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14년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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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지 14년 정변은 1881년, 일본 정부 내 권력 투쟁으로 오쿠마 시게노부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실각한 사건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오쿠마가 급진적인 헌법 제정 및 정당 내각 구성을 주장하고,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의심하여 그를 정부에서 몰아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은 보수화되었고,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는 조슈 번벌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오쿠마는 이후 정당을 결성하여 정부에 대항했지만, 결국 정부에 복귀하였다. 메이지 14년 정변은 일본의 한국 정책에도 영향을 미쳐, 대한제국의 독립과 개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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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1년 일본 -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
메이지 시대 초 홋카이도 개척을 담당한 개척사가 폐지될 때, 막대한 관유물을 특정 세력에 헐값으로 불하하려 한 정치 스캔들로, 부정부패 의혹과 특혜 제공 논란을 일으켜 자유 민권 운동 확산과 국회 개설 요구를 촉발했다. - 1881년 일본 - 국회개설의 조
국회개설의 조는 자유민권운동의 확산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1890년 제국 의회 개설을 약속한 일본 제국 정부의 칙령으로, 일본 정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이와쿠라 도모미 - 이와쿠라 사절단
이와쿠라 사절단은 메이지 유신 직후 이와쿠라 도모미를 대표로 메이지 정부가 파견한 외교 사절단으로, 불평등 조약 개정과 서양 문물 시찰을 목표로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여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 - 이와쿠라 도모미 - 정한론
정한론은 에도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유신 시기에 일본에서 무력을 사용해 조선을 개항하고 복속시켜야 한다는 정치적 사상으로, 존왕양이 운동과 결합되어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과의 갈등 속에서 부각되었으며,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 자유 민권 운동 - 오사카 사건
오사카 사건은 1885년 오사카에서 자유민권운동의 격화로 발생한 사건으로, 자유당 좌파가 조선 내정 개혁을 목표로 계획했으나 배신으로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처벌받았다. - 자유 민권 운동 - 폭발물취체벌칙
폭발물취체벌칙은 1884년 일본에서 제정되어 폭발물 사용, 미수, 예비 등을 처벌하며, 국제 테러 방지 조약에 따라 국외범에게도 적용되는 법률이다.
메이지 14년 정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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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개요 | |
발생 시기 | 1881년 (메이지 14년) |
주요 인물 | 오쿠마 시게노부, 이토 히로부미, 이와쿠라 도모미 |
주요 내용 | 오쿠마 시게노부 일파의 실각과 이토 히로부미 중심의 메이지 정부 강화 |
배경 | |
정치적 배경 | 자유민권운동의 고조 및 메이지 정부 내부 권력 다툼 |
재정적 배경 | 메이지 유신 이후의 재정 위기 및 국유 재산 매각 문제 |
외교적 배경 | 조선 문제를 둘러싼 정부 내 갈등 |
경과 | |
발단 | 개척사 관재 매각 사건 및 오쿠마 시게노부의 국정 비판 |
전개 | 이토 히로부미 등의 오쿠마 시게노부 탄핵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 사퇴 및 실각 메이지 천황의 국회 개설에 대한 칙령 발표 |
결과 | 이토 히로부미 중심의 정부 체제 강화 국회 개설 준비 본격화 자유민권운동 탄압 |
영향 | |
정치적 영향 | 이토 히로부미 중심의 메이지 정부 권력 강화 및 제국 헌법 제정 준비 |
사상적 영향 | 자유민권운동의 좌절 및 국가주의 사상 강화 |
사회적 영향 |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회의 변화 및 새로운 정치 질서 형성 |
평가 | |
긍정적 평가 | 메이지 정부의 안정화 및 입헌 정치로의 전환 준비 |
부정적 평가 | 자유민권운동 탄압 및 국가주의 강화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메이지 천황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이와쿠라 도모미 |
관련 인물 | 사이고 다카모리 기노시타 도시야스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
추가 정보 | |
관련 사건 | 개척사 관재 매각 사건 |
관련 법령 | 국회 개설 칙령 |
참고 문헌 | https://ja.wikipedia.org/wiki/%E6%98%8E%E6%B2%BB%E5%8D%81%E5%9B%9B%E5%B9%B4%E3%81%AE%E6%94%BF%E5%A4%89 |
2. 정변 전의 상황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 이후, 이토 히로부미가 정부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1] 오쿠마 시게노부는 사쓰마번 출신으로 조슈번 출신인 이토의 대항마로 여겨졌지만, 이토의 맹우인 이노우에 가오루의 참의 취임에 협력하는 등 이토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1880년, 오쿠마의 외채 모집 주장에 이토 등이 반대하면서 갈등이 생겼다. 7월, 이노우에는 이토에게 오쿠마를 러시아 공사로 좌천시킬 것을 건의했고, 8월에는 이토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오쿠마를 개척사 장관으로 보내는 것을 의논했다.
1879년 국회 개설 운동이 고조되면서 정부 내에서도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원로원은 1876년부터 헌법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1879년 12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입헌 정체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자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는 다른 참의들에게도 의견을 메이지 천황에게 제출하도록 지시했다.[1] 1880년 2월 구로다 기요타카, 7월 이노우에 가오루, 12월 이토 히로부미가 차례로 의견서를 제출했다.[1] 구로다는 일본에서 입헌 정치는 시기상조라고 반대했고, 야마가타와 이노우에는 유럽의 입헌 정체를 소개하는 데 그쳤다.[1]
이토는 이노우에 고와시의 협력을 얻어 작성한 의견서에서 국회 창설에는 찬성했지만, 상하 양원 구성과 점진적인 도입을 주장했다. 상원 창설을 위해 원로원을 확장하고 화족과 사족 대표자를 뽑고, 하원 창설을 위해 부현회 대표자를 선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1] 반면, 오쿠마는 영국식 의원내각제 도입과 조속한 국회 개설을 주장하여 이토와 대립하였다.
1881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이토 히로부미는 아타미시의 여관에서 오쿠마 시게노부, 이노우에 가오루, 구로다 기요타카를 초청하여 입헌 정체 등에 대해 논의했지만,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1] 이 회의에서는 개척사 폐지 문제도 다루어졌는데, 구로다는 개척사 존속을 주장했지만 오쿠마는 재정 문제로 곤란하다고 반대했다. 결국 개척사 관유물 매각 방침이 정해졌고, 고다이 도모아쓰가 인수자로 나섰다.
1881년 3월, 좌대신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은 오쿠마에게 입헌 정체에 관한 의견서 제출을 독촉했다. 오쿠마는 다른 참의나 대신에게 자신의 의견서를 보여주지 말 것을 요구하며 의견서를 제출했다.[1] 오쿠마의 의견서는 다음과 같았다.[1]
- 시급히 흠정 헌법을 제정해 2년 후에 국회를 개설해야 한다.
- 영국식 입헌 정치를 도입하고 정당내각을 조직해야 한다.
이는 다른 참의들의 의견에 비해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다. 다루히토 친왕은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의견서를 보여줬고, 이와쿠라는 내용이 과격하다고 여겨 이토가 알기 전에 의논하자고 오쿠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7월, 이토가 오쿠마의 의견서 내용을 알고 격노하여 출근을 거부했다. 오쿠마는 이토를 찾아가 변명했지만, 이토는 오쿠마에게 왜 후쿠자와 유키치를 대변하는 듯한 의견서를 제출했냐고 따지며 사전에 자신과 상의하지 않은 것을 추궁했다. 오쿠마는 의견서 내용은 실효성이 없고 후쿠자와와는 무관하며 자신의 의견을 적었을 뿐이라고 사과했다. 이토는 다음 날부터 다시 출근했지만 오쿠마에게 다시 한번 의견서에 대해 대화를 나눴고 이와쿠라에게도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등 두 사람 사이에는 균열이 심하게 남아 있었다. 이때까지는 산조와 이와쿠라가 두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정변 후, 가네코 겐타로는 사사키 다카유키에게 오쿠마의 의견서는 후쿠자와의 것을 가져온 것이며 후쿠자와도 이를 인정했다고 말했다. 게이오기주쿠 출신 태정관 대서기관 야노 후미오는 훗날 자신이 쓴 것이라 회상했다.
2. 1. 정부 구조
1878년 5월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된 후, 참의 이토 히로부미가 정부의 핵심 역할을 맡게 되었다.[1] 당시 대장경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도 이토를 지지했다.[1] 오쿠마는 사쓰마번 출신으로 조슈번 출신인 이토의 대항마로 여겨졌지만, 오히려 이토의 맹우인 이노우에 가오루의 참의 취임에 협력하는 등 이토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1880년, 오쿠마가 외채 모집을 주장하자 이토 등이 반대하면서 갈등이 생겼다. 7월에는 이노우에가 이토에게 오쿠마를 러시아 공사로 좌천시켜야 한다고 건의했고, 8월에는 이토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오쿠마를 개척사 장관으로 보내는 것을 의논했다.
2. 2. 입헌 체제 도입 문제
1879년 국회 개설 운동이 고조되면서 정부 내에서도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원로원은 1876년부터 헌법 초안 작성을 진행하고 있었다. 1879년 12월, 참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입헌 정체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자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는 다른 참의들에게도 입헌 정체에 관한 의견을 메이지 천황에게 제출하도록 지시했다.[1] 이에 따라 1880년 2월 구로다 기요타카, 7월 이노우에 가오루, 12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차례로 의견서를 제출했다.[1] 다만 구로다는 일본에서 입헌 정치는 시기상조라고 반대했고, 야마가타와 이노우에는 유럽의 입헌 정체를 소개하는 데 그쳤다.[1]이토는 이노우에 고와시의 협력을 얻어 작성한 의견서에서 국회 창설은 찬성하지만, 상하 양원 구성과 점진적인 도입을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상원 창설을 위해 원로원을 확장하고 화족과 사족 대표자를 뽑고, 하원 창설을 위해 부현회 대표자를 선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1]
반면, 오쿠마 시게노부는 영국식 의원내각제 도입과 조속한 국회 개설을 주장하여 이토와 대립하였다.
2. 2. 1. 아타미 회의
메이지 14년(1881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이토 히로부미는 아타미시의 여관에 오쿠마 시게노부, 이노우에 가오루, 구로다 기요타카를 초청하여 입헌 정체 등에 대해 논의했지만,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1] 이 회의에서는 개척사 폐지 문제도 다루어졌는데, 구로다는 개척사의 존속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오쿠마는 재정 문제로 존속이 곤란하다고 반대했다. 결국 개척사 관유물 매각 방침이 정해졌고, 고다이 도모아쓰가 인수자로 나섰다.2. 2. 2. 오쿠마의 의견서
1881년 3월, 좌대신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은 아직 입헌 정체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지 않고 있던 참의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제출을 독촉했다. 오쿠마는 다른 참의나 대신에게 자신의 의견서를 보여주지 말 것을 요구하며 의견서를 제출했다.[1] 오쿠마의 의견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내용을 담고 있었다.[1]- 시급히 흠정 헌법을 제정해 2년 후에 국회를 개설해야 한다.
- 영국식 입헌 정치를 도입하고 정당내각을 조직해야 한다.
이는 다른 참의들의 의견에 비해 지나치게 급진적인 것이었다. 다루히토 친왕은 의견서를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보여줬고, 이와쿠라는 내용이 너무 과격하다고 여겨 이토 히로부미가 알기 전에 잠시 얘기를 하자고 오쿠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7월 이토가 오쿠마의 의견서 내용을 알게 되었고 격노하여 출근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오쿠마는 이토를 찾아가 변명을 했지만, 이토는 오쿠마에게 왜 후쿠자와 유키치를 대변하는 듯한 의견서를 제출했냐고 몰아붙이면서 사전에 자신과 상의하지 않은 것을 따졌다. 오쿠마는 의견서 내용은 실효성이 없고 후쿠자와와는 무관하며 자신의 의견을 적었을 뿐이라고 사과했다. 이토는 다음 날부터 다시 출근했지만 오쿠마에게 다시 한번 의견서에 대해 대화를 나눴고 이와쿠라에게도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등 두 사람 사이에는 균열이 심하게 남아 있었다. 이때까지는 산조와 이와쿠라가 두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정변 후에 가네코 겐타로는 사사키 다카유키에게 오쿠마의 의견서는 후쿠자와의 것을 가져온 것이며 후쿠자와도 이를 인정했다고 말했다. 게이오기주쿠 출신으로 태정관 대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야노 후미오는 훗날 자신이 쓴 것이라 회상했다.
3. 정변
1881년 7월 26일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은 구로다 기요타카가 동향 출신인 고다이 도모아쓰에게 특혜를 주고 있다는 의혹을 보도하면서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다.[1] 이 정보가 언론에 처음 제보된 경로는 불확실하지만, 미쓰비시와 공모한 오쿠마 시게노부,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배후라는 지적이 당시부터 있었다. 정부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쿠마는 이를 부정했다.
이토 히로부미 등은 오쿠마 시게노부가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고 의심하고, 그를 정부에서 축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사사키 다카유키 등 비삿초계 정부 고관들과 연합하여 오쿠마 배제에 대한 지지를 확보했다.
1881년 7월 30일, 메이지 천황이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 순시에 나섰고, 다루히토 친왕, 오쿠마, 구로다 기요타카, 오키 다카토가 동행했다. 도쿄에 남은 이토,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야마다 아키요시, 사이고 주도 등은 이때 오쿠마를 정부에서 쫓아내기로 하고 산조 사네토미와 이와쿠라 도모미 설득에 나섰다.
정부는 오쿠마가 후쿠자와 유키치, 미쓰비시, 사가, 도사의 민권파와 손을 잡고 불하 사건 등으로 반정부 감정을 부채질해 정권을 탈취하고자 한다고 의심하여 오쿠마를 배제하려 했다.
실제로 오쿠마, 후쿠자와, 미쓰비시의 제휴는 느슨했고 공통 모략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후쿠자와의 제자가 많았던 오쿠마계 관료들이 국회의 조기 개설에 적극적이었지만, 정작 후쿠자와는 자유 민권 운동가들을 무지무식한 우민으로 치부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국회 개설도 시기상조라 여겼다. 오쿠마와 오쿠마계 관료들은 이토가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881년 10월 8일까지 도쿄의 중신들은 오쿠마를 정부에서 배제하고 9년 뒤에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을 추진하며 관유물 불하는 중지하기로 합의했다.
3. 1. 불하 문제 누설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과 관련하여, 1881년 7월 26일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은 구로다 기요타카가 동향 출신인 고다이 도모아쓰에게 특혜를 주고 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1] 이 정보가 언론에 처음 제보된 경로는 불확실하지만, 미쓰비시와 공모한 오쿠마 시게노부,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배후라는 지적이 당시부터 있었다. 정부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쿠마는 이를 부정했다.누가 정보를 유출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마가 유출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히로세는 8월 31일 고다이에게 보낸 서한에서 미쓰비시의 계략이라고 언급했으며, 당시 정부 내에서도 미쓰비시의 개입이 자주 거론되었다. 사사키 다카유키는 도가타 히사모토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이토 히로부미가 (사건은) 미쓰비시 회사, 오쿠마 시게노부,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공모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또한 사사키에 따르면 고노 도기마도 참여했다고 한다.
1900년에 간행된 '維新後に於ける名士の逸談'에서는 이와이 탄광의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고다이에 의한 유출이라고 한다. 미야지 히데토시는 탄광의 수지가 맞지 않아 개척 사업 참여에 대한 우려를 품었던 히로세가 미쓰비시와 고노를 통해 유출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토 유키오는 오쿠마 계열 관료였던 야노 후미오 또는 오자키 유키오, 이누카이 쓰요시, 오노 아즈사 중 한 명일 것이라고 한다.
3. 2. 오쿠마 배제를 향한 움직임
이토 히로부미 등은 오쿠마 시게노부가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고 의심하고, 그를 정부에서 축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사사키 다카유키 등 비삿초계 정부 고관들과 연합하여 오쿠마 배제에 대한 지지를 확보했다.1881년 7월 30일, 메이지 천황이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 순시에 나섰고, 다루히토 친왕, 오쿠마, 구로다 기요타카, 오키 다카토가 동행했다. 도쿄에 남은 이토,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야마다 아키요시, 사이고 주도 등은 이때 오쿠마를 정부에서 쫓아내기로 하고 산조 사네토미와 이와쿠라 도모미 설득에 나섰다.
이와 함께 사사키 등 비삿초계 중신들과 이노우에 다케시가 사쓰마계 참의를 설득했다. 이 무렵 사사키, 히지카타 히사모토, 요시이 도모자네 등 천황 친정을 주장하는 옛 시보 그룹, 다니 다테키, 도리오 고야타, 미우라 고로, 소가 스케노리 등 비삿초계 군인, 가와타 가게토모, 나카무라 고키 등 원로원 의관, 가네코 겐타로, 미요시 다이조 등 중견 관료가 중심이 되어 9월 중정당이란 조직을 만들어 관유물 불하에 반대하고 삿초 번벌에 대항하고자 했다.
정부는 오쿠마가 후쿠자와 유키치, 미쓰비시, 사가, 도사의 민권파와 손을 잡고 불하 사건 등으로 반정부 감정을 부채질해 정권을 탈취하고자 한다고 의심하여 오쿠마를 배제하려 했다. 사사키는 여론을 격화하여 정부가 동요할 때를 노려 불하를 막고 오쿠마를 추방한 뒤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참의를 폐지하고 천황의 친정을 실현해 이토 등 번벌 세력을 쫓아낸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사사키에게 관유물 불하 사실을 알린 건 가네코였는데, 가네코는 오쿠마계 관료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미요시나 비삿초계를 포함해 정부 고관들이 오쿠마, 후쿠자와, 미쓰비시의 결탁을 강하게 믿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오쿠마, 후쿠자와, 미쓰비시의 제휴는 느슨했고 공통 모략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후쿠자와의 제자가 많았던 오쿠마계 관료들이 국회의 조기 개설에 적극적이었지만, 정작 후쿠자와는 자유 민권 운동가들을 무지무식한 우민으로 치부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국회 개설도 시기상조라 여겼다. 또한 오쿠마와 오쿠마계 관료들은 이토가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쿠마가 이토의 계획을 알게 된 건 10월 3일이었는데, 이때는 오쿠마가 대책을 세우기엔 너무 늦은 시기였다.
10월 8일까지 도쿄의 중신들은 오쿠마를 정부에서 배제하고 9년 뒤에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을 추진하며 관유물 불하는 중지하기로 합의했다.
4. 정변의 영향
메이지 14년 정변으로 오쿠마 시게노부와 그를 따르던 관료들이 정부에서 쫓겨났고,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한 조슈 번벌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정변 이후 정부 내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 계열의 영향력이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시마즈 히사미쓰의 보수 사상이 재평가 받았다.
오쿠마 시게노부를 비롯한 오쿠마계 관료들은 입헌개진당을 창당하며 정당 결성에 나섰지만, 1882년 1월 1일, 구로다 기요타카가 참의 겸 개척사 장관을 사직하고 내각고문으로 물러나면서,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한 조슈 번벌의 주도권이 확립되었다.
4. 1. 정계 개편
메이지 14년 정변은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 제국의 비스마르크 헌법을 모범으로 삼으려 하고, 오쿠마 시게노부가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면서 발생한 노선 대립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토는 정변 당시 독일 헌법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명확히 하지는 않았다.[1] 그럼에도 정변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 계열의 영향력이 철저하게 배제되는 등 정부의 보수화가 심화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이전에 정부에서 배제되었던 시마즈 히사미쓰의 보수 사상이 이 무렵 재평가받기 시작했다.오쿠마 시게노부와 오쿠마계 관료들은 사직 후 정당 결성에 나섰고, 이는 입헌개진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1888년 오쿠마는 정부에 복귀하여 외무상이 되었다. 오쿠마는 1883년 이와쿠라 도모미가 죽기 직전 "삿초 정치가에게 사죄를 하게 하고 쫓아낸 것을 후회한다"라며 자신에게 사과했다고 회상했다.
1882년 1월 1일, 구로다 기요타카는 참의 겸 개척사 장관을 사직하고 내각고문이라는 한직으로 물러났다. 이는 이토를 중심으로 한 조슈벌이 정부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이토는 헌법 조사를 위해 독일과 영국에 유학했고, 이때 로렌츠 폰 슈타인을 만나면서 독일식 헌법에 경도되기 시작했다.
4. 2. 정변으로 하야한 인물
- 오쿠마 시게노부 (참의)
- 가와노 도시가마 (농상무경)
- 사노 쓰네타미 (대장경)
- 전도밀 (역제총감)
- 야노 후미오 (통계원 간사 겸 태정관대서기관)
- 이누카이 쓰요시 (통계원 권소서기관)
- 오노 아즈사, 우시바 다쿠조, 오쿠마 히데마로, 오자키 유키오, 시마다 사부로, 다나카 고조, 쓰다 준이치, 나카노 무네야, 나카가와 히코지로, 무타구치 모토가쿠, 모리시타 이와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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