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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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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감로의 변은 당나라 문종 시대에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문종은 환관 왕수징의 횡포를 제거하기 위해 이훈, 정주 등과 모의하여 왕수징을 실각시켰다. 이후 환관 숙청을 계획했으나, 이훈의 실수로 감로가 내렸다는 소식을 틈타 환관들이 매복한 군사를 눈치채면서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이훈, 정주 등은 처형당하고 환관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으며, 문종은 이후 실의에 빠져 사망했다. 감로의 변 이후 환관들은 정계를 장악하고 황제의 계승까지 결정하는 등 당나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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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의 변
사건 개요
이름감로사변 (甘露事變)
로마자 표기Gamno Sabyun
발생일835년 12월 14일
위치당나라
원인환관 세력에 대한 황제의 불만
목표환관 제거
결과이훈, 정주 및 그들의 연루자들과 관리들의 사망
환관 세력의 강화
관련 인물
주요 인물문종
주도 세력이훈, 정주
관련 인물환관
배경
배경황제의 권력 약화 및 환관 세력의 강화
전개
경과이훈과 정주 등이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다 실패
결과 및 영향
결과계획 실패 및 관련자 처형, 환관 세력의 권력 강화
영향당나라 황실의 권위 실추 및 환관 정치 심화
같이 보기
관련 사건사마소의 조모 시해

2. 역사적 배경

당나라 현종 시기 고력사를 시작으로, 숙종, 대종 시기에는 이보국, 정원진 등 환관이 정치 권력을 휘두르는 기반이 있었다. 고력사는 현종의 개인 비서로서 암암리에 권력을 행사했으나, 이보국은 안사의 난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권력을 키워 "상부(尙父)"라 칭해지고 사공, 중서령에 오를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이보국 이후, 환관은 황제의 비서직을 넘어 공개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환관이 중용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환관은 자손을 남길 수 없어 황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적었다.
  • 황제의 사적인 가신(가노)으로서 일상적으로 접촉하여 황제 권력에 가까웠다.


이러한 이유로, 특히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민심이 쉽게 변하므로, 일반적인 가신보다 모반의 위험이 적은 환관에게 군권을 가진 군벌 등 군사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권력을 쥐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 1. 환관 세력의 발호

황제 문종은 권력 있는 환관 왕수성에 의해 이훈(당시 이름은 이중언)과 정주에게 소개되었다. 이훈과 정주의 왕과의 관계는 두 사람을 환관의 의심에서 벗어나게 했고, 이는 그들이 황제와 함께 환관에 대항할 때 유리하게 작용했다. 835년 여름, 문종은 이훈과 정의 제국 안정 계획을 승인했는데, 이 계획은 환관 제거, 토번 제국에 빼앗긴 영토 회복, 황하 북쪽의 군벌 제거의 세 단계로 구성되었다.[2]

문종은 835년 여름에 이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신책군 중 하나의 지휘권이 환관 위원소()에서 왕의 경쟁자 중 한 명인 환관 구사량으로 넘어갔다. 다른 군대 또한 환관이 통제했다. 위원소와 궁궐 통신 책임자들인 환관 양승화()와 왕천언()은 서로 다른 절도사의 감시관으로 임명된 후 자살 명령을 받았다. 왕은 이 세 사람과 갈등을 겪었고, 그들이 수도 장안에서 제거되면서 화해했을 수도 있다. 정주는 제국 군대를 모으기 위해 봉상 절도사(, 현대의 바오지, 산시성)의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훈과 정주는 환관 전원조(), 류행심(), 주원진(), 설사간(), 사선의일(), 그리고 류영찬(, 마지막 문자는 유니코드에 없음) 등 왕과 이전 갈등이 있었던 자들을 여섯 개의 외딴 절도사를 조사하도록 배정했고, 황실 학자 구사옹()이 작성한 칙령으로 그들의 자살을 명령하려 했다.[2]

835년 겨울, 문종은 이훈과 정의 조언에 따라 왕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계획에 따르면, 12월 20일[1] 장안에서 열리는 왕의 장례식에는 모든 환관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정주와 그의 개인 경호원들도 참석하여 기습으로 환관들을 죽일 계획이었다. 이 무렵, 이훈은 당나라 재상이었고, 정주가 이 음모의 모든 공을 차지할 것이라고 질투했다. 이훈은 먼저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소집하기 위해 곽행여(郭行餘|곽행여중국어)를 빈녕 절도사(, 현대의 시안, 산시성)로, 왕범()을 하동 절도사(, 현대의 타이위안, 산시성)로, 나립언()을 경조의 시장 대행으로, 그리고 한약()을 황실 경호대의 장군으로 임명했다. 새로운 임명 외에, 부 수석 감찰관 이효본()과 동료 재상 서원유만이 이훈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2]

원래 당나라에서는 현종 시기 고력사 이후 숙종・대종 시기의 이보국・정원진 등 환관이 정치 권력을 휘두르는 토대가 있었다. 고력사는 현종의 사적 비서로서 은연중에 권력을 행사했을 뿐이었지만, 이보국은 안사의 난 이후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권력을 증대시켜 한때 "상부(尚父)"라 칭하고 사공・중서령에 오를 정도의 권세를 떨쳤다. 이보국 이후, 환관은 황제의 비서에 머무르지 않고 공공연하게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환관이 우대받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자손을 남길 수 없는 환관은 황위를 넘볼 우려가 없다는 점
  • 황제의 사적인 가신(가노)으로서 일상적으로 접하기 때문에 황제 권력에 가까웠다는 점


이 때문에, 특히 국가의 혼란기 등 민심이 쉽게 변하는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가신보다 모반을 일으킬 위험이 낮기 때문에, 군권을 가진 군벌 등 군사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종종 환관에게 권력을 장악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2. 2. 문종의 환관 제거 시도

문종은 즉위 초부터 자신을 옹립한 환관인 왕수징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그의 횡포를 미워했다. 문종의 뜻을 받은 예부시랑인 이훈과 태복시경정주구사량이라는 환관을 왕수징과 대립시켜 두 사람을 항쟁하게 하여 공멸시킨다는 모의를 헌책했다. 이 사전 준비로 정주는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절도사(봉상 절도사)가 되었다.

이 계책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왕수징은 실권을 빼앗기고 억울한 죄로 주살되었다.[2] 이후, 왕수징의 장례식에 참례한 구사량 및 주요 환관 세력을 정주가 봉상에서 군사를 이끌고 숙청할 예정이었지만, 공적을 독점하려는 이훈은 정주가 출병하기 전 왕수징의 장례식 전에 환관을 한자리에 모이게 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상서에 감로가 내렸다"는 것을 이유로 환관들을 모으려고 했다. 이는 상서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환관 전원이 확인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835년 12월 14일(음력 11월 21일) 좌금오위대장군 한약이 조회에서 "좌금오위 관청(좌금오위) 뒷마당의 석류나무에 어젯밤 감로가 내렸다"고 상주했고, 관례에 따라 대부분의 환관이 확인하러 갔다.

이때 좌금오위 뒷마당에는 막이 쳐져 있었고, 그 뒤에 곽행여·라립언 등이 군사를 매복해 있었다. 그러나 막 사이로 병사가 보이면서 사태를 눈치챈 구사량 등은 문종을 옹립하여 도망했고, 환관에게 둘러싸인 문종은 이훈·정주 등을 역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훈 등은 요참으로 처형되었다.

3. 전개 과정

835년12월 14일(대화 9년 11월 21일 (음력)), 당나라 좌금오위대장군 한약이 조회에서 "좌금오위 관청 뒷마당의 석류나무에 어젯밤 감로가 내렸다"고 상주했고, 관례에 따라 대부분의 환관이 확인하러 갔다.[2]

이때 좌금오위 뒷마당에는 막이 쳐져 있었고, 그 뒤에 곽행여·라립언 등이 군사를 매복해 있었다. 그러나 막 사이로 병사가 보이면서 사태를 눈치챈 구사량 등은 문종을 옹립하여 도망했다. 환관에게 둘러싸인 문종은 이훈·정주 등을 역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요참으로 처형되었다.[2]

이 사건 이후 환관은 문종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권력을 행사했고, 실의에 빠진 문종은 "짐은 가노(환관)에게 제압당하고 있다"고 탄식하며 4년 후에 병사했다.[2]

3. 1. 초기 계획

당나라 문종은 즉위 초부터 자신을 옹립한 환관인 왕수징에게 권력을 잡혀 그 횡포를 미워했다. 문종의 뜻을 받은 예부시랑인 이훈과 태복시경정주구사량이라는 환관을 왕수징과 대립시켜 두 사람을 항쟁하게 하여 공멸시킨다는 모의를 헌책했다. 이 사전 준비로 정주는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절도사(봉상 절도사)가 되었다.

이 계책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왕수징은 실권을 빼앗기고 억울한 죄로 주살되었다. 이후, 왕수징의 장례식에 참례한 구사량 및 주요 환관 세력을 정주가 봉상에서 군사를 이끌고 숙청할 예정이었지만, 공적을 독점하려는 이훈은 정주가 출병하기 전 왕수징의 장례식 전에 환관을 한자리에 모이게 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상서로 감로가 내렸다"는 것을 이유로 환관들을 모으려고 했다. 이는 상서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환관 전원이 확인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대화 9년 11월 21일 (835년12월 14일) 좌금오위대장군 한약이 조회에서 "좌금오위 관청(좌금오위) 뒷마당의 석류나무에 어젯밤 감로가 내렸다"고 상주했고, 관례에 따라 대부분의 환관이 확인하러 갔다.[2]

3. 2. 감로 사건

835년 12월 14일,[1] 문종은 조정 대신들과 함께 자진전(紫宸殿)에서 조회를 열고 있었다. 좌금오군(左金吾)의 장군인 한약은 좌금오군과 우금오군의 장군이 관례적으로 보고해야 할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 대신, 전날 밤 좌금오군 사령부 밖의 석류나무에 감로(甘露, )가 내렸다고 보고했다. 그는 문종에게 엎드렸고, 재상들은 즉시 다른 관리들을 이끌고 황제에게 축하를 드렸다(감로는 신의 총애의 징표로 여겨졌기 때문). 이순과 서원여는 문종이 직접 감로를 관찰하여 하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제안했다. 문종은 동의했고, 관리들은 좌금오군 사령부 근처에 있는 함원전(含元殿)으로 향했다. 문종 자신은 가마를 타고 함원전으로 갔다.[2]

황제와 관리들이 함원전에 도착하자, 문종은 재상들과 시험원(門下省, 문하성)과 입법원(中書省, 중서성)의 관리들에게 좌금오군 사령부에서 감로를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이 그렇게 한 후, 이순이 돌아와 "저희가 조사를 해 본 결과, 그것은 진짜 감로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을 즉시 발표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은 너무 빨리 황제 폐하께 축하를 드리는 꼴이 될 것입니다."라고 발표했다. 문종은 놀라움을 표하며, 구사량과 다른 신책군 사령관 어홍지(魚弘志)에게 다른 환관들을 이끌고 감로를 조사하도록 명령했다.[2]

환관들이 함원전을 떠난 후, 이순은 즉시 곽행유와 왕만을 함원전으로 불러 "조서를 받을 준비를 하시오."라고 말했다. 왕만은 두려워 문종 앞에 나아가지 못했지만, 곽행유는 나아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한편, 왕만과 곽행유는 수백 명의 병사를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병사들이 함원전 밖에 있는 단봉문(丹鳳門) 밖에 서 있었다. 이순은 그들을 단봉문 안으로 불러 조서를 받게 했지만, 왕만의 병사들만 들어갔고 곽행유의 병사들은 들어가지 않았다.[2]

한편, 구사와 다른 환관들은 좌금오군 사령부에 있었다. 그러나 한약은 두려움에 떨며 초조해하고 땀을 흘렸다. 구사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스크린이 날아갔고, 구사는 무장한 많은 병사들을 보고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구사와 다른 환관들은 놀라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좌금오군 사령부의 경비병들은 그들을 가두기 위해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구사가 그들에게 소리치자 그들은 놀라 문을 닫을 수 없었다. 구사와 다른 환관들은 함원전으로 달려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문종에게 보고할 준비를 했다.[2]

이순은 환관들이 함원전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금오위에게 황제를 보호하라고 소리치며 그들에게 상을 약속했다. 그러나 환관들은 비상사태라며 황제가 즉시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문종의 가마를 붙잡아 그를 태우고 함원전 뒤에 쳐진 밧줄 가리개를 뚫고 북쪽으로 달려 궁으로 향했다. 이순은 가마를 쫓아가 붙잡고 "아직 보고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궁으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라고 외쳤다.[2]

이때 금오위는 함원전에 있었고, 낙이연 휘하의 경조부 관원들과 이소본 휘하의 어사대 감찰관들이 환관들을 공격했다. 10명 이상의 환관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지만, 이 공격으로 환관들이 선정문()을 통해 문종의 가마를 궁 안으로 들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여전히 가마를 붙잡고 있던 이순은 문종에게 멈추라고 촉구했지만, 문종은 그에게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라고 소리쳤다. 환관 치지롱()은 이순의 가슴을 때렸고, 이순은 땅에 쓰러졌다. 가마는 이내 선정문으로 들어갔고, 문이 닫혔다. 환관들은 환호했다. 함원전에 정렬해 있던 관리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도망쳤다. 이순은 실패했음을 알고 자신의 직원들이 입는 녹색 제복을 입고 말에 올라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유배를 가는가?"라고 큰 소리로 길에서 외치며 도망쳤다. 길에 있던 누구도 그를 이순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서원유는 다른 재상들인 왕아와 가수와 함께 재상 사무실로 돌아갔고, 곧 문종이 그들을 불러 사후 처리를 논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부하 관리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자, 그들은 부하들에게 계속 일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2]

3. 3. 실패와 관료들의 처형

이순은 환관들이 함원전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금오위에게 황제를 보호하라고 소리치며 상을 약속했다. 그러나 환관들은 비상사태라며 황제가 즉시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문종의 가마를 붙잡아 태우고 함원전 뒤 밧줄 가리개를 뚫고 북쪽으로 달려 궁으로 향했다. 이순은 가마를 쫓아가 붙잡고 "아직 보고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궁으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라고 외쳤다.[2]

이때 금오위는 함원전에 있었고, 낙이연 휘하 경조부 관원들과 이소본 휘하 어사대 감찰관들이 환관들을 공격했다. 환관 10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지만, 이 공격으로 환관들이 선정문()을 통해 문종의 가마를 궁 안으로 들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전히 가마를 붙잡고 있던 이순은 문종에게 멈추라고 촉구했지만, 문종은 그에게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라고 소리쳤다. 환관 치지롱()은 이순의 가슴을 때렸고, 이순은 땅에 쓰러졌다. 가마는 이내 선정문으로 들어갔고, 문이 닫혔다. 환관들은 환호했다.[2]

함원전에 정렬해 있던 관리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도망쳤다. 이순은 실패했음을 알고 직원들이 입는 녹색 제복을 입고 말에 올라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유배를 가는가?"라고 큰 소리로 길에서 외치며 도망쳤다. 길에 있던 누구도 그를 이순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서원유는 왕아, 가수와 함께 재상 사무실로 돌아갔고, 곧 문종이 그들을 불러 사후 처리를 논의할 것이라고 믿었다. 부하 관리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자, 그들은 부하들에게 계속 일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2]

이 무렵, 구사량과 다른 환관들은 문종이 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면전에서 황제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문종은 너무 두려워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편, 구사량과 환관들은 신책군 장교 유태륜과 위중경에게 각각 병사 500명을 주어 칼을 들고 이선과 정주의 동료로 여겨지는 자들을 공격하게 했다.[2]

그때, 왕아 등 재상들은 정기적인 점심 회의를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직원이 "병사들이 궁궐에서 나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있습니다!"라고 알렸다. 재상들은 급히 말을 탈 수 없어 도보로 도망쳤다. 입법 및 시험 부서 관리들과 금오군 병사들은 1,000명이 넘었는데, 도망치려 했지만 재상 사무실 입구에서 병목 현상이 발생했고, 결국 문이 닫히면서 600명 정도가 갇혔고, 신책군 병사들이 그들을 학살했다. 구사량과 환관들은 신책군 병사들을 보내 황성의 모든 문을 닫고 여러 정부 사무실에 들어가 관리들을 공격하게 했다. 관리들과 경비병, 그리고 사무실에 우연히 있던 민간인들까지 1,000명 이상이 학살되었다. 정부 소유 파일, 인장, 책, 기타 장비가 이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환관들은 황성 밖으로 기병들을 보내 도망친 사람들을 체포하려 했다.[2]

수원유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안화문 밖으로 도망치려다 체포되었다. 70대였던 왕아는 영창리의 찻집으로 걸어가 그곳에서 체포되었다. 병사들은 왕아를 좌신책군 사령부로 데려가 고문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왕아는 그와 이선이 문종을 폐위하고 정주를 새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고 거짓 자백했다. 왕번은 장흥리에 있는 저택으로 도망쳐 하동 절도사 병사들에게 저택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신책군 장교들이 도착하자, "왕아가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황제께서 당신이 재상을 맡아달라고 하시고, 유 사령관이 문안을 전하라고 했습니다."라고 외쳤다. 왕번은 그들을 믿고 저택 밖으로 나왔고, 장교들은 가짜 축하를 시작했다. 그제야 왕번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책군 병사들은 태평리에서 나려연을 체포하고, 왕아의 친척과 하인들을 모두 체포하여 투옥했다. 이선의 사촌 이원고는 살해당했다.[2]

신책군 병사들은 이선의 동료와 재상들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부유한 가정을 약탈했다. 과거 광동성 광저우시에 본부를 둔 영남 절도사였던 호증은 매우 부유했기 때문에, 신책군 병사들은 가숙을 찾기 위해 그의 저택에 들어가 아들 호인을 살해했다. 비슷한 약탈은 관리 나양, 헌회, 이직의 가문에서도 일어났다. 많은 거리 불량배들도 이 기회를 이용해 복수와 약탈을 했다.[2]

12월 15일 아침[1], 생존한 관료들이 자신전()에서 열리는 정기적인 조회를 위해 입궐하려 했으나, 건복문()은 해가 뜰 때까지 열리지 않았고, 문을 지키던 신책군 병사들은 각 관료에게 수행원 1명만 데리고 들어오도록 허가했다. 재상이나 어사들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조회에 참석해야 할 다른 많은 직위도 비어 있었다. 문종이 재상들이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 묻자, 구사량은 "왕아 등은 반역을 저질렀고, 체포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구사량은 왕아의 자백서를 문종에게 보여주고, 집행부() 수장인 영호초와 정담에게 보여주었다. 문종은 왕아의 자백서를 읽고 슬픔과 분노를 느껴 영호와 정에게 이것이 왕아의 필적이 맞는지 물었다. 영호와 정이 맞다고 확인하자 문종은 "그들의 죄는 사형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영호와 정에게 재상들의 직무를 대신하여 그곳의 문제를 처리하고, 영호에게 발생한 일을 설명하는 조서를 작성하도록 명령했다(왕아 및 다른 재상들의 죄를 선언). 그러나 영호는 그렇게 했지만, 왕아와 가수의 반역 혐의를 묘사할 때 조서를 무미건조한 어조로 작성하여 구사량의 분노를 샀다. 그 결과, 정은 재상이 되었지만, 영호는 그렇지 못했다.[2]

거리에서는 약탈이 계속되었다. 환관들은 신책군 장교 양진()과 진수량()에게 각각 병사 500명을 이끌고 장안의 주요 거리를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병사들은 꽹과리를 쳐서 불량배들에게 경고했고, 불량배 10명 정도를 죽인 후 상황이 진정되었다.[2]

가는 평민 옷으로 갈아입고 사람 속에 숨었지만, 하룻밤이 지나자 도망갈 방법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나귀를 타고 흥안문()으로 가서 흥안문 경비병들에게 자신이 가라고 알리고 신책군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경비병들은 그를 좌신책군에게 넘겼다. 이소본은 녹색 제복(이허가 그랬던 것처럼)으로 갈아입었지만 금색 허리띠를 계속 착용했다. 그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말을 타고 풍상으로 도망가려 했다. 그는 함양(, 현재 시안) 서쪽에서 신책군 병사들에게 붙잡혔다.[2]

12월 16일[1], 정담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2]

이순은 불교 승려 종밀과 친분이 있어 종밀에게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종남산()으로 도망쳤다. 종밀은 이순에게 삭발을 시켜 승려로 변장시키려 했지만, 종밀의 추종자들은 이순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간청했다. 이순은 종남산을 나와 풍상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주지(, 현재 시안)의 방어사 송초()에게 붙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이순의 호송대가 곤명지()에 도착했을 때, 이순은 환관들이 고문하고 모욕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호송하는 장교에게 머리를 베어 신책군 병사들이 자신을 붙잡아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장교는 동의하여 이순의 머리를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2]

12월 17일[1], 경조윤으로 나뤄연에게 밀려났던 이사가 재상 겸 재정 담당자로 임명되었다.[2]

같은 날, 재상들과 이순의 주요 관련자들에 대한 처형을 위한 대규모 행렬이 열렸다. 좌신책군 소속 병사 300명이 이순의 머리를 높이 쳐들고 왕아, 왕번, 나뤄, 과행우를 호송했다. 우신책군 소속 병사 300명이 가, 서원유, 이소본을 호송했다. 관료들은 황실 사당과 토지 신사에 끌려가 희생 동물처럼 묘사되었다. 그들은 장안의 동시와 서시에서 행진했다. 황실 관료들이 처형을 감독하라는 명령을 받고, 허리를 잘라 죽임을 당했고, 머리는 잘려 흥안문 밖에 걸렸다. 친척들은 아무리 먼 친척이라도 아이들을 포함하여 처형되었고, 어떻게든 죽음을 면한 사람들은 정부 노예가 되었다. 이 며칠 동안 문종의 이름으로 내려진 결정 중 실제로는 문종 자신이 내린 결정(또는 알았던) 것은 없었다고 한다. 구사량과 우홍지가 이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2]

12월 18일[1], 구시용이 체포되었는데, 그는 육순을 순찰하도록 보낸 여섯 명의 환관에게 자살을 강요하라는 조서를 작성했지만, 조서를 받은 여섯 개 순찰구에서 무시되었다.[2]

3. 4. 환관의 권력 장악

이 무렵, 구사량(邱士良)과 다른 환관들은 문종이 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알고, 면전에서 황제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문종은 너무 두려워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2] 한편, 구사량 등은 신책군(神策軍) 장교 유태륜(劉泰倫)과 위중경(魏仲卿)에게 각각 500명의 병사를 주어 칼을 들고 이훈(李訓)과 정주(鄭注)의 동료로 여겨지는 자들을 공격하게 했다.[2]

그때, 왕애(王涯) 등 재상들은 정기적인 점심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 직원이 "병사들이 궁궐에서 나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있습니다!"라고 알렸다. 재상들은 급히 말을 탈 수 없어 도보로 도망쳤다. 입법 및 시험 부서의 관리들과 금오군(金吾軍) 병사들은 1,000명이 넘었는데, 도망치려 했지만 재상 사무실 입구에서 병목 현상이 발생했고, 결국 문이 닫히면서 그 중 600명 정도가 갇혀 신책군 병사들에게 학살당했다. 구사량 등은 신책군 병사들을 보내 황성의 모든 문을 닫고 여러 정부 사무실에 들어가 관리들을 공격하게 했다. 관리들과 그들의 경비병, 그리고 사무실에 우연히 있던 민간인들까지 1,000명 이상이 학살되었다. 정부 소유의 다양한 파일, 인장, 책, 기타 장비도 파괴되었다. 환관들은 황성 밖으로 기병들을 보내 도망친 사람들을 체포하려 했다.[2]

서원유(舒元裕)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안화문(安化門) 밖으로 도망치려다 체포되었다. 70대였던 왕애는 영창리(永昌里)의 찻집으로 걸어가 그곳에서 체포되었다. 병사들은 왕애를 좌신책군 사령부로 데려가 고문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왕애는 이훈과 자신이 문종을 폐위하고 정주를 새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고 거짓 자백했다. 왕번(王璠)은 장흥리(長興里)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도망쳐 하동(河東) 절도사의 병사들에게 저택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신책군 장교들이 도착하자, "왕애가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황제께서 당신이 재상을 맡아달라고 하시고, 유 사령관이 문안을 전하라고 했습니다."라고 외쳤다. 왕번은 그들을 믿고 저택 밖으로 나왔고, 장교들은 가짜 축하를 시작했다. 그제야 왕번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책군 병사들은 태평리(太平里)에서 나려연(羅扆衍)을 체포하고, 왕애의 친척과 하인들을 모두 체포하여 투옥했다. 이훈의 사촌 이원고(李元臯)는 살해당했다.[2]

한편, 신책군 병사들은 이훈의 동료와 재상들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부유한 가정을 약탈했다. 과거 광동성 광저우시에 본부를 둔 영남 절도사였던 호증(胡證)은 매우 부유했기 때문에, 신책군 병사들은 가숙(賈肅)을 찾기 위해 그의 저택에 들어가 아들 호인(胡溵)을 살해했다. 비슷한 약탈은 관리 나양(羅讓), 헌회(渾鐬), 이직(黎埴)의 가문에서도 일어났다. 많은 거리 불량배들도 이 기회를 이용해 복수와 약탈을 했다.[2]

대화 9년 12월 15일 아침[1], 생존한 관료들이 자신전(紫宸殿)에서 열리는 정기적인 조회를 위해 입궐하려 했으나, 건복문(建福門)은 해가 뜰 때까지 열리지 않았고, 문을 지키던 신책군 병사들은 각 관료에게 수행원 1명만 데리고 들어오도록 허가했다. 재상이나 어사들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조회에 참석해야 할 다른 많은 직위도 비어 있었다. 문종이 재상들이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 묻자, 구사량은 "왕애(王涯) 등은 반역을 저질렀고, 체포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구사량은 왕애의 자백서를 문종에게 보여주고, 영호초와 정담에게도 보여주었다. 문종은 왕애의 자백서를 읽고 슬픔과 분노를 느껴 영호와 정에게 이것이 왕애의 필적이 맞는지 물었다. 영호와 정이 맞다고 확인하자 문종은 "그들의 죄는 사형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영호와 정에게 재상들의 직무를 대신하여 그곳의 문제를 처리하고, 영호에게 발생한 일을 설명하는 조서를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영호는 조서를 무미건조한 어조로 작성하여 구사량의 분노를 샀다. 그 결과, 정담은 재상이 되었지만, 영호는 그렇지 못했다.[2]

한편, 거리에서는 약탈이 계속되었다. 환관들은 신책군 장교 양진(楊鎮)과 진수량(靳遂良)에게 각각 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장안의 주요 거리를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병사들은 꽹과리를 쳐서 불량배들에게 경고했고, 약 10명의 불량배를 죽인 후 상황이 진정되었다.[2]

가는 평민 옷으로 갈아입고 사람 속에 숨었지만, 하룻밤이 지나자 도망갈 방법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나귀를 타고 흥안문(興安門)으로 가서 경비병들에게 자신이 가라고 알리고 신책군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경비병들은 그를 좌신책군에게 넘겼다. 이소본은 녹색 제복(이허가 그랬던 것처럼)으로 갈아입었지만 금색 허리띠를 계속 착용했다. 그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말을 타고 풍상(鳳翔)으로 도망가려 했다. 그는 함양(咸陽, 현재의 시안) 서쪽에서 신책군 병사들에게 붙잡혔다.[2]

대화 9년 12월 16일[1], 정담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2]

이훈은 불교 승려 종밀과 친분이 있어 종밀에게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종남산(終南山)으로 도망쳤다. 종밀은 이훈에게 삭발을 시켜 승려로 변장시키려 했지만, 종밀의 추종자들은 이훈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간청했다. 이훈은 종남산을 나와 풍상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주지(盩厔, 현재 시안)의 방어사 송초(宋楚)에게 붙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이훈의 호송대가 곤명지(昆明池)에 도착했을 때, 이훈은 환관들이 고문하고 모욕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호송하는 장교에게 자신의 머리를 베어 신책군 병사들이 자신을 붙잡아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장교는 동의하여 이훈의 머리를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2]

대화 9년 12월 17일[1], 경조윤으로 나뤄연에게 밀려났던 이사가 재상 겸 재정 담당자로 임명되었다.[2]

같은 날, 재상들과 이훈의 주요 관련자들에 대한 처형을 위한 대규모 행렬이 열렸다. 좌신책군 소속 병사 300명이 이훈의 머리를 높이 쳐들고 왕애, 왕번, 나뤄, 과행우를 호송했다. 우신책군 소속 병사 300명이 가, 서원유, 이소본을 호송했다. 관료들은 황실 사당과 토지 신사에 끌려가 희생 동물처럼 묘사되었다. 그들은 장안의 동시와 서시에서 행진했다. 황실 관료들이 처형을 감독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들은 허리를 잘라 죽임을 당했고, 머리는 잘려 흥안문 밖에 걸렸다. 그들의 친척들은 아무리 먼 친척이라도 아이들을 포함하여 처형되었고, 어떻게든 죽음을 면한 사람들은 정부 노예가 되었다. 이 며칠 동안 문종의 이름으로 내려진 결정 중 실제로는 문종 자신이 내린 결정(또는 알았던) 것은 없었다고 한다. 구사량과 우홍지가 이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2]

대화 9년 12월 18일[1], 구시용이 체포되었는데, 그는 육순을 순찰하도록 보낸 여섯 명의 환관에게 자살을 강요하라는 조서를 작성했지만, 조서를 받은 여섯 개 순찰구에서 무시되었다.[2]

정주는 이훈의 행동을 알지 못하고 원래 계획대로 행동하여 경비병들을 데리고 풍상을 떠났다. 그가 부풍(扶風, 현재 보계시)에 도착했을 때, 부풍현의 현령 한료(韓遼)는 정의 계획을 알고 물품 공급을 거부하고 무공(武功, 현재 함양)으로 도망쳤다. 정은 이훈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풍상으로 돌아갔다.[2] 그의 부하 위홍절(魏弘節)은 풍상의 환관 감찰관 장중경(張仲卿)과 여러 장교를 죽이라고 제안했지만, 정은 두려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5] 구사량은 문종의 이름으로 장에게 정을 공격하라는 조서를 전달했다. 장은 처음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지만, 장교 이숙화(李叔和)의 제안에 따라 정을 연회에 초대했다. 이숙화는 정의 경비병들에게 음식과 술을 제공한 다음, 연회에서 정이 정신을 팔고 있을 때 그를 죽이고 목을 베었다. 그는 정의 경비병, 정의 가족, 그리고 많은 정의 참모들을 학살했다. 장은 이숙화에게 정의 머리를 장안으로 가져가도록 했고, 이숙화는 대화 9년 12월 20일[1] 도착했다. 대화 9년 12월 19일[1], 환관들은 정의 공격에 대비하여 병력을 준비해 장안 시민들에게 큰 공포를 안겨주었다. 정의 머리가 흥안문에 걸린 후에야 백성들이 다소 진정되었다고 한다. 대화 9년 12월 20일 한악이 체포되었고, 대화 9년 12월 21일[1], 한악이 처형되었다.[2]

4. 결과 및 영향

12월 15일 아침, 생존한 관료들이 당나라 장안의 자신전(紫宸殿)에서 열리는 정기적인 조회에 참석하려 했으나, 건복문(建福門)은 해가 뜰 때까지 열리지 않았다. 신책군 병사들은 각 관료에게 수행원 1명만 데리고 들어오도록 허가했다. 재상이나 어사들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다른 많은 직위도 비어 있었다. 문종 황제가 재상들이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 묻자, 구사량(邱士良)은 왕아 등이 반역을 저질렀고 체포되었다고 대답했다. 구사량은 왕아의 자백서를 문종 황제에게 보여주고, 다시 집행부(尙書省, 상서성)의 수장인 영호초와 정담에게 보여주었다. 문종 황제는 왕아의 자백서를 읽고 슬픔과 분노를 느껴 영호초와 정담에게 이것이 왕아의 필적이 맞는지 물었다. 영호초와 정담이 맞다고 확인하자 문종 황제는 "그들의 죄는 사형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영호초와 정담에게 재상들의 직무를 대신하여 그곳의 문제를 처리하고, 영호초에게 발생한 일을 설명하는 조서를 작성하도록 명령했다(즉, 왕아 및 다른 재상들의 죄를 선언). 그러나 영호초는 그렇게 했지만, 왕아와 가수의 반역 혐의를 묘사할 때 조서를 무미건조한 어조로 작성하여 구사량의 분노를 샀다. 그 결과, 결국 정담은 재상이 되었지만, 영호초는 그렇지 못했다.[2]

한편, 거리에서는 약탈이 계속되었다. 환관들은 신책군 장교 양진(楊鎮)과 진수량(靳遂良)에게 각각 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장안의 주요 거리를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병사들은 꽹과리를 쳐서 불량배들에게 경고했고, 약 10명의 불량배를 죽인 후 상황이 진정되었다.[2]

가수는 평민 옷으로 갈아입고 사람 속에 숨었지만, 하룻밤이 지나자 도망갈 방법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나귀를 타고 흥안문(興安門)으로 가서 흥안문 경비병들에게 자신이 가수라고 알리고 신책군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경비병들은 그를 좌신책군에게 넘겼다. 한편, 이소본은 녹색 제복(이허가 그랬던 것처럼)으로 갈아입었지만 금색 허리띠를 계속 착용했다. 그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말을 타고 풍상(鳳翔)으로 도망가려 했다. 그는 함양(咸陽, 현재의 시안) 서쪽에서 신책군 병사들에게 붙잡혔다.[2]

12월 16일, 정담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2]

한편, 이순은 불교 승려 종밀과 친분이 있어 종밀에게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종남산(終南山)으로 도망쳤다. 종밀은 이순에게 삭발을 시켜 승려로 변장시키려 했지만, 종밀의 추종자들은 이순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간청했다. 이순은 종남산을 나와 풍상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주지(盩厔, 현재 시안)의 방어사 송초(宋楚)에게 붙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이순의 호송대가 곤명지(昆明池)에 도착했을 때, 이순은 환관들이 고문하고 모욕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호송하는 장교에게 자신의 머리를 베어 신책군 병사들이 자신을 붙잡아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장교는 동의하여 이순의 머리를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2]

12월 17일, 이사가 재상 겸 재정 담당자로 임명되었다.[2]

같은 날, 재상들과 이순의 주요 관련자들에 대한 처형을 위한 대규모 행렬이 열렸다. 좌신책군 소속 병사 300명이 이순의 머리를 높이 쳐들고 왕아, 왕번, 나뤄, 과행우를 호송했다. 우신책군 소속 병사 300명이 가수, 서원유, 이소본을 호송했다. 관료들은 황실 사당과 토지 신사에 끌려가 희생 동물처럼 묘사되었다. 그들은 장안의 동시와 서시에서 행진했다. 황실 관료들이 처형을 감독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들은 허리를 잘라 죽임을 당했고, 머리는 잘려 흥안문 밖에 걸렸다. 그들의 친척들은 아무리 먼 친척이라도 아이들을 포함하여 처형되었고, 어떻게든 죽음을 면한 사람들은 정부 노예가 되었다. 이 며칠 동안 문종 황제의 이름으로 내려진 결정 중 실제로는 문종 자신이 내린 결정(또는 알았던) 것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구사량과 우홍지가 이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2]

12월 18일, 구시용이 체포되었는데, 그는 육순을 순찰하도록 보낸 여섯 명의 환관에게 자살을 강요하라는 조서를 작성했지만, 조서를 받은 여섯 개 순찰구에서 무시되었다.[2]

한편, 정주는 이순의 행동을 알지 못하고 원래 계획대로 행동하여 그의 경비병들을 데리고 풍상을 떠났다. 그가 부풍(扶風, 현재 보계시)에 도착했을 때, 부풍현의 현령 한료(韓遼)는 정주의 계획을 알고 그에게 물품 공급을 거부하고 무공(武功, 현재 함양)으로 도망쳤다. 정주는 이순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풍상으로 돌아갔다.[2] 그의 부하 위홍절(魏弘節)은 그에게 풍상의 환관 감찰관 장중경(張仲卿)과 여러 장교를 죽이라고 제안했지만, 정주는 두려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5] 동시에 구사량문종 황제의 이름으로 장중경에게 정주를 공격하라는 조서를 전달했다. 장중경 역시 처음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지만, 장교 이숙화(李叔和)의 제안에 따라 정주를 연회에 초대했다. 이숙화는 정주의 경비병들에게 음식과 술을 제공한 다음, 연회에서 정주가 정신을 팔고 있을 때 그를 죽이고 목을 베었다. 그는 정주의 경비병, 정주의 가족, 그리고 많은 정주의 참모들을 학살했다. 장중경은 이숙화에게 정주의 머리를 장안으로 가져가도록 했고, 이숙화는 12월 20일 도착했다. 12월 19일, 환관들은 정주의 공격에 대비하여 병력을 준비해 장안 시민들에게 큰 공포를 안겨주었다. 정주의 머리가 흥안문에 걸린 후에야 백성들이 다소 진정되었다고 한다. 또한 12월 20일 한악이 체포되었고, 12월 21일, 한악이 처형되었다.[2]

4. 1. 환관 전횡 시대

사건 이후, 추사량과 유홍지를 위시한 환관들은 한동안 정계를 완전히 장악했다. 자살을 강요당할 뻔했던 여섯 명의 환관들이 장안으로 돌아오자, 전원초는 관료들을 도륙할 준비가 되었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장안에는 또 다른 대규모 공포가 조성되었다. 이사 및 진군상 장군만이 침착함을 유지한 후에야 백성들이 진정되었다.[2]

836년 봄, 산서성 장치시에 본거지를 둔 조의절도사 유총건은 환관들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재상들은 무죄이며 환관들이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환관들은 처음에는 유총건에게 높은 명예를 하사하여 회유하려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들을, 특히 추사량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유총건의 탄핵 이후에야 환관들이 다소 불안해하며 문종 황제, 이사, 정담에게 어느 정도의 통치 권한을 허용하게 되었다고 한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로의 변 이후, 당나라 역사상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환관들이 정부를 굳건히 장악하며 황제의 계승을 결정했다고 전해진다.[3]

4. 2. 유총건의 상소와 환관 세력의 동요

836년 봄, 산서성 장치시에 본거지를 둔 조의절도사 유총건은 환관들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재상들은 무죄이며 환관들이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2] 환관들은 처음에는 유총건에게 높은 명예를 하사하여 회유하려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들과 추사량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유총건의 탄핵 이후에야 환관들이 다소 불안해하며 문종, 이사, 정담에게 어느 정도의 통치 권한을 허용하게 되었다고 한다.[2]

5. 평가

(이전 출력이 비어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요약 정보가 제공되어야 평가 섹션을 작성하고 수정할 수 있습니다.)

참조

[1]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db1x.sinica.e[...]
[2] 서적 Zizhi Tongjian
[3]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4] 논문 The Li Hsün Faction and the Sweet Dew Incident of 835 https://muse.jhu.edu[...] 1989
[5] 서적 New Book of T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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