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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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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봉상부는 중국의 역사적 행정 구역으로, 당나라 시기부터 중화민국 초기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다. 당나라 시기에는 기주, 부풍군으로 불리다가 757년 봉상부로 개칭되어 당나라 5경 중 하나가 되었으며, 관내도에 속했다. 이후 송, 금, 원, 명, 청나라 시대를 거치며 각 왕조의 행정 구역으로 편제되었고, 1913년 중화민국에 의해 폐지되었다.

2. 역사

수나라 시대의 부풍군은 618년 (당 고조 무덕 원년) 당나라에 의해 기주(岐州)로 개칭되었다. 이후 742년 (당 현종 천보 원년)에는 군현제 실시에 따라 다시 부풍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757년 (지덕 2년) 12월, 부풍군은 서경 봉상부(西京 鳳翔府)로 승격되어 관내도에 속하게 되었으며, 성도, 경조부, 하남부, 태원부와 함께 당나라의 5경 중 하나가 되었다.[9][10][1]

북송 시대에는 진봉로에 속했으며[2], 1130년 (천회 8년) 금나라에 점령되어 봉상로에 속하게 되었다[3][4]. 1231년 (정대 8년) 몽골 제국에 점령된 후[5], 원나라 시대에는 섬서등처행중서성에 속했다[6].

시대에는 산시성에 속했으며, 관할 구역에 약간의 변동은 있었으나 대체로 비슷한 행정 체계를 유지했다[7][8]. 1913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봉상부는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2. 1. 당나라

618년(당 고조 무덕 원년), 수나라의 부풍군을 고쳐 기주(岐州)를 설치하고, 옹현, 진창현, 미현, 괵현, 기산현, 봉천현의 6개 현을 관할하게 했다. 또한 위천현과 부주의 인유현(麟遊縣), 보윤현(普潤縣) 3개 현이 기주에 편입되었다. 620년(무덕 3년)에는 기산현 일부를 나누어 위천현(圍川縣)을 설치했고, 621년(무덕 4년)에는 위천현을 직주로 이관했다. 624년에는 미현을 관할하던 순주(郇州)가 폐지되면서 미현이 기주로 편입되었다. 625년(무덕 7년)에는 기산현의 치소를 용미성(龍尾城)으로 옮겼다. 627년(당 태종 정관 원년)에는 직주가 폐지되면서 위천현이 다시 기주로 돌아왔고, 인주(麟州)가 폐지되면서 보윤현과 인유현이 기주에 편입되었다. 633년(정관 7년)에는 부풍현과 기산현 사이에 기양현(岐陽縣)이 신설되었다.

634년(정관 8년)에는 위천현의 이름을 부풍현(扶風縣)으로 바꾸고, 괵현과 봉천현을 폐지했다. 같은 해 기산현의 치소를 저역(豬驛) 남쪽으로 옮겼다가 다시 치산 현으로 옮겼고, 폐지되었던 괵현을 기산현에 통합했다. 647년(정관 21년)에 기양현이 폐지되었다가 654년(영휘 5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691년(무주 천수 2년)에는 폐지되었던 괵현이 다시 설치되었다.

742년(당 현종 천보 원년)에는 군현제 실시에 따라 기주가 부풍군(扶風郡)으로 개명되었다. 초기에 진창현(陳倉縣)은 봉상현(鳳翔縣)으로 불렸으나, 곧 보계현(寶鷄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757년(지덕 2년) 2월 15일, 진창현은 봉상현으로 개명되었다가 3일 뒤인 2월 18일에 다시 보계현으로 개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부풍군은 서경 봉상부(西京 鳳翔府)로 승격되어 성도, 경조부, 하남부, 태원부와 함께 당나라의 5경 중 하나가 되었다.[9][10] 이때 천흥현(天興縣)이 신설되었고, 옛 옹현(雍縣)은 봉상현(鳳翔縣)으로 개명되어 천흥현과 치소를 공유했다. 그러나 762년(보응 원년)에 봉상현(옛 옹현)은 천흥현에 통폐합되었다.

당나라 시대 봉상부는 관내도에 속했으며, 천흥, 부풍, 기산, 미, , 보계, 린유, 보윤, 주질의 9개 현을 관할했다.[1]

봉상부 속현 (당나라)
현명한자대략적 위치비고
천흥현天興縣바오지시 펑샹 현봉상부의 치소가 있던 곳이다. 757년(지덕 2년), 당 숙종이 천흥현(天興縣)을 신설하고 옹현을 봉상현(鳳翔縣)으로 개명하여 치소를 공유했으나, 762년(보응 원년) 봉상현을 천흥현에 통폐합했다. 현 서쪽 43리 거리에 걸복건귀가 쌓은 건귀고성(乾歸故城)이 있었다.
부풍현扶風縣바오지시 푸펑현620년(당 고조 무덕 3년) 기산현을 나누어 위천현(圍川縣)을 설치했고, 621년(당 고조 무덕 4년) 직주로 이관되었다. 627년(당 태종 정관 원년) 직주가 폐지되면서 기주로 내속되었다. 634년 위천현에서 부풍현으로 개명되었다.
보계현寶鷄縣바오지시원래 진창현(陳倉縣)이었다. 757년 2월 15일 봉상현으로 개명되었다가 3일 뒤 보계현으로 최종 개명되었다.
기양현岐陽縣바오지시 치산현 동 포촌진 일대633년(당 태종 정관 7년) 부풍현과 기산현 사이에서 신설되었다. 647년(당 태종 정관 21년) 폐지되었다가 654년(영휘 5년) 복구되었다.
기산현岐山縣바오지시 치산현618년 장보(張堡)로 치소를 옮겼다. 625년(당 고조 무덕 7년) 치소를 용미성(龍尾城)으로 옮겼다. 634년 치소를 저역(豬驛) 남쪽으로 옮겼다가 바로 치산 현으로 옮겼고, 폐지된 괵현을 통폐합했다.
미현郿縣바오지시 메이현617년 수당교체기에 현 경계에 미성군(郿城郡)을 세우고 미현과 봉천현을 속현으로 삼았으나, 618년 군을 폐지하고 미현만 속현으로 가지는 순주(郇州)를 설치했다. 620년 순주를 폐지하고 직주에 소속되었다가 624년 기주로 이관되었다.
인유현麟游縣바오지시 린유현617년 인수궁(仁壽宮)에 봉서군(鳳棲郡)과 본현을 설치했다. 봉서군은 인유현, 상의현, 보윤현을 속현으로 두었는데, 618년 군명을 인유군으로 개명하고 영태현(靈台縣)과 안정군의 순고현(鶉觚縣)을 편입시켰다. 당나라 건국 후 인유군은 인주(麟州)로 개명했다. 627년 영태현을 인유현에 통폐합시키고 인주를 폐지하면서, 보윤현과 인유현은 기주로, 상의현은 옹주로, 순고현은 경주(涇州)로 각각 이관되었다. 당 태종은 인수궁을 구성궁(九城宮)으로 개명했다.
보윤현寶潤縣바오지시 펑샹 현 북부원래 인주에 속했으나 627년 기주로 내속되었다.
괵현虢縣바오지시 천창구634년 기산현에 통폐합되었다가 691년(무주 천수 2년) 복구되었다.


2. 2. 송나라

북송 시대 봉상부는 진봉로에 속했으며, 등급은 차급부였다. 군명은 당나라 때와 같이 부풍군을 사용했고, 민정은 봉상군절도(鳳翔軍節度)가 맡았다.[11][2]

순화 연간에는 숭신현이 의주(儀州)로 분리되어 나갔다. 1072년(북송 신종 희녕 5년)에는 건주가 폐지되면서 그곳에 속했던 호치현(好畤縣)이 봉상부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1118년(북송 휘종 정화 8년), 호치현은 다시 영흥군로 산하의 예주(醴州)로 이관되었다.[11]

숭녕 연간 봉상부의 인구는 143,374호, 322,378명이었다. 주요 공납품으로는 밀랍으로 만든 초, 개암, 돗자리 등이 있었다.[11]

봉상부는 아래의 9개 현과 1개 감(監)을 관할했다.[11][2]

현명한자대략적 위치 (현대 행정구역)현급비고
천흥현天興縣바오지시 펑샹 현次赤봉상부의 치소(治所)가 있던 곳이다.
기산현岐山縣바오지 시 치산 현次畿
부풍현扶風縣바오지 시 푸펑현次畿
주질현盩厔縣시안시 저우즈현次畿1107년(북송 휘종 대관 원년) 청평진(淸平鎭)이 군(軍)으로 분리되었다.
미현郿縣바오지 시 메이현次畿철야무(鐵冶務, 철 제련 및 관리 기관)가 있었다.
보계현寶鷄縣바오지 시次畿
괵현虢縣바오지 시 천창구次畿
인유현麟游縣바오지 시 린유현次畿
보윤현寶潤縣바오지 시 펑샹 현 북부次畿
사죽감司竹監알 수 없음-


2. 3. 금나라

1130년 (천회 8년), 금나라가 봉상부를 점령했다[3]. 봉상부는 봉상로에 속했으며, 처음에는 중급부였다. 1142년(금 휘종 황통 2년) 부로 승격되고 천흥군으로 개칭되었다. 1179년(금 세종 대정 19년) 군명을 봉상군으로 복구했으며, 1187년(금 세종 대정 27년)에는 총관부로 승격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궁궁이(芎藭), 독활(獨活), 등초(燈草), 무심초(無心草), 승마(升麻), 진교(秦艽), 골쇄보(骨碎補), 강활(羌活) 등이 생산되었다. 총 63,303호를 거느렸으며, 9개 현과 4개 진을 관할했다.[12][4]

관할 현 및 진
현명한자대략적 위치비고
봉상의鳳翔倚바오지시 펑샹 현두양산(杜陽山), 오악(吳岳), 옹수(雍水)가 있었다. 1179년 천흥현에서 개명되었다.
보계현寶鷄縣바오지시진창산(陳倉山), 위수(渭水), 대산관(大散關)이 있었다. 무성진(武城鎭)이 있었다.
괵현虢縣바오지시 천창구초산(楚山), 위수가 있었다. 양평진(陽平鎭)이 있었다.
미현郿縣바오지시 메이현태백산(太白山)과 위수가 있었다.
주질현盩厔縣시안시 저우즈현남으로 순마도(巡馬道)까지 20리이다. 1216년(금 선종 정우 4년) 항주(恆州)로 독립하여 미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종남산(終南山), 위수, 욕곡(浴穀)이 있다.
부풍현扶風縣바오지시 푸펑현점령 초기에 부흥현(扶興縣)으로 칭했다. 위수, 위수(湋水), 기양진(岐陽鎭)이 있었다.
기산현岐山縣바오지시 치산 현기산(岐山), 종남산, 위수, 강주(姜水), 마적진(馬跡鎭)이 있었다.
보윤현寶潤縣바오지시 펑샹 현 북부두수(杜水), 칠수(漆水), 기산이 있었다.
인유현麟游縣바오지시 린유현오장산(五將山)과 유토산(黝土山)이 있었다.



1231년 (정대 8년), 봉상부는 몽골 제국에 점령되었다[5].

2. 4. 원나라

1231년 (정대 8년), 봉상부는 몽골 제국에 점령되었다[5]. 원나라 시대에 봉상부는 섬서등처행중서성에 속했으며, 봉상, 부풍, 기산, 보계, 린유의 5개 현을 관할했다[6].

2. 5.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봉상부는 산시성에 속했다. 직속으로 봉상, 기산, 보계, 부풍, 미, 린유, 천양의 7개 현과 농주를 관할했다[7].

시대에도 봉상부는 여전히 산시성에 속했으며, 봉상, 기산, 보계, 부풍, 미, 린유, 천양, 농주의 1주 7현을 관할하여 명나라 때와 동일한 행정 구역을 유지했다[8].

2. 6. 중화민국

1913년, 중화민국에 의해 봉상부는 폐지되었다.

3. 지리

봉상부는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바오지시 일대에 위치했던 옛 행정 구역이었다. 그 역사는 수나라 시대의 부풍군에서 시작되었다.

618년 당나라가 건국되면서 부풍군은 기주(岐州)로 개칭되었고, 여러 현의 편입과 폐합을 거쳤다. 742년에는 다시 부풍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757년 안사의 난 중에 당 숙종이 이곳에서 즉위하면서 서경(西京) 봉상부로 승격되었고, 성도, 경조부, 하남부, 태원부와 함께 당나라 5경(五京) 중 하나로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다.[9][10] 당시 봉상부는 관내도에 속했고 9개 현을 관할했다.[1]

북송 시대에는 진봉로에 속했고, 군명은 당나라 때와 같이 부풍군을 사용했다. 관할 구역은 9개 현과 사죽감(司竹監)으로 조정되었으며, 밀랍으로 만든 초, 개암, 돗자리 등을 공물로 바쳤다.[11][2]

1130년 금나라가 점령한 이후에는 봉상로에 속했다.[3] 초기에는 천흥군(天興軍)으로 불리다가 봉상군(鳳翔軍)으로 복구되었고, 이후 총관부로 승격되기도 했다. 이 시기 봉상부에서는 궁궁이, 독활, 승마, 진교, 강활 등 다양한 약초가 생산되었다. 금나라 때는 9개 현과 4개 진(鎭)을 관할했다.[12][4]

1231년 몽골 제국에 점령되었고,[5] 원나라 시대에는 섬서등처행중서성에 속하여 관할 현이 5개로 축소되었다.[6]

명나라청나라 시대에는 산시성에 속했고, 1개 주(州)와 7개 현을 관할하는 체제가 유지되었다.[7][8]

봉상부라는 행정 구역은 1913년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3. 1. 주요 지명

618년(당 고조 무덕 원년) 주현제를 시행하면서 수나라 때의 부풍군을 기주(岐州)로 고쳤다. 이때 옹현(雍縣), 진창현(陳倉縣), 미현(郿縣), 괵현(虢縣), 기산현(岐山縣), 봉천현(奉天縣)의 6개 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이후 위천현(圍川縣)과 부주(鄜州)의 인유현(麟遊縣), 보윤현(普潤縣) 3개 현이 기주에 편입되었다. 634년(당 태종 정관 8년)에는 위천현을 부풍현(扶風縣)으로 개명하고, 괵현과 봉천현을 폐지했다. 742년(당 현종 천보 원년) 군현제를 다시 실시하면서 부풍군(扶風郡)으로 개명되었다. 초기에는 진창현을 봉상현(鳳翔縣)이라 불렀으나, 곧 보계현(寶鷄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757년 12월, 서경 봉상부(西京鳳翔府)로 승격되어 성도, 경조부, 하남부, 태원부와 함께 당나라의 5경 중 하나가 되었다.[9][10]

'''당나라 시대 봉상부 관할 현'''

현명한자대략적 위치비고
천흥현天興縣바오지시 펑샹 현봉상부의 치소(治所, 행정 중심지)가 있던 곳이다. 757년(지덕 2년), 당 숙종이 천흥현(天興縣)을 신설하고 옹현을 봉상현(鳳翔縣)으로 개명하여 치소를 공유했으나, 762년(보응 원년) 봉상현을 천흥현에 통폐합했다. 현 서쪽 43리 거리에 걸복건귀가 쌓은 건귀고성(乾歸故城)이 있었다.
부풍현扶風縣바오지시 푸펑현620년(당 고조 무덕 3년), 기산현을 나누어 위천현(圍川縣)을 설치했고, 621년(당 고조 무덕 4년) 직주(直州)로 이관되었다. 627년(당 태종 정관 원년) 직주가 폐지되면서 봉상부로 편입되었다.
보계현寶鷄縣바오지시757년 2월 15일 진창현에서 봉상현으로 개명되었다가 3일 뒤에 보계현으로 다시 개명되었다.
기양현岐陽縣바오지시 치산현 동쪽 포촌진(蒲村鎮) 일대633년(당 태종 정관 7년) 부풍현과 기산현 사이 지역에 신설되었다. 647년(당 태종 정관 21년) 폐지되었다가 654년(영휘 5년) 복구되었다.
기산현岐山縣바오지시 치산현618년 장보(張堡)로 치소를 옮겼다. 625년(당 고조 무덕 7년) 치소를 용미성(龍尾城)으로 옮겼다. 634년 치소를 저역(豬驛) 남쪽으로 옮겼다가 바로 기산현으로 옮기고 괵현을 통폐합했다.
미현郿縣바오지시 메이현617년 수당교체기에 현 경계에 미성군(郿城郡)을 세우고 미현과 봉천현을 속현으로 삼았으나, 618년 군을 폐지하고 미현만 속현으로 둔 순주(郇州)를 설치했다. 620년 순주를 폐지하고 직주에 소속시켰다가, 624년 기주로 이관되었다.
인유현麟游縣바오지시 린유현617년 인수궁(仁壽宮) 자리에 봉서군(鳳棲郡)과 함께 설치되었다. 봉서군은 인유현, 상의현(上宜縣), 보윤현을 속현으로 두었는데, 618년 군명을 인유군(麟游郡)으로 개명하고 영태현(靈台縣)과 안정군의 순고현(鶉觚縣)을 편입시켰다. 당나라 건국 후 인유군은 인주(麟州)로 개명했다. 627년 영태현을 인유현에 통폐합시키고 인주를 폐지했다. 이때 보윤현과 인유현은 기주로, 상의현은 옹주로, 순고현은 경주(涇州)로 각각 편입되었다. 당 태종은 인수궁을 구성궁(九成宮)으로 개명했다.
보윤현普潤縣바오지시 펑샹 현 북부본래 인주(麟州)에 속했으나 627년 봉상부로 편입되었다.
괵현虢縣바오지시 천창구634년 기산현에 통폐합되었다가 691년(무주 천수 2년) 복구되었다.



북송 시대에 봉상부는 진봉로(秦鳳路)에 속했으며, 차급부(次級府)로 군명은 당나라와 같은 부풍군이었다. 민정(民政)은 봉상군절도(鳳翔軍節度)가 맡았다. 순화 연간에 숭신현(崇信縣)이 의주(儀州)로 분리되었으나, 1072년(북송 신종 희녕 5년) 건주(乾州)를 폐지하고 호치현(好畤縣)을 봉상부로 편입시켰다. 1118년(북송 휘종 정화 8년) 호치현을 영흥군로(永興軍路)의 예주(醴州)로 이관했다. 숭녕 연간에는 143,374호 322,378명을 거느렸다. 밀랍으로 만든 초, 개암, 돗자리 등을 공납으로 바쳤다. 9개 현과 사죽감(司竹監)을 관할했다.[11]

'''북송 시대 봉상부 관할 현 및 감'''

현명/감명한자대략적 위치현급비고
천흥현天興縣바오지시 펑샹 현次赤
기산현岐山縣바오지시 치산현次畿
부풍현扶風縣바오지시 푸펑현次畿
주질현盩厔縣시안시 저우즈현次畿1107년(북송 휘종 대관 원년) 청평진(清平鎮)이 군으로 분리되었다.
미현郿縣바오지시 메이현次畿철야무(鐵冶務)가 있었다.
보계현寶鷄縣바오지시次畿
괵현虢縣바오지시 천창구次畿
인유현麟游縣바오지시 린유현次畿
보윤현普潤縣바오지시 펑샹 현 북부次畿
사죽감司竹監



1130년 (천회 8년), 금나라가 봉상부를 점령했다.[3] 금나라 시대에 봉상부는 봉상로(鳳翔路)에 속했다. 중급부(中級府)로 1142년(금 희종 황통 2년) 부로 승격하고 군명을 천흥군(天興軍)으로 고쳤다. 1179년(금 세종 대정 19년) 군명을 다시 봉상군(鳳翔軍)으로 복구했다. 1187년(금 세종 대정 27년) 총관부(總管府)로 승격되었다. 궁궁이(芎藭), 독활(獨活), 등초(燈草), 무심초(無心草), 승마(升麻), 진교(秦艽), 골쇄보(骨碎補), 강활(羌活) 등이 생산되었다. 63,303호를 거느렸고 9개 현과 4개 진을 관할했다.[12]

'''금나라 시대 봉상부 관할 현 및 진'''

현명한자대략적 위치비고
봉상의鳳翔倚바오지시 펑샹 현두양산(杜陽山), 오악(吳岳), 옹수(雍水)가 있었다. 1179년 천흥현에서 개명되었다.
보계현寶鷄縣바오지시진창산(陳倉山), 위수(渭水), 대산관(大散關)이 있었다. 무성진(武城鎭)이 있었다.
괵현虢縣바오지시 천창구초산(楚山), 위수가 있었다. 양평진(陽平鎭)이 있었다.
미현郿縣바오지시 메이현태백산과 위수가 있었다.
주질현盩厔縣시안시 저우즈현남쪽으로 순마도(巡馬道)까지 20리 거리였다. 1216년(금 선종 정우 4년) 항주(恆州)로 독립하여 미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종남산(終南山), 위수, 욕곡(浴穀)이 있다.
부풍현扶風縣바오지시 푸펑현점령 초기에 부흥현(扶興縣)으로 불렸다. 위수(渭水), 위수(湋水), 기양진(岐陽鎭)이 있었다.
기산현岐山縣바오지시 치산현기산(岐山), 종남산, 위수, 강수(姜水), 마적진(馬跡鎭)이 있었다.
보윤현普潤縣바오지시 펑샹 현 북부두수(杜水), 칠수(漆水), 기산이 있었다.
인유현麟游縣바오지시 린유현오장산(五將山)과 유토산(黝土山)이 있었다.



1231년 (정대 8년), 봉상부는 몽골 제국에 점령되었다.[5] 원나라 시대에 봉상부는 섬서등처행중서성에 속했으며, 봉상현, 부풍현, 기산현, 보계현, 린유현의 5개 현을 관할했다.[6]

명나라 시대에 봉상부는 산시성에 속했으며, 직속으로 봉상현, 기산현, 보계현, 부풍현, 미현, 린유현, 천양현의 7개 현과 농주(隴州)를 관할했다.[7]

청나라 시대에도 봉상부는 산시성에 속했으며,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봉상현, 기산현, 보계현, 부풍현, 미현, 린유현, 천양현의 7개 현과 농주의 1주 7현을 관할했다.[8]

1913년,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봉상부는 폐지되었다.

4. 문화

봉상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지역이다. 특히 당나라 시대인 757년 12월에는 서경 봉상부로 승격되어 성도, 경조부, 하남부, 태원부와 함께 당나라의 5경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9][10]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봉상부 지역은 시대별로 다양한 특산물을 생산했으며, 여러 유적과 지리적 명소를 간직하게 되었다.

4. 1. 특산물

북송 시대에는 밀랍으로 만든 초, 개암, 돗자리를 공납으로 바쳤다.[11] 금나라 시대에는 궁궁이( 芎藭중국어 ), 독활( 獨活중국어 ), 등초( 燈草중국어 ), 무심초( 無心草중국어 ), 승마( 升麻중국어 ), 진교( 秦艽중국어 ), 골쇄보( 骨碎補중국어 ), 강활( 羌活중국어 ) 등이 생산되었다.[12]

4. 2. 유적

봉상부 지역에는 오랜 역사만큼 다양한 유적과 지리적 명소가 남아 있다.

당나라 시대 봉상부의 전신인 기주(岐州) 시기부터 봉상부 관할에 포함되었던 지역에는 여러 역사적 장소가 있었다.

  • 건귀고성(乾歸故城): 현재의 바오지시 펑샹 현 서쪽 43리 지점에 위치했던 성으로, 오호 십육국 시대 서진(西秦)의 군주였던 걸복건귀가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9][10] 이곳은 당나라 시기 천흥현(天興縣)이 있던 지역이다.
  • 구성궁(九城宮): 현재의 바오지시 린유 현에 위치했던 궁궐이다. 원래 수나라 시기 인수궁(仁壽宮)으로 지어졌으며, 617년 이곳에 봉서군(鳳棲郡)이 설치되면서 중심지가 되었다. 당나라 건국 이후 당 태종이 이곳의 이름을 구성궁으로 바꾸었다.[9][10] 이곳은 당나라 시기 인유현(麟游縣)이 있던 지역이다.
  • 용미성(龍尾城): 625년(당 고조 무덕 7년) 기산현(岐山縣)의 치소가 이전되었던 곳이다.[9][10] 기산현은 현재의 바오지시 치산 현 지역에 해당한다.


금나라 시대 봉상부 관할 지역의 주요 산, 강, 관문 등은 다음과 같다.[12]

이러한 지명들은 봉상부 지역의 역사적, 지리적 중요성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참조

[1] 서적 『旧唐書』地理志一
[2] 서적 『宋史』地理志三
[3] 서적 『金史』太宗紀
[4] 서적 『金史』地理志下
[5] 서적 『金史』哀宗紀上
[6] 서적 『元史』地理志三
[7] 서적 『明史』地理志三
[8] 서적 『清史稿』地理志十
[9] 서적 《구당서》38권 지 제18 지리지 1 관내도 봉상부 https://zh.wikisourc[...]
[10] 서적 《원화군현도지》 2권 관내도 봉상부 https://zh.wikisourc[...]
[11] 서적 《송사》87권 지 제40 지리지 3 진봉로 봉상부 https://zh.wikisourc[...]
[12] 서적 《금사》26권 지 제7 지리지 下 봉상로 봉상부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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