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야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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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나야마성은 1469년 닛타 가문의 이와마쓰 이에즈미가 고가 구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성이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여러 가문의 지배를 받았고,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로 함락된 후 폐성되었다. 현재 성터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닛타 신사, 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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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야마성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가나야마성 |
원어 이름 (일본어) | 金山城 |
다른 이름 | 닛타 가나야마성, 오타 가나야마성 |
종류 | 언덕 위 일본식 성곽 |
위치 | 군마현 오타시 |
![]() | |
좌표 | 36°19′4.08″N 139°22′38.91″E |
역사 | |
건설 | 1469년 |
건설 주체 | 이와마쓰 씨 |
사용 시기 | 센고쿠 시대 |
철거 | 1591년 |
구조 | |
현재 상태 | 유적 |
재료 | 석재 토루 |
특징 | 석벽 토루 해자 마출 우물 |
소유 및 관리 | |
일반 공개 여부 | 예 |
추가 정보 | |
지정 | 국가 지정 사적 |
건설자 | 이와마쓰 가즈즈미 |
개축 | 고호조 씨 |
통치자 | 이와마쓰 씨 유라 씨 다카야마 사다시게 우쓰기 씨히사 |
2. 역사
무로마치 시대인 1469년 간토 관령 우에스기 가문을 지원하던 닛타 가문 출신의 이와마쓰 이에즈미가 고가 구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가나야마성을 축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나야마 산성이 축성될 무렵, 간토 지역은 고가 구보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간토 관령 우에스기 가문이 극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두 세력은 간토를 양분하여 다투었으며, 이를 교토쿠의 난이라 부른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1476년 우에스기 가문의 집사직에 불만을 품은 나가오 가게하루가 하치가타 성을 거점으로 나가오 가게하루의 난을 일으켰다. 우에스기 가문은 대립하던 고가 구보 세력과 화해하고, 가신 오타 도칸의 활약으로 난을 진압했다. 가나야마 산성은 나가오 가게하루 군에 포위되었지만, 70여 일간의 농성전 끝에 격퇴하였다.
나가오 가게하루의 난 당시, 이와마쓰 가문은 이에즈미 세력과 그의 아들 아키즈미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했다. 이 갈등은 중신 요코세 가문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1573년 호조 가문을 등에 업은 유라 나리시게는 주변의 다테바야시 성을 함락하고, 기류 가문의 거성 히샤쿠 산성도 손에 넣어 세력을 확장했다. 호조 우지야스 사후, 호조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 간의 동맹은 파기되었고, 1574년 우에스기 겐신은 다시금 간토의 호조 가문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에 가나야마 산성도 우에스기 겐신의 공세에 시달렸지만, 번번이 격퇴하였다. 1578년 나리시게는 아들 유라 구니시게에게 성을 양도하고 히샤쿠 산성으로 거처를 옮긴다.
1583년 누마지리 전투를 앞두고 유라 가문은 호조 가문에서 반(反) 호조 연합 세력(사타케 가문, 우쓰노미야 가문)에 가담하여 호조 측의 고이즈미 성을 공격해 함락했다. 그러나 누마지리 전투는 호조 가문의 승리로 끝났고, 유라 가문의 당주 유라 구니시게와 그의 동생 나가오 아키나가는 호조 가문의 계략에 빠져 포로가 되었다. 유라 가문은 구니시게와 아키나가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가나야마 산성을 양도하고 히샤쿠 산성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이후 가나야마 산성은 호조 가문의 가신이 관리하게 되었다.
1875년 혼마루 부근에 닛타 요시사다를 모시는 닛타 신사가 건립되었다. 1934년 쇼와 9년) 12월 28일 '''가나야마 성터'''(金山城跡)로 국가 사적에 지정되었다. 2006년 헤세 18년) 4월 6일 일본 100명성에 선정되었다.
2. 1. 무로마치 시대 이전
1336년(겐무 3년) 사노 요시쓰나가 닛타 장원의 닛타 성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 닛타 성이 닛타 요시사다에 의해 가나야마에 건축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최근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는 그 시대의 유구나 유물이 검출되지 않았다. 다만 성곽 유구 보호와의 관계 때문에 완벽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측면도 있다. 1469년 간토 관령 우에스기 가문에 가세한 닛타 가문 출신의 이와마쓰 이에즈미가 고가 구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축성했다고 한다. 1476년 나가오 가게하루가 하치가타 성을 거점으로 나가오 가게하루의 난을 일으켰고, 가나야마 산성은 포위되었지만 70여 일간의 농성전 끝에 격퇴하였다. 이와마쓰 가문은 이에즈미 세력과 아들 아키즈미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하였고, 이 대립은 중신 요코세 가문의 조력으로 해결되었다.[2]2. 2. 센고쿠 시대
1494년 이와마쓰 이에즈미가 사망하자, 그의 손자 이와마쓰 히사즈미가 뒤를 이었다. 이와마쓰 아키즈미는 히사즈미를 돕는다는 명목하에 가나야마 산성에 머물고 있는 요코세 가문을 공격했지만, 가나야마 산성은 견고하여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고가 구보 아시카가 시게우지의 중재로 화의를 맺게 된다. 이 화의를 통해 아키즈미의 손자이자 히사즈미의 아들인 이와마쓰 마사즈미가 가문의 당주가 되었고, 아키즈미와 히사즈미는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이로 인해 요코세 가문은 어린 마사즈미를 이용하여 전권을 장악하고, 주가를 뒤엎으며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한다. 1565년경에는 요코세 씨에서 유라 씨로 성을 바꾼다.[2]1546년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간토 관령 우에스기 가문이 패배하면서 간토의 패권은 호조 우지야스에게 넘어갔다. 1552년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히라이 성이 함락되고 노리마사가 에치고로 도피하자, 요코세 가문(후일 유라 가문)은 호조 가문에 종속된다. 1560년 우에스기 겐신이 간토의 호조 가문을 제압하기 위해 출병하자, 유라 가문은 이에 편승하여 우에스기 가문에 가담했다. 그러나 1566년 다시 호조 가문으로 돌아섰고, 이후 벌어진 우에스기 가문의 공격을 가나야마 산성에서 격퇴했다. 1569년, 호조 가문은 다케다 신겐의 스루가 침공으로 다케다 가문과의 동맹이 파기되자, 유라 나리시게의 중재로 우에스기 가문과 동맹을 맺는다.[2]
1573년 유라 나리시게는 호조 가문의 지원을 받아 주변의 다테바야시 성을 함락하고, 기류 가문의 거성 히샤쿠 산성까지 손에 넣으며 세력을 확장했다. 호조 우지야스 사후 호조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의 동맹이 파기되자, 1574년 우에스기 겐신은 다시 간토의 호조 가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가나야마 산성도 우에스기 겐신의 공격을 받았지만, 번번이 격퇴하였다. 1578년 나리시게는 아들 유라 구니시게에게 성을 물려주고 히샤쿠 산성으로 거처를 옮겼다.[2]
1583년 누마지리 전투를 앞두고 유라 가문은 호조 가문에서 반(反) 호조 연합 세력(사타케 가문, 우쓰노미야 가문)으로 돌아서서 호조 측의 고이즈미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누마지리 전투는 호조 가문의 승리로 끝났고, 유라 가문의 당주 유라 구니시게와 그의 동생 나가오 아키나가는 호조 가문의 계략에 빠져 포로가 되었다. 유라 가문은 구니시게와 아키나가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가나야마 산성을 양도하고 히샤쿠 산성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2]
1584년 유라 구니시게와 그의 동생 나가오 아키나가, 그리고 유라 씨족의 지도자들이 오다와라성을 방문하여 호조 씨족에게 경의를 표했을 때, 호조 군이 가나야마성을 기습 공격하면서 배신 행위로 체포되었다. 당시 71세였던 그들의 어머니 아카이 테루코가 가나야마성 전투에서 방어전을 지휘했다. 그녀는 남은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15개월 이상 저항했고, 마침내 포로로 잡힌 아들들의 반환을 조건으로 항복했다.[2]
2. 3.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이 시작되자, 가나야마 산성은 마에다 도시이에가 이끄는 도요토미 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으며, 이후 폐성되었다.[2] 유라 구니시게와 그의 동생 나가오 아키나가는 호조 가문의 볼모로 잡혀 어쩔 수 없이 오다와라 성에서 농성했지만, 그의 어머니 유라 데루코의 조력으로 유라 가문은 존속할 수 있었다.[2]2. 4. 에도 시대
1613년(게이초 1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먼 조상이라고 자칭했던 닛타 요시시게를 기리기 위해 가나야마 남쪽에 다이코인을 건립했다.[11] 1629년(간에이 6년) 다테바야시 번주 사카키바라 다다쓰구는 가나야마의 송이버섯을 처음으로 에도 막부에 헌상했는데, 이는 1867년(게이오 3년)까지 매년 계속되었다.1688년(겐로쿠 원년) 가나야마는 막부 직할 임야가 되었다.[12] 1701년(겐로쿠 14년)에는 가나야마 성의 유구(遺構)가 상세히 기록된 겐로쿠 오타 가나야마 지도가 그려졌는데, 이는 현재 오타 시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13]
2. 5. 근현대
1934년(쇼와 9년) 12월 28일 "'''가나야마 성터'''"로 사적에 지정되었다. 현재는 몇몇 유구를 바탕으로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1] 후지오카시에 있는 히라이 가나야마성과 구별하여 오타 가나야마성이라고도 한다.[1]2006년(헤세 18년) 4월 6일 일본 100명성 (17번)에 선정되었다.[2]
2009년(헤세 21년) 5월 30일 사적 가나야마 성터 가이던스 시설・오타시 가나야마 지역 교류 센터가 개관했다.[3]
3. 구조
한때 가나야마성의 천수각이 1559년에 이시카와 미츠요시에 의해 이누야마성으로 옮겨졌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1961년부터 1965년 사이에 수행된 복원 작업을 통해 이누야마성의 천수각을 해체하는 등 고고학적 조사를 거쳐 부정되었다.
3. 1. 구루와
일본식 산성과 조선식 산성의 특징이 혼합된 산성으로 가나야마 산 전체가 산성을 이루고 있다. 간토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석벽으로 된 성이다. 현재 산 정상부에 해당하는 혼마루에는 닛타 신사가 건립되어 있다. 배후 경사면에는 석벽 일부가 남아 옛 모습 그대로 현존해 있으며, 1단 아래에는 평상시 취수원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히노이케(日の池, 해의 연못)와 쓰키노이케(月の池, 달의 연못)가 있다. 혼마루 남서쪽에는 니노마루, 산노마루가 일렬로 배치된 연곽식 산성이며, 본성 이외에도 서쪽 능선에 사이조(西城),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높이 209.9m의 덴진 산에 사카나카 성(坂中城)이라고 불리는 별성이 있다. 이들 구루와와 이어진 능선과 본성의 구루와 주위는 구덩이(호리키리)를 조성해 성을 방비하고 있다.[1]가나야마성은 이 시기 일본 성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이, 여러 구획이 언덕 꼭대기에 걸쳐 흙 제방과 마른 해자로 요새화되었으며, 본환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혼마루 아래의 작은 계곡은 석벽으로 요새화되었고, 정문으로 사용되었으며, 유라 가문의 주요 거주지가 있었다. 이곳에 남아있는 둥근 연못은 한때 이 부지를 차지했던 일본 정원의 흔적이다. 2차 구획은 석벽이 있는 문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광범위한 석벽 사용은 성이 건설된 위치와 시대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주요 지역의 크기는 대략 1km 길이였으며, 2차 요새를 포함한 전체 면적은 약 3km2에 달했다.[1]
3. 2. 석벽
1992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석축을 다용한 산성의 모습이 해명되고 있다.[8] 대수구(大手虎口) 동쪽 흙담 석축에서 석축을 개수한 흔적이 확인되어, 총 5회의 개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8]또한, 「턱받이돌」을 채용한 곳이 대수구를 포함하여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턱받이돌」은 석축 기저부(최하부)의 돌을 석축 면보다 10cm~20cm 앞으로 내놓고 설치하는 기법으로, 석축이 침하되어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8] 앞서 언급한 대수구 동쪽 흙담 석축에서는 3번째 개수 이후(발굴 조사를 실시한 오오타시(太田市)는 Ⅳ기로 분류)에 「턱받이돌」의 사용이 확인되었으며, 석축 기술의 향상 등이 추측되지만, 시대를 확정할 수 있는 출토물이 없기 때문에 시대 특정에는 이르지 못했다.[9]
3. 3. 해자
가나야마 산에는 히노이케(日の池, 해의 연못)와 쓰키노이케(月の池, 달의 연못)가 있는데, 평상시에는 취수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우물에 물이 고여있다. 혼마루 남서쪽에는 니노마루, 산노마루가 일렬로 배치된 연곽식 산성이었다. 본성 외에도 서쪽 능선에 사이조(西城),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높이 209.9m의 덴진 산에 사카나카 성(坂中城)이라고 불리는 별성이 있었다. 이들 구루와와 이어진 능선과 본성의 구루와 주위는 구덩이(호리키리)를 조성해 성을 방비했다.4. 현지 정보
가나야마성은 군마현 오타시에 있는 산성이다. 성터는 나가테정, 히가시카나이정, 가나야마정에 걸쳐있다.[1] 도부 철도 오타 역에서 내려 걸어서 약 50~70분 정도 걸리며, 도부 이세사키 선 오타역 북쪽 출구에서 가나야마 성터 가이던스 시설까지는 걸어서 약 50분(약 2.8km), 택시로 약 7분 거리이다. 주변 시설로는 닛타 신사(혼마루), 미카즈키무라(민속촌), 세라다 동조궁, 야부즈카 온천, 이쿠시나 신사 등이 있다.
4. 1. 소재지
군마현 오타시 가나야마정 40-98, 나가테정, 히가시카나이정에 걸쳐있다.[1]4. 2. 교통
도부 철도 오타 역에서 내려 걸어서 약 50~70분 정도 걸린다. 또는 도부 이세사키 선 오타역 북쪽 출구에서 가나야마 성터 가이던스 시설까지 걸어서 약 50분(약 2.8km), 택시로 약 7분 거리에 있다.4. 3. 주변 시설
- 닛타 신사 - 혼마루
- 미카즈키무라 - 민속촌
- 세라다 동조궁
- 야부즈카 온천
- 이쿠시나 신사
참조
[1]
웹사이트
金山城跡跡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07-23
[2]
서적
Samurai Women 1184–1877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2-01-20
[3]
웹사이트
Kanayama Castle
http://www.jcastl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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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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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Nihon no meijō kojō ji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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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kyū Communications
[6]
간행물
太田金山城の虎口周辺の通路形態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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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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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史跡 金山城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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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田市教育委員会文化財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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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太田金山城における石垣の改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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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跡金山城跡環境整備報告書
太田市教育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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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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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田市|大光院と呑龍上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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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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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太田市|金山御林と献上松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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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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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太田市|元禄太田金山絵図
https://www.city.ota[...]
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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