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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쿨름바흐 변경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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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쿨름바흐 변경백은 1484년 안스바흐에서 태어나 1543년 사망한 인물이다. 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실에서 일하며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의 후견인이자 가정교사로 활동했고, 형 카지미르와 공동으로, 이후 단독으로 안스바흐를 통치했다. 종교 개혁을 지지하며 프로테스탄트의 포교를 지원했고, 프로이센 공작령 성립에 기여했다. 슐레지엔 영토 확장을 위해 노력했으며, 조카 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의 후견인으로서 쿨름바흐와 바이로이트를 다스렸다. 그는 여러 언어에 능통했고 고전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세 번의 결혼을 통해 후손을 얻었으나, 그의 가계는 아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사망으로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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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쿨름바흐 변경백
기본 정보
한스 크렐의 초상화 (1522)
한스 크렐의 초상화 (1522)
이름게오르크
존칭경건한 자
출생일1484년 3월 4일
출생지아른스바흐
사망일1543년 12월 27일 (59세)
사망지아른스바흐
매장지하일스브론 수도원
가문호엔촐레른 가문
통치
작위안스바흐 변경백
통치 시작1536년
통치 종료1543년
선임자프리드리히 1세
후임자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가족 관계
아버지프리드리히 1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어머니조피아 야기에우옹카
배우자
배우자 1베아트리체 드 프랑코판 (1509년 결혼, 1510년 사망)
배우자 2헤트비히 폰 뮌스터베르크-욀스 (1525년 결혼, 1531년 사망)
배우자 3에밀리에 폰 작센 (1533년 결혼)
자녀
자녀안나 마리아, 뷔르템베르크 공작 부인
자비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비
조피, 레그니차 공작 부인
바르바라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도로테아 카타리나, 마이센 부르크그라프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기타 정보
직업변경백

2. 생애

1506년 헝가리의 울라슬로 2세 국왕 궁정에 들어가 그의 아들 러요시 2세의 후견인이자 가정교사가 되었다. 1515년부터는 형 카지미르와 공동으로 안스바흐를 통치했으며, 1527년 형이 사망한 후에는 단독으로 통치했다.

그는 일찍부터 종교 개혁에 관심을 보여 1524년 공식적으로 수용을 선언하고 자신의 영지 내에서 프로테스탄트 포교를 지원했다. 1523년에는 슐레지엔의 예게른도르프 공령을 획득하였다. 1525년에는 동생이자 독일 기사단 총장이었던 알브레히트와 협력하여 기사단령 프로이센을 세속적인 프로이센 공작령으로 전환하는 크라쿠프 조약 체결을 중재했다.

1527년부터는 미성년자였던 조카 알브레히트 알키비아데스의 후견인으로서 1541년까지 쿨름바흐 지역도 다스렸다. 1529년 슈파이어 제국회의와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 참여하여 프로테스탄트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가 종교 개혁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2. 1. 헝가리 생활

게오르크(오른쪽)와 그의 사촌 러요시 2세


1506년, 게오르크는 외삼촌이자 헝가리보헤미아의 국왕인 울라슬로 2세의 초청으로 헝가리 궁정에 머물게 되었다. 처음에는 추정상속인 자격이었으나, 같은 해 7월 울라슬로 2세의 아들 러요시 2세가 태어나면서 게오르크는 어린 러요시 2세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울라슬로 2세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어 러요시 2세의 공동 후견인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왕의 양자로 여겨졌다.

게오르크의 첫 아내 베아트릭스 드 프랑케판


1509년 게오르크는 헝가리 귈렌에서 베아트릭스 드 프랑케판과 결혼했다. 베아트릭스는 헝가리의 전임 국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의 서자였던 요한 코르비누스의 미망인이었다. 그녀의 가문인 프랑케판 가문은 헝가리크로아티아 지역의 유력 가문이었기에, 울라슬로 2세는 이 결혼을 통해 크로아티아 지역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 그러나 베아트릭스는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10년 5월 27일 자녀 없이 사망했다. 게오르크는 아내의 죽음으로 헝가리 내에서 상당한 재산과 영지를 상속받았지만, 투르크족의 침략 위협 속에서 헝가리에 오래 머물기보다는 상속받은 재산 대부분을 매각하여 슐레지엔 지역의 공작령을 매입하고자 했다.

1515년 울라슬로 2세는 게오르크를 오폴레 공작으로 임명하여 오폴레(Oppeln) 지역의 통치권을 부여했고, 그는 1516년까지 이 지역을 다스렸다. 이후 1532년부터 다시 오폴레 공작이 되어 통치하다가 154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강제로 그의 아들 페르디난트 2세 대공에게 넘겨줄 때까지 공작 지위를 유지했다. 또한 그는 1512년 라치부시의 공작 발렌틴과 상속 계약을 맺어, 발렌틴에게 자녀가 없을 경우 공작령을 상속받기로 하였다.

헝가리 궁정 내에서는 자폴리야 가문이 이끄는 마자르 파벌과 게오르크가 이끄는 독일 파벌이 대립하고 있었다. 게오르크는 라치부시 공작령과 오폴레 공작령을 확보하고, 보헤미아 국왕으로부터 오데르베르크, 보이텐, 타르노비츠 등의 영토를 담보로 얻으면서 슐레지엔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1521년 게오르크는 크로아티아의 군주 페타르 케겔로비크와의 합의를 통해 크로아티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헝가리에서도 철수했다. 이 합의는 1526년 러요시 2세에 의해 승인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1559년까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2. 2. 쿠데타와 안스바흐의 통치자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는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영지에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했다. 이에 1515년 5월 27일 게오르크는 형 카지미르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를 팔레센부르크 요새에 유폐시켰다. 이후 형제는 아버지의 영지를 나누어 가졌는데, 형 카지미르가 할아버지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가 확보했던 쿨름바흐와 바이로이트를 차지했고, 게오르크는 고향인 안스바흐 후작령의 후작 지위와 영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 황궁과 헝가리 왕국 왕궁을 자주 오갔기 때문에, 1515년부터 1527년까지는 형 카지미르가 실질적으로 안스바흐를 통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오르크는 1506년부터 외삼촌인 헝가리 국왕 울라슬로 2세의 궁정에서 활동하며 그의 아들 러요시 2세의 후견인이 되었고, 1516년에는 울라슬로 2세에 의해 헝가리 왕국의 섭정 중 한 명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주로 헝가리와 슐레지엔 지역에서의 활동에 집중했으며, 안스바흐 통치에는 1525년 자신의 영지에서 발생한 독일 농민전쟁 진압에 참여하는 등 제한적으로 관여했다. 1527년 형 카지미르가 사망한 후에는 단독으로 안스바흐를 다스렸으며, 동시에 조카 알브레히트 알키비아데스의 후견인으로서 1541년까지 쿨름바흐 변경백국 지역도 통치했다.

게오르크는 마르틴 루터종교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이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루터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루터와 서신을 교환하며 신학적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자신의 영지 내에서 루터교회와 칼뱅교회의 설교 및 포교 활동을 허용했으며, 1524년에는 공식적으로 종교 개혁 수용을 선언하고 영지 내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이러한 결정은 그가 통치하던 안스바흐뿐만 아니라, 1523년 확보한 하부 슐레지엔과 예겐도르프 공국 등 다른 영지에도 적용되었다.

2. 3. 영토 확장 정책

(게오르크 경건공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가 새겨져 있다.)]]

1523년 크르노프공작 게오르크 폰 스켈부르크가 사망하자, 게오르크는 그 뒤를 이어 크르노프 공작직을 차지하였다. 1525년 게오르크는 결혼을 통한 영토 확장을 계획하여 뮌스터베르크와 오일레의 공작인 카를 1세 폰 뮌스터베르크의 딸 헤드비가 폰 뮌스텐베르크 (1508-1531)와 결혼했다. 같은 해, 그는 튜튼 기사단장을 지낸 동생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과 함께 기사단 국가였던 프로이센을 세속 국가로 전환하는 계획을 세우고, 1525년 크라코프 조약을 맺어 이를 조정하였다.

1526년 외사촌인 헝가리의 왕 러요시 2세모하치 전투에서 사망한 후, 게오르크는 슐레지엔 전체의 통치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헝가리를 차지한 황제 페르디난트 1세에 의해 그의 시도는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오르크는 여전히 슐레지엔 내에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오르크는 슐레지엔을 확보하기 위해 페르디난트 1세와 전쟁을 벌였다. 그는 형 카지미르 폰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와 함께 출정했으며, 전쟁으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영지 관리는 신뢰하던 동생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에게 맡겼다. 알브레히트는 동시에 쿨름바흐와 바이로이트의 통치권도 대행하였다. 1527년 형 카지미르가 전쟁 중 사망하자, 게오르크는 아버지 프리드리히와 화해하고 팔레센부르크 요새에 있던 아버지를 불러들였다.

형 카지미르가 사망한 후, 게오르크는 그의 어린 아들인 조카 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는 조카를 대신하여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및 바이로이트후작직을 계승했지만, 조카가 만 18세가 되면 성인식을 치름과 동시에 쿨름바흐와 바이로이트의 후작직을 양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게오르크는 조카 알브레히트를 보호하였고, 형 카지미르가 남긴 빚을 대신 청산하였으며, 조카의 교육은 또 다른 동생인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이 맡았다. 1541년 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가 성년이 되자 약속대로 쿨름바흐와 바이로이트 후작직을 조카에게 인계하였다.

게오르크의 권위는 각 공작과의 세습 조약을 통해 라치부르츠 공작령과 오펠른 공작령을 획득하고, 빚을 갚을 수 없었던 보헤미아 국왕으로부터 담보로 오데르베르크, 보이텐, 타르노비츠 영토를 얻으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예게른도르프 공작령을 추가로 합병함으로써, 게오르크는 상부 실레지아 전체를 소유하게 되었다.

2. 4. 종교개혁 운동에 개입

게오르크는 마르틴 루터종교 개혁에 영향을 받아 종교 개혁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521년 보름스 어전 회의에서 마르틴 루터가 이단으로 고발되었을 때, 게오르크는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루터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뉘른베르크의 성 로렌스 교회와 성 세발두스 교회에서 루터의 강연을 직접 참관하기도 했다. 루터의 신약성서 번역을 연구하며 개인적인 신념을 확립한 그는 종교 개혁 운동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친척들과 마르틴 루터종교 개혁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했으며, 이미 자신의 영지에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선교와 설교를 허용하고 있었다. 동생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은 종교는 개인의 양심 문제라고 답했다. 1523년에는 하부 슐레지엔과 예겐도르프 공작령에도 포교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1524년 종교 개혁 수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베를린 광장의 승리대로에 세워진 게오르크와 요아힘 2세 헥토르의 흉상 (1900년 12월 22일)


뉘른베르크의 성 세발드 성당의 창문에 새겨진 게오르크의 프레스코화


1524년부터 1526년까지 독일 농민 전쟁이 일어났고 1531년에는 슈말칼덴 동맹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게오르크는 황제 카를 5세의 자문역을 맡았다. 그는 황제 및 가톨릭 제후들과 소통하며 종교 개혁 운동 확산을 막는 동시에 폭력 사태를 예방하려 노력했다. 헝가리의 국왕이었던 외사촌 러요시 2세가 개혁 운동에 동조하면서 그의 활동은 더욱 힘을 얻었다. 레그니차, 브제크, 올로우의 공작 프리드리히 2세 등 일부 슐레지엔 지역 공작들도 종교 개혁을 지지하며 복음 확산에 기여했다.

게오르크는 마르틴 루터, 필리프 멜란히톤, 우르바누스 레기우스 등 개혁가들과 지속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수도원의 복음화, 수도원 재산의 교육적 활용(특히 학교 설립) 등 개혁 방안을 논의하고, 복음 전파와 교회 조직을 위해 유능한 인물들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형 카지미르 폰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가 통치하던 쿨름바흐 등에서는 개혁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구교 의식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루터 교리에 따른 설교는 허용되었다. 1527년 형 카지미르 사후, 조카 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의 후견인으로서 쿨름바흐와 바이로이트를 통치하게 되면서, 요한 폰 슈바르첸베르크 같은 조언자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켄 영토에서 본격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영지 내 교회와 수도원에서 금, 은, 보석, 성물 등을 거두어들였고, 그 수익금 중 5만 플로린을 사용하여 형 카지미르의 빚을 갚았다.[1] 1533년에는 뉘른베르크 시의회와 협력하여 작센 선제후국을 모델로 한 교회 질서인 '브란덴부르크-뉘른베르크 교회 헌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영지(프랑켄, 상부 슐레지엔)에 도입했다.

1529년 슈파이어 제국 의회와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게오르크는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의 포교권 허용을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회의에서는 황제가 복음주의 설교 금지를 요구했을 때 이에 반대했으며, 황제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슐레지엔 영토 전체를 대가로 황제 지지를 제안했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또한 조카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르를 설득하여 종교 개혁을 지지하도록 이끌었다.

게오르크는 슈말칼덴 동맹의 무력 저항 노선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영지 백성들이 동맹에 참여하는 것을 묵인했다. 그는 작센 선제후 요한 다음으로 개혁 신앙을 옹호한 주요 제후로 평가받았다. 1541년 레겐스부르크 종교 회의에 참여하여, 조카 요아힘 2세 헥토르에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내에서도 프로테스탄트 포교를 허용할 것을 다시 한번 요구했다. 이는 그가 참석한 마지막 주요 종교 회의였다.

2. 5. 생애 후반

세 번째 부인 작센의 에밀리아


1531년 두 번째 부인 뮌스텐베르크의 헤드비가가 사망하자, 게오르크는 1532년 작센 공작 헨리 4세의 딸인 작센의 에밀리아(1516년 7월 27일 – 1591년 3월 9일)와 1533년 8월 25일 세 번째로 결혼하였다. 헤드비가와의 사이에서는 딸만 둘 있었으나, 에밀리아와의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작센의 에밀리아와의 자녀
이름생몰년배우자비고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조피1535년 3월 23일 – 1587년 2월 12일레그니차의 헨리 11세 (1560년 결혼)
바르바라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1536년 6월 17일 – 1591년 6월클로스터 히멜크론에서 사망
도르테아 카테리나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1538년 – 1604년플라우엔의 헨리 5세, 마이센의 부르크그라프 (1556년 결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1539년 – 1603년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프로이센 공국 섭정



1532년부터는 라치부시의 영지를 매입하고 라치부시의 프린스(Prince, 후작) 직위를 획득했다. 그는 라치부시 공국에서 얻은 수입으로 1535년 라치부시에 사냥용 별장을 건립하였다. 1534년 8월 8일에는 프랑켄에서 광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신규 이민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광부들은 주택과 마을을 약탈하고 일부 주민과 관료를 살해했으며, 여러 광산 및 제철소를 파괴했다. 게오르크는 군대의 도움을 받아 광부들의 폭동을 진압했다.

1541년 조카 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가 성인이 되자, 게오르크는 그에게 쿨름바흐와 바이로이트의 후작직을 넘겨주었다. 열성적인 신앙인이었던 게오르크는 자신의 영지에서 복음주의자들의 포교 활동을 지원했지만,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았다. 같은 해 1541년에는 타노우스키 지역의 분쟁에 개입하여 타노우스키의 통치권을 매입하였다. 또한, 군주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폴란드비톰 공작령과 크르노프 공작령을 매입하기도 했다.

게오르크는 모국어 외에도 체코어, 루마니아어, 라틴어, 세르비아어, 헝가리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고전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여러 작품에 대한 비평을 남겼으나, 그의 비평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이는 비평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게오르크에 대한 정치적인 반발의 성격이 강했다.

1543년 12월 27일 게오르크는 안스바흐에서 사망하여 안스바흐의 하일스브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비석은 로이 헤링(Loy Hering)이 제작했으며,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게오르크와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의 모습이 양 측면에 새겨져 있다.

3. 가족 관계



게오르크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베아트리체 데 프란게판(1480년 – 1510년경)으로, 1509년 1월 21일 헝가리 귈라에서 결혼했다. 그녀는 후냐디 왕가의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의 서자였던 요한 코르비누스의 미망인이었다. 게오르크와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으며, 베아트리체는 결혼 이듬해인 1510년에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은 뮌스터베르크-외스 공작 카렐 1세의 딸인 헤트비히 폰 뮌스터베르크-에르스(1508년–1531년)로, 1525년 1월 9일에 결혼했다. 헤트비히는 1531년에 사망했으며, 게오르크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다.

이름생몰년배우자
안나 마리아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1526년 12월 28일 – 1589년 5월 20일1544년 뷔르템베르크 공작 크리스토프
자비네1529년 5월 12일 – 1575년 11월 2일154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세 번째 부인은 작센 공작 하인리히 4세와 메클렌부르크의 카테리나의 딸인 작센의 에밀리(1516년 7월 27일 – 1591년 3월 9일)로, 1533년 8월 25일에 결혼했다. 에밀리는 1591년에 사망했으며, 게오르크와의 사이에서 네 자녀를 낳았다.

이름생몰년배우자 및 주요 사항
조피1535년 3월 23일 – 1587년 2월 12일1560년 레그니차 공작 헨리크 11세와 결혼
바르바라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1536년 6월 17일 – 1591년 6월미혼, 클로스터 히멜크론에서 사망
도르테아 카테리나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1538년 – 1604년1556년 마이센의 부르크그라프 플라우엔의 헨리 5세와 결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1539년 – 1603년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 프로이센 공국 섭정


4. 유산과 평가

게오르크는 슐레지엔과 프랑켄 지역에서 종교 개혁 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의 지지를 얻었으며, 레그니차 공작 프리드리히 2세, 뮌스터베르크 공작 카를 1세 등 다른 제후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며 자신의 영지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프로테스탄트 신앙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마르틴 루터와 지속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종교 개혁의 방향을 논의했고, 1529년 슈파이어 제국 의회와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포교권 허용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황제 카를 5세의 동생이자 대리인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가 슐레지엔 전체 영유권을 대가로 황제 측 지지를 제안했을 때 이를 단호히 거절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이러한 확고한 태도로 그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더불어 종교 개혁의 중요한 지지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조카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르를 설득하여 개혁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가계는 아들 없이 사망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대에서 단절되었다. 특히 그가 확보했던 오폴레와 라치부시 공작령은 호엔촐레른 가문이 아닌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베를린의 '승리의 거리'(Siegesallee)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조각가 하로 마크누센이 제작한 그룹 20에는 요아힘 2세 헥토르의 입상 옆에 게오르크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종교 개혁이라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크누센은 하일스브론 수도원 교회에 있는 게오르크의 초상 부조와 그림을 참고하여 이 흉상을 제작했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German People at the Close of the Middle Ages, Volume 5 Kegan Paul, Trench, Trubner & Co 1903
[2] 서적 Der Kaiser und die ...
[3] 문서 만약 동생 [[알브레히트 폰 프리드리히]]의 남자 후손이 단절되었을 때 게오르크의 후손이 프로이센 공국의 상속권을 획득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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