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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동지찬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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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민동지찬성회는 1910년 1월 23일에 결성된 한일 병합 찬성 단체이다. 고관 민영휘, 이지용, 실업인 이학재 등이 고문으로 참여하고, 이범찬이 회장을 맡았으며, 일진회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다. 한일 병합을 지지하며 청원서 발송, 토론회 개최 등의 활동을 펼쳤으나, 언론의 비판과 내부 문제에 직면했다. 결국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진회와 같은 날인 9월 12일에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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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동지찬성회
기본 정보
태극기
국민동지찬성회에서 사용한 태극기
국문 명칭국민동지찬성회
한문 명칭國民同志贊成會
결성
결성 시기1920년대
결성 배경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
활동
주요 활동민족 운동 자금 지원
교육 사업 지원
언론 활동 지원
해체
해체 시기일제강점기 말
해체 이유일제의 탄압

2. 결성

1910년 1월 23일에 설립되어 발기회를 가졌다. 이 단체는 비슷한 성격의 다른 단체에 비해 거물급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고 조직 체계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다. 활동 경비는 일진회가 부담했으며, 일진회 간부들과 따로 회동을 갖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2. 1. 주요 인물

1910년 1월 23일 국민동지찬성회 발기회 당시, 민영휘, 이지용, 이학재 등이 고문으로 참여했고, 이범찬이 회장, 서창보가 부회장, 조덕하가 총무를 맡는 등 거물급 인사들이 조직에 포함되어 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일진회는 활동 경비를 부담하고 간부들과의 회동을 통해 국민동지찬성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3. 활동

국민동지찬성회는 찬성원 망첩 및 취지서 발간, 대신들에게 망첩 발송,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내각에 "정합방" 청원서 제출, 한일 병합 촉구 장서 발송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한일 병합 반대 여론에 부담을 느낀 대신들은 망첩을 모두 돌려보냈고, 총재로 추천된 김종한도 사양했다. 회원 수 과장, 이름 도용 문제도 있었으며, 병합 찬성 여론 조성을 위한 토론회는 "부모도 임금도 없는 한 마리 개돼지"라는 비난을 받는 등 반감이 컸다. 검계단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계속하여, 한일 병합 조약 체결과 함께 9월 12일 해산되었다.

3. 1. 주요 활동 내용

국민동지찬성회는 발기 직후부터 찬성원 망첩과 취지서를 발간하고 현직 대신들에게 망첩을 발송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한일 병합 반대 여론에 부담을 느낀 대신들은 모두 이 망첩을 되돌려 보냈다. 총재로 김종한이 추천되었으나 거듭 사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황성신문》은 "대한국의 역당"인 일진회 도당이라며 이들의 활동을 비난하는 논설을 게재했고, 연이어 《대한민보》도 "신흉회(新凶會)"라 지칭하면서 국민동지찬성회를 맹비난했다.

회원 수는 결성 초기를 기준으로 100명이 채 되지 않았으나, 입회자들에게 400~500명 선이라고 과장 선전하여 들통이 났다. 이 단체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이름을 도용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국민찬성동지회는 1910년 2월 5일2월 6일 조속한 "정합방"을 간곡히 바란다는 청원서를 각각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의 내각에 보냈다.

국민찬성동지회는 병합 찬성 여론을 만들기 위해 토론회도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부모도 임금도 없는 한 마리 개돼지"라는 말을 들었을 만큼 반감을 많이 샀다. 검계단이라는 단체가 부회장 서창보의 죄상을 적은 글을 사무소 문 앞에 걸어놓고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굴하지 않고 3월 12일에 또다시 내각과 통감부에 장서를 보내 한일 병합을 촉구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뒤 일진회와 같은 날인 9월 12일에 해산되었다.

3. 2. 언론의 비판

황성신문》은 "대한국의 역당"인 일진회 도당이라며 국민동지찬성회의 활동을 비난하는 논설을 게재했고, 연이어 《대한민보》도 "신흉회(新凶會)"라 지칭하면서 국민동지찬성회를 맹비난했다.

3. 3. 내부 문제

국민동지찬성회는 발기 직후부터 찬성원 망첩과 취지서를 발간하고 현직 대신들에게 망첩을 발송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한일 병합 반대 여론에 부담을 느낀 대신들은 모두 이 망첩을 되돌려 보냈다. 총재로 추천된 김종한이 거듭 사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황성신문》은 "대한국의 역당"인 일진회 도당이라며 이들의 활동을 비난했고, 《대한민보》도 "신흉회(新凶會)"라 지칭하면서 국민동지찬성회를 맹비난했다.

회원 수는 결성 초기에 100명이 채 되지 않았으나, 입회자들에게 400~500명 선이라고 과장 선전하여 들통이 나기도 했다. 이 단체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의 이름이 도용당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국민찬성동지회는 1910년 2월 5일2월 6일 조속한 "정합방"을 간곡히 바란다는 청원서를 각각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의 내각에 보냈다.

국민동지찬성회는 병합 찬성 여론을 만들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부모도 임금도 없는 한 마리 개돼지"라는 말을 들었을 만큼 반감을 많이 샀다. 검계단이라는 단체가 부회장 서창보의 죄상을 적은 글을 사무소 문 앞에 걸어놓고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굴하지 않고 3월 12일에 또다시 내각과 통감부에 장서를 보내 한일 병합을 촉구했다.

4. 평가

국민동지찬성회는 한일 병합 찬성 단체 중 하나였다.

4. 1. 친일 행적

국민동지찬성회는 한일 병합 찬성 단체 중 하나였다.

계열단체명
일진회 계열일진회, 자위단원호회, 정합방찬성회
이완용 계열국시유세단, 국민연설회, 정우회
합방청원 찬성 단체국민의무찬성회, 신사협의소, 국민동지찬성회, 임시찬성건의소, 국민협성회, 국민협성진보회, 국민협성동진회, 유생건의소, 한국평화협회
기타 단체시국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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