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세이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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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세이 개혁은 1780년대 후반 일본 에도 막부 시대에 일어난 일련의 개혁으로, 당시 발생한 덴메이 대기근과 사회 혼란, 다누마 오키쓰구 정권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막부의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로주의 주도로 진행되었으며, 다누마 시대의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백성 구제를 위한 복지 정책, 막부 재정 재건을 위한 긴축 정책, 학문과 사상 통제, 대외 방비 강화 등을 추진했다. 6년 만에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해임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지만, 이후에도 개혁의 기조는 이어졌다. 간세이 개혁은 에도 막부의 붕괴를 늦추는 데 기여했으나, 내우외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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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 개혁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시기 | 1787년 ~ 1793년 |
장소 | 에도 막부 |
주도자 |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
배경 | |
사회적 배경 | 다누마 오키쓰구의 실각 미쓰이를 비롯한 대규모 상인들의 대두 막부 재정 악화 농촌 피폐 기근 |
주요 내용 | |
정치 | 쇼군의 권위 강화 간세이 학정 실시 외척 정치 배제 |
경제 | 사치 금지령 상업 억제 정책 절약 및 검소 장려 간정 정책을 통한 재정 재건 노력 |
사회 | 농촌 부흥책 실시 향촌 사회 질서 강화 기근 대책 마련 |
학문 | 주자학 장려 출판 통제 강화 이단 사상 탄압 |
평가 | |
긍정적 평가 | 막부 재정 안정화 농촌 경제 회복 사회 질서 유지 |
부정적 평가 | 상업 발달 저해 문화 발전 억제 서민 생활 어려움 가중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
관련 인물 | 도쿠가와 이에나리 다누마 오키쓰구 |
같이 보기 | |
관련 개혁 | 교호 개혁 덴포 개혁 |
기타 | |
로마자 표기 | Kansei no Kaikaku |
2. 배경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로주에 취임하기 전, 다누마 오키쓰구 집권기는 사회 혼란기였다. 호레키·메이와 시기(1751년~1772년)부터 잦은 가뭄, 홍수, 메이와 대화재 같은 대규모 재난이 발생했다.[30][1] 조정은 안에이로 연호를 바꾸며 안녕을 기원했지만, 재난은 끊이지 않았다.[30][1] 미하라산, 사쿠라지마, 아사마산 분화와 덴메이 대기근까지 겹쳐 전국적으로 잇키와 우치코와시가 빈번했다.[30][3][1]
다누마는 처벌 강화로만 대응하고, 기근 대비 비축을 소홀히 하는 등 미흡하게 대처했다. 이는 백성들의 불만을 증폭시켜 에도 쌀값 폭등과 덴메이 우치코와시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1] 이 소동은 다누마 파 실각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로주 취임을 불렀다.
다누마 시대 실정과 계속된 자연재해, 대기근은 농업 인구 급감과 막부 재정의 심각한 적자를 초래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붕괴 직전의 봉건적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간세이 개혁 필요성이 대두되었다.[30][1]
2. 1. 덴메이 대기근과 사회 혼란
호레키·메이와 시기(1751년~1772년)는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가 많았고, 에도에서는 메이와 대화재까지 겹쳐 사망자가 14,700명, 행방불명자가 4,000명을 넘어섰다. 조정에서는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연호를 안에이로 바꾸었으며, 세간에서도 안에이에는 재난이 끊이기를 갈망하는 노래가 유행했다.[30] 하지만 이후에도 재난이 계속되어 덴메이 대기근이 일어났고 전국적으로 잇키가 퍼져나갔다.호레키·메이와 시기 발생한 잇키는 600건에 달하며 도시에서 일어난 소요도 150건 이상에 달했다.[31] 발생 횟수뿐 아니라 규모도 확대되어 갔는데 로주 다누마 오키쓰구는 처벌을 보다 엄격히 하는 것으로 대응하여 막부의 쌀 수입이 매년 적자를 기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막부의 창고에서 쌀이 갈수록 줄어들어 기근에 대비한 비축분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32]
백성들의 소요가 에도로까지 퍼지자 다누마는 결국 실각했고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로주에 취임하게 되었다. 다누마가 집권할 당시의 소요는 반권력 투쟁을 고양시켰고 막번 체제가 해체될 수도 있는 중요한 전환기라는 평가도 있다.[30] 다누마가 실각할 당시 농업 인구가 140만 명이나 줄었으며, 덴메이 대기근의 영향과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장례식 때문에 100만엔의 적자가 예상되었다.[30]
2. 2. 다누마 시대의 문제점
호레키·메이와 시기(1751년~1772년)는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가 많았고, 에도에서는 메이와 대화재까지 겹쳐 사망자 14,700명, 행방불명자 4,000명을 넘어섰다. 조정에서는 안녕을 기원하며 연호를 안에이로 바꾸었지만, 이후에도 재난은 계속되어 덴메이 대기근이 발생, 전국적으로 잇키가 퍼져나갔다.[30]호레키·메이와 시기에 발생한 잇키는 600건, 도시 소요는 150건 이상이었다.[31] 로주 다누마 오키쓰구는 처벌 강화로 대응했으나, 막부의 쌀 수입은 매년 적자를 기록했고, 기근 대비 비축분도 부족했다.[32] 백성들의 소요가 에도로까지 퍼지자 다누마는 실각했고,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로주에 취임했다. 다누마 집권 당시 소요는 반권력 투쟁을 고양시켜 막번 체제 해체의 중요한 전환기로 평가받는다.[30] 다누마 실각 당시 농업 인구는 140만 명 감소, 도쿠가와 이에하루 장례 등으로 100만 냥의 적자가 예상되었다.[30]
다누마 시대는 초기부터 자연재해와 기근이 잇따랐다. 보력·명화 시대에는 큰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가 빈발하여, 에도에서는 명화 대화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변고가 계속되자 연호를 안에이로 변경하여 태평성대를 기원했으나,[1] 자연재해는 계속되어 미하라산, 사쿠라지마, 아사마산의 대분화[2], 덴메이 대기근이 발생했다. 전국 각지에서 일기와 우치코와시가 빈발했으며, 보력에서 덴메이 시대 38년 동안 일기 600건, 도시 소요 150건 이상이 발생했다.[3] 다누마는 처벌 강화로만 대응했고,[4] 기근 대비 비축도 소홀히 했다.
덴메이 대기근에 막부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무이자 분할 상환 拝借金은 덴메이 3, 4년 기근에 6대명 1만 9000량 남짓으로, 교호 대기근(33만 9140량)과 큰 차이를 보였다. 교호 대기근 때는 흉작인 서국에 27만 5525석의 쌀을 수송했지만, 덴메이 대기근 때는 도호쿠에 쌀을 보내지 않고 에도로 돌렸다.
에도에서 쌀값 폭등이 발생하자, 막부는 쌀 매매 자유령을 발표해 에도로 쌀 유입을 촉진하려 했으나,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상황은 악화되었다. 뇌물이 만연했던 다누마 시대의 사풍 타락, 무사들의 쌀 은닉도 문제였다. 백성들은 교호 대기근 때와 같은 구휼미 실시를 탄원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우치코와시에 나섰다.
덴메이 우치코와시는 다누마 파 실각, 사다노부 로주 취임의 계기가 되었다. 스기타 겐파쿠는 "이번 소동이 없었다면 정사가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 지적했다. 다누마 시대는 백성들의 반권력 투쟁 고양기, 막번 체제 해체의 전환기였다.[1] 농업 인구 감소, 막부 재정 적자 등 문제가 심각했다.
당시에는 세금 징수 대가로 행정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의 정책으로 인해 농촌에 대한 구제책은 부족했고, 덴메이(天明) 대기근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15]
2. 3. 개혁의 필요성 대두
호레키·메이와 시기(1751년~1772년)는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가 많았고 에도에서는 메이와 대화재까지 겹쳐 사망자 14,700명, 행방불명자 4,000명을 넘어섰다. 조정에서는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연호를 안에이로 바꾸었으며, 세간에서도 안에이에는 재난이 끊이기를 갈망하는 노래가 유행했다.[30] 하지만 이후에도 재난이 계속되어 덴메이 대기근이 일어났고 전국적으로 잇키가 퍼져나갔다.호레키·메이와 시기 발생한 잇키는 600건에 달하며 도시에서 일어난 소요도 150건 이상에 달했다.[31] 발생 횟수뿐 아니라 규모도 확대되어 갔는데 로주 다누마 오키쓰구는 처벌을 보다 엄격히 하는 것으로 대응하여 막부의 쌀 수입이 매년 적자를 기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막부의 창고에서 쌀이 갈수록 줄어들어 기근에 대비한 비축분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32]
덴메이 우치코와시가 없었다면 다누마 파가 실각하고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로주에 취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기타 겐파쿠는 "만약 이번 소동이 없었다면 정사가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누마 시대는 백성에 의한 반권력 투쟁의 고양기였으며, 막번 체제가 해체로 향하는 중요한 전환기이기도 했다.[30]
전대 다누마 시대는 초기부터 자연재해와 기근이 잇따랐다. 보력·명화 시대에는 큰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가 빈발하여, 에도에서는 명화 대화재로 사망자 1만 4700명, 실종자 4000명을 넘었다. 변고가 계속되자 연호를 안에이로 변경하여 태평성대를 기원했다.[1] 당시의 낙서에도 "명화 9년도 어제까지로 하고 오늘부터는 수명이 긴 안에이 연호"라고 읊조리며 자연재해가 수그러들기를 바랐다.[1] 그러나 그 후에도 자연재해는 계속되어 자연재해·전염병, 미하라산·사쿠라지마·아사마산의 대분화[2], 그리고 덴메이 대기근이 발생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일기와 우치코와시가 빈발했다. 보력에서 덴메이 시대 38년 동안 발생한 일기의 수는 600건에 가까우며, 도시 소요도 150건을 넘었다.[3] 또한 건수의 증가뿐 아니라 그 규모도 확대되었다. 그에 대해 다누마는 처벌 강화로만 대응했을 뿐만 아니라,[4] 막부의 쌀 수입이 매년 적자를 기록하는 상황에서도 기근에 대비하여 비축해야 할 성미·향창미를 비축하는 것을 포기했다.
덴메이 대기근에서 막부의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막부가 시행했던 무이자 분할 상환이었던 拝借金은 덴메이 3, 4년 기근에 6대명 1만 9000냥 남짓에 불과했고, 교호 대기근 당시의 총계 339140JPY과 큰 차이가 있었다. 또한 교호 대기근 당시에는 흉작이 된 서국을 구하기 위해 막부는 275,525석의 쌀을 수송했지만, 덴메이 대기근 당시에는 기근이 가장 심했던 해에 도호쿠에는 전혀 쌀을 보내지 않고 에도로 쌀을 돌렸다.
그러나 그 후 에도에서도 쌀값 폭등이 발생했다. 덴메이 6년, 에도 이래 최악이라고 불리는 덴메이 홍수가 발생하여 물가가 상승하고 쌀값 폭등이 시작되었다. 막부는 한시적 법률로 쌀 매매 자유령을 발표하여 단기간에 한정하여 에도로의 자유로운 쌀 반입과 판매를 허가하는 등 에도로의 쌀 유입을 촉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의 공포는 완전히 역효과를 낳았다. 원래 쌀값 폭등으로 한몫을 보려는 상인들이 투기 목적으로 쌀을 매점매석하여 가격을 올리고 있던 곳에 쌀 상인 이외의 많은 상인들이 쌀을 사재기하는 결과가 되어 상황이 악화되었다. 거기에 뇌물이 만연했던 다누마 시대의 사풍 타락의 극치도 더해져 뇌물을 받고 쌀을 저택 안으로 들이는 무사의 예가 빈발했다. 결국 백성들이 바랐던 교호 대기근 때와 같은 대규모 구휼미 실시의 탄원을 거절하는 등을 계기로 에도의 백성들은 우치코와시에 나서게 된다.
다누마 시대가 끝난 당초, 농업 인구는 140만 명이나 감소했고, 막부 재정은 덴메이 대기근의 피해와 쇼군 이에하루의 장례 때문에 100만엔의 적자가 예상되었다. 재정난 해소, 붕괴하는 봉건적 사회 구조의 유지가 요구되는 가운데 간세이 개혁이 시작되었다.[1]
3. 내용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기아 대책에 힘을 쏟아 도시와 농촌 구분 없이 흉작이나 자연재해에 대비해 쌀이나 금전을 비축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국가 차원의 식량 비축을 주장했다.[40] 농업 인구 증가와 황폐해진 토지 복구를 위해 노력했으며, 각 지역에 쌀 창고를 설치하고 연공 징수 관리의 부정을 엄격하게 단속했다.
1787년 5월 에도에서 발생한 소동의 재발을 막기 위해 도시 정책을 정비하여 호적 미등록자를 위한 시설을 이시카와지마(石川島)에 설치하고, 빈곤층 구제를 위해 회소(会所)를 설치했다.[41] 이러한 시설들은 막말 시대까지 존속한 경우가 많았다.
사다노부는 막부 재정 재건을 위해 과감한 재정 긴축을 꾀했다. 그의 자서전 겸 회고록인 「우게노히토코토(宇下人言)」에 따르면, 1770년(메이와 7년) 막부의 금화는 300만 냥 정도였지만, 사다노부가 집권할 당시에는 덴메이 대기근의 손해와 쇼군 이에하루의 장례 비용 때문에 백만 냥의 적자가 예상될 정도로 절박했다. 이에 즉시 효과가 있는 엄중한 긴축 정책을 시행하여 재정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검약령을 반포하고 오오쿠를 축소했으며 여러 경비를 줄이는 등 다누마 시대에도 행해졌던 긴축 정책을 계승하여 줄인 결과 막부의 재정은 흑자로 전환될 수 있었다. 사치엄금 차원에서 유흥과 오락까지 제한하였는데,[42]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가루타(트럼프) 놀이 등 노름도 금지하면서 1791년부터는 단속하였다.[43] 사다노부가 실각할 당시에는 20만 냥 정도의 비축금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검약령이나 풍속통제령을 자주 반포한 덕에 에도가 불황에 빠져 시민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받아 각종 법령을 남발하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38]
3. 1. 다누마 정권과의 연속성
일반적으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다누마 오키쓰구의 정책을 모두 뒤집었다고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간세이 개혁에 다누마 정권과의 연속성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33] 도쿠가와 임정사 연구소는 사다노부의 반(反) 다누마 캠페인은 표면적인 것이고 실제로는 다누마의 정치를 계승한 부분이 많다고 주장했다. 특히 학문·기술·경제·정보 등을 막부로 집중시키고자 한 것이나 부상·부농과 제휴하면서 개혁을 이루고자 한 점 등은 다누마의 정책을 계승한 것을 넘어서 다누마의 노선을 심화시킨 것으로 보았다.[34]일본 중세·근세사를 전문으로 하는 다카기 히사시는 다누마와 사다노부 사이에 연속적인 면이 있었음을 중시하며, 그 예시로 통화 정책을 들었다. 1788년 사다노부는 에도의 물가를 억제하기 위해[35] 메이와 니슈긴(明和二朱銀)의 제조를 중지하고 겐분긴(元文銀)을 증산했다. 다카기는 제조만 중지시켰을 뿐 통용은 중지시키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금화와 은화의 시세를 시정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다누마의 통화 정책을 부정할 취지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1790년에는 니슈긴이 많이 통용되지 않았던 서일본[36]에서도 사용하도록 강제했다. 결과적으로 다누마 정권의 화폐 정책은 사다노부가 집권한 이후 더 확대되었다. 이는 교호 개혁 때 아라이 하쿠세키가 오기와라 시게히데의 통화 정책을 완전히 뒤엎은 것과는 대조적이다.[33]
다누마는 허가한 화폐 이외의 것은 통용 정지시키는 등 지폐 경제의 발달을 방해하는 듯한 정책을 펼쳤지만, 사다노부는 1790년(간세이 2년) 이세 신궁의 신관과 상인들이 만든 야마다하가키(山田羽書)를 야마다부교(이세부교) 소관으로 옮겨 준비금 범위 내에서 발행을 허락했다. 위조 지폐 대책도 철저히 세우는 등 야마다하가키는 사실상 막부가 발행하는 지폐로 인식되어 다누마 시절보다 진일보한 지폐 정책이 이루어졌다. 봉행소가 직접 관리했기에 상인들에 의한 남발을 막아 통화 공급량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7]
일본 근세사를 연구하는 후지타 사토루는 간세이에서 분카까지의 재정·경제 정책은 긴축으로 재정 수지 균형을 맞추는 것을 기본으로 했으며, 세간의 비판이 강했던 일부 사업을 철회했으나 다누마 시대를 계승하여 독자적이고 적극적인 증수책은 볼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다카자와 노리하루 역시 간세이 당시 막부의 경제 개혁 정책은 상업조합, 니슈긴, 공금 대출 등 다누마 정권을 계승한 것이 많았다고 평했다.[38]
사다노부는 상업조합을 모조리 해산시켰다는 통설과는 달리 대부분의 상업조합을 존속시켰다. 개혁 초기 니슈긴 주조와 상업조합 결성으로 징수한 운상금(運上金)이 물가 급등의 원인이 되어 니슈긴과 상업조합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사다노부는 상업조합에 대해 물가 조정과 함께 운상금 상납에도 기대를 하고 있었기에 개혁 초기에 일부만 폐지하고 나머지는 존속시켰다. 1787년(덴메이 7년)에는 자신의 영지에서 치안 유지를 위해 전당포 조합을 결성하여 고리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했다.[38]
다누마는 적극 재정을 펼쳤으나 사다노부는 긴축 재정을 펼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후지타는 다누마의 정치를 오히려 긴축으로 이해하여[39] 전대부터 이어진 긴축 정책을 계승시켰다고 설명했다.
서양 서적 수입 해금이나 상업조합 결성 등 교호 개혁의 정책이 다누마 시대에 결실을 맺을 수 있었기에 다누마 시대는 교호 시대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재의 통설이다. 사다노부가 발포한 검약령(倹約令)을 다누마의 적극적 재정정책에서 전환한 긴축 정책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다누마도 1783년(덴메이 3년)부터 7년간 검약령을 발포한 적이 있으며, 사다노부의 검약령은 다누마 정책의 남은 기간을 그대로 추인한 것에 불과하다. 사다노부가 추진한 다른 긴축 정책에서도 다누마의 긴축 정책을 이어받아 심화시킨 것이 많다.
3. 2. 복지 정책 실시
간세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이전의 수탈 위주 정책에서 벗어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정치를 시행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기아 대책에 힘을 쏟아 도시와 농촌 구분 없이 흉작이나 자연재해에 대비해 쌀이나 금전을 비축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국가 차원의 식량 비축을 주장했다.[40]사다노부는 농업과 복지 정책에 중점을 두고 농업 인구 증가와 황폐해진 토지 복구에 노력했다. 기아 대책으로 각 지역에 쌀 창고를 설치하고, 연공 징수 관리의 부정을 엄격하게 단속했다. 또한 1787년 5월 에도에서 발생한 소동의 재발을 막기 위해 도시 정책을 정비하여 호적 미등록자를 위한 시설을 이시카와지마(石川島)에 설치하고, 빈곤층 구제를 위해 회소(会所)를 설치했다.[41] 이 시설들은 막말 시대까지 존속한 경우가 많다.
3. 3. 막부 재정 재건
막부 재정의 재건을 위해 과감한 재정 긴축을 꾀했다. 사다노부의 자서전 겸 회고록인 「우게노히토코토(宇下人言)」에 의하면 막부의 금화는 1770년(메이와 7년) 300만 냥 정도 있었지만 사다노부가 집권할 당시에는 덴메이 대기근의 손해와 쇼군 이에하루의 장례 비용 때문에 백만 냥의 적자가 예상될 정도로 절박했다. 개혁 초기인 1771년에는 막부의 재정이 81만 냥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에 사다노부는 즉시 효과가 있는 엄중한 긴축 정책을 시행하여 재정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검약령을 반포하고 오오쿠를 축소했으며 여러 경비를 줄이는 등 다누마 시대에도 행해졌던 긴축 정책을 계승하여 줄인 결과 막부의 재정은 흑자로 전환될 수 있었다. 사다노부는 사치엄금 차원에서 유흥과 오락까지 제한하였는데,[42] 당시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가루타(트럼프) 놀이 등 노름도 금지하면서 1791년부터는 단속하였다.[43] 사다노부가 실각할 당시에는 20만 냥 정도의 비축금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검약령이나 풍속통제령을 자주 반포한 덕에 에도가 불황에 빠져 시민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받아 각종 법령을 남발하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38]
3. 4. 6년 만의 해임
1793년 7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로주(老中)에서 갑작스럽게 해임되면서 간세이 개혁은 불과 6년 만에 막을 내렸다.[30] 그 배경으로는 존호일건 등으로 인해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대립하게 되었고, 오오쿠 개혁으로 인해 오오쿠와의 대립도 심각해진 것이 꼽힌다. 또한 지나친 긴축 정책을 펼쳐 무사나 서민들의 불만이 팽배해진 것도 이유 중 하나이다.[30] 당시 그의 갑작스러운 해임은 낙두(落首)에 "5, 6년 돈도 조금 모았는데, 이럴 줄은 아무도 몰랐네"라는 노래로 표현되었다.하지만 사다노부가 실각한 후에도 후임 로주인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 등 간세이 유로(寛政の遺老)에 의해 개혁 방침은 이어졌으며 사다노부의 정치 노선도 계승·발전되어 갔다.[30][1] 간세이 유로|寛政の遺老일본어는 사다노부의 실각 이후에도 그의 정치 노선을 계승한 사람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공금 대부 정책은 개혁 말기의 대출액 약 에서 으로 배증되었고, 출판 규제도 외환의 심각화와 더불어 유로 시대의 교와·분카기에 더욱 엄격해졌다. 이러한 간세이 개혁을 계승하는 정책은 1817년(분카 14년)에 노부아키라가 병사하고 미즈노 다다아키라가 새롭게 로주로 취임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4. 주요 정책 및 개혁
간세이 개혁은 농촌 부흥, 상업 통제, 재정 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다.
농촌 안정을 위해 각 번에 기근 대비용 창고를 설치하고 곡물을 비축하는 가코이마이(囲米) 정책을 시행했다.[41] 에도에는 시치부쓰미킨(七分積金)과 함께 설치되었다. 에도로 유입된 농민들에게 귀농 자금을 지원하는 큐리키노우레(旧里帰農令) 정책도 시행했지만 강제성은 없었다.[44] 이 외에도 농민 부담 경감을 위한 스케고(助郷) 축소, 오사메야도(納宿) 폐지, 인구 증가를 위한 간뽑기 금지 및 아동 수당 지급 등의 정책이 시행되었다.
하타모토와 고케닌 구제를 위해 쌀 중개업자인 후다사시(札差)에게 채권 포기와 이자 인하를 명령하는 기엔레(棄捐令)를 시행했다.[45][46] 그러나 이는 후다사시의 대출 기피라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막부는 사루야초카이쇼(猿屋町会所)를 설치하여 후다사시에게 자금을 대출해주며 경영을 지원했다.[45] 가야쿠카타닌소쿠요세바(加役方人足寄場)는 부랑자들에게 직업 훈련을 제공하는 시설로, 치안 유지 목적도 겸했다.[38]
다누마 시대의 중상주의 정책을 계승하여 주나카마(株仲間) 등을 지원했다. 쌀값 안정을 위해 주류 생산업체를 규제하여 생산량을 1/3로 줄이도록 했다. 각 마을이 구황 기금을 적립하는 제도인 시치부쓰미킨(七分積金) 제도를 시행했다.[41]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실각 이후, 노부아키라는 아이타이스마시레(相対済令)를 반포했다.
학문과 사상 분야에서는 주자학을 막부 공인 학문으로 인정하고 성당 학문소(聖堂学問所)를 관립 쇼헤이자카 학문소로 개편하면서 '''간세이 이학의 금(寛政異学の禁)'''을 시행하였다.[47] 재야 학자들의 막부 비판을 금지하는 '''처사 횡의의 금(処士横議の禁)'''을 시행하고[48] 사치품 단속, 공중 목욕탕 혼욕 금지, 출판 통제 등을 실시하였다. 하타모토와 고케닌을 대상으로 한 한학 필답 시험인 '''학문 음미(学問吟味)'''를 실시했다.[47] '''문교 진흥'''을 위해 여러 사서·지지(地誌)를 편찬하고 자료를 정리·보존하였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북방 군다이를 신설하여 북방의 방비를 담당하고자 했으며, 에도만의 방비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러시아의 통상 요구를 거절하고, "쇄국"을 법제화했다.[26]
4. 1. 경제 정책
간세이 개혁의 경제 정책은 크게 농촌 부흥, 상업 통제, 재정 정책으로 나눌 수 있다.- 농촌 부흥:
가코이마이(囲米)와 큐리키노우레(旧里帰農令) 정책이 대표적이다. 가코이마이는 각 번에 기근 대비용 창고를 설치하고 곡물을 비축하게 한 정책이다.[41] 에도에는 시치부쓰미킨(七分積金)과 함께 설치되었다. 큐리키노우레는 에도로 유입된 농민들에게 귀농 자금을 지원하는 정책이었지만 강제성은 없었다.[44] 이 외에도 농민 부담 경감을 위한 스케고(助郷) 축소, 오사메야도(納宿) 폐지, 인구 증가를 위한 간뽑기 금지 및 아동 수당 지급 등의 정책이 시행되었다. 1790년에는 둘째 아이 양육에 금 1냥을 지급했고, 1799년에는 2냥으로 증액했다.
- 상업 통제 및 재정 정책:
기엔레(棄捐令)는 하타모토와 고케닌 구제를 위해 쌀 중개업자인 후다사시(札差)에게 채권 포기와 이자 인하를 명령한 법이다.[45][46] 그러나 이는 후다사시의 대출 기피라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막부는 사루야초카이쇼(猿屋町会所)를 설치하여 후다사시에게 자금을 대출해주며 경영을 지원했다.[45] 가야쿠카타닌소쿠요세바(加役方人足寄場)는 부랑자들에게 직업 훈련을 제공하는 시설로, 치안 유지 목적도 겸했다.[38]
- 상업 정책:
다누마 시대의 중상주의 정책을 계승하여 주나카마(株仲間) 등을 지원했다. 1800년에는 막부의 대출액이 150만 냥에 달했으며, 이는 농촌 부흥, 숙박 시설 조성, 광산 부흥 등에 사용되었다.[30]
- 시치부쓰미킨(七分積金):
각 마을이 구황 기금을 적립하는 제도로, 마을 경비의 70%와 막부 지원금을 합쳐 조성했다.[41] 이 기금은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시(東京市)의 인프라 사업에 사용되었다.
- 쌀값 안정을 위해 주류 생산업체를 규제하여 생산량을 1/3로 줄이도록 했다.
-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실각 이후, 노부아키라는 아이타이스마시레(相対済令)를 반포했다.
4. 2. 학문과 사상
간세이 개혁기에 학문과 사상 분야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간세이 이학의 금(寛政異学の禁)'''
시바노 리쓰잔, 니시야마 셋사이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주자학을 막부 공인 학문으로 인정하고 성당 학문소(聖堂学問所)를 관립 쇼헤이자카 학문소로 개편했다. 학문소에서 양명학과 고학을 강의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 금지는 학문소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각 번의 번교도 이를 따랐기에 주자학을 정학으로 하고 다른 학문을 이학으로 하여 금지하는 경향이 확산됐다.[47]
- '''처사 횡의의 금(処士横議の禁)'''
재야의 학자들이 막부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금지했다. 실제로 해방학(海防学)자인 하야시 시헤이 등이 처벌을 받았다.[48] 사치품을 단속하고 공중 목욕탕에서 혼욕을 금지했으며 출판도 통제했다.
- '''학문 음미(学問吟味)'''
에도 막부가 하타모토와 고케닌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학 필답 시험이다. 성당학문소에서 실시했으며 1792년(간세이 4년)부터 1868년(게이오 4년)까지 19번 있었다. 시험의 목적은 성적이 우수한 자들에게 상을 주어 막신 사이에서 기풍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함이었으나, 장남이나 무직자의 경우 실제로 등용하는 관행이 있어 입신의 실마리로 공부를 하도록 유도하는 역할도 했다. 막부 말기로 갈수록 시험 출신자들 중에서 대외 관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면에 대응할 수 있는 유능한 막신이 배출되기도 했다.[47] 비슷한 제도로 연소자를 대상으로 한 소독 음미(素読吟味), 무예를 장려하기 위한 상람(上覧) 등도 있었다.
- '''문교 진흥'''
막정 초기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여러 사서·지지(地誌)를 편찬하고 자료를 정리·보존하였다. 이는 일부 번에서도 시행되었다.
4. 3. 대외 정책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간세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북방 군다이를 신설하여 북방의 방비를 담당하고자 했다. 사다노부는 직접 이즈와 사가미를 순검했으며 에도만의 방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이즈에 4개소, 사가미에 2개소 봉행소를 둘 것을 주장했다. 또한 에조치로 도항하기 위해 무쓰 연안의 요충지를 막부의 직할령인 천령으로 삼고 군다이를 설치하는 계획을 입안했다. 군다이에는 네덜란드의 협력을 받아 서양식 군함을 배치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안 방어 강화 계획은 제안자인 사다노부가 실각하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26]사다노부는 일본인 표류민인 다이코쿠야 고다유를 반환하는 과정에서 통상을 요구해 온 러시아의 사절 아담 락스만에게 즉시 통상 개시를 거절했다. 이것은 “쇄국”의 법제화로 이어진다.[26]
5. 평가
삼상 참자의 말에 따르면 간세이 개혁은 에도 막부의 붕괴를 50년 정도 늦춘 것이라고도 한다. 간세이 개혁의 성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18]
- 막정의 공정화 도모: 다누마의 뇌물 정치에서 벗어나 도덕적 반성을 통해 막부 정치의 공정성을 확보하려 했다.
- 사회 정책 도입: 교육과 교화를 통해 민중의 납득을 얻으려 하는 등 사회 정책적 수단을 도입했다.
- 대외 관계 명확화: 쇄국 정책과 대정 위임론에 따라 대외 관계 및 조정과의 관계를 명확히 했다.
- 다이묘에 대한 공의성 회복: 다누마 시대에 손상되었던 다이묘들에 대한 공의성을 회복시켜 덴메이기의 위기 상황을 소강 상태로 회복시켰다.[18]
그러나 간세이 개혁은 시간을 되돌리고 내우외환의 체제적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내우(內憂)의 한계:
- 번의 자립화: 다누마 시대 막부 본위 정책의 결과로 촉진된 번의 자립화를 막을 수 없었다. 막부는 본래 다이묘가 대처할 수 없는 대규모 반란, 전국적인 대기근, 외국의 침략 등에 대처하고, 다이묘가 궁핍할 때 바이샤쿠킨 등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다누마 시대에는 번에 부담을 전가하고 다이묘 금융을 통제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번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고 번의 자립화를 촉진했다.[18]
외우(外憂)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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