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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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술국적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8명의 친일파를 지칭한다.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가 포함되며, 이들은 작위 수여 외에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이들의 친일 행적과 해방 이후 후손들의 재산 유지 등은 한국 사회에서 친일 청산 문제와 관련하여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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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병합 - 한일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한일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는 1909년 일진회 이용구가 발표한 문서로, 한일 병합을 통해 조선의 위기 극복과 조선 백성의 동등한 대우를 주장했으나, 일본의 강제 병합을 정당화하고 일진회의 친일 행태를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는다. - 한일 병합 - 국민동지찬성회
국민동지찬성회는 1910년 1월 23일에 결성되어 한일 병합을 지지하며 청원서 발송 등의 활동을 펼쳤으나 언론의 비판과 내부 문제에 직면하여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해산된 단체이다. - 대한제국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으로 설립되어 1987년까지 사용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으로,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광복 후에는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어 사용되다가 서대문독립공원으로 조성되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여 현재는 역사 교육의 장이자 과거사 반성의 공간이다. - 대한제국 - 의민태자
의민태자는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로, 영친왕 책봉 후 황태자가 되었으나 일본 유학 및 군 복무, 일본 황족과의 정략결혼, 광복 후 국적 미인정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다 귀국 후 영원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의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친일파 - 김기진
김기진은 팔봉이라는 호를 사용한 한국의 문학평론가, 소설가, 시인으로, KAPF에서 활동하며 경향파 문학 이론을 이끌었으나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에는 반공주의 문인으로 활동했다. - 친일파 - 박태원 (1909년)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로, 모더니즘 소설을 주로 썼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 사망했다.
경술국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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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정보 | |
제목 (한글) | 경술국적 |
제목 (한자) | 庚戌國賊 |
제목 (히라가나) | 코우쥬츠코쿠조쿠 |
제목 (가타카나) | 쿄ンスルククチョク |
주요 인물 | |
인물 목록 |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 |
2. 경술국적 명단
다음은 경술국적 8인의 명단이다. 이들은 모두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았으며, 해방 이후에도 그 후손들이 재산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여준다.
성명 | 생몰 연대 (당시 나이) | 당시 직위 | 이후 경력 |
---|---|---|---|
이완용 | 1858년~1926년 (52세) | 내각총리대신 | 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
윤덕영 | 1873년~1940년 (37세) | 시종원경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
민병석 | 1858년~1940년 (52세) | 궁내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고영희 | 1849년~1916년 (61세) | 탁지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박제순 | 1858년~1916년 (52세) | 외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조중응 | 1860년~1919년 (50세) | 법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병무 | 1864년~1926년 (46세) |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 자작 |
조민희 | 1859년~1931년 (51세) | 승녕부총관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2. 1. 이완용 (李完用)

1858년~1926년 (52세). 내각총리대신이었다. 이후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을 지냈다. 을사오적, 정미칠적에도 포함된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서 그의 재산을 몰수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여전히 부유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2. 윤덕영 (尹德榮)

1873년~1940년 (37세). 당시 시종원경이었다. 이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2. 3. 민병석 (閔丙奭)

1858년~1940년 (52세). 궁내부대신을 지냈다.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2. 4. 고영희 (高永喜)

1849년~1916년 고영희는 경술국적 당시 탁지부대신이었다.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2. 5. 박제순 (朴齊純)
1858년~1916년(52세). 을사오적 중 한 명이다. 당시 외부대신이었으며, 이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2. 6. 조중응 (趙重應)
1860년에 태어나 법부대신을 지냈다. 1919년에 사망했다.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2. 7. 이병무 (李秉武)

1864년~1926년 (46세).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이었으며,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2. 8. 조민희 (趙民熙)

1859년에 태어나 1931년에 사망했다. 당시 나이는 51세였다. 승녕부총관을 지냈으며, 이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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