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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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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일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는 1909년 12월 4일 일진회가 순종, 한국통감 소네 아라스케,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제출한 성명서이다. 이 성명서는 일본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대한제국을 위해 희생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한일 병합을 통해 대한제국 백성이 일본의 일등 국민으로 대우받고 정부와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진회는 일본과 대등한 합방을 원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의한 한국의 일방적인 병합이 이루어졌다. 이 성명서는 일진회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앞장선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으며, 한국 사회에서 친일 잔재 청산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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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문서 정보
제목한일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원제목 (일본어)韓日合邦を要求する声明書
배경
발표 시기대한제국 말기
시대적 배경한일 병합 직전
내용
주장 내용일본과의 합방 요구
일진회 주도
한국의 국권 포기 및 일본 편입 주장
핵심 주장한국과 일본은 본래 한 뿌리이며, 일본에 합방되는 것이 한국의 발전과 평화를 위한 길
역사적 의미친일파의 주장을 보여주는 문서
한일합방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한 문서
관련 단체
주도 단체일진회
추가 정보
논란매국 행위라는 비판
한국의 독립 의지를 훼손한 행위라는 비판
외부 링크
관련 자료한일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위키문헌)
韓日合邦を要求する声明書 (일본어 위키문헌)

2. 성명서의 배경

1909년 12월 3일 서울 종로구 상업회의소에서 일진회대한협회의 정견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양측의 합동 논의는 결렬되었다. 그날 저녁 일진회 임시총회에서 회장 이용구는 "나라와 백성의 형세가 절박하여 황실 존영과 인민 복리를 위해 정합방을 성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가결했다.[4]

12월 4일, 이용구는 100만 일진회 회원 이름으로 대한제국 순종과 내각, 통감부에 〈한일합방상주문〉을 제출하고,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는 한일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전국 동포에게 포고한 성명서"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4]

이 성명서 발표로 한일 병합 요구가 공세적으로 일어났고, 대한제국의 여론은 찬반 양측으로 분열되어 갈등을 빚었다. 친일 성향이었지만 일진회 주도의 병합을 반대하는 이완용국시유세단도 갈등에 가담했다. 약 8개월 간의 대립 끝에 1910년 8월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진회의 성명서는 실현되었다.[4]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암살되자, 이용구는 12월 4일 일진회 회원들과 연명으로 성명서를 제출했다. 이 성명서는 순종, 한국통감 소네 아라스케,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전달되었다.[4]

성명서에서 일진회는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막대한 비용과 수많은 인명을 소모하여 한국을 독립시켜 주었다. 또 러일전쟁에서는 일본의 손해가 갑오의 스무 배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러시아의 입에 삼켜지는 고기가 되는 것을 막고,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유지했다. 한국은 이에 감사하지 않고, 여기저기 나라에 매달리고, 외교권이 빼앗기고, 보호 조약에 이른 것은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제3차 한일협약(정미조약), 헤이그 밀사 사건도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지만, 이것도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우리나라 황제 폐하와 일본 천황 폐하께 간청하여, 조선인도 일본인과 같은 일등 국민의 대우를 받고, 정부와 사회를 발전시키자.”라고 주장했다.[5] 즉,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가 새롭게 하나의 정치 기관을 설립하고, 한국과 일본이 대등하게 합방하여 하나의 대제국을 만들 것을 요구했다.

이용구는 일본의 우치다 료헤이와 함께 일본과 한국의 대등한 입장에서의 합방을 희망했지만, 실제로는 성명서 요구 내용은 거부되었고, 일본에 의한 한국의 일방적인 병합(한국]의 주권 상실,

2. 1. 대한제국의 위기

1905년 일본 제국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고,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보호국 신세로 전락했다.[5]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과 한일신협약(정미조약) 체결은 대한제국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5] 이러한 상황에서 1909년 12월 4일 일진회한일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4]

2. 2. 일진회의 등장

1904년, 러일 전쟁에서 한국 주둔 일본군 통역으로 조선에 귀국한 송병준독립협회 잔당인 윤시병과 함께 일진회를 창설했다.[1] 일진회는 초기에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대한제국의 부흥을 목표로 했으나, 손병희가 이탈하면서 일본과의 합방을 추진하는 조직으로 변질되었다.[2] 1906년 10월, 이용구는 일본 우익 단체인 흑룡회를 이끄는 우치다 료헤이와 회담하면서 한일 합방 운동을 시작했다.[3]

3. 성명서의 주요 내용

일진회는 한일합방성명서를 통해 단군과 조선 태조를 거론하며 나라의 독립은 당연하지만, 대한제국의 상황은 매우 위태롭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조선을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외교권을 빼앗기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하는 등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또한, 헤이그 밀사 사건과 이토 히로부미 암살 등으로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의병 항쟁으로 국내 정세 또한 혼란스러웠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진회는 한일 병합이 대한제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대한제국 백성이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정부와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했다.[5]

3. 1. 대한제국 위기의 원인

청일 전쟁일본이 거액의 군사비와 수만 명의 군사를 희생시켜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 주었는데도 정사를 어지럽힌 것은 조선 사람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라고 주장했다.[5] 러일 전쟁 때도 일본이 다시금 러시아에 먹힐 뻔한 조선을 구출하고 동양 평화를 달성했으나, 이를 우의로 갚지 못하고 이 나라 저 나라에 붙었다가 결국 외교권을 넘겨주게 된 것도 조선 사람의 잘못이라고 했다.[5] 그럼에도 호의로 대해주는 일본을 배신한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거듭 잘못을 저질러, 결국 한일신협약을 불러왔다고 했다.[5]

고종의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체결된 정미7조약 이후에는 마땅히 산업을 발전시키고 교육에 힘써야 하건만 "폭도와 비적"으로 표현된 의병 항쟁으로 정국이 혼란해졌으며, 권세와 이속을 다투면서 나라를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대한제국을 위해 수고를 다한 은혜를 잊기 어려운 이토 히로부미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저격하여 일본의 여론을 악화시켰다고 주장했다.[5]

3. 2. 한일 병합의 당위성

청일 전쟁일본이 거액의 군사비와 수만 명의 군사를 희생시켜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 주었지만, 정사를 어지럽힌 것은 조선 사람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라고 주장했다.[5] 러일 전쟁 때도 일본이 다시금 러시아에 먹힐 뻔한 조선을 구출하고 동양 평화를 달성했으나, 이를 우의로 갚지 못하고 여러 나라에 붙었다가 결국 외교권을 넘겨주게 된 것도 조선 사람의 잘못이라고 보았다.[5] 그럼에도 호의로 대해주는 일본을 배신한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거듭 잘못을 저질러, 결국 한일신협약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정미7조약 체결 이후에는 마땅히 산업을 발전시키고 교육에 힘써야 하건만 "폭도와 비적"으로 표현된 의병 항쟁으로 정국이 혼란해졌으며, 권세와 이속을 다투면서 나라를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대한제국을 위해 수고를 다한 은혜를 잊기 어려운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하여 일본의 여론을 악화시켰다고 보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5백 년 사직이 폐허가 되고 2천만 백성도 하나도 남지 않게 될 비참한 지경이라는 것이 일진회의 인식이였다. 국가의 재정도 바닥났으며 국가기밀도, 통신수단도, 법률도 한국인의 손에 없는 상황에서 나라의 운명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져가는 중이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일진회는 일본의 여론이 주장하는 한일 병합을 대한제국 순종 황제메이지 천황이 받아들이도록 호소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한일 병합이 만 번의 죽을 고비를 넘어 한 번 살아남을 길이며, 대한제국 백성이 일등 대우의 복리를 누리고 정부와 사회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도라고 주장했다.[5]

4. 성명서 발표 이후의 경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자, 이용구는 같은 해 12월 4일 일진회 회원들과 연명으로 순종(순종), 한국통감 소네 아라스케,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성명서를 제출했다.[4] 송병준은 이를 지지하는 “일한 합방의 선결 문제”를 제출했다.[4]

이 성명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한국을 위해 희생했음에도, 한국이 외세에 의존하며 보호 조약, 제3차 한일협약(정미조약), 헤이그 밀사 사건 등을 자초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하나의 정치 기관을 설립하고, 한국과 일본이 대등하게 합방하여 하나의 대제국을 만들 것을 요구했다.[5]

이용구는 우치다 료헤이와 함께 일본과 한국의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을 추진했지만, 성명서의 요구 내용은 거부되었고, 일본에 의한 한국의 일방적인 병합(한국]의 주권 상실,

4. 1. 여론의 분열과 갈등

성명서 발표 이후, 대한제국의 여론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친일 성향의 세력 내부에서도 갈등이 있었는데, 이완용 등은 일진회 주도의 병합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4]

4. 2. 한일 병합 조약 체결과 일진회 해산

1910년 8월 22일 한국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9월 12일 일본 정부는 일진회에 해산을 명령했고, 9월 25일 일진회는 해산되었다.[6] 이는 한국통감부가 조선 내부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의 정치결사를 전면적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일진회는 해산 비용으로 150000JPY을 받고 다른 정치 결사와 마찬가지로 해산했다.[6]

5. 한일합방성명서에 대한 평가

1909년 12월 4일, 일진회는 순종, 한국통감 소네 아라스케,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한일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제출했다.[4] 이 성명서는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한국을 위해 희생했다고 주장하며, 한국과 일본이 대등하게 합방하여 하나의 대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5]

그러나 이 성명서는 결국 일본의 일방적인 한국 병합으로 이어졌고, 1910년 8월 22일 한국 병합 조약 체결 후, 9월 12일 일진회는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6]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한일합방성명서는 친일 단체인 일진회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앞장선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5. 1. 진보/보수 진영의 시각

진보 진영에서는 일진회를 민족 반역자로 규정하고, 이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일진회는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서 성장했으며, 송병준, 이용구 등은 일본과의 합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들은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한국을 위해 희생했다는 주장을 펼치며 합방을 정당화하려 했다.[5] 그러나 진보 진영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일제의 침략을 은폐하고,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간주한다.

반면,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일진회의 행위를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옹호하기도 한다. 당시 조선은 양반 중심의 사회 구조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며, 일진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과의 합방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용구는 일본과 한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하나의 대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결국 일본에 의한 일방적인 병합으로 이어졌고, 한국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일진회는 해산되었다.[6]

5. 2. 역사적 교훈

한일합방성명서는 과거사 청산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성명서는 일진회와 같은 친일 단체의 주도로 작성되었으며, 대한제국의 주권 상실과 조선반도의 일본령화를 초래했다.[6]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친일 잔재 청산이 여전히 한국 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친일파 청산과 역사 정의 실현을 주요 정책 목표로 삼고 있다. 한일합방성명서는 이러한 정책 방향의 역사적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송병준과 같은 친일 인물들은 조선귀족으로 자작에 서열화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내는 등[8] 일제강점기 동안 특권을 누렸던 반면, 이용구와 같이 합방을 주도했던 인물조차 일본에 의해 배신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7] 이는 친일 행위의 대가와 역사적 심판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참조

[1] 서적 近代朝鮮におけるナショナリズムと「シンボル」の変遷に関する一考察─ 独立協会の解散以後の独立門をめぐって ─ https://www.ritsumei[...] 立命館国際研究 2016-06-01 # 날짜 형식을 YYYY-MM-DD로 변환, 일 정보가 없으므로 1로 설정
[2] 서적 旧韓末における羅喆の訪日活動-朝鮮開化派亡命政客および玄洋社系人士との交流を中心に- https://www.ritsumei[...] 『立命館文学』立命館大学人文学会 2018-03-01 # 날짜 형식을 YYYY-MM-DD로 변환, 일 정보가 없으므로 1로 설정
[3] 서적 李容九の日韓合邦(聯邦)運動 : 資料的に https://www.ritsumei[...] 九州大学文学部 1970-03-25
[4] 웹사이트 日韓合邦ノ先決問題・宋秉畯提出 https://www.jacar.ar[...]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22-01-12
[5] 간행물 統監府文書 8、警秘第4106号の1
[6] 서적 日韓合邦秘史
[7] 서적 日本のアジア主義 # 출판사 정보 부족 1980-01-01 # 날짜 형식을 YYYY-MM-DD로 변환, 월, 일 정보가 없으므로 1로 설정
[8] 서적 親日政治100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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