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오카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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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미오카 제사장은 일본의 산업화 시기인 메이지 시대에 비단 생산을 위해 건설된 관영 공장이다. 프랑스 기술자의 설계와 일본인 기술자들의 노력으로 1872년 가동을 시작하여, 세계 최대 규모의 제사 공장 중 하나로 성장했다. 미쓰이, 하라 등 민간 기업의 소유를 거쳐 1987년 생산을 중단할 때까지 일본 비단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현재는 주요 건물들이 국보 및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4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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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오카 제사 공장과 관련 유적지는 일본 최초의 대규모 기계 제사 공장인 토미오카 제사 공장을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의 산업 근대화와 양잠 기술 발전에 기여한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도미오카 제사장 | |
---|---|
개요 | |
![]() | |
위치 | 군마현 |
일부 | 도미오카 제사장과 관련된 유적 |
기준 | (ii), (iv) |
ID | 1449 |
좌표 | 북위 36° 15′ 19″ 동경 138° 53′ 16″ |
등재 연도 | 2014년 |
면적 | 5.5 헥타르 |
완충 구역 | 151.1 헥타르 |
웹사이트 | www.tomioka-silk.jp/_tomioka-silk-mill |
일반 정보 | |
명칭 | 도미오카 제사장 |
옛 명칭 | 해당사항 없음 |
용도 | 견학 시설 |
옛 용도 | 제사 공장 |
설계자 | 에드몬 오귀스트 바스티앙 (주요 부분) |
구조 설계자 | 해당사항 없음 |
시공 | 해당사항 없음 |
건축주 | 해당사항 없음 |
사업 주체 | 도미오카시 |
관리 운영 | 도미오카시 |
구조 형식 | 해당사항 없음 |
부지 면적 | 55391.42 |
착공 | 1871년 (메이지 4년) 3월 |
준공 | 1872년 (메이지 5년) 7월 (주요 부분) |
개관/개소 | 1872년 11월 4일 (메이지 5년 10월 4일 (음력)) |
소재지 우편 번호 | 370-2316 |
소재지 | 군마현 도미오카시 도미오카 1번지 1 |
문화재 지정 | 사적 국보 세계유산 |
지정일 | 2005년 (헤이세이 17년) 7월 14일 2014년 (헤이세이 26년) 12월 10일 |
비고 | 근대화 산업 유산 세계유산 등재 물건 구성 자산 |
2. 역사
에도 시대 말기, 일본은 개항과 함께 생사를 주요 수출품으로 삼았으나, 품질이 조잡하여 국제적인 평가가 낮았다. 이에 메이지 정부는 1872년 프랑스의 기술을 도입하여 관영 모범 공장인 도미오카 제사장을 설립했다. 이는 기계 제사 공장으로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다. 이곳에서 사용된, 일본 기후에 맞춰 개량된 방적 기계는 이후 일본 국내 제사 공장에도 도입되었으며, 도미오카 제사장에서 기술을 익힌 여공들이 각지로 기술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도미오카 제사장은 1893년 미쓰이 가에 매각되었고, 1902년 하라 합명회사, 1939년 가타쿠라 제사방적회사(현 가타쿠라 공업) 등으로 경영 주체가 바뀌었다. 1987년 조업이 중단될 때까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을 포함하여 제사 공장으로 계속 가동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의 공습 피해를 입지 않았고, 조업 중단 이후에도 가타쿠라 공업이 보존에 힘쓴 덕분에 초기 건물 구조가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2005년에는 공장 일대가 일본 사적으로, 2006년에는 주요 건조물이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07년에는 "도미오카 제사장과 실크 산업 유산군"이라는 명칭으로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었으며, 2014년 6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정식으로 등록되었다.
2. 1. 설립 배경
에도 시대 말기 일본은 개항 후 생사를 주요 수출품으로 삼았으나, 품질이 조잡하여 국제적인 평가가 낮았다.[19][20] 당시 유럽에서는 미립자병[15]이라는 누에 질병이 유행하고, 태평천국의 난으로 청나라의 생사 수출이 부진하여 일본 생사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16][17] 그러나 급격한 수요 증가는 조잡한 생산을 초래했고, 이는 일본 생사의 국제적 평가 하락으로 이어졌다.[19][20]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는 산업화를 위해 서구 기술 도입이 필요했다. 메이지 정부는 외국 상인들로부터 기계 제사 공장 건설 제안을 받았으나, 국책 사업으로 추진하기 위해 거절하고 1870년 (메이지 3년) 2월에 기계 제사 관영 모범 공장 건설을 결정했다.[23][24]
정부는 기계 제사 기술 도입을 장려했고, 마에바시 번에서는 하야미 겐소 등이 같은 해에 번영 마에바시 제사소를 설립했다. 이는 일본 최초의 기계 제사 공장으로 여겨지지만,[26] 이탈리아식 제사 기계를 도입한 소규모 공장이었다.[27][28]
오쿠마 시게노부, 이토 히로부미,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은 프랑스 공사관에 고용 외국인 적임자 소개를 요청했고, 폴 브뤼나가 추천되었다.[29] 메이지 정부는 브뤼나와 1870년 (메이지 3년) 6월 가계약을 체결했다.[30]
브뤼나는 오다카 아츠타다 등과 함께 나가노현, 군마현, 사이타마현 등을 시찰하여 공장 건설 예정지를 선정했고, 1870년 (메이지 3년) 윤 10월 17일 (1870년 12월 9일)에 도미오카를 건설지로 최종 결정했다.[32] 이는 주변에서 양잠업이 성행하여 고치 조달이 용이하고, 건설 예정지 주변 토질이 농사에 적합하지 않으며,[33] 물과 석탄 등 자원 조달이 가능하고, 주민 동의를 얻었으며, 공유지를 부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11] 등이 고려된 결과였다.
2. 2. 건설 과정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는 산업화와 서구화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출 상품이 필요했다. 생사는 이미 일본에서 생산되어 수익을 내고 있었고,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누에 질병 확산과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한 중국의 혼란으로 수요가 높았다. 그러나 과잉 생산과 유럽, 중국의 생산 회복으로 생사 가격이 하락하자, 메이지 정부는 비단 제품으로 초점을 전환했다.1870년, 정부는 국책으로 기계 제사 공장 건설을 결정하고, 오쿠마 시게노부, 이토 히로부미,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은 프랑스 공사관을 통해 폴 브뤼나를 소개받았다.[29] 브뤼나는 오다카 아쓰타다와 함께 나가노현, 군마현, 사이타마현 등을 시찰하여 도미오카를 건설지로 결정했다.[32] 이는 양잠업이 성행하여 繭(고치) 조달이 용이하고, 물과 석탄 등 자원 조달이 가능하며, 주민 동의와 공유지 사용 등의 요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11]
브뤼나는 요코스카 제철소의 에드몽 오귀스트 바스찬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1870년 12월에 완성했다.[11] 바스찬은 요코스카 제철소 설계 경험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설계를 완료했다.[36][37] 브뤼나는 1871년 1월 기계 구입과 기술자 고용을 위해 프랑스로 귀국했고,[11] 같은 해 11월에 재일본했다.
일본 측 책임자 오다카 아쓰타다는 1871년 3월부터 자재 조달에 착수하여 건설을 시작했다.[11] 석재, 목재, 벽돌, 회반죽 등은 주변 지역에서 조달했고, 벽돌은 간라정 후쿠시마에 가마를 설치하여 생산했다.[40]
1872년 2월, 정부는 여공 모집 포고를 냈으나, "서양인에게 생피를 빼앗긴다"는 소문으로 인해 난항을 겪었다.[44] 이에 오다카는 딸을 첫 번째 여공으로 입주시켰다.[45][46][47] 도미오카 제사장은 1872년 7월에 주요 부분 공사가 완료되어 개업할 예정이었으나, 여공 부족 문제 등으로 늦어졌다.[48]
2. 3. 관영 시대 (1872년 - 1893년)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는 일본의 산업화와 서구화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출 상품이 필요했다. 누에고치와 생사는 당시 일본 수출의 86%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그러나 과잉 생산과 유럽 및 중국의 비단 생산 지역 회복으로 생사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자, 메이지 정부는 비단 실과 직물과 같은 비단 제품으로 초점을 전환하여 비단 수출의 가치를 높이고자 했다.1872년 11월 4일, 관영 모범 공장 중 하나로 도미오카 제사장이 가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여공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약 210명의 여성 노동자가 처음에는 전체 실 감기 기계의 절반으로 운영되었고, 서양인들이 적포도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일본인 노동자들의 피를 뽑아 먹고 산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져 많은 잠재적 노동자들이 겁을 먹기도 했다.[1] 오다카 아쓰타다는 이러한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자신의 딸을 고용해야 했다.
이듬해 1월에는 주로 옛 사족 등의 딸들인 404명의 노동자가 있었고,[11] 4월에는 556명으로 증가했다.[50] 이들 중에는 『도미오카 일기』로 알려진 와다 에이도 포함되어 있었다.[51][11]
도미오카 제사장은 300개의 실 감는 틀을 갖춘 거대한 목조 골조 벽돌 건물로,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다.[52][53] 실 감는 틀은 생사를 작은 틀에서 더 큰 틀로 다시 감는 재감기(re-rolling) 과정을 포함했는데, 이는 습한 일본 기후에서 세리신이 실 가닥을 서로 붙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54] 폴 브류나는 일본 여성들의 작은 체격에 맞춰 기계 높이를 조절하는 등, 일본의 환경에 맞게 기계를 특별 주문했다.[58]
당시 노동 환경은 8시간 근무, 일요일 휴무, 연간 10일 휴가 등 진보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59][60][61] 노동자들에게는 유니폼이 제공되었고, 여성 노동자들은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63] 그러나 엄격한 규율, 작업장 소음, 사회적 계층 차이로 인한 갈등 등으로 인해 노동자 이직률이 높았고, 이는 제사장의 비용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1][52]
여공들은 숙련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고, 1873년 빈 만국 박람회에서 도미오카 제사장의 생사가 2등상을 받으면서 "도미오카 실크"는 브랜드 이름이 되었다.[65] 도미오카의 노동자들은 일본 각지에 건설된 다른 사립 실크 제사장에 기술을 전파하는 역할도 했다.[69]
초기 도미오카 제사장은 오다카 아쓰타다와 폴 브류나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나, 미숙련공 문제, 고용 외국인에게 지불하는 고액의 봉급, 관영 특유의 비효율성 등으로 인해 대폭적인 적자가 이어졌다.[72][73]
1875년 계약 만료로 브류나 등이 떠난 후, 일본인만으로 경영이 시작된 첫 해에는 흑자로 전환되었다.[74] 이는 고용 외국인에 대한 지출이 사라지고, 오다카의 대담한 고치 매입 등이 성공한 결과였다.[76] 그러나 오다카는 정부와의 갈등으로 1876년 소장직에서 물러났다.[77]
1877년에는 미쓰이 물산에 의해 리옹으로 생사가 직수출되면서 일본인에 의한 직수출이 시작되었다.[78][79] 하야미 겐조는 민영화를 포함한 개혁을 제안했지만, 1878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도미오카 생사의 질 저하 문제가 제기되면서 개혁을 주도하게 되었다.[81][26] 하야미는 오다카의 후임이었던 야마다 레이코를 경질하고,[82] 1879년 제3대 소장으로 취임했다.
하야미는 민영화를 주장하며 1880년 소장직을 사임하고, 도미오카 제사소의 생사 직수출을 담당하는 요코하마 동신 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했다.[83] 그러나 군마 현 정부의 반대 등으로 인해 민영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84] 도미오카 제사장은 계속 관영으로 남게 되었다.
제4대 소장 오카노 아사하루 시대에는 실값 하락 등의 영향을 받아 경영이 어려워졌고,[88] 1885년 하야미가 제5대 소장으로 복귀했다. 하야미는 뉴욕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품질 관리를 강화하여 도미오카 실크의 명성을 높였다.[89][90][91][92]
'''도미오카 제사장 역대 소장 (관영 시대)'''
대 | 성명 | 취임일 | 퇴임일 | |
---|---|---|---|---|
1 | -- | 오다카 아쓰타다 | 1872년(메이지 5년) 10월 | 1876년(메이지 9년) 11월 |
2 | -- | 야마다 레이코 | 1876년(메이지 9년) 11월 | 1879년(메이지 12년) 3월 |
3 | -- | 하야미 겐조 | 1879년(메이지 12년) 3월 | 1880년(메이지 13년) 11월 |
4 | -- | 오카노 아사하루 | 1880년(메이지 13년) 12월 | 1885년(메이지 18년) 2월 |
5 | -- | 하야미 겐조 | 1885년(메이지 18년) 2월 | 1893년(메이지 26년) 10월 |
2. 4. 미쓰이 시대 (1893년 - 1902년)
미쓰이는 1893년 9월 10일 입찰을 통해 도미오카 제사장을 121460JPY에 인수했다.[95] 미쓰이 시대의 경영은 대체로 양호하여[11][96], 목조 단층의 제2공장을 신설하고[97], 제1공장(구 연사소)에서는 증기 기관 때문에 습기가 많아 부적절했던 양반장을 서치견소 1층에 새로 설치했다.[98][99] 신형 연사기 등이 도입되어[11], 초기의 연사기, 양반기는 모두 사라졌다.[100] 이 시기에 생산된 생사는 모두 미국으로 수출되었다.[101]기숙사도 새로 지어졌지만, 여공의 약 절반은 통근했다.[102] 여공의 노동 시간은 초기보다 늘어나는 경향이 있어, 6월에는 11시간 55분, 12월에는 8시간 55분이었다.[103] 읽고 쓰기와 재봉을 가르치는 1시간 정도의 야학은 계속되었지만, 장시간 노동에 지친 여공들은 학업에 열심이지 않았다고 한다.[104]
미쓰이는 도미오카 외에도 3개의 제사 공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4개 공장 전체 수익은 좋지 않았다.[105] 미쓰이 가문 내에서 제사 공장 유지에 적극적이었던 은행부 이사 나카미가와 히코지로가 사망한 것도 제사 사업 존속에 악영향을 미쳤다.[106] 결국, 미쓰이는 1902년 9월 13일에 4개 공장 전부를 하라 토미타로의 하라 합명 회사에 양도했다.[107] 하라가 지불한 대가는 현금 100000JPY과 10년 연부 135000JPY이었다.[11]
2. 5. 하라 시대 (1902년 - 1939년)
하라 합명회사가 도미오카 제사](富岡製糸所)]를 인수하고 다음 달인 1902년(메이지 35년) 10월에 '''하라 도미오카 제사'''로 개명했다.[11]2. 6. 가타쿠라 시대 (1939년 - 1987년)
1939년, 주식회사 도미오카 제사장은 당시 일본 최대 섬유 기업이었던 가타쿠라에 합병되었다.[11] 합병된 해에 가타쿠라 도미오카 제사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11] 1940년에는 18만 9000kg의 생산량을 기록하며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127]그러나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1년 3월, 잠사 사업 통제법이 공포되면서 가타쿠라 도미오카 제사장은 통제 경제에 편입되었다.[128] 같은 해 5월, 일본 잠사 통제 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도미오카 제사장은 가타쿠라에서 해당 주식회사로 형식상 임대되었다.[129][130] 가타쿠라 본사는 항공기 관련 군수 생산으로 전환했고, 1943년에 가타쿠라 공업 주식회사로 개칭했다.[131]
태평양 전쟁 중에도 도미오카 제사장은 제사 공장으로서 조업을 계속했지만,[132] 남자들이 징집되면서 여공 수가 크게 감소했다. 하지만 롤사기 증설로 이를 보충했다.[133]
전쟁 후, GHQ의 경제 민주화 정책에 따라 1946년 3월 1일 일본 잠사 통제 주식회사가 해산되었고, 도미오카 제사장은 다시 가타쿠라 소유가 되었다.[135][136] 이 해부터 가타쿠라 공업 주식회사 도미오카 공장이 되었다.[11][137] 같은 해 3월 25일, 쇼와 천황이 군마현을 순행하면서 도미오카 제사장을 방문했다.[138]
도미오카 제사장은 전쟁 중에도 공습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139] 1952년부터 자동 롤사기를 단계적으로 도입했다.[140] 또한, 전력화를 위해 변전소도 설치했다.[141] 이후 최신 기계로 계속 교체하여 1974년에는 생산량 37만 3401kg으로 역대 최고 생산량을 기록했다.[142]
전후 노동자 보호 법제가 정비되면서 2교대제가 도입되었다.[143] 가타쿠라 공업은 청년학교령(1935년)에 따라 공장 내 학교를 설치했고, 도미오카 제사장에도 사립 도미오카 여자 청년학교를 개교했다.[144] 전후에는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가타쿠라 학원을 설치했고, 도미오카 공장에도 기숙사 입사자가 무료로 다닐 수 있는 가타쿠라 도미오카 학원이 개교했다.[11]
그러나 기모노 착용 감소 등 사회 변화와 더불어 1972년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로 저렴한 중국산 생사 수입이 증가하면서[148] 생산량이 감소했다.[149] 결국 1987년 2월 26일 조업을 중단하고, 3월 5일 폐업식을 거행했다.[150][151]
2. 7. 세계유산 등재
가타쿠라 공업은 도미오카 제사 공장(구 도미오카 제사장)을 폐쇄한 후에도 "팔지 않고, 빌려주지 않고, 부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하며 유지 및 관리에 힘썼다.[152][153] 도미오카 제사장은 그 규모 때문에 고정 자산세만 연간 2000만엔, 기타 유지 및 관리 비용을 포함하면 연간 최대 1억엔 이상이 들기도 했다.[154] 가타쿠라는 수리 공사를 할 때에도 비용 절감보다 당시의 공법으로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155] 이러한 노력 덕분에 도미오카 제사장은 양호한 보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가타쿠라의 공헌은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다.[156][157]도미오카 제사 공장의 조업 중단을 계기로 1988년(쇼와 63년) 시민들 사이에서 "도미오카 제사장을 사랑하는 모임"이 발족하여 그 가치를 알리는 학습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왔다.[158] 이 단체는 활발한 시민 단체로 평가받고 있다.[159]
도미오카시의 이마이 세이지로 시장 재임 기간(1995년-2007년)은 도미오카 제사장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에 있어 중요한 시기였다.[160] 이마이 시장은 취임 전부터 도미오카 제사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시장이 되자 가타쿠라 공업과의 협상을 시작했다.[161] 2003년, 고데라 히로유키 군마현 지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을 위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162] 이듬해 12월, 현 지사, 시장, 가타쿠라 공업 사장의 3자 간 합의가 성립되어 도미오카 제사장이 도미오카시에 기증되었다.[163](토지는 유상 매각, 건물은 무상 양도[164]) 2005년 9월 30일, 도미오카시에 기증되었고, 다음 날부터 시에서 관리를 시작했다.[165][166]
2005년 7월 14일, "'''구 도미오카 제사 공장'''"으로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06년 7월 5일에는 1875년 이전의 건조물이 중요 문화재로[167], 2014년 12월 10일에는 그 일부가 국보로 지정되었다. 2006년에는 마이니치 신문사의 "헤리티징 100선"에 선정되었으며, 2007년 11월 30일에는 경제산업성으로부터 근대화 산업 유산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168]
문화청은 2006년과 2007년에 전국의 지방 자치 단체로부터 세계 문화 유산 추가 제안 후보를 공모했고, 군마현과 도미오카시를 비롯한 7개 시정촌이 공동으로 "'''도미오카 제사 공장과 견사 산업 유산군 - 일본 산업 혁명의 원점'''"을 제안했다. 이는 2007년 1월 30일에 "'''도미오카 제사 공장과 견사 산업 유산군'''"으로서 일본의 세계 유산 잠정 목록에 기재되었다. 근대화 유산이 잠정 목록에 추가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169] 이후 구성 자산 후보는 여러 번 검토되었지만, 2012년 8월 23일에 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 (UNESCO)의 세계 유산 센터에 공식 추천하기로 결정했고[170], 2013년 1월 31일에 공식 추천서가 수리되었다.[171] 일본의 세계 유산으로서 산업 유산이 추천된 것은 이와미 은광 유적과 그 문화적 경관 (2006년 추천, 2007년 등록) 이후 두 번째이다.
2013년 9월 25일부터 26일에 걸쳐, 세계 유산 위원회의 자문 기관인 국제 기념물 유적 회의 (ICOMOS)에서 파견된 중국 국립 실크 박물관 관장 자오펑이 현지 조사를 실시했다.[172] 이 조사를 바탕으로, 2014년 4월 26일 새벽(일본 시간)에 ICOMOS로부터 "등록" 권고가 나왔다.[173] 이 권고에 따라, 같은 해 6월 제38회 세계 유산 위원회에서 정식으로 등록되었다.
3. 주요 건물
도미오카 제사장의 주요 건물로는 제사 공장, 동쪽 고치(繭) 보관소, 서쪽 고치 보관소, 증기 기관실, 저수조, 배수 시스템, 감독관 저택, 프랑스 여성 강사 기숙사, 감독관의 집 등이 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1872년(메이지 5년)에 건설되었으며, 일본의 근대 산업 유산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2]
- 제사 공장 (국가 중요 문화재): 공장의 중심 건물로, 벽돌과 나무 골조로 만들어진 길고 좁은 건물이다. 프랑스에서 수입한 커다란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으며, 내부에 설치되었던 실 잣는 기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기술로 교체되었지만, 건물 자체는 넓어서 개조할 필요가 없었다.[2]
- 동쪽 고치 보관소 (국가 중요 문화재) 및 서쪽 고치 보관소 (국가 중요 문화재): 제사 공장의 양쪽에 위치한 건물로, 2층 벽돌 구조에 나무 골조로 지어졌다. 위층은 누에고치 보관에 사용되었으며, 동쪽 고치 보관소의 1층은 사무실, 서쪽 고치 보관소의 1층은 석탄 보관소로 사용되었다.[3][4]
- 증기 기관실 (중요 문화재): 제사 공장 바로 북쪽에 위치하며, 브뤼나가 도입한 단기통 증기 기관("브뤼나 엔진")은 메이지무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20년대에 전기가 공급되기 전까지 공장의 주요 동력이었다.[5]
- 저수조 (중요 문화재): 증기 기관실 서쪽에 있는 철제 물탱크로, 철판을 리벳으로 연결하여 만들었다. 약 400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국내 주철 구조물이다.[6]
- 배수 시스템 (중요 문화재): 공장의 하수 시스템은 벽돌 암거로, 조약 항구 외에서는 드물게 발견되는 서양 건축 양식을 통합하여 건축학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진다.[7]
- 감독관 저택 (중요 문화재): '''브루나 저택'''이라고도 불리며, 브루나 가족의 거주지였다. 브루나가 프랑스로 돌아간 후에는 노동자들을 위한 학교로 사용되었다.[8]
- 프랑스 여성 강사 기숙사 (중요 문화재): "2호 건물"이라고도 불렸으며, 프랑스에서 고용한 여성 강사들을 수용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강사들이 모두 일찍 귀국하면서 빈집이 되었고, 나중에 회사 간부들의 기숙사, 식당으로 사용되었다.[9]
- 감독관의 집 (중요 문화재): "3호 건물"이라고도 불렸으며, 프랑스에서 고용한 남성 기술자들의 기숙사였다.[10]
1893년 미쓰이에 인수된 후에는 (구) 제2공장, 하루나 기숙사 등의 건물이 추가되었다.
- (구) 제2공장: 1896년에 준공된 목조 단층 건물이다.[233]
- 하루나 기숙사: 수장관 옆에 지어진 기숙사로, 기존 기숙사의 노후화에 대응하기 위해 건설되었다.[11]
1902년 하라 합명회사에 인수된 후에는 양반 공장, 건조장, 누에고치 취급소, 실 창고, 구 계산소, 남자 기숙사 등이 건설되었다.
- 양반 공장: 1919년에 제사장 옆에 세워진 목조 단층 작업장이다.[237]
1939년 가타쿠라 제사 방적에 인수된 후에는 1940년(쇼와 15년) 아사마 기숙사와 묘기 기숙사 등의 여자 기숙사와 진료소, 병실 등이 건설되었다.
3. 1. 국보 및 중요문화재
도미오카 제사장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지정 면적 55,391.42제곱미터),[182] 개업 당시의 주로 목골 벽돌 구조의 건조물군이 중요 문화재(일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지정 명칭은 모두 "구 도미오카 제사 공장").[183]
2006년(헤이세이 18년)에 건축물 7동, 저수조(철수조) 1기, 배수구(하수구 및 외구) 1곳이 '구 도미오카 제사 공장'의 명칭으로 일괄하여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184] 또한, 중요 문화재 '구 도미오카 제사 공장'의 일부(사조소, 동·서치견소의 3동)가 2014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185][186]
중요 문화재 '구 도미오카 제사 공장'으로 지정된 건조물은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는 중요 문화재 지정 당시의 관보 고시에 근거한 건조물명(읽는 법은 문화청의 국가지정 문화재 등 데이터베이스에 의함)으로, 일부에는 현재 명칭을 덧붙였다.[187]
- '''사조소''' (소시죠, 국보) 또는 사조 공장은, 도미오카 제사 공장 내에서 중심적인 건물이다. 부지 중앙 남쪽에 위치하며, 동서로 긴 건물로, 목골 벽돌조, 평가건물, 잔와부이다. 평면 규모는 지간 140.4미터, 보간 12.3미터이다. 동쪽에 현관을 설치한다. 샛기는 목조 킹포스트 트러스이다.[189][190][191] 사조 작업은 밝은 환경이 필요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수입한 큰 유리창으로 채광을 확보했다.[11] 이 거대한 작업장에 300개의 프랑스식 사조기가 설치되었다. 조업에 사용된 기계는 시대에 따라 교체되었지만, 건물 자체는 증축 등의 필요성이 없어 창건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164]
- '''동치견소''' (히가시오키마유죠, 국보)와 '''서치견소''' (니시오키마유죠, 국보) 또는 동견 창고와 서견 창고는 사조소 북쪽에 세워진 남북으로 긴 건물이며, 동치견소, 사조소, 서치견소가 'ㄷ'자 모양을 이루도록 배치되어 있다. 동서치견소는 모두 1872년(메이지 4년 11월 21일부터 메이지 5년 12월 2일 사이)에 준공되었으며, 지간 104.4미터, 보간 12.3미터, 목골 벽돌조 2층 건물로, 지붕은 맞배지붕, 잔와부이다. 주로 2층이 누에고치 보관 장소로 사용되었다. 두 건물 모두 규모와 형식은 거의 같지만, 동치견소는 남면과 서면에, 서치견소는 남면과 동면에 각각 베란다를 설치했다. 또한, 동치견소는 정문과 마주보는 위치에 건물 내부를 관통하는 통로를 설치했으며, 통로 위 아치의 쐐기돌에는 '메이지 5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194][195][196] 개업 초기에는 양잠이 주로 봄누에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봄누에고치를 보관할 필요가 있어 건설되었으며, 두 건물 합쳐 약 32톤의 누에고치를 수용할 수 있었다.[11] 2층을 창고로 만든 것은 통풍 등을 고려한 조치였다.[11] 동치견소의 1층은 당초 사무실 등으로, 서치견소의 1층은 연료인 석탄 보관 장소로 활용되었지만, 나중에는 모두 창고 등으로 사용되어 건조 당초에 존재했던 칸막이 등은 없어졌다.[197]
- '''증기 가마소''' (조키카마쇼. 1872년・메이지 4년 11월 21일부터 메이지 5년 12월 2일 사이 준공, 중요 문화재)는 사조소 바로 북쪽에 세워졌다. 남북으로 긴 목골 벽돌조, 잔와부 부분과 동서로 긴 목조, 철판부 부분으로 나뉘며, 전자는 증기 가마소의 일부가 남은 것이고, 후자는 증기실의 2스팬분이 남은 것이다.[198][184] 이곳은 제사 공장의 동력을 담당했으며, 일부는 자견에 사용되었다. 브뤼나가 도입한 단기통식 증기 엔진은 브뤼나 엔진이라고 불리며, 현재는 가타쿠라 공업의 기증으로 박물관 메이지무라 (아이치현 이누야마시)에 전시되어 있다.[199] 1920년(다이쇼 9년)에 동력이 전력화되면서 브뤼나 엔진은 사용되지 않게 되었고, 이후에는 자견소 등으로 전용되었다.[200] 현재 이름은 자견장・선견장이다. 증기 가마소 서쪽에는 조업 당시에 있던 프랑스제 철제 굴뚝의 기부가 남아 있으며,[201] 증기 가마소의 '부'(付けたり)로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지정 명칭은 '연통 기부 1기').[184][202]
- '''철수조''' (텟스이류. 1875년・메이지 8년 준공, 중요 문화재) 또는 철수조는 증기 가마소 서쪽에 있는 철제 통 모양의 구조물이다. 철판을 리벳으로 접합하여 만들었으며, 직경 15미터, 깊이 2.4미터이고, 석축 기초를 갖추고 있다.[198] 창건 당시 벽돌에 모르타르를 바른 저수조가 누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요코하마 제조소에 제작을 의뢰한 철제 저수조로, 약 400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205] 철제 국산 구조물로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도 한다.[206][11][207]
- '''하수구 및 외구''' (게스이토오요비가이토, 중요 문화재) 또는 벽돌 쌓기 배수구는 모두 1872년(메이지 4년 11월 21일부터 메이지 5년 12월 2일 사이)에 벽돌을 주재료로 하여 축조된 암거이다.[208] 서양 건축 양식을 도입한 하수도는 당시에는 개항지 외에서는 보기 드물었으며, 이러한 유구 또한 건축학적 가치를 지닌다.[209] 하수구는 사조소 북쪽에 있으며, 건물과 평행하게 동서로 뻗어 있고, 길이는 186미터이다. 외구는 하수구 동쪽 끝에서 90도로 꺾여 부지 밖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뻗어 있으며, 길이는 135미터이다. 배수는 가부라카와로 흘러 들어갔다.[210]
- '''수장관''' (슈초칸. 1873년・메이지 6년 준공, 중요 문화재) 또는 브뤼나관(브뤼나관)은 사조소 동남쪽에 위치한다. 목골 벽돌조, 평가건물, 합각지붕, 잔와부이며, 평면은 L자형으로 동서 33미터, 남북 32.5미터이다. 내부는 이후 용도 변경을 위해 개조되었다.[198]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브뤼나 일가가 거주하기 위해 건설된 건물이다.[211][212]
- '''여공관''' (조코칸, 중요 문화재) 또는 2호관은 수장관과 마찬가지로 1873년(메이지 6년)에 준공되었으며, 동치견소 동쪽, 남쪽에 위치한다. 목골 벽돌조, 2층 건물, 동서로 긴 합각지붕, 잔와부 건물이다. 규모는 동서 20.1미터, 남북 17.4미터이다.[216] 이 건물은 브뤼나가 프랑스에서 데려온 여성 기술 지도자들을 위해 지어졌다. 그러나 4명의 교사 중 마리 샤레(Marie Charet / Charay, 19세[217])는 병 때문에 1873년(메이지 6년) 10월 23일에 도미오카를 떠나 같은 달 28일에 요코하마에서 귀국했다.[218] 이어서 클로린데 비에르포르(Clorinde Vielfaure, 연령 불명)와 루이즈 모니에(Louise Monier / Maunier, 27세)도 병에 걸려 1874년(메이지 7년) 3월 11일에 도미오카를 떠났다.[11] 남은 알렉상드린 발랑(Alexandrine Vallent, 25세)은 건강했지만, 혼자만 남는 것을 원치 않아 같은 날 도미오카를 떠났다.[219][220]
- '''검사인관''' (켄사인칸, 중요 문화재) 또는 3호관은 1873년(메이지 6년)에 준공되었으며, 동치견소 동쪽, 여공관 북쪽에 세워졌다. 목골 벽돌조, 2층 건물, 남북으로 긴 합각지붕, 잔와부 건물이다. 규모는 동서 10.9미터, 남북 18.8미터이다.[222] 원래는 브뤼나가 프랑스에서 데려온 남성 기술 지도자들의 숙소로 지어졌지만, 검사인 쥐스탱 벨랑(Justin Bellen, 29세[223])과 폴 에드가르 프라(Paul Edgar Prat, 23세)는 무허가로 요코하마에 나가 태업했다는 이유로 1873년(메이지 6년) 10월 30일에 해고되었다.[224][225] 정문 근처에 있으며, 현재는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229]
위의 건물 외에도, 정문 옆에서 출입자를 확인하던 후몬소가 중요 문화재 '구 도미오카 제사 공장'의 '부'(つけたり)로 지정되어 있다.[184]
3. 2. 미쓰이 시대의 건물
미쓰이는 1893년 9월에 도미오카 제사장을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이 시기에 (구) 제2공장과 하루나 기숙사 등 여러 건물이 신설되었다.[11]- (구) 제2공장: 1896년(메이지 29년)에 준공된 목조 단층 건물이다.[233] 제2공장 준공으로 기존 제사장은 제1공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1911년(메이지 44년)에 제사장은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고, 제2공장은 선견장, 자견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가타쿠라 시대에는 부잠사 가공 처리 시설로 쓰였다.[234]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원래 크기보다 축소되었다.[11]
- 하루나 기숙사: 제2공장과 같은 해에 수장관 옆에 지어진 기숙사로, 기존 기숙사의 노후화에 대응하기 위해 건설되었다.[11] 이전 기숙사는 해체되었고, 하루나 기숙사의 목재 일부는 이전 기숙사의 자재를 재활용한 것이다.[235][11] 수장관 옆은 햇볕이 잘 들어서 여공들의 주거 환경을 배려한 이전이었다고 한다.[11]
- 덴카 산: 건물은 아니지만, 미쓰이 시대와 관련된 장소이다. 1902년(메이지 35년) 6월 2일, 당시 황태자였던 가야 친왕이 올랐다고 전해지는 작은 언덕이다.[236]
미쓰이 시대에는 제사 기계가 현대화되었고, 생산된 생사는 모두 미국으로 수출되었다.[101] 노동 시간은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야학은 계속 운영되었다.[103][104] 그러나 미쓰이는 도미오카 제사장을 포함한 4개 제사 공장의 수익성이 좋지 않았고, 나카미가와 히코지로의 사망 이후 제사 사업 유지가 어려워졌다. 결국 1902년(메이지 35년)에 모든 공장을 하라 토미타로의 하라 합명 회사에 양도했다.[107]
3. 3. 하라 시대의 건물
1902년 하라 합명회사(이하 하라)가 도미오카 제사장을 인수하면서 '''하라 도미오카 제사'''로 이름이 바뀌었다.[11] 하라는 뽕나무 열매의 품질을 높이고 균일하게 하기 위해, 1903년부터 하라 나고야 제사에서, 1906년부터는 하라 도미오카 제사에서 누에씨를 무상으로 배포했다.[109] 이 과정에서 군마현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영향을 끼친 양잠 교육 기관인 다카야마사의 협력을 받았다.[11] 또한, 숙련된 여성 노동자들을 유지하기 위해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오락 활동을 지원하는 등 복지에도 힘썼다.[110][111][112]하라 시대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세계 공황의 영향을 받아 생산량이 감소하기도 했지만, 1930년대에 새로운 실 잣는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115] 1936년에는 14만 7000킬로그램의 생산량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치를 달성했다.[116]
이 시기에 지어진 주요 건물들은 다음과 같다.
- 양반 공장(일본어: 揚返工場|아게카에시코조일본어): 1919년에 제사장 옆에 세워진 폭 9.1m, 길이 136.4m의 목조 단층 작업장이다.[237] 생산량 증가에 따라 양반 작업만을 위한 별도 건물이 필요해져 건설되었다.[238]
- 건조장, 누에고치 취급소: 생고치의 번데기를 죽이고 고치를 건조하는 시설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 시대)
- 실 창고, 구 계산소: 1919년 건설, 목조 단층 건물[239]
- 남자 기숙사: 여공관과 검사관 사이에 위치[239]
1907년에 준공되어 누에 품종 개량을 담당했던 잠종 제조소는 1980년대 중반에 해체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240]
3. 4. 가타쿠라 시대의 건물
태평양 전쟁 종전 전에 세워진 건물로는 1940년(쇼와 15년) 아사마 기숙사와 묘기 기숙사가 있다. 이들은 여자 기숙사로, 모두 보 7.3미터, 지간 55.0미터의 목조 2층 건물이다.[241] 같은 해에는 수장관 동쪽에 있던 원 시대의 진료소·병실이 새롭게 재건축되었다.[242]4. 작업 공정
도미오카 제사장은 구매한 솜씨의 건조 및 저장부터 출하를 위한 포장까지의 모든 공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도미오카 제사장의 작업은 300개의 실 감는 틀을 갖춘 거대한 목조 골조 벽돌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가장 큰 공장들이 최대 150개의 실 감는 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도미오카 제사장은 완공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공장 중 하나였다. 실 감는 틀은 생사를 작은 틀에서 더 큰 틀로 다시 감는 재감기(re-rolling) 공정을 포함했는데, 이는 일본 장인들이 이전에는 손으로 했던 과정을 기계적으로 모방한 것이다. 습한 일본 기후에서는 생사가 감길 때 세리신이 실 가닥을 서로 붙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건조한 유럽 기후에서는 필요하지 않았던 재감기 과정이 필요했다.
개업 초기부터 조업 중단 시까지 기본적인 공정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초기에는 잣는 곳에서 자견, 조사, 양반을 모두 수행했지만, 자견장이나 양반 공장이 설치되면서 공정이 분리되고 기계화가 진행되는 등의 변화는 있었다.[179] 또한, 작업에서 발생한 찌꺼기 솜씨, 찌꺼기 실 등의 부산물 처리는 처음에는 하지 않았지만,[180] 쇼와 시대에 들어서 부산물 공장이 설치되었다.[181]
작업 공정은 다음과 같다.
- 건조
- 선별
- 자견
- 조사
- 양반
- 속장
4. 1. 건조
乾燥繭|간켄일본어은 구매한 솜씨를 건조하는 과정으로, 솜씨 안의 번데기를 죽이고 곰팡이 발생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다[174]. 초기에는 증기 가마 옆에 설치된 繰繭所|소켄조일본어에서 화로의 복사열을 이용해 건조했다[175][11]. 건조된 솜씨는 치견소(솜씨 창고)에 저장한 후, 선견(센켄) 과정을 거쳐 불량 솜씨를 제거하고 품질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용도를 결정했다[176].4. 2. 선별
도미오카 제사에서 구매한 솜씨는 건조와 저장을 거쳐 선별(選繭) 과정을 거친다. 선별 과정에서는 불량 솜씨를 제거하고, 솜씨의 품질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용도를 결정한다.[176]4. 3. 자견
자견(煮繭)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공정이다. 도미오카 제사장 초기에는 잣는 기계에 자견용 가마가 붙어 있어 잣는 곳에서 이 작업을 수행했다.[177] 이후 뽑아낸 실을 여러 개 꼬아 조사(繰糸)를 했다.4. 4. 조사
뽑아낸 실을 여러 개 꼬아 繰糸|조사일본어를 했다. 일본의 경우, 그 뒤에 작은 틀에 감아놓은 생사를 큰 틀에 다시 감는 揚返|양반일본어라는 공정이 존재한다.[178]4. 5. 양반
일본의 경우, 그 뒤에, 전술한 대로, 작은 틀에 감아놓은 생사를 큰 틀에 다시 감는 揚返|양반일본어이라는 공정이 존재한다.[178]4. 6. 속장
양반을 한 후의 생사는 출하를 위해 묶는다. 이 공정을 속장|소쿠소일본어라고 한다[178]。5. 역대 공장장
대 | 성명 | 취임일 | 퇴임일 | |
---|---|---|---|---|
1 | -- | 오다카 아쓰타다 | 1872년 10월 | 1876년 11월 |
2 | -- | 야마다 레이코 | 1876년 11월 | 1879년 3월 |
3 | -- | 하야미 켄조 | 1879년 3월 | 1880년 11월 |
4 | -- | 오카노 아사하루 | 1880년 12월 | 1885년 2월 |
5 | -- | 하야미 켄조 | 1885년 2월 | 1893년 10월 |
6 | -- | 쓰다 고지 | 1893년 10월 | 1896년 5월 |
7 | -- | 고이데 오사무 | 1896년 5월 | 1897년 3월 |
8 | -- | 후지와라 긴지로 | 1897년 3월 | 1898년 9월 |
9 | -- | 고이데 오사무 | 1898년 9월 | 1899년 3월 |
10 | -- | 쓰다 고지 | 1899년 3월 | 1902년 9월 |
11 | -- | 쓰다 고지 | 1902년 9월 | 1905년 11월 |
12 | -- | 고고로 도키마 | 1905년 11월 | 1909년 2월 |
13 | -- | 오쿠보 사사 | 1909년 2월 | 1933년 12월 |
14 | -- | 요코야마 히데아키 | 1933년 12월 | 1938년 7월 |
15 | -- | 오자와 토라오 | 1938년 7월 | 1940년 8월 |
16 | -- | 곤노 신이치 | 1940년 8월 | 1941년 4월 |
17 | -- | 야자키 교지 | 1941년 4월 | 1946년 8월 |
18 | -- | 니시모토 기요시 | 1946년 8월 | 1947년 4월 |
19 | -- | 사카데 도타로 | 1947년 4월 | 1952년 3월 |
20 | -- | 후쿠자와 킨이치 | 1952년 3월 | 1955년 2월 |
21 | -- | 스즈키 쇼이치 | 1955년 2월 | 1958년 6월 |
22 | -- | 에지마 마사미 | 1958년 6월 | 1968년 1월 |
23 | -- | 사카네 사다노부 | 1968년 1월 | 1969년 2월 |
24 | -- | 마쓰자키 쇼헤이 | 1969년 2월 | 1972년 3월 |
25 | -- | 사요 미쓰오 | 1972년 3월 | 1979년 3월 |
26 | -- | 후쿠모토 아키라 | 1979년 3월 | 1985년 3월 |
27 | -- | 다치바나 다쓰미 | 1985년 3월 | 1987년 3월 |
6. 관광
도미오카 제사장은 2005년부터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약 25만 명이 방문하여 묘기산, 군마 사파리 파크에 이어 도미오카시의 주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248] 2007년 4월부터 견학은 유료(도미오카 시민은 무료)로 전환되었다.[249][250] 자유 견학 외에도 정해진 시간에 해설 가이드 투어가 진행되며, 단체 예약 시 전속 해설원을 배정받을 수 있다.[11]
2014년에는 세계 유산 등록 권고 발표 다음 날 방문객 수가 4972명으로 최고 기록을 경신했고, 이후에도 계속 증가하여 4월 26일부터 5월 6일까지 누적 방문객 수가 5만 명을 넘었다.[251][254]
2014년 당시에는 노후화 문제로 조사소와 동치견소만 공개되었으나,[255] 이후 양반장도 공개될 예정이었다.[11] 그러나 전체 복원에는 상당한 기간과 비용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256][257] 입장객 수는 2014년도를 정점으로 감소하여[258]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크게 감소했다.[259] 시는 입장객 수 감소에 대응하고 있으며, 코로나19 종식 후 방문객 수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260] 2023년도 입장객은 36.7만 명으로, 목표치인 50만 명에는 미치지 못했다.[261]
가장 가까운 역은 조신 전철의 조슈 도미오카역으로, 도보로 약 1km 거리에 있다.[11] 조신 전철 다카사키역에서는 왕복 승차권과 입장권 세트가 판매되고 있다.[262] 자동차로는 조신에츠 자동차도 도미오카 인터체인지에서 약 3km 거리지만, 시설 내 차량 진입은 불가능하다.[263]
참조
[1]
웹사이트
富岡製糸場と明治時代のワインのお話 (小暮BLOG)
http://www.kogure-t.[...]
2022-06-27
[2]
웹사이트
旧富岡製糸場 繰糸所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3]
웹사이트
旧富岡製糸場 西置繭所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4]
웹사이트
旧富岡製糸場 東置繭所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5]
웹사이트
旧富岡製糸場 蒸気釜所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6]
웹사이트
旧富岡製糸場 鉄水溜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7]
웹사이트
旧富岡製糸場 下水竇及び外竇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8]
웹사이트
旧富岡製糸場 首長館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9]
웹사이트
旧富岡製糸場 女工館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10]
웹사이트
旧富岡製糸場 検査人館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11]
문서
[12]
뉴스
Sites in Iraq, Japan, the Netherlands and Saudi Arabia inscribed on World Heritage List
http://whc.unesco.or[...]
世界遺産センター
[13]
문서
[14]
간행물
[15]
문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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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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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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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置繭所に残っていた8万円相当の繭の代金を含む金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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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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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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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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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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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동시에 繰る 生糸의 数。8条と表記する文献も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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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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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37]
문서
前述のように、富岡工場への改名の時期は文献によって異なっている。
[138]
서적
昭和天皇御召列車全記録
新潮社
[13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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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50]
서적
[151]
서적
絹の国拓く 世界遺産「富岡製糸場と絹産業遺産群」
上毛新聞社
2014
[152]
서적
[153]
서적
[153]
서적
[153]
웹사이트
http://tumagowoaisur[...]
[153]
웹사이트
http://shirakawa-go.[...]
[15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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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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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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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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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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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68]
pdf
http://www.meti.go.j[...]
[169]
서적
世界遺産年報2008
日経ナショナルジオグラフィック社
2008-01-21
[170]
웹사이트
富岡製糸場の現状
http://www.tomioka-s[...]
[171]
간행물
WHC-13/37.COM/INF.8B3 List of nominations received by 1 February 2013 and for examination by the Committee at its 38th session (2014)
https://whc.unesco.o[...]
[172]
서적
[173]
pdf
http://worldheritage[...]
[174]
서적
[17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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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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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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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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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80]
문서
1877年開業の[[新町紡績所|官営新町屑糸紡績所]]([[高崎市]])は、この副蚕糸の加工のために設立された工場である。
[181]
서적
[182]
서적
[18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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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平成18年7月5日文部科学省告示第93号
[185]
문서
平成26年12月10日文部科学省告示第175号
[186]
문서
一括指定された重要文化財建造物のうちの一部を国宝に指定した例は他にもある。たとえば、滋賀県の「宝厳寺」は4棟一括で指定された重要文化財のうち「唐門」1棟のみが国宝指定、奈良県の「法隆寺食堂及び細殿」は2棟のうち食堂1棟のみが国宝である。
[187]
서적
現在名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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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収蔵品紹介
http://silkfact.jp/c[...]
[18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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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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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46]
뉴스
世界遺産のシンボル 富岡製糸場の煙突守って 保存費8000万円 寄付呼び掛け
https://www.tokyo-np[...]
2021-01-07
[247]
뉴스
"お富ちゃん家"10年以内に廃止 公共施設計画で方針 富岡市の発信拠点・観光物産館
https://www.jomo-new[...]
上毛新聞社
2021-04-25
[248]
서적
2009
[249]
서적
2007
[250]
웹사이트
見学するには
http://www.tomioka-s[...]
富岡製糸場公式サイト
2014-04-20
[251]
뉴스
富岡製糸場 世界遺産へ / 来場者 過去最高4972人
2014-04-28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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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遺産へ 富岡施設 連携進まず
2014-05-04
[253]
뉴스
富岡製糸場に最多6400人
2014-05-04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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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絹の国 4遺産世界へ» 来場数更新GWに6万人 備え万全に
http://jomo-news.co.[...]
2014-05-08
[255]
뉴스
富岡保存 熱意実る」「『100億円以上』改修費用課題
2014-04-27
[256]
뉴스
富岡製糸場 世界遺産へ / 受け入れ態勢に課題も
2014-04-27
[257]
뉴스
富岡 結んだ西洋・伝統
2014-04-27
[258]
뉴스
世界遺産に「殺された」富岡製糸場の教訓 観光客殺到で「本来の姿」失う
https://web.archive.[...]
産経デジタル
2021-02-06
[259]
웹사이트
見学者数
http://www.tomioka-s[...]
富岡市
2021-03-31
[260]
뉴스
【深層リポート】群馬発 岐路に立つ富岡製糸場 新たな可能性 コロナ後に期待
https://www.sankei.c[...]
産業経済新聞社
2021-02-06
[261]
뉴스
富岡製糸場 修繕ピンチ
2024-09-08
[262]
웹사이트
富岡製糸場見学往復割引乗車券
http://www.joshin-de[...]
上信電鉄
2014-04-20
[263]
서적
2013
[264]
웹사이트
Sites in Iraq, Japan, the Netherlands and Saudi Arabia inscribed on World Heritage List
http://whc.unesco.or[...]
世界遺産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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