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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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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은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후작이자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후작이었다. 그는 아버지 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가 사망한 후 영지를 상속받았으며, 사촌 알브레히트 알키비아데스가 사망한 후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을 겸임했다. 또한 사촌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섭정으로서 프로이센을 통치하며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하고 루터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그는 프랑켄과 프로이센에서 행정 운영을 체계화하고 재정을 개선했으며, 1603년 사망하여 호엔촐레른 가문의 안스바흐-예게른도르프 가문을 단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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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기본 정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1601년경
이름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독일어 이름Georg Friedrich der Ältere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데어 엘테레)
가문호엔촐레른 가문
출생일1539년 4월 5일
출생지안스바흐
사망일1603년 4월 25일
사망지안스바흐
배우자엘리자베트 폰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
조피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배우자 유형배우자
작위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시작: 1543년
종료: 1603년
선임자: 게오르크
후임자: 요아힘 에른스트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시작: 1553년
종료: 1603년
선임자: 알브레히트 알키비아데스
후임자: 크리스티안
가족 관계
아버지게오르크
어머니에밀리에 폰 작센
기타 정보
참고 문헌Ingrao, Charles W. State and Society in Early Modern Austria (1994)
George Frederick, Margrave of Brandenburg-Ansbach and Bayreuth (British Museum)

2. 생애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와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후작이었던 아버지 게오르크 경건공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543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후작직과 광대한 영지를 상속받았으며, 초기에는 어머니와 친척들의 후견 아래 성장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사촌의 영지를 상속받아 통치 영역을 넓혔으며, 뛰어난 행정 및 재정 관리 능력을 발휘하여 영지를 안정시키고 발전시켰다. 특히 프랑켄 지역과 프로이센 공국에서의 개혁 활동이 두드러졌다. 1577년부터는 정신 질환을 앓던 사촌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를 대신하여 프로이센 공국의 섭정을 맡기도 했다.

두 번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를 얻지 못하자, 가문의 영지를 보존하기 위해 1598년 게라 가문 조약을 통해 호엔촐레른 가문의 본가 후손들에게 영지를 상속하도록 미리 정했다. 1603년 안스바흐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죽음으로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가문의 안스바흐-예게른도르프 계열은 단절되었다. 그의 유해는 하일스브룬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2. 1. 초기 활동

아버지 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와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후작이었던 아버지 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와 어머니 작센의 에밀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에밀리아는 작센의 경건공 하인리히의 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분가의 창시자인 프리드리히 2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쿨름바흐 후작이다. 아버지 게오르크는 세 번 결혼했으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그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에밀리아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154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어린 나이에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후작직을 물려받았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폴란드 왕국 내의 오폴레 공작령, 라치부시 공작령, 크르노프 공작령과 해당 지역의 공작 작위, 그리고 새로 획득한 예겐스도르프와 하부 슐레지엔의 영지까지 상속받았다.

아버지 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가 사망한 후, 그의 교육은 어머니 작센의 에밀리아가 맡았다. 어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를 대신하여 그의 영지는 1553년 무렵까지 사촌인 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가 대리인으로서 관리했다. 다른 삼촌인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 역시 그의 섭정이자 후견인으로서 통치를 도왔다.

삼촌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은 종교 개혁과 프로테스탄트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은 과거 자신의 조카이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사촌 형인 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에게도 신앙의 자유와 종교 개혁 사상을 전파한 바 있다.

2. 2. 정치 활동

7촌 조카딸이자 첫 부인인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의 엘리자베스. 1579년 사후 그려진 작품이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집권 기간 동안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국교로 프로테스탄트 루터교를 채택하였으나 신앙의 자유는 보장하였다. 1548년에는 광산 관련 법령을 직접 반포하였다.

1557년 사촌 형 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가 사망하자 그의 영지였던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와 바이로이트를 상속받아 통치 영역을 넓혔다. 이 상속 과정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의 영지를 차지하려 하였으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바이로이트 지역 상속 전부터 광산 채굴로 부당 이익을 얻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황제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549년 페르디난트 1세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어리다는 이유로 오폴레 공작령을 차지하고, 1551년부터는 존 지그문트 자폴리아와 그의 어머니 이사벨라 자폴리아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통치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1556년에야 오폴레 공작령을 되찾을 수 있었으나, 이후에도 합스부르크 왕가와 영유권 갈등이 지속되었다.[3] 페르디난트 1세는 실레지아, 비톰, 예겐스도르프, 오데르스부르크 등의 영지를 요구하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뛰어난 행정 및 재정 관리 능력을 바탕으로 영지 경영에 힘썼다. 고향인 프랑켄 지역의 행정 운영 체계를 체계화하고 효율화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영지에도 유사한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제2차 변경백 전쟁으로 황폐해진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지역의 재건에 주력했다. 적극적인 인구 유입 정책을 통해 재정을 개선하고 군사력을 확충하였으며, 교역 거점과 시장을 조성하여 상업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또한, 쿨름바흐 지역에 개신교 관료를 적극 등용하고 개신교 포교를 장려하여 지역 교회의 지지를 얻었으며, 이 지역 개신교 교회는 그를 종교적 지도자로 추대하기도 했다. 쿨름바흐에는 쿨름바흐 철학교(Schola Culmbachiana)를 설립하여 교육 재정비에도 힘썼고, 팔레센부르크 성의 재정비를 위해 건축가 카스퍼 비셔를 파견하기도 했다.

1577년부터는 크라쿠프 조약에 따라 정신 질환을 앓던 사촌 동생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를 대신하여 프로이센 공국의 섭정을 맡았다. 1578년 폴란드 국왕 스테판 바토리는 그의 섭정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프로이센에서도 프랑켄의 사례를 본보기 삼아 행정, 재정, 법률 시스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법과 질서 확립, 효율적인 세금 징수 방안 마련에 주력했다. 많은 프랑켄 출신 관료들을 프로이센으로 파견하여 개혁을 실행하도록 했다.

폴란드 내 영지에는 주지사를 파견하여 위임 통치하였으며, 관료 채용 시 독일어폴란드어 구사 능력을 엄격히 검증했다. 크르노프 공국에서는 체코어로 된 모라비아 토지법을 적용하여 효과적으로 통치했다. 그는 사회 개혁의 일환으로 영지 내 상류 계급의 권한을 제한하고 재산, 노동, 상속 등에 엄격한 규제를 적용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슐레지엔 지역의 재정 안정에 기여하였지만, 친개신교 정책은 일부 반발을 사 종교적 갈등의 소지를 남기기도 했다.

2. 3. 근친 결혼과 상속권 문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 두번째 부인 브론스위크-뤼네부르크의 소피아가 새겨진 브란덴부르크 안스바흐, 쿨름바흐 지역의 메달


1558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의 엘리자베스와 첫 번째 결혼을 하였다. 엘리자베스 역시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으로, 요한 폰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의 장녀였다. 두 사람은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를 공통 조상으로 두는 친척 관계였다.[4] 이러한 가문 내 결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578년 엘리자베스는 동프로이센 방문 중 사망하였다.

첫 부인이 사망하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1579년 브론스위크-뤼네부르크 공작 빌헬름과 덴마크의 도로테아의 딸인 브론스위크-뤼네부르크의 소피아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소피아와의 사이에서도 자녀를 얻지 못했다.

두 번의 결혼에도 후계자가 없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가문의 영지를 보존하기 위해 상속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는 1598년 게라 가문 조약(Geraer Hausvertrag)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그가 남자 상속자 없이 사망하거나 그의 남자 후계자들이 모두 사망할 경우, 그의 지위와 영지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의 아들들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요한 게오르크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 복잡한 친족 관계(7촌 조카이자 매형)에 있었다.[5] 이 조약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영지를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1599년 4월 29일 이 조약의 효력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조약에 따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사후 안스바흐 후작령은 요아힘 에른스트에게,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후작령 (또는 바이로이트 후작령)은 크리스티안에게 상속되기로 결정되었다. 이들은 모두 요한 게오르크의 아들들이자 요아힘 2세 헥토르의 손자들이었으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첫 부인 엘리자베스의 조카뻘(재종손)이기도 했다.[6] 특히 크리스티안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사촌인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딸 프로이센의 마리아와 결혼하여 인척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러나 이 상속 계획 전부에 동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슐레지엔 지역 영지(오폴레, 라치부시 등)의 상속에 반발하였고, 이는 후일 슐레지엔 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해당 영지들은 브란덴부르크 가문이 아닌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갔다.

2. 4. 생애 후반

하일스브룬 수도원에 있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석관


하일스브룬 수도원에 있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석관


1561년 4월 23일부터 폴란드크르노프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게오르크부르크를 건설했다. 그는 인근 야산에서 광산을 채굴하게 하여 지역의 자체 소득원을 만들었으며, 소금 무역 시장, 양조장, 정원이 있는 주점 등을 건설하여 도시가 스스로 소득을 확보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궁정은 르네상스 시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나, 1552년1554년의 마르그라베 전투 중에 파괴되었다. 이외에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뷀츠부르크와 바이로이트에도 궁정을 소유하고 있었다.

1577년, 우울증이 심해져 정신 질환을 앓게 된 사촌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폰 호엔촐레른의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프로이센 공국의 섭정을 맡게 되었다. 폴란드 왕국 내 일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1578년 폴란드의 국왕 스테판 바토리로부터 섭정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같은 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바르샤바로 가서 폴란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뛰어난 행정 관리 능력과 재정 운영 능력을 바탕으로 스테판 바토리의 협력을 얻어 프로이센 공국 내 영주의 권한을 강화했다. 또한, 폴란드어독일어를 모두 구사하는 인물을 직접 선발하여 관료로 채용하고, 프랑켄 지역의 관료들을 프로이센 공국으로 파견하여 행정 실무, 금융 정책, 조세 정책, 행정 관리 등 여러 제도를 프랑켄 지역의 모델을 따라 개혁했다. 이는 그가 고향 프랑켄에서 성공적으로 행정 운영을 전환하고 쿨름바흐 지역을 부흥시킨 경험에 기반한 것이었다.

종교적으로는 1577년 루터교회의 콩고드 협약에 정식으로 서명했으며, 1580년 이를 법전 형태인 콩고드의 책으로 편찬하여 성문화했다. 같은 해 9월 18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루돌프 2세로부터 관세와 통행세를 면제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두 번 결혼했다. 1558년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 변경백 요한의 장녀 엘리자베트(1540년–1578년)와 첫 결혼을 했으나, 엘리자베트는 1578년 동프로이센으로 가던 중 사망했다. 1년 후인 1579년, 뤼네부르크 후 빌헬름의 딸 조피(1563년–1639년)와 재혼했지만, 두 번의 결혼 모두 자녀를 얻지 못했다.

1603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안스바흐에서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가문의 오래된 가문인 안스바흐-예게른도르프 가문은 단절되었다. 후계자는 이미 1598년의 겔러아 가문법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본가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의 아들들 중, 다섯째 아들 크리스티안이 쿨름바흐를, 여섯째 아들 요아힘 에른스트가 안스바흐를 각각 상속받았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유해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묘소가 있는 안스바흐의 하일스브룬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그가 쿨름바흐에 설립한 교육 기관인 스콜라 쿨름바키아나(Schola Culmbachiana|스콜라 쿨름바키아나lat)는 후에 '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김나지움'(Markgraf-Georg-Friedrich-Gymnasium)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3. 사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1603년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가문의 오래된 가문인 안스바흐-예게른도르프 가문은 단절되었다.

그의 영지 상속 문제는 이미 1598년 겔러아 가문 조약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었다. 이 조약에 따라 본가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의 아들들이 영지를 나누어 상속받게 되었다. 다섯째 아들 크리스티안은 쿨름바흐 지역을, 여섯째 아들 요아힘 에른스트는 안스바흐 지역을 각각 물려받았다.

그러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소유했던 영지 중 크르노프, 오데르 지역, 하부 슐레지엔 등 일부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차지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과정에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가졌던 하부 슐레지엔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아버지 게오르크가 과거에 얻고자 했던 슐레지엔 지방 전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유해는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가문의 전통적인 매장지인 하일스브론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한편, 그가 쿨름바흐에 설립했던 교육 기관인 Schola Culmbachiana|스콜라 쿨름바키아나deu는 후대에 Markgraf-Georg-Friedrich-Gymnasium|마르크그라프-게오르크-프리드리히-김나지움deu (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김나지움)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4. 가계

게오르크친할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증조할아버지: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증조할머니:
작센의 안나친할머니:
폴란드의 조피아외증조할아버지:
카지미에시 4세외증조할머니: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어머니:
작센의 에밀리에외할아버지:
하인리히 4세외증조할아버지:
알브레히트 3세외증조할머니:
포데브라디의 시도니에외할머니:
메클렌부르크의 카타리나외외증조할아버지:
마그누스 2세외외증조할머니:
포메라니아의 조피



154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교육은 어머니 작센의 에밀리에가 맡았고, 그의 영지는 1553년경까지 사촌 형인 알브레히트 알키비아데스가 대리인으로 관리했다. 다른 삼촌인 알브레히트 역시 그의 후견인으로서 통치를 지지했으며, 종교 개혁과 프로테스탄트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두 번 결혼했으나 자녀를 얻지 못했다.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영지를 보존하기 위해 1598년 게라 가문 조약(Geraer Hausvertrag)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만약 자신이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거나 남자 후계자들이 모두 사망할 경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가문의 요한 게오르크의 아들들에게 자신의 지위를 모두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요한 게오르크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7촌 조카이자, 그의 누나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자비나의 남편이기도 하여 매형이 되는 복잡한 관계였다. (단, 후계자로 지명된 아들들은 요한 게오르크가 자비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아니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후계자로 내정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모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의 아들들이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6촌 형인 요아힘 2세 헥토르의 손자들이며, 그의 첫 부인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의 엘리자베트에게는 재종손(조카의 손자)이 된다.[6] 특히 크리스티안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사촌 동생인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딸 프로이센의 마리와 결혼하여,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에게는 5촌 조카사위도 되는 관계였다.

1603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랑켄계 분가인 안스바흐-예겐스도르프 가문은 단절되었다. 그의 영지는 게라 가문 조약에 따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가문의 크리스티안과 요아힘 에른스트에게 상속되었다.

참조

[1] 서적 State and Society in Early Modern Austria https://books.google[...] Purdue University Press 1994
[2] 웹사이트 George Frederick, Margrave of Brandenburg-Ansbach and Bayreuth https://www.britishm[...] 2022-12-29
[3] 문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보헤미아 왕 자격으로 오폴레 지역의 영유권을 요구하였다.
[4] 문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7촌 아저씨가 되며 요한 폰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르]]는 그의 6촌 형이 된다.
[5] 문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에게는 6촌 형 요아힘 2세 헥토르의 아들로, 7촌 조카가 된다.
[6] 문서 "*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요한 키케로-요아힘 1세 네스토르-요아힘 2세 헥토르-요한 게오르크-요아힘 프리드리히, 요아힘 에른스트, 크리스티안
*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프리드리히 2세-게오르크-게오르크 프리드리히
*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요한 키케로-요아힘 1세 네스토르-요한 폰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의 엘리자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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