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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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은 1881년 일본 정부가 홋카이도 개척 사업과 관련된 재산을 민간에 헐값으로 매각하려다 발생한 정치 스캔들이다. 개척사 폐지를 결정하고 관유물 불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헐값 매각, 특혜 의혹, 정보 유출 등으로 인해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북해사에 부당한 조건으로 불하하려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 사건은 언론의 폭로와 국민적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오쿠마 시게노부의 실각과 메이지 14년 정변으로 이어졌다. 불하 중지와 국회 개설이 공표되었으며, 자유민권운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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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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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 |
주요 내용 | 개척사의 관유물을 정치가와 재벌에게 불하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특혜와 정경유착 의혹이 제기된 사건 |
발생 시기 | 1881년 |
관련 기관 | 개척사 |
배경 | |
개척사 설치 목적 | 홋카이도 개척 및 경영 |
개척사 폐지 | 1882년 |
폐지 이유 | 개척 사업의 성과 부진 및 재정 낭비, 정치적 비판 증가 |
불하 과정 | |
불하 결정 | 1881년, 개척사 관유물 불하 결정 |
불하 대상 | 미쓰이를 비롯한 정치가, 재벌 |
불하 조건 | 시가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 불리한 조건 |
논란 및 의혹 | |
주요 논점 | 정경유착 의혹 특혜 제공 의혹 불공정한 불하 가격 |
관련 인물 | 개척사 관료 정치가 미쓰이 등 재벌 |
결과 및 영향 | |
사회적 파장 | 사회적 비판 및 논란 심화 |
정치적 영향 | 정부에 대한 불신 증가, 정치 개혁 요구 증대 |
경제적 영향 | 재벌의 경제력 집중 심화 |
관련 사건 | |
연관 사건 | 임오군란 |
2. 불하 결정 과정
1869년 홋카이도 개척을 위해 개척사가 설치되었다. 1870년 5월 개척사 차관으로 임명된 구로다 기요타카는 러시아 제국에 대항해 국력을 충실히 할 필요를 느꼈고 홋카이도 개척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다. 구로다의 건의를 받아들인 정부는 1871년 8월에 앞으로 10년에 걸쳐 1,000만 냥을 투자하겠단 계획을 발표했다.
1881년 7월, 구로다 기요타카는 각의에서 불하를 제의했으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과 오쿠마 시게노부는 이에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각의를 통과했다. 그런데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에서 불하 사건을 폭로하며 구로다가 동향인 고다이 도모아쓰에게 특혜를 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오보였고, 실제로는 개척사 관료들이 만든 북해사가 특혜 대상이었다.
구로다는 고용 외국인을 초빙해 정책 조언을 구하고 기술을 가르치게 했다. 막대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홋카이도가 워낙 넓어 개척사는 모든 사업을 완수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측량, 도로 등 기초 사업을 우선 마무리짓고 산업 육성에 나섰다.
1880년 11월 오쿠마 시게노부의 주도로, 공장 등 관유물 불하 방침을 추진하는 "공장 불하 개칙"이 제정되었다.[1] 이로 인해, 개척사 내부에서는 10개년 계획의 만기가 다가오고 경영 부진에 빠진 산업의 민간 불하가 검토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고다이 도모아쓰는 무역 회사 설립을 구상하고, 같은 해 10월에는 오쿠마의 동의를 얻어 계획이 진행되었다.
1881년 1월부터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구로다 등 참의를 중심으로 사이고 주도, 마쓰카타 마사요시, 마에다 마사나, 그리고 고다이 등 사쓰마 파의 중요 인물과 오쿠마 파의 야노 후미오, 기타바타케 하루후사 등 관료들이 아타미에 모여 국회 개설, 재정 문제 등에 대해 자주 회의를 열었다(아타미 회의). 이 중에서 개척사 폐지 문제가 거론되었다. 구로다는 개척사 계속을 주장했지만, 오쿠마는 재정적으로 계속은 곤란하다고 했다. 이렇게 관유물 불하 방침이 정해졌지만, 고다이가 인수자로서 나섰다.
같은 해 6월에는 고다이, 스미토모 요시자에몬의 총대로서 히로세 사이헤이, 고노이케 사치토미, 미쓰이 타카히로 등이 출자한 간사이 무역사가 설립되었다. 7월에 간사이 무역사는 개척사에 이와나이 탄광과 앗케시 산림의 불하를 신청했다. 한편, 개척사 대서기관이었던 야스다 사다노리 등 개척사 관료는 북해사를 설립하고 개척사 산업의 불하를 신청했다. 북해사에의 불하는 선박, 토지, 건물, 농원, 양조소 등이며, 당시 가격으로 1500만엔 상당에 달하는 거액이 투자되었지만, 북해사가 대금으로 제시한 것은 387,082엔이었고, 게다가 무이자 30년 분할 상환이었다. 히로세 사이헤이가 "북해사와 무역 회사는 그 관계가 없다"고 말했듯이 북해사와 간사이 무역사는 상호 계약 관계도 없는 별개의 사업이었다.
3. 불하에 대한 비판
메이지 천황의 재가와 정식 공표 이후, 여러 언론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도 불하에 난색을 표하자, 구로다는 산조를 찾아가 불하 이행을 강하게 요구했다.
각 신문은 부당한 불하가 의회가 개설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는 논조를 펼쳤고, 사쓰마-조슈 번벌 정부에 대한 비판과 의회 개설 요구가 높아졌다. 심지어 정부 측인 『도쿄 니치니치 신문』까지 비슷한 주장을 하면서 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3. 1. 정보 유출 경위
언론에 정보를 유출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여러 설이 있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히로세는 8월 31일 고다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 회사", 미쓰비시의 책략이라고 언급했으며, 당시 정부도 미쓰비시가 관여한 것으로 생각했다.[1] 이와 함께 미쓰비시와 연결 고리가 있는 오쿠마 시게노부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음모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정부 내에서 돌았다. 사사키 다카유키는 천황을 보좌하는 시종 히지카타 히사모토로부터 들었다며 "이토 히로부미가 말하길 이번 사건은 미쓰비시, 오쿠마, 후쿠자와가 꾸민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사사키는 농상무경 고노 도가마도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구로다 기요타카도 이 이야기를 믿었지만, 오쿠마는 이를 부정했다.
1900년에 간행된 『유신 후의 명사들의 일담』에는 이와나이 탄광이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고다이가 이를 제보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사학자 미야치 히데토시는 이 이상 개척 사업에 관여하는 것이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생각한 고다이가 미쓰비시와 고노를 통해 언론에 제보했다고 추측했다. 한편, 사학자 이토 유키오는 오쿠마계에 속하던 관료 야노이거나 혹은 오자키 유키오, 이누카이 쓰요시, 오노 아즈사 중 한 명일 것이라 추측했다.
다만 내부고발자가 누구든 간에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마가 관여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3월에 오쿠마가 빠른 시일 내에 국회를 개설하고 영국식 입헌 정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이토는 이에 반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각의에서 오쿠마가 불하에 반대하자 이토는 오쿠마, 후쿠자와, 미쓰비시가 음모를 꾸몄다고 믿었던 것이다.
4. 메이지 14년 정변과 불하 중지
1881년(메이지 14년) 7월 30일, 메이지 천황이 도호쿠와 홋카이도 순행을 떠났고, 오쿠마 시게노부를 포함한 주요 각료들이 동행했다.[1] 도쿄에 남은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오쿠마를 정부에서 몰아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0월 8일, 정부 수뇌부는 오쿠마 파면, 9년 후 헌법 제정 및 국회 개설, 개척사 관유물 불하 중지에 합의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불하 중지에는 동의했지만 오쿠마 파면에는 소극적이었으나, 구로다 기요타카와 이토의 강력한 요구로 결국 동의했다.
10월 11일, 천황이 돌아오자 이와쿠라는 천황에게 오쿠마의 모략으로 정부가 비판받고 있다고 말하며 불하 문제 재고를 요청했다. 천황은 주요 대신 및 참의들과 밀담을 통해 오쿠마 파면에 합의했고, 오쿠마를 제외한 대신과 참의들이 일제히 오쿠마 파면을 상주하여 천황이 재가했다. 같은 날 이토와 사이고 다카모리는 오쿠마를 찾아가 파면 결정을 알렸다.
다음 날인 10월 12일, 불하 중지와 국회 개설이 공표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오쿠마 파면 이후, 오쿠마계 관료들이 대거 사직하고 입헌개진당을 창당하게 된다.
1882년 1월 1일, 구로다는 참의 및 개척사 장관에서 물러나 내각고문이 되었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한 조슈벌이 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2월 8일, 개척사는 폐지되었고 홋카이도는 하코다테현, 삿포로현, 네무로현의 3현으로 분리되었다.
5.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은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의 부패와 정경유착 문제를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으로, 한국의 일제강점기와 유사한 형태로 나타나 식민지 수탈과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된다.
구로다 기요타카는 각의에서 불하를 제의했지만,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과 오쿠마 시게노부는 이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의를 통과했고, 이후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이 개척사 관유물 불하를 폭로하며 구로다가 동향인 고다이 도모아쓰에게 이익을 주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사건은 정경유착 의혹으로 번졌다. 언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구로다는 산조 사네토미에게 불하 이행을 강경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언론 제보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당시 정부는 미쓰비시와 연결 고리가 있는 오쿠마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음모로 여겼고, 사사키 다카유키는 이토 히로부미가 미쓰비시, 오쿠마, 후쿠자와의 음모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마가 관여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오쿠마가 빠른 시일 내에 국회를 개설하고 영국식 입헌 정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이토는 이에 반대했었고, 이번 각의에서 오쿠마가 불하에 반대하자 이토는 오쿠마, 후쿠자와, 미쓰비시가 음모를 꾸몄다고 믿었던 것이다.
결국 정부 수뇌부들은 오쿠마를 파면하고 9년 뒤에 헌법을 제정한 뒤 국회를 개설하며, 개척사 관유물 불하를 중지하는 것에 합의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불하 중지에는 동의했지만 오쿠마 파면에는 소극적이었으나, 구로다와 이토의 강한 요구에 결국 동의했다. 메이지 천황은 3대신과 6참의와 밀담을 통해 오쿠마 파면에 합의했고, 오쿠마 이외의 대신과 참의가 일제히 오쿠마 파면을 상주하여 결국 오쿠마는 파면되었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메이지 14년 정변으로 이어져 오쿠마 시게노부가 파면되고 국회 개설이 약속되었다.
5. 1. 아이누족 수탈 심화
아이누(アイヌ일본어)은 홋카이도의 원주민으로,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은 이들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는 과정을 가속화했다. 일본 정부는 아이누족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부정하고, 동화 정책을 강요했다.5. 2. 일본 제국주의 팽창 정책
이 사건은 일본 제국이 홋카이도를 식민지화하려는 팽창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1869년 홋카이도 개척을 위해 개척사가 설치되었고, 개척사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홋카이도 개척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1]1871년, 일본 정부는 10년간 1,000만 냥을 투자하는 대규모 예산 계획을 결정했다. 그러나 방대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홋카이도의 광활함 때문에 개척사는 모든 사업을 완수하기 어려웠다. 이에 측량, 도로 등 기초 사업을 우선 마무리하고 산업 육성에 집중했다.
1880년, 오쿠마 시게노부의 주도로 '공장 불하 규칙'이 제정되어 경영 부진을 겪는 관영 산업을 민간에 헐값으로 불하하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다이 도모아쓰는 무역회사 설립을 구상했고, 오쿠마의 동의를 얻어 계획을 진행했다.
1881년,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구로다 등 정부 요인들이 아타미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개척사 폐지와 관유물 불하 방침이 정해졌고, 고다이가 불하 대상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일본 정부가 홋카이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일본 자본가들에게 특혜를 제공하여 식민지 경제 체제를 구축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5. 3. 정경유착과 부패 문제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은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가 추진한 홋카이도 개척 사업의 일환으로, 관유물을 민간에 불하하는 과정에서 특혜 시비가 불거진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정치의 부패와 정경유착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1881년 7월, 개척사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는 개척사 관유물을 자신의 동향인 고다이 도모아쓰가 설립한 간사이 무역회사에 헐값으로 불하하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척사 관료들이 설립한 북해사가 1,500만 엔에 달하는 자산을 38만 엔, 무이자 30년 할부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불하받으려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언론은 일제히 정부를 비판했고,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마저 불하에 난색을 표했다.
특히,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은 구로다가 고다이에게 특혜를 제공했다고 보도하면서, 이 사건은 정경유착 의혹으로 번졌다. 비록 해당 보도는 오보였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개척사 불하로 이득을 본 것은 고다이라는 오해가 널리 퍼져있다. 언론은 의회 개설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정부를 압박했고, 결국 정부는 불하를 중지하고 메이지 14년 정변을 일으켜 오쿠마 시게노부를 파면하고 국회 개설을 약속했다.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은 일본에서 정경유착의 전형적인 사례로 인식된다. 이는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 동안 유사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식민지 수탈과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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