indiana University Press
[4] 서적 사기 권39 진세가 http://zh.wikisource[...]
[5] 서적 역주 춘추좌씨전 전통문화연구회
[6] 문서 위와 같음
[7] 문서 위와 같음
[8] 문서 위와 같음
[9] 문서 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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