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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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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빈드는 핀란드 공군의 에이스 전투기 조종사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75대의 적기를 격추하여 핀란드 에이스 순위 2위를 기록했다. 1938년 조종 훈련을 시작하여 계속 전쟁에 참전, 브루스터 B239를 주로 조종하며 39기를 격추했다. 1943년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두 번 수여받았으며, 핀란드 공군에서 숙련된 공중 전술가로 인정받아 새로운 조종사 훈련에 기여했다. 1944년 전투 중 부상으로 인해 전투 임무에서 물러났으며, 1945년 공군에서 퇴역 후 학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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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빈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스 헨릭 빈트 (1943년 수울라얘르비)
한스 헨릭 빈트 (1943년 수울라얘르비)
별명하세
출생일1919년 7월 30일
사망일1995년 7월 24일
출생지에케네스
사망지탐페레
군사 경력
소속핀란드 공군
복무 기간1938년–1945년
최종 계급대위
소속 부대제24비행대대
참전 전투겨울 전쟁
계속 전쟁
훈장만네르헤임 십자장 (2회 수훈)
기타 정보
이후 활동사업가

2. 생애

한스 빈드는 1938년 조종 훈련 과정에 자원하면서 조종사 경력을 시작했다. 겨울 전쟁(1939년-1940년)에는 예비 장교로 참전했으나 항공기 부족으로 실제 비행은 하지 못했고, 1941년 6월 소위로 임관하여 계속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제24 비행단 소속으로 활동하며 주로 브루스터 B239와 메서슈미트 Bf 109G를 조종했다. 그는 총 302회의 전투 출격을 통해 75대의 적기를 격추하여,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에 이어 핀란드 공군 에이스 순위 2위를 기록했다. 특히 브루스터 B239 기종으로는 39기를 격추했으며, 이는 핀란드 공군 내 해당 기종 최다 격추 기록이다.

뛰어난 전공을 인정받아 1943년 7월과 1944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핀란드의 최고 무공훈장인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는 핀란드군 전체에서 단 4명, 조종사 중에서는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과 빈드 단 두 명만이 받은 영예였다. 또한, 그는 뛰어난 공중 전술가로 인정받아 1943년에는 신참 조종사들을 위한 '전투기 전술 강의'를 집필하기도 했다.

1944년 7월 28일, 공중전 중 적기의 포탄에 맞아 왼쪽 팔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부상에서 회복되었으나 다시는 전투 비행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1945년 5월 10일 공군에서 퇴역했으며, 같은 해 8월 26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이후 헬싱키 경영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갔으며, 1995년 7월 24일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복무

핀란드 에케네스에 있는 한스 빈드와 토르 린드블라드의 기념비


한스 빈드는 1938년 조종 훈련 과정에 자원하며 조종사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겨울 전쟁(1939년-1940년) 당시 예비 장교 신분이었으나, 운용 가능한 항공기가 부족하여 실제 비행 임무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이후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빈드는 1941년 6월 17일, 소위로 임관하며 정식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다.

1941년 8월, 그는 제24 비행단으로 배치되어 계속 전쟁에 참전했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브루스터 B239(브루스터 버팔로의 핀란드 수출형)를 주로 조종했으며, 그의 총 75번의 공중 격추 기록 중 39번을 이 기체로 달성했다. 그의 첫 격추 기록은 1941년 9월 22일(일부 자료에서는 9월 27일)에 기록한 폴리카르포프 I-15였다. 1942년 3월 29일에는 폴리카르포프 R-5를 공동 격추하며 총 5기의 격추 기록을 달성하여 에이스의 반열에 올랐다.

1942년 8월, 소속 비행대가 룀푀티로 이동하면서 빈드는 핀란드 동부 만 상공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그는 꾸준히 전과를 올렸는데, 1942년 8월 14일에는 호커 허리케인 2대를 격추했고, 4일 뒤인 8월 18일에는 허리케인 1대와 폴리카르포프 I-16 2대를 격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42년 말까지 그의 누적 격추 수는 14.5기에 달했다. 1942년 11월에는 잠시 제1중대장 직무를 대행한 뒤 제3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에도 그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4월 5일에는 Il-2 슈토르모빅 3대를 격추했으며, 4월 14일에는 스핏파이어 2대, 4월 21일에는 Yak-1 2대를 격추하고 동료 에이스 키누넨과 함께 Yak-1 1대를 공동 격추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3년 7월 31일, 첫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빈드가 조종했던 브루스터 B239 기체 중 BW-393호기는 이전에 에이노 안테로 루카넨 소령이 주로 탑승했던 기체로, 빈드는 이 기체로 다수의 격추 기록을 세웠다. BW-393호기는 루카넨과 빈드 두 에이스가 사용하며 총 41기의 격추 기록을 가진 핀란드 공군 브루스터 기체 중 가장 뛰어난 전과를 올린 기체가 되었다. 빈드는 브루스터 기종으로 1944년 3월 21일 라보츠킨 La-5를 격추하며 마지막 전과(총 39기)를 기록했다.

1943년 8월(일부 자료에서는 1944년 초), 제24전대는 메서슈미트 Bf 109G형으로 기종을 전환했다. 빈드 역시 '멜스'(Mersu, 핀란드 공군에서 Bf 109를 부르는 애칭)로 갈아탔다. 공교롭게도 그가 처음 배정받은 MT-201호기 역시 이전에 루카넨 소령이 애용했던 기체였으며, 이 기체는 핀란드 공군의 Bf 109 중 가장 많은 32.5기의 격추 기록을 세웠다. 빈드는 MT-201호기로 11기를 격추했다.

1943년 10월 19일, 빈드는 24세의 나이로 대위로 진급했다. 그는 핀란드 공군 내에서 가장 뛰어난 공중 전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최전선 임무에서 잠시 물러나 신참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가 1943년에 작성한 '전투기 전술 강의'는 이후 수십 년간 핀란드 공군 조종사 훈련 교재로 사용되었다.

1944년 2월, 빈드는 다시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5월 27일, 그는 Bf 109로 첫 전과를 올리며 라보츠킨 La-5 2대를 격추했다. 1944년 6월 9일, 카렐리야 지협에서 소련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자 빈드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졌다. 1944년 6월에는 메서슈미트 Bf 109G-6 기종인 MT-439호기로 기체를 변경했으며, 6월 13일부터 28일까지 약 10일간 25기(자료에 따라서는 27기)를 격추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 6월 13일: 6대의 Bf 109 편대를 이끌고 Pe-2 폭격기 편대를 요격하여 4대 격추.
  • 6월 15일: P-39 에어라코브라 1대, Il-2M 1대 격추.
  • 6월 16일: Pe-2 2대, La-5 1대 격추.
  • 6월 19일: P-39 2대 (그중 한 대는 29기 격추 기록을 가진 소련 영웅 A. V. 치르코프 소령기), La-5 1대 격추. (총 3기)
  • 6월 20일: La-5 2대, Yak-9 2대, Pe-2 1대 격추. (총 5기)
  • 6월 22일: 스핏파이어 2대, La-5 1대 격추. (총 3기)
  • 6월 23일: La-5 2대, DB-3F 2대 격추. (총 4기)
  • 6월 25일(혹은 26일): Yak-9 3대, Yak-7 2대 격추. (총 5기)
  • 6월 28일: Yak-9 5기 격추. (총 5기)


이러한 눈부신 전과를 바탕으로 그는 1944년 6월 28일,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훈장을 두 번 받은 군인은 핀란드 전군에서 단 4명뿐이었으며, 조종사 중에서는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과 빈드 단 두 명이었다.

그러나 1944년 7월 28일(일부 자료에서는 6월 28일), 약 30대의 소련군 Yak-9 및 P-39 편대와의 공중전에서 빈드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Yak-9 1대를 격추하는 데 성공했지만, P-39에서 발사된 37mm 포탄이 조종석 방탄판에 명중하며 폭발했고, 다른 포탄은 방탄 유리를 뚫고 계기판에서 터졌다. 이로 인해 왼쪽 팔에 중상을 입었으나, 빈드는 심하게 손상된 기체를 몰고 기적적으로 비행장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편대원이었던 닐스 카타야이넨 역시 일주일 뒤 비슷한 공중전에서 중상을 입고 같은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부상에서 회복되었지만, 빈드는 다시는 전투 비행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그는 총 302회의 전투 출격을 통해 75대의 적기를 격추했으며, 이는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에 이어 핀란드 공군 전체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Bf 109 기종으로는 총 36기를 격추했다.

전쟁이 끝난 후, 빈드는 1945년 5월 10일(일부 자료에서는 10월 10일) 공군에서 퇴역했다. 그는 1945년 8월 26일 결혼했으며, 이후 헬싱키 경영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며 제분업계 등에서 사업가로 활동했다. 아내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두었으며, 1995년 7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2. 2. 계속 전쟁 참전



1941년 8월 제24 비행단으로 전속되어 계속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브루스터 B239(핀란드 공군에서의 호칭은 '블루스텔')를 주로 조종했으며, 총 75번의 격추 기록 중 39번을 이 기종으로 달성했다. 이는 핀란드 공군 내 브루스터 기종 최다 격추 기록이다. 그가 주로 탑승했던 BW-393호기는 이전에 에이노 안테로 루카넨 소령이 탑승했던 기체로, 두 에이스의 활약 덕분에 핀란드 공군 브루스터 기체 중 가장 많은 41기의 격추 기록을 가진 기체가 되었다.

1941년 9월 27일, 빈드는 폴리카르포프 I-15를 상대로 첫 격추(공동 격추)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42년 3월 29일에는 폴리카르포프 R-5를 공동 격추하며 총 5기 격추를 달성하여 에이스 조종사가 되었다. 1942년 8월, 비행대가 룀푀티로 이동한 후 핀란드 동부 만 상공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전과를 쌓았다. 8월 14일에는 호커 허리케인 2대를 격추했고, 4일 후인 8월 18일에는 허리케인 1대와 폴리카르포프 I-16 2대를 하루에 격추했다. 1942년 말까지 그의 격추 수는 14.5기를 기록했다. 1942년 11월에는 잠시 제1중대장직을 맡은 후 제3중대장이 되었다.

1943년에도 빈드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4월 5일에는 Il-2 3대를 격추했고, 4월 14일에는 스핏파이어 2대, 4월 21일에는 Yak-1 2대를 격추하고 동료 에이스 서전트 키누넨과 1대를 공동 격추했다. 5월 4일에는 하루 출격으로 Il-2 3기와 I-153 1기를 격추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이러한 공로로 1943년 7월 31일 첫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1943년 8월, 부대는 메서슈미트 Bf 109G(핀란드 공군에서의 호칭은 '멜스')로 기종을 전환했다. 빈드는 1944년 3월 21일 라보츠킨 La-5를 격추하며 브루스터 기종으로 마지막 전과를 올렸다. 이후 메서슈미트 Bf 109G-2 기종인 MT-201호기(이 기체 역시 이전에 루카넨 소령이 주로 사용)로 갈아탔고, 이 기체로 11기를 격추했다. MT-201호기는 핀란드 공군 메서슈미트 기체 중 가장 많은 32.5기의 격추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1943년 10월 19일, 빈드는 24세의 나이로 대위로 진급했으며, 그의 뛰어난 공중전 능력을 인정받아 새로운 전투기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최전선 임무에서 물러났다. 그가 작성한 '전투기 전술 강의'는 이후 수십 년 동안 핀란드 공군 조종사 훈련에 사용되었다.

1944년 2월, 빈드는 다시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5월 27일, Bf 109 기종으로 라보츠킨 La-5 2대를 격추하며 첫 격추를 기록했다. 6월 9일 카렐리야 지협에서 소련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자 빈드는 메서슈미트 Bf 109G-6 기종인 MT-439호기로 교체하고 더욱 맹렬히 싸웠다. 6월 13일에는 Pe-2 폭격기 4대를 격추했고, 이후 격추 행진을 이어갔다. 6월 15일 P-39 에어라코브라 1대와 Il-2 1대, 16일 Pe-2 2대와 라보츠킨 La-5 1대, 19일 P-39 에어라코브라 2대(소련 영웅 칭호를 받은 A. V. 치르코프 소령기 포함)와 라보츠킨 La-5 1대, 20일 라보츠킨 La-5 2대, Yak-9 2대, Pe-2 1대, 22일 스핏파이어 2대와 라보츠킨 La-5 1대, 23일 라보츠킨 La-5 2대와 DB-3F 2대, 25일 Yak-9 3대와 Yak-7 2대, 26일과 28일에는 각각 5기를 격추하는 등 6월 13일부터 28일까지 25기를 격추했다.

1944년 6월 28일, 빈드는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같은 훈장을 두 번 수훈한 것은 핀란드 전군을 통틀어 단 4명뿐이며, 조종사 중에서는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과 빈드 두 명뿐이다. 그러나 같은 날, 빈드는 약 30대의 Yak-9 및 P-39 에어라코브라와의 공중전에서 Yak-9 1대를 격추한 직후 P-39 에어라코브라에서 발사된 37mm 포탄에 피격되어 왼쪽 팔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크게 손상된 전투기를 몰고 기지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부상으로 인해 다시는 전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메서슈미트 Bf 109 기종 총 격추 수는 36기였다.

빈드는 부상에서 회복되었으나 전투 임무에는 복귀하지 못했다. 그는 계속 전쟁 기간 동안 총 302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하여 총 75기의 적기를 격추했으며, 이는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에 이어 핀란드 에이스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다.

2. 3. 혁혁한 전과와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훈장



1943년 10월 19일, 24세의 나이로 대위로 진급한 빈드는 새로운 전투기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잠시 최전선 임무에서 물러났다. 그는 핀란드 공군에서 가장 뛰어난 공중 전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그가 1943년에 작성한 '전투기 전술 강의'는 이후 수십 년간 새로운 조종사 훈련 교재로 사용되었다.

빈드는 1944년 2월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3월 21일, 그는 브루스터 버팔로("블루스텔")로 마지막 전과(라보츠킨 La-5)를 기록하며, 이 기종으로 총 39기의 격추 기록을 세웠다. 이는 핀란드 공군 내 브루스터 버팔로 최다 격추 기록이다. 이후 소속 부대인 제24전대는 제34전대로부터 넘겨받은 메서슈미트 Bf 109G-2("멜스")로 기종을 전환했고, 빈드 역시 주로 MT-201호기를 조종하며 전과를 이어갔다. 5월 27일, 그는 Bf 109로 첫 격추(La-5 2기)를 기록했다.

카렐리야 지협에서 소련군의 대공세가 시작된 1944년 6월 9일 이후, 빈드의 전과는 더욱 두드러졌다.

  • 6월 13일: Bf 109 6기를 이끌고 Pe-2 폭격기 편대를 요격하여 4기를 격추했다.
  • 6월 15일: P-39 1기와 Il-2M 1기를 격추했다.
  • 6월 16일: Pe-2 2기와 La-5 1기를 격추했다.
  • 6월 19일: 메서슈미트 Bf 109G-6(MT-439호기)로 기체를 바꾼 후, P-39 2기(이 중 한 대는 29기 격추 기록을 가진 소련 영웅 A. V. 치르코프 소령 조종)와 La-5 1기를 격추했다.
  • 6월 20일: La-5 2기, Yak-9 2기, Pe-2 1기 등 총 5기를 격추했다.
  • 6월 22일: 스핏파이어 2기와 La-5 1기를 격추했다.
  • 6월 23일: La-5 2기와 DB-3F 2기를 격추했다.
  • 6월 25일: Yak-9 3기와 Yak-7 2기를 격추했다.
  • 6월 26일: 5기 격추.
  • 6월 28일: 5기 격추.


이처럼 6월 19일부터 28일까지 열흘 동안 25기를 격추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혁혁한 전과를 인정받아 빈드는 1944년 6월 28일,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수훈했다. 이 훈장을 두 번 받은 군인은 핀란드 전군에서 단 4명뿐이며, 조종사 중에서는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과 빈드 단 두 명뿐이다.

그러나 한 달 뒤인 1944년 7월 28일, 약 30대의 Yak-9 및 P-39 편대와의 공중전에서 Yak-9 1기를 격추한 직후, P-39가 발사한 37mm 포탄에 피격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포탄 한 발은 조종석 방탄판에 맞아 폭발했고, 다른 한 발은 방탄 유리를 뚫고 계기판에서 터졌다. 왼쪽 팔에 중상을 입었지만, 빈드는 크게 손상된 기체를 몰고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빈드는 부상에서 회복되었으나 다시는 전투 비행에 나서지 못했다. 그는 총 302회의 전투 출격 임무를 완수했으며, 공식 격추 기록 75기로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에 이어 핀란드 공군 에이스 2위에 올랐다. Bf 109 기종으로는 총 36기를 격추했다.

2. 4. 부상과 종전

1944년 6월 28일, 빈드는 약 30대의 Yak-9과 P-39와의 공중전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Yak-9 1대를 격추했지만, P-39에서 발사된 37mm 포탄이 그의 좌석 방탄판에 맞아 폭발했고, 다른 포탄은 왼쪽 어깨 뒤의 방탄 유리를 관통하여 계기판에서 터졌다. 이로 인해 왼쪽 팔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그는 심하게 손상된 비행기를 몰고 기지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날, 그는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훈장을 두 번 받은 조종사는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과 빈드 뿐이었다.

이 부상으로 빈드는 더 이상 전투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고, 병원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편대원이었던 닐스 카타야이넨 역시 빈드가 부상당한 지 일주일 후에 중상을 입고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 빈드는 총 302번의 전투 출격을 통해 75대의 적기를 격추하여, 핀란드 공군 에이스 순위 2위를 기록했다.

빈드는 부상에서 회복된 후, 1945년 8월 26일에 결혼했고, 같은 해 10월 10일에 공군에서 퇴역했다. 이후 헬싱키 경영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하여 경영학을 공부했으며, 제분 업계 등에서 사업가로 활동했다. 그는 1995년 7월 24일에 사망했으며, 아내와 다섯 자녀를 남겼다.

2. 5. 전후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한스 빈드는 1945년 5월 10일 핀란드 공군에서 퇴역했다. 같은 해 8월 26일에 결혼했으며, 이후 헬싱키 경영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빈드는 1995년 7월 24일에 사망했으며, 아내와 다섯 자녀를 남겼다.

3. 격추 기록

항공기격추
브루스터 B23939
메서슈미트 Bf 109G36
합계75



1941년 8월, 핀란드 공군의 제24전대에 배속되어 브루스터 버팔로(핀란드 공군에서의 호칭은 블루스텔) 조종사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27일, 소련 공군의 폴리카르포프 I-15를 상대로 첫 격추(공동 격추)를 기록했다. 1942년 3월 29일에는 폴리카르포프 R-5(공동 격추)를 격추하며 총 5기 격추를 달성, 에이스 파일럿이 되었다. 그 후 착실하게 경험을 쌓아, 8월 14일에는 호커 허리케인 2기, 8월 18일에는 허리케인 1기와 I-16 2기를 격추했다.

1942년 11월, 에이노 안테로 루카넨 소령의 후임으로 제3중대장이 되었다. 1943년 5월 4일에는 하루 출격으로 Il-2 슈토르모빅 3기와 I-153 1기를 격추하는 성과를 올렸다. 같은 해 7월 31일 첫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 훈장을 수훈했고, 10월 19일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1944년 3월 21일, La-5를 격추하며 브루스터 버팔로 기종으로 마지막 전과를 올렸다. 이때까지 버팔로 기종으로 총 39기를 격추하여, 핀란드 공군 내 버팔로 최다 격추 기록을 세웠다. 그가 주로 탑승했던 BW-393호기는 루카넨 소령도 사용했던 기체로, 총 41기의 격추 기록을 가진 핀란드 공군 최고의 공훈기가 되었다.

이후 제24전대는 메서슈미트 Bf 109G-2로 기종을 전환했고, 빈드는 "멜스"(핀란드 공군에서의 Bf 109의 호칭) MT-201호기를 배정받아 11기를 추가 격추했다. 공교롭게도 이 기체 역시 루카넨 소령이 사용했던 기체로, 핀란드 공군 Bf 109 중 가장 많은 32.5기의 격추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1944년 6월, 메서슈미트 Bf 109G-6(MT-439호기)로 기체를 변경했다. 빈드는 더욱 뛰어난 공중전 기술을 선보이며, 6월 19일부터 28일까지 단 10일 동안 25기(19일 3기, 20일 5기, 22일 3기, 23일 4기, 26일 5기, 28일 5기)를 격추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6월 28일 공중전에서 중상을 입고 기지로 간신히 귀환했으나, 이후 병원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맞이했다. 같은 날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 훈장을 수훈했는데, 이 훈장을 두 번 받은 조종사는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과 빈드뿐이었다. 메서슈미트 기종으로는 총 36기를 격추했다.

4. 참고 문헌


  • 케스키넨, 칼레비; 스텐만, 카리; 니스카, 클라우스. ''Hävittäjä-ässätfin (핀란드 공군 에이스)''. 핀란드 에스포: 티에토테아스, 1978. ISBN 951-9035-37-0.
  • 스텐만, 카리; 케스키넨, 칼레비. ''Finnish Aces of World War 2 (에이스 항공기 23)''. 영국 옥스퍼드: 오스프리 출판, 1998. ISBN 1-85532-783-X.
  • 칼리 스텐먼, 칼레비 케스키넨. 『제2차 세계 대전 핀란드 공군 에이스』. 다이닛폰 회화.
  •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 (번역: 우메모토 히로시). 『핀란드 공군 전투기대』. 다이닛폰 회화, 1997.
  • 나카야마 마사히로 외. 『제2차 대전 세계의 전투기대』. 간토샤.
  • 칼레비 케스키넨, 카리 스텐먼, 클라우스 니스카. "FINNISH FIGHTER ACES". Apali Oy, 1994.
  • 칼레비 케스키넨, 카리 스텐먼, 클라우스 니스카. "BREWSTER MODEL 239". Apali Oy, 1995.
  • 칼레비 케스키넨, 카리 스텐먼, 클라우스 니스카. "MESSERSCHMITT BF109G". AR-KUSTANNUS OY, 1991.
  • 오시 윤투넨. ''한스 "하세" 빈트 - 르네 퐁크 오브 WW2 ("Finnish Fighter Ace")''.

참조

[1] 서적 Keskinen 1978
[2] 문서 REDIR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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