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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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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건전가요는 일제강점기 국민가요 또는 가정가요로 불리며 시작되어, 해방 이후에도 정부 주도로 제작 및 배포되었다. 특히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반공 이념 및 정부 정책 홍보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앨범에 의무적으로 수록되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법적 의무가 사라지면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으며, 민족 정체성 확립과 이념 통제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건전가요로는 "아! 대한민국"과 "조국찬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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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가요
개요
태극기
태극기
국가대한민국
장르가요
특징획일적인 가사, 제한된 음계
창작 시기1970년대
소멸 시기1980년대
상세 정보
정의정부 주도적인 가요
목적국민 정신 개조
사회 정화
내용애국심 고취
반공 사상 함양
근검절약 장려
전통 미덕 강조
제작 주체방송국
음반사
가요 작가
특징단순한 멜로디
획일적인 가사
건전한 내용
영향가요의 다양성 억압
대중음악의 발전 저해
획일적인 문화 조성
비판강제적인 분위기
획일적인 내용
예술성 부족
배경
시대적 배경1970년대 유신체제
사회적 배경반공 이데올로기 강화
사회 정화 운동 전개
획일적인 사회 분위기 조성
내용
주제애국심 고취
반공 사상 함양
근검절약 장려
전통 미덕 강조
가사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내용
국가와 민족을 위한 헌신 강조
개인의 자유와 개성 억압
특징단순하고 쉬운 가사
획일적이고 반복적인 내용
영향
긍정적 영향국민 통합에 기여
사회 질서 유지에 기여
부정적 영향가요의 다양성 억압
대중음악의 발전 저해
획일적인 문화 조성
같이 보기

2. 역사

건전가요의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국민가요 또는 가정가요(가족과 함께 집에서 안전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 불렸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 제국은 한국을 일본군 보급을 위한 후방 지역으로 간주하였고, 한국인의 보급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일제 강점기 정부는 조선문예회를 설립하여 선전에 맞는 노래를 "정화"하는 운동을 주도하였다.[1] 1940년대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주도로 국가적인 노래 개정 운동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만들어진 노래를 국민가요라고 불렀다.[1]

해방 이후에도 건전가요 운동은 계속되었다. 1949년 정부는 공보처 산하 선전 계획 위원회를 통해 새로운 건전가요를 신청받았고, "일터로 가자"와 "저축의 노래"가 대표적인 예이다. 1957년 대한민국 문화공보부는 대중가요가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건전가요 제작 및 배포에 힘썼다.[1]

1960년대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반공 정책으로 인해 반공 이념을 가진 시민 단체들이 "반공의 노래"와 같은 반공 가요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베트남 전쟁 중에는 "육군 김일병", "빨간 마후라" 같은 군가 스타일의 노래들이 인기를 얻었다.[2] "아침이슬"처럼 건전가요로 지정되었다가 나중에 금지된 노래도 있었다. 이 노래는 1973년 건전가요로 지정되었으나 1975년 금지되었다가[3] 1987년 해금되었다.[4] 1976년에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애국가요 추천 계획"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의 이념을 홍보하는 운동이 전개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작사, 작곡한 "나의 조국"이라는 노래도 있었다.[2] 1979년에는 앨범당 건전가요를 최소 한 곡 이상 수록하도록 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이후 발매된 모든 한국 앨범에는 건전가요 목록이 포함되었다.[1][2]

1980년대의 건전가요는 신국민가요로도 알려져 있으며, 당시 유행하던 상업적인 노래들과 정서가 대부분 일치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1] 건전가요는 주로 LP 레코드의 B면이나 앨범의 마지막 트랙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공공의 이익을 명목으로 독재 정부의 홍보 수단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아 인기가 떨어졌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독재 정권 몰락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로 앨범에 건전가요를 수록하도록 하는 법적 의무는 사라졌다.[2]

2. 1. 일제강점기

건전가요의 기원은 한국이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장르는 국민가요(國民歌謠) 또는 가정가요(家庭歌謠, 가족과 함께 집에서 안전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 불렸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 제국은 한국을 일본군에 대한 보급을 제공하는 중요한 후방 지역으로 간주하였고, 일본군을 위한 한국인의 보급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일제 강점기 정부는 조선문예회(한국 문학 협회)를 설립하고, 이 단체는 선전에 맞는 노래를 "정화"하기 위한 운동을 주도하였다.[1] 1940년대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주도 하에 국가적인 노래 개정 운동이 진행되었고, 이 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노래를 국민가요라고 불렀다. 이러한 운동들은 모두 일제 강점기 정부가 주도하였다.[1]

2. 2. 해방 이후

해방 이후에도 건전가요 운동은 계속되었다. 1949년 정부는 공보처 산하의 선전 계획 위원회를 통해 새로운 건전가요 신청을 받았다. 초기의 대표적인 예로는 "일터로 가자"와 "저축의 노래"가 있다. 1957년 대한민국 문화공보부는 대중가요가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건전가요의 제작 및 배포에 노력을 기울였다.[1]

1960년대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반공 정책의 결과로, 반공 이념을 가진 시민 단체들조차도 "반공의 노래"와 같은 반공 가요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베트남 전쟁 중에는 "육군 김일병", "빨간 마후라"와 같은 군가 스타일의 노래들이 한국 음악 차트에서 인기를 얻었다.[2] 과거에는 건전가요로 지정되었지만 나중에 금지된 노래도 있다. "아침이슬"은 1973년 건전가요로 지정되었으나 1975년 금지되었다가[3] 1987년 해금되었다.[4] 1976년에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애국가요 추천 계획"을 통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이념을 홍보하는 많은 운동이 전개되었고,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작사 작곡한 "나의 조국"이라는 노래도 있었다.[2] 1979년에는 음악가들이 앨범 장르에 관계없이 앨범당 건전가요를 최소 한 곡 이상 수록하도록 하는 법률이 제정되었고, 그 이후 발매된 모든 한국 앨범에는 대중이 들을 수 있도록 건전가요 목록을 포함하도록 했다.[1][2]

1980년대의 건전가요는 신국민가요로도 알려져 있으며, 당시 유행하던 상업적인 노래들의 정서와 대부분 일치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1][2] 건전가요는 일반적으로 LP 레코드의 B면에 수록되거나 앨범의 마지막 트랙으로 배치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당시 독재 정부의 홍보 수단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아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독재 정권 몰락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 이후에는 앨범에 건전가요를 수록하도록 하는 법적 의무가 사라졌다.[2]

2. 3. 1960-80년대: 발전과 쇠퇴

해방 이후에도 건전가요 운동은 계속되었다. 1949년 정부는 공보처 산하의 선전 계획 위원회를 통해 새로운 건전가요 신청을 받았다. 초기의 대표적인 예로는 "일터로 가자"와 "저축의 노래"가 있다. 1957년 대한민국 문화공보부는 대중가요가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건전가요의 제작 및 배포에 노력을 기울였다.[1]

1960년대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반공 정책의 결과로, 반공 이념을 가진 시민 단체들조차도 "반공의 노래"와 같은 반공 가요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베트남 전쟁 중에는 "육군 김일병", "빨간 마후라"와 같은 군가 스타일의 노래들이 한국 음악 차트에서 인기를 얻었다.[2] 과거에는 건전가요로 지정되었지만 나중에 금지된 노래도 있다. "아침이슬"은 1973년 건전가요로 지정되었으나 1975년 금지되었다가[3] 1987년 해금되었다.[4] 1976년에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애국가요 추천 계획"을 통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이념을 홍보하는 많은 운동이 전개되었고,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작사 작곡한 "나의 조국"이라는 노래도 있었다.[2] 1979년에는 음악가들이 앨범 장르에 관계없이 앨범당 건전가요를 최소 한 곡 이상 수록하도록 하는 법률이 제정되었고, 그 이후 발매된 모든 한국 앨범에는 대중이 들을 수 있도록 건전가요 목록을 포함하도록 했다.[1][2]

건전가요는 1980년대에 당시 유행하던 상업적인 노래들의 정서와 대부분 일치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1] 건전가요는 일반적으로 LP 레코드의 B면에 수록되거나 앨범의 마지막 트랙으로 배치되었다. 1980년대의 건전가요는 신국민가요로도 알려져 있다.[2]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당시 독재 정부의 홍보 수단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아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독재 정권 몰락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 이후에는 앨범에 건전가요를 수록하도록 하는 법적 의무가 사라졌다.[2]

2. 4. 민주화 이후

1988년 서울 올림픽과 독재 정권 몰락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 이후에는 앨범에 건전가요를 수록하도록 하는 법적 의무가 사라졌다.[2]

3. 목적과 의의

해방 직후 발표된 건전가요는 민족 정체성을 회복하고 독립을 이루며 일본의 잔재를 없애는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남한 음악 검열과 함께 사상 통제의 수단으로도 활용되었으며, 권위주의적 문화를 반영하기도 했다.[1]

4. 대표적인 건전가요


  • 아! 대한민국
  • 시장에 가면
  • 어허야 둥기둥기
  • 정화의 노래
  • 서로 믿는 우리마음
  • 웃는 마음 둥근 마음
  • 손모아 마음모아
  • 조국찬가

참조

[1] 웹사이트 건전가요 http://encykorea.aks[...]
[2] 웹사이트 가요 LP에 꼭 실려야했던 노래, 건전가요 https://terms.naver.[...]
[3] 뉴스 Why Is It Prohibited to Sing "Morning Dew" in North Korea? https://www.dailynk.[...] Daily NK 2008-04-17
[4] 웹사이트 양희은 "'아침이슬'은 건전가요상을 받고 금지곡도 된 노래" https://www.hankyung[...] 202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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