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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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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현은 기원전 107년 한나라가 고구려족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현도군의 군치로, '고구려'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곳이다. 고구려족은 한나라에 저항하여 고구려현성을 공격했고, 이에 한나라는 현도군을 북서쪽으로 옮겼다. 이후 고구려는 요동을 지배하던 공손씨의 공격을 받아 수도를 환도산성으로 옮겼으며, 오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기도 했다.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를 전한의 현도군 고구려현 영역 내 변방 민족이 수립한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보며, 중국 왕조와 신속 관계에 있었고, 멸망 후 많은 고구려인이 중국으로 이주하여 한족과 융합되었다고 본다.

2. 역사

기원전 107년, 이 고구려족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에 설치한 식민지현도군의 군치(郡治)가 설치된 고구려현으로, "고구려"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였다.[7] 고구려족은 한의 현도군 지배에 항거하여 고구려현성을 공격했고, 이에 한은 현도군을 북서쪽으로 이동시켜 고구려현도 요녕성신빈 만족 자치현으로 옮겨졌다. 105년 고구려가 후한요동군을 공격하자, 현도군은 군치가 있는 고구려현을 서쪽으로 옮겼다.[7] 2세기 말, 고구려는 요동을 지배하는 공손씨의 공격을 받아 수도압록강 중류 북안에 있던 옛 고구려현성 고지인 환도산성으로 옮겼다.

233년, 손권를 협공하기 위해 장병 1만 명을 동반한 사절단을 요동에 파견하여 공손연책봉했지만, 위를 두려워한 공손연은 의 사절을 참수했다.[7] 이에 사절단은 고구려로 도망쳐 고구려 동천왕에게 요동 영유를 인정하는 조칙을 전달했고, 고구려는 오에 신종을 맹세하는 문서와 공물을 봉정했다.[7] 이듬해, 오는 동천왕을 선우로 임명했지만, 위를 두려워한 고구려는 236년에 오의 사절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위로 보내어 오와 단절했다. 238년, 위가 공손씨를 멸망시키고 현도군에 고구려현을 설치함과 동시에 낙랑군·대방군을 부흥시키자, 위와 고구려의 관계가 긴장되었다.[7]

2. 1. 건국 이전

기원전 107년, 이 고구려족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에 설치한 식민지현도군의 군치(郡治)가 설치된 고구려현으로, "고구려"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였다.[7] 고구려족은 한의 현도군 지배에 항거하여 고구려현성을 공격했고, 이에 한은 현도군을 북서쪽으로 이동시켜 고구려현도 요녕성신빈 만족 자치현으로 옮겨졌다. 105년 고구려가 후한요동군을 공격하자, 현도군은 군치가 있는 고구려현을 서쪽으로 옮겼다.[7] 2세기 말, 고구려는 요동을 지배하는 공손씨의 공격을 받아 수도압록강 중류 북안에 있던 옛 고구려현성 고지인 환도산성으로 옮겼다.

233년, 손권를 협공하기 위해 장병 1만 명을 동반한 사절단을 요동에 파견하여 공손연책봉했지만, 위를 두려워한 공손연은 의 사절을 참수했다.[7] 이에 사절단은 고구려로 도망쳐 고구려 동천왕에게 요동 영유를 인정하는 조칙을 전달했고, 고구려는 오에 신종을 맹세하는 문서와 공물을 봉정했다.[7] 이듬해, 오는 동천왕을 선우로 임명했지만, 위를 두려워한 고구려는 236년에 오의 사절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위로 보내어 오와 단절했다. 238년, 위가 공손씨를 멸망시키고 현도군에 고구려현을 설치함과 동시에 낙랑군·대방군을 부흥시키자, 위와 고구려의 관계가 긴장되었다.[7]

2. 2. 건국과 발전

기원전 107년, 이 고구려족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에 설치한 식민지현도군의 군치(郡治)가 설치된 곳이 고구려현으로 여겨진다.[7] 고구려족은 한의 현도군 지배에 항거하여 고구려현성을 공격했고, 한은 현도군을 북서쪽으로 이동시켜 고구려현도 요녕성신빈 만족 자치현으로 옮겨졌다. 105년 고구려가 후한요동군을 공격하여 현도군은 군치가 있는 고구려현을 서쪽으로 옮겼다.[7]

2세기 말, 고구려는 요동을 지배하는 공손씨의 공격으로 수도압록강 중류 북안에 있던 옛 고구려현성 고지인 환도산성으로 옮겼다. 233년, 손권를 협공하기 위해 장병 1만 명을 동반한 사절단을 요동에 파견하여 공손연책봉했지만, 위를 두려워한 공손연은 의 사절을 참수했다. 사절단은 고구려로 도망쳐, 고구려 동천왕에게 요동 영유를 인정하는 조칙을 전달했다.[7] 고구려는 오에 신종을 맹세하는 문서와 공물을 봉정하고, 이듬해, 오는 동천왕을 선우로 임명했지만, 236년 고구려는 위를 두려워하여 오의 사절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위로 보내어 오와 단절했다. 238년, 위가 공손씨를 멸망시키고 현도군에 고구려현을 설치함과 동시에 낙랑군·대방군을 부흥시키자, 위와 고구려의 관계가 긴장되었다.[7]

2. 3. 전성기

2. 4. 쇠퇴와 멸망

3. 고구려와 주변국의 관계

고구려는 전한의 현도군 고구려현 영역 내 변방 민족이 수립한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것이 중국 학자들의 견해이다.[8] 사서비문에 따르면, 고구려는 전한 시대에 고구려현 영역 내 변방 민족과 남하한 부여의 일단이 합류하여 건국되었으며, 이후 고이, 옥저, , , 한족, 선비, 숙신 등의 민족을 흡수하고 융합하여 고구려인을 형성했다.[8] 이들 여러 민족은 전한 시대의 중국 민족이며, 주대에는 중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전한 시대에 현도군이 관할했으며, 고구려 건국 후에는 전한이 직접 지배했다.[8]

고구려의 활동 중심은 여러 차례 이동했지만, 한사군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8] 초기 고구려의 도성은 오녀산성 (요녕성환인만족자치현), 국내성 (길림성집안시), 평양성이나 장안성이 일반적이었다.[8] 고구려 굴기 이전, 전한의 현도군,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등은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를 관할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활동이 한사군의 관할 외로 미치지 않았다.[8]

고구려는 중국 왕조와 항상 신속 관계에 있었으며,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중국 왕조는 고구려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배했다.[8] 한은 고구려를 직접 지배했지만, 삼국 시대위진남북조 시대는 중원의 내란 때문에, 중국의 분열 정권은 고구려를 신속시키는 간접 지배에 그쳤지만, 수·당에 이르러 중국의 분열이 끝나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직접 지배했으며, 중원의 상황에 따라 직접 지배에서 간접 지배로, 더 나아가 간접 지배에서 직접 지배로 발전했다.[8] 668년안동도호부에 의한 직접 지배로 귀결되었다.[8]

중국 왕조는 고구려를 중국 고유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수의 지배자는 "고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으로 주대에는 여기에 기자를 봉했습니다. 한대에는 삼군(낙랑군, 현도군, 임둔군 내지 대방군)으로 나뉘었고, 진조도 또한 요동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하가 아닌 외역이 되었습니다. … 폐하의 때가 되어 어찌 그대로 내버려두어 이, 본래 관대의 땅을 만맥의 나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수서』배구전).[8] 당태종은, 고구려를 "중국의 땅이며, 막리지의 도적이 주군을 죽였으니, 내가 책임지고 통일하겠다" (『신당서』고구려전)고 생각하고, 고구려를 통일함으로써 중국 전토의 통일에 진력했다.[8]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중국"에서 단절된 적이 없고, 삼국 시대, 위진남북조 시대의 분열 시대를 포함해, 중국 왕조와 신속 관계에 있었다.[8]통전』고구려전은, 진, 에서 제, , 북위, 북주까지, 고구려의 주는 모두 남북 양조로부터 봉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8]

고구려의 인구는 70만 명 정도였지만, 당의 고구려 통일 후, 고구려인의 많은 수가 중원으로 이주했다. 당태종, 당고종 때 30만 명 정도가 중원으로 이주했으며, 전체 고구려인 70만 명의 절반 가까이 된다.[8] 이주지는, 북경, 하남, 안휘, 강소, 호북, 산서, 섬서가 많았고, 이주한 고구려인은 차츰 한족에 흡수되어, 민족적으로 한족과 융합한다.[8] 신라 (조선 민족)에 흡수된 고구려인은 약 10만 명 정도이다. 말갈 (발해)에 투항한 고구려인도 있으며, 발해 건국 후, 고구려의 옛 땅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인의 일부는 발해로 망명했지만, 그 수는 약 10만 명이며, 고구려인은 발해인의 구성원이 되었고, 발해 멸망 후, 금대에 여진과 융합했다.[8] 또한, 고대 중국 북방 민족의 돌궐에 투항한 고구려인도 있었으며, 그 수는 수만 명 정도이다. 이상의 각지로 이주·분산·투항한 고구려인의 수와 전쟁으로 사망한 고구려인의 수를 합산하면, 고구려의 본래 인구인 70만 명 정도와 일치하며,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인의 대다수가 한족을 주된 중국인과 융합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소수의 고구려인이 신라 (조선 민족)와 융합해도, 고구려의 민족적 귀속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8] 고구려인의 기원은, 한족, , 부여, 고이, 은인의 여러 설이 있지만, 이러한 민족은 모두 중국의 고대 민족이기 때문에, 고구려인은 중국의 고대 민족이라는 본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8]

3. 1. 중국과의 관계

고구려는 전한의 현도군 고구려현 영역 내 변방 민족이 수립한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것이 중국 학자들의 견해이다.[8] 사서비문에 따르면, 고구려는 전한 시대에 고구려현 영역 내 변방 민족과 남하한 부여의 일단이 합류하여 건국되었으며, 이후 고이, 옥저, , , 한족, 선비, 숙신 등의 민족을 흡수하고 융합하여 고구려인을 형성했다.[8] 이들 여러 민족은 전한 시대의 중국 민족이며, 주대에는 중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전한 시대에 현도군이 관할했으며, 고구려 건국 후에는 전한이 직접 지배했다.[8]

고구려의 활동 중심은 여러 차례 이동했지만, 한사군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8] 초기 고구려의 도성은 오녀산성 (요녕성환인만족자치현), 국내성 (길림성집안시), 평양성이나 장안성이 일반적이었다.[8] 고구려 굴기 이전, 전한의 현도군,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등은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를 관할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활동이 한사군의 관할 외로 미치지 않았다.[8]

고구려는 중국 왕조와 항상 신속 관계에 있었으며,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중국 왕조는 고구려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배했다.[8] 한은 고구려를 직접 지배했지만, 삼국 시대위진남북조 시대는 중원의 내란 때문에, 중국의 분열 정권은 고구려를 신속시키는 간접 지배에 그쳤지만, 수·당에 이르러 중국의 분열이 끝나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직접 지배했으며, 중원의 상황에 따라 직접 지배에서 간접 지배로, 더 나아가 간접 지배에서 직접 지배로 발전했다.[8] 668년안동도호부에 의한 직접 지배로 귀결되었다.[8]

중국 왕조는 고구려를 중국 고유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수의 지배자는 "고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으로 주대에는 여기에 기자를 봉했습니다. 한대에는 삼군(낙랑군, 현도군, 임둔군 내지 대방군)으로 나뉘었고, 진조도 또한 요동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하가 아닌 외역이 되었습니다. … 폐하의 때가 되어 어찌 그대로 내버려두어 이, 본래 관대의 땅을 만맥의 나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수서』배구전).[8] 당태종은, 고구려를 "중국의 땅이며, 막리지의 도적이 주군을 죽였으니, 내가 책임지고 통일하겠다" (『신당서』고구려전)고 생각하고, 고구려를 통일함으로써 중국 전토의 통일에 진력했다.[8]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중국"에서 단절된 적이 없고, 삼국 시대, 위진남북조 시대의 분열 시대를 포함해, 중국 왕조와 신속 관계에 있었다.[8]통전』고구려전은, 진, 에서 제, , 북위, 북주까지, 고구려의 주는 모두 남북 양조로부터 봉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8]

고구려의 인구는 70만 명 정도였지만, 당의 고구려 통일 후, 고구려인의 많은 수가 중원으로 이주했다. 당태종, 당고종 때 30만 명 정도가 중원으로 이주했으며, 전체 고구려인 70만 명의 절반 가까이 된다.[8] 이주지는, 북경, 하남, 안휘, 강소, 호북, 산서, 섬서가 많았고, 이주한 고구려인은 차츰 한족에 흡수되어, 민족적으로 한족과 융합한다.[8] 신라 (조선 민족)에 흡수된 고구려인은 약 10만 명 정도이다. 말갈 (발해)에 투항한 고구려인도 있으며, 발해 건국 후, 고구려의 옛 땅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인의 일부는 발해로 망명했지만, 그 수는 약 10만 명이며, 고구려인은 발해인의 구성원이 되었고, 발해 멸망 후, 금대에 여진과 융합했다.[8] 또한, 고대 중국 북방 민족의 돌궐에 투항한 고구려인도 있었으며, 그 수는 수만 명 정도이다. 이상의 각지로 이주·분산·투항한 고구려인의 수와 전쟁으로 사망한 고구려인의 수를 합산하면, 고구려의 본래 인구인 70만 명 정도와 일치하며,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인의 대다수가 한족을 주된 중국인과 융합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소수의 고구려인이 신라 (조선 민족)와 융합해도, 고구려의 민족적 귀속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8] 고구려인의 기원은, 한족, , 부여, 고이, 은인의 여러 설이 있지만, 이러한 민족은 모두 중국의 고대 민족이기 때문에, 고구려인은 중국의 고대 민족이라는 본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8]

3. 2. 한반도 국가들과의 관계

3. 3. 기타 국가들과의 관계

4. 고구려 유민과 부흥 운동

5.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6. 고구려의 문화

7. 역사적 의의와 영향

7. 1. 한국사에 대한 영향

7. 2. 동아시아사에 대한 영향

8. 논쟁

고구려는 전한의 현도군 고구려현 영역 내 변방 민족이 수립한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것이 중국 학자들의 컨센서스이다.[8] 사서비문에 따르면, 고구려는 전한 시대에 고구려현의 영역 내 변방 민족과 남하한 부여의 일단이 합류하여 건국되었으며, 그 후 고이, 옥저, , , 한족, 선비, 숙신 등의 민족을 흡수하고 융합하여 고구려인을 형성했다.[8] 즉, 고구려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지만, 이들은 전한 시대의 중국 민족이며, 주대에는 중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전한 시대에 현도군이 관할했으며, 고구려 건국 후에는 전한이 직접 지배했다.[8] 수와 당이 중국 통일을 위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고구려의 활동 지역이 고대부터 중국 왕조의 통치 구역이었기 때문이다.[8]

고구려의 활동 중심은 여러 차례 이동했지만, 한사군의 범위를 넘지 않았고, 초기 고구려의 도성은 오녀산성 (요녕성환인만족자치현), 국내성 (길림성집안시), 평양성이나 장안성이 일반적이었다.[8] 고구려 굴기 이전, 전한의 현도군,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등은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를 관할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활동이 한사군의 관할 외로 미치지 않았다.[8]

고구려는 중국 왕조와 항상 신속 관계에 있었으며,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중국 왕조는 고구려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배했다.[8] 한은 고구려를 직접 지배했지만, 삼국 시대위진남북조 시대는 중원의 내란 때문에, 중국의 분열 정권은 고구려를 신속시키는 간접 지배에 그쳤지만, 수·당에 이르러 중국의 분열이 끝나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직접 지배했으며, 중원의 상황에 따라 직접 지배에서 간접 지배로, 더 나아가 간접 지배에서 직접 지배로 발전했다.[8] 중원이 통일되고, 수·당은 고구려의 간접 지배에 만족하지 못하고, 668년안동도호부에 의한 직접 지배로 돌아갔다.[8] 중국 왕조는 고구려를 중국 고유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으며, 수의 지배자는 "고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으로 주대에는 여기에 기자를 봉했습니다. 한대에는 삼군(낙랑군, 현도군, 임둔군 내지 대방군)으로 나뉘었고, 진조도 또한 요동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하가 아닌 외역이 되었습니다. … 폐하의 때가 되어 어찌 그대로 내버려두어 이, 본래 관대의 땅을 만맥의 나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수서』배구전).[8] 당태종은, 고구려를 "중국의 땅이며, 막리지의 도적이 주군을 죽였으니, 내가 책임지고 통일하겠다" (『신당서』고구려전)고 생각하고, 고구려를 통일함으로써 중국 전토의 통일에 진력했다.[8]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중국"에서 단절된 적이 없고, 삼국 시대, 위진남북조 시대의 분열 시대를 포함해, 중국 왕조와 신속 관계에 있었다. 『통전』고구려전은, 진, 에서 제, , 북위, 북주까지, 고구려의 주는 모두 남북 양조로부터 봉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8]

고구려 인구는 70만 명 정도였지만, 당의 고구려 통일 후, 고구려인의 많은 수가 중원으로 이주했다.[8] 당태종, 당고종 때 30만 명 정도가 중원으로 이주했으며, 전체 고구려인 70만 명의 절반 가까이 된다.[8] 이주지는, 북경, 하남, 안휘, 강소, 호북, 산서, 섬서가 많았고, 이주한 고구려인은 차츰 한족에 흡수되어, 민족적으로 한족과 융합한다.[8] 한편, 망명, 포로, 병합 등을 통해 신라 (조선 민족)에 흡수된 고구려인은 약 10만 명 정도이다.[8] 말갈 (발해)에 투항한 고구려인도 있다.[8] 발해 건국 후, 고구려의 옛 땅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인의 일부는 발해로 망명했지만, 그 수는 약 10만 명이며, 고구려인은 발해인의 구성원이 되었고, 발해 멸망 후, 금대에 여진과 융합했다.[8] 또한, 고대 중국 북방 민족의 돌궐에 투항한 고구려인도 있었으며, 그 수는 수만 명 정도이다.[8] 이상의 각지로 이주·분산·투항한 고구려인의 수와 전쟁으로 사망한 고구려인의 수를 합산하면, 고구려의 본래 인구인 70만 명 정도와 일치하며,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인의 대다수가 한족을 주된 중국인과 융합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소수의 고구려인이 신라 (조선 민족)와 융합해도, 고구려의 민족적 귀속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8] 고구려인의 기원은, 한족, , 부여, 고이, 은인의 여러 설이 있지만, 이러한 민족은 모두 중국의 고대 민족이기 때문에, 고구려인은 중국의 고대 민족이라는 본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8]

8. 1. 고구려의 귀속 문제

고구려는 전한의 현도군 고구려현 영역 내 변방 민족이 수립한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것이 중국 학자들의 컨센서스이다.[8] 사서비문에 따르면, 고구려는 전한 시대에 고구려현의 영역 내 변방 민족과 남하한 부여의 일단이 합류하여 건국되었으며, 그 후 고이, 옥저, , , 한족, 선비, 숙신 등의 민족을 흡수하고 융합하여 고구려인을 형성했다.[8] 즉, 고구려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지만, 이들은 전한 시대의 중국 민족이며, 주대에는 중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전한 시대에 현도군이 관할했으며, 고구려 건국 후에는 전한이 직접 지배했다.[8] 수와 당이 중국 통일을 위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고구려의 활동 지역이 고대부터 중국 왕조의 통치 구역이었기 때문이다.[8]

고구려의 활동 중심은 여러 차례 이동했지만, 한사군의 범위를 넘지 않았고, 초기 고구려의 도성은 오녀산성 (요녕성환인만족자치현), 국내성 (길림성집안시), 평양성이나 장안성이 일반적이었다.[8] 고구려 굴기 이전, 전한의 현도군,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등은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를 관할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활동이 한사군의 관할 외로 미치지 않았다.[8]

고구려는 중국 왕조와 항상 신속 관계에 있었으며,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중국 왕조는 고구려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배했다.[8] 한은 고구려를 직접 지배했지만, 삼국 시대위진남북조 시대는 중원의 내란 때문에, 중국의 분열 정권은 고구려를 신속시키는 간접 지배에 그쳤지만, 수·당에 이르러 중국의 분열이 끝나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직접 지배했으며, 중원의 상황에 따라 직접 지배에서 간접 지배로, 더 나아가 간접 지배에서 직접 지배로 발전했다.[8] 중원이 통일되고, 수·당은 고구려의 간접 지배에 만족하지 못하고, 668년안동도호부에 의한 직접 지배로 돌아갔다.[8] 중국 왕조는 고구려를 중국 고유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으며, 수의 지배자는 "고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으로 주대에는 여기에 기자를 봉했습니다. 한대에는 삼군(낙랑군, 현도군, 임둔군 내지 대방군)으로 나뉘었고, 진조도 또한 요동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하가 아닌 외역이 되었습니다. … 폐하의 때가 되어 어찌 그대로 내버려두어 이, 본래 관대의 땅을 만맥의 나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수서』배구전).[8] 당태종은, 고구려를 "중국의 땅이며, 막리지의 도적이 주군을 죽였으니, 내가 책임지고 통일하겠다" (『신당서』고구려전)고 생각하고, 고구려를 통일함으로써 중국 전토의 통일에 진력했다.[8]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중국"에서 단절된 적이 없고, 삼국 시대, 위진남북조 시대의 분열 시대를 포함해, 중국 왕조와 신속 관계에 있었다. 『통전』고구려전은, 진, 에서 제, , 북위, 북주까지, 고구려의 주는 모두 남북 양조로부터 봉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8]

고구려 인구는 70만 명 정도였지만, 당의 고구려 통일 후, 고구려인의 많은 수가 중원으로 이주했다.[8] 당태종, 당고종 때 30만 명 정도가 중원으로 이주했으며, 전체 고구려인 70만 명의 절반 가까이 된다.[8] 이주지는, 북경, 하남, 안휘, 강소, 호북, 산서, 섬서가 많았고, 이주한 고구려인은 차츰 한족에 흡수되어, 민족적으로 한족과 융합한다.[8] 한편, 망명, 포로, 병합 등을 통해 신라 (조선 민족)에 흡수된 고구려인은 약 10만 명 정도이다.[8] 말갈 (발해)에 투항한 고구려인도 있다.[8] 발해 건국 후, 고구려의 옛 땅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인의 일부는 발해로 망명했지만, 그 수는 약 10만 명이며, 고구려인은 발해인의 구성원이 되었고, 발해 멸망 후, 금대에 여진과 융합했다.[8] 또한, 고대 중국 북방 민족의 돌궐에 투항한 고구려인도 있었으며, 그 수는 수만 명 정도이다.[8] 이상의 각지로 이주·분산·투항한 고구려인의 수와 전쟁으로 사망한 고구려인의 수를 합산하면, 고구려의 본래 인구인 70만 명 정도와 일치하며,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인의 대다수가 한족을 주된 중국인과 융합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소수의 고구려인이 신라 (조선 민족)와 융합해도, 고구려의 민족적 귀속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8] 고구려인의 기원은, 한족, , 부여, 고이, 은인의 여러 설이 있지만, 이러한 민족은 모두 중국의 고대 민족이기 때문에, 고구려인은 중국의 고대 민족이라는 본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8]

8. 2. 고구려와 발해의 관계

참조

[1] 서적 Early Modern China and Northeast Asia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2] 서적 Koguryo https://books.google[...] BRILL 2007
[3] 서적 "State Formation in Korea" Curzon Press 2001
[4] 간행물 고구려현 Encyclopædia Britannica Korean Edition
[5] 뉴스 韓国・日本の歴史教科書の古代史記述 http://www.jkcf.or.j[...] "[[日韓歴史共同研究]]" 2010-03
[6] 서적 7世紀以前の中国・朝鮮関係史 "[[法政大学経済学部学会]]" 202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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