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경학원은 1887년 고종에 의해 성균관으로 개칭된 후 1894년 폐지되었다가, 1911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다시 설치되었다. 일본 천황의 하사금으로 설립되어 총독부의 식민 정책에 부합하는 교육 기관으로 운영되었으며, 유교를 통해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를 꾀했다. 주요 사업은 석전(유교 제사) 거행, 유교 강연회 개최, 학술 잡지 발행 등이었으며, 교육 기능 약화로 인해 1930년 부설 명륜학원이 설치되어 교육 기능을 부분적으로 회복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하고, 성균관대학교로 이어졌다.
경학원은 조선총독의 감독 아래 유교를 바탕으로 조선인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유교를 총독부 체제에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경학원은 조선총독의 감독을 받아 유교를 바탕으로 조선인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경학원 대제학은 조선총독의 지휘감독을 받아 경학원의 사무를 총괄했다. 경학원의 주요 직책으로는 대제학, 부제학, 좨주, 사성, 직원, 강사 등이 있었다.[4][5]
2. 역사
1911년 조선총독부는 성균관을 유교 연구 기관으로 개편하고 "경학원 규정"(정령 제74호)을 공포했다.[2]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받은 은사금 25만엔과 총독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었다. 주요 사업은 문묘(공자묘)에서 석전(유교 제사)을 지내고, 유교 강연회 개최 및 학술 잡지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1930년에는 교육 기관인 "명륜학원"이 부설되었다.[3]
1942년 3월 17일 명륜전문학교로 등록되어 유교를 가르치는 전문학교가 되었다.[2] 1945년 10월 17일 군정법령 제15호에 따라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하였다.[1] 광복 후, 경학원은 "성균관"으로 복귀하였으며, 현재는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가 되었다.
2. 1. 성균관에서 경학원으로
1887년 대한제국 고종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칭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조선총독부는 1911년 6월 15일 조선총독부령 제73호 경학원 규정에 따라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칭하였다.[1] 이는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특수성을 배제하고, 총독부의 식민 정책에 부합하는 교육 기관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경학원은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은사금 25만엔을 기금으로 하여, 기금의 이자와 총독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었다.[2]
2. 2. 경학원의 설립 목적과 활동
경학원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1911년 6월 15일 조선총독부령 제73호 경학원규정에 따라 설립한 기관이다. 본래 1887년 대한제국 고종 때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이 개칭된 이름이었으나, 1894년에 폐지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조선총독부는 남아있던 성균관을 폐지되었던 경학원의 이름을 사용하여 다시 개칭하였다. 경학원은 천황의 하사금으로 설립되어 총독부의 식민 정책에 부합하는 교육 기관으로 전락했다.[1][2]
경학원의 주요 활동은 철따라 유교 제사를 지내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강연회와 순회 강사 파견은 식민통치 정당화에 이용되었다. 특히 3·1 운동 이후에는 강연회가 중단된 대신 순회강연이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1915년 경학원 사성 이인직은 이원군 순회강연에서 조선인이 일본 정신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는 일선동화를 주장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황도유학(皇道儒學)이 대두되었다. 황도유학의 출발은 1908년 한국통감부에서 성균관 학칙을 제정하여 고등보통교육기관으로 개편하면서 시작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편하면서, 경학원을 성균관을 승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조선시대 관직명을 사용했을 뿐 일개의 교화기관으로 전락시켰다.
경학원은 일본 천황의 은사금 250000JPY과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었다. 경학원 규정에는 “경학원 대제학은 조선총독의 지휘감독을 받들어 경학원의 사무를 총리한다”고 명시되어 총독부 교화기관으로 지정되었다. 총독부 정책을 유교적 언어로 홍보하는 역할을 맡은 계간 《경학원잡지》도 발행하였다. 경학원은 시설 내의 문묘(공자묘)에서 석전(유교의 제사)을 거행하고, 유교 강연회 개최 및 학술 잡지를 발행하는 사업을 주로 하였다.[3]
2. 3. 명륜학원 설립과 교육 기능
1930년 조선총독부는 경학원의 교육 기능이 약화되고 선전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유교 지식인 양성의 필요성을 느껴,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을 설치하여 부분적으로 교육 기능을 되살렸다.
명륜학원은 수업료를 받지 않았으며, 교과 과정은 유학, 유학사, 일본어, 동양철학, 한문학, 공민과 등으로 구성되었다. 명륜학원 직원은 조선총독이 임명하였으며, 초대 총재에는 경학원 대제학 정만조가 임명되었다.[3]
2. 4. 해방 이후
1945년 10월 17일 미군정의 군정법령 제15호에 따라 경학원은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하였다.[1] 1942년 3월 17일 명륜전문학교로 등록되어 유교를 가르치는 전문학교가 되었다가,[2] 해방 이후 성균관으로 복귀, 현재의 성균관대학교가 되었다.[3]
3. 조직
경학원은 개편 당시 일본 천황의 은사금 25만엔과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었다. 경학원 규정에는 "경학원 대제학은 조선총독의 지휘감독을 받들어 경학원의 사무를 총리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이는 경학원이 총독부의 교화기관임을 명시한 것이다.
경학원의 주요 직책은 다음과 같다.
4. 비판
경학원은 주요 인사들의 친일 행적과 일제의 식민 통치 정당화, 조선인의 민족의식 약화에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4][5]
4. 1. 친일 논란
경학원의 주요 인사들은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경학원의 활동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4][5]경학원은 철따라 유교 제사를 지내고 강연회를 개최했다. 강연회와 순회 강사 파견은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특히 3·1 운동 이후에는 강연회가 중단되고 순회강연이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1915년에 경학원 사성 이인직이 이원군 순회강연에서 강연한 내용은, 조선인이 일본 정신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는 일선동화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른바 황도유학(皇道儒學)이 대두되었다. 황도유학을 주도한 자들은 위유(僞儒)·부유(腐儒)들이었다. 황도유학의 출발은 성균관의 개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8년 한국통감부에서는 성균관 학칙을 제정하여 고등보통교육기관으로 개편했는데, 이는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특수성을 배제하려는 의도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경학원 규정을 제정하여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편했다. 경학원이 성균관을 승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대제학, 부제학, 좨주(祭酒) 따위의 조선시대 관직명을 사용했을 뿐 일개의 교화기관으로 전락시켰다. 종래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성을 대제학으로 승격시키는 제스처를 썼으나 완전한 허울뿐이었다.
개편 당시 일본 천황의 은사금 25만엔과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으로 운영케 했다. 경학원 규정에는 “경학원 대제학은 조선총독의 지휘감독을 받들어 경학원의 사무를 총리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이는 총독부 교화기관으로 지정한 것이다. 총독부 정책을 유교적 언어로 홍보하는 역할을 맡은 계간 《경학원잡지》도 발행하였다. 경학에 대한 논설 외에 일본인의 논설, 정책 해설과 법령, 시국에 대한 성명을 게재했다.
참조
[1]
서적
韓国近代大学の成立と展開
[2]
서적
韓国近代大学の成立と展開
[3]
서적
韓国近代大学の成立と展開
[4]
문서
역사학자 이인화에 따르면, '황도유학파'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성균관을 개편한 경학원 등을 통해 유학자들을 황국신민 교화와 조선통치에 활용하는 과정에서 이에 협조한 유학연구 경향으로, 경학원 대제학 박제순, 사성 안인식 등 성균관 관련 인사들 일부가 연관되어 있다.
[5]
뉴스
교직원에 멱살 잡힌 교수... 그가 쫓겨난 까닭은?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2-05-3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