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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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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녀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주변국에 헌상된 여성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몽골의 침입 이후 고려 시대에는 원나라에 공녀를 바치는 것이 시작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에 공녀를 헌상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공녀로 차출된 여성들은 궁녀나 노비로 일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일부는 황후나 후궁이 되기도 했다. 공녀 제도는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조선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어려움을 겪었다. 1332년 충숙왕은 원나라에 대한 공녀를 폐지했고, 세종 때 명나라에 공녀 공출 중단을 요청하여 성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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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용어
공녀고려·조선 시대에 다른 나라에 바치던 여성
관련 용어환향녀
관련 용어 설명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들을 일컫는 말
역사적 배경
공녀 차출 시기고려 시대, 원나라의 간섭기에 특히 많았음
공녀의 목적원나라에 대한 공물 및 인적 자원 제공
조선 시대명나라에 대한 공녀 차출 요구 존재
공녀 폐지 노력조선 시대에 공녀 차출을 막기 위한 노력 지속
공녀의 삶
공녀의 역할원나라 황실, 귀족, 관료 등의 노비나 첩으로 생활
귀환일부 공녀는 속환 등의 방법으로 귀환
환향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귀환한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 존재
사회적 영향
사회적 문제여성 인권 유린, 가정 해체, 사회적 편견 심화
역사적 교훈외세의 침략과 간섭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2. 고려 시대

몽골제1차 침입 직후인 1232년(고종 19)에 왕족과 고위 관리의 자녀인 동남·동녀 각 500명 및 기술자, 수를 놓는 장인 등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이 공녀의 시초이다. 충렬왕 초부터 공민왕 초까지 약 80년 동안 공식 기록된 공녀 선발만 50여 차례이며, 이곡의 공녀 폐지 상소에 따르면 그 수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따라서 끌려간 공녀는 2,000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1] 이는 공식 기록이며, 원나라 사신, 귀족, 호족들이 사사로이 데려간 경우까지 합하면 실제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12] 한 번에 500여 명의 공녀를 끌고 간 경우도 있었다.[13]

공녀로 끌려간 여성들은 대부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궁중 시녀나 노비로 일생을 보냈다. 이에 고려인들은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부쳐 이웃에게도 보이지 않게 하고, 딸의 머리를 깎는 등 공녀 선발을 피하려 노력하였다.[14]

공녀 중 일부는 중국이나 몽골 황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나 비빈으로 간택되기도 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황제가 된 대표적인 공녀 출신은 기황후이다.

공녀들로 인해 원나라에 고려의 풍습인 고려양이 빠르게 전파되었다.[20] 특히 의복, 신발, 모자 등의 복식과 만두, 떡, 아청주 등의 음식이 전파되었다.

세종 때 공녀 폐지 여론이 나타나, 세종이 직접 명나라에 공녀와 내시 공출 중단을 요청하여 성사시켰다. 이후 공녀 차출 기록은 없다. 고려 시대 공녀 헌상 대상은 몽골(원), 거란, 이었으며, 공녀뿐만 아니라 많은 조공을 강요받았다. 1274년 여몽 전쟁 중 문영의 역(대마도 침공)에서 붙잡은 섬 주민을 몽골 왕후 등에게 바치기도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140명의 공녀를 보냈고, 이후 공녀 확보를 위해 나라 안의 혼인을 금지했으며, 과부처녀추고별감을 설치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이곡은 원나라 황제에게 공녀로 인한 고려 국내 상황을 상소했다.[4][5]

1332년, 충숙왕은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원나라에 대한 공녀 진상을 폐지했다.

2. 1. 공녀의 기원과 배경

1232년(고종 19) 몽골이 제1차 침입 직후, 왕족과 고위 관리의 자녀들인 동남·동녀 각 500명과 기술자, 수를 놓는 여성인 자수부인(刺繡婦人)을 요구한 것이 공녀의 시초이다.[11]

충렬왕 초부터 공민왕 초까지 약 80년 동안 정사에 기록된 공녀 선발만 50여 차례이며, 이곡의 공녀 폐지 상소에 따르면 그 수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따라서 끌려간 공녀의 수는 2,000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1] 이는 공식 기록이며, 원나라 사신, 귀족, 호족들이 사사로이 데려간 경우까지 합하면 실제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12] 한 번에 500여 명의 공녀를 끌고 간 경우도 있었다.[13]

대부분의 공녀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궁중 시녀나 노비로 일생을 보내야 했다. 이에 고려인들은 딸을 낳으면 비밀로 하고, 이웃에게도 보이지 않게 했으며, 딸의 머리를 깎는 등 공녀 선발을 피하려 노력했다.[14]

일부 공녀는 중국이나 몽골 황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나 비빈으로 간택되기도 했다. 고려 출신으로 세조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은 이씨(李氏), 인종 때의 영비(英妃) [15], 원나라 말의 기황후[16]권황후[17], 조선여비 한씨[18]와 공신부인 한씨[19]가 대표적인 예이다. 공녀 출신이 황후나 후궁이 되면 고려조선에 있던 친정은 상당한 혜택을 보았다. 기황후의 친족인 기철, 기원 5형제와 여비 한씨, 공신부인의 남동생인 한확 등이 그 예이다.

공녀들로 인해 원나라에 고려의 풍습이 빠르게 전파되기도 했다.[20] 특히 의복, 신발, 모자 등의 복식과 만두, 떡 등의 음식, 아청(鴉靑)주 등의 기물이 빠르게 전파되었는데, 이를 통틀어 고려양이라고 부른다.

세종 때 공녀 폐지 여론이 나타났고, 세종이 직접 공녀와 내시 공출 중단을 명나라에 요청하여 성사시켰다. 이후 공녀 차출 기록은 없다.

고려 시대에는 몽골(원), 거란, 에 공녀와 많은 조공을 바쳐야 했다. 1274년 여몽 전쟁 - 문영의 역 (대마도 침공)에서 붙잡은 섬 주민을 몽골 왕후 등에게 바치기도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140명의 공녀를 보냈고, 이후 공녀 확보를 위해 나라 안의 혼인을 금지했으며, 과부처녀추고별감을 설치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곡 (1298년-1351년)은 원나라 황제에게 공녀로 인한 고려 국내의 상황을 상소했다.[4][5]

1332년, 충숙왕은 원나라의 쇠퇴와 함께 원나라에 대한 공녀를 폐지했다.

공녀 출신으로 왕후(妃)가 된 여성으로는 기황후 (생몰년 미상, 원나라 순제 토곤 테무르의 황후, 숙량대 완자홀도)와 권현비 (? - 1410년, 명나라 성조 영락제 (주체)의 총희[8]) 등이 있다.

2. 2. 공녀의 선발과 규모

몽골은 1232년(고종 19)에 고려에 왕족과 고위 관리의 자녀 각각 500명과 기술자, 자수부인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공녀의 시초이다.[11]

공녀 선발은 충렬왕 초기부터 공민왕 초기까지 약 80년 동안 정사에 기록된 것만 50여 차례이며, 이곡의 공녀 폐지 상소에 따르면 그 수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따라서 끌려간 공녀의 수는 2,000명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1] 이는 공식 기록이고, 원나라 사신이나 귀족들이 사사로이 데려간 경우까지 합하면 실제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12] 한 번에 500여 명의 공녀를 끌고 간 경우도 있었다.[13]

이곡 (1298년-1351년)은 원나라 황제에게 공녀로 인한 고려 국내의 상황을 상소했다.[4][5]

1332년 충숙왕은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공녀 진상을 폐지하였다.

2. 3. 공녀의 삶과 고려 사회의 반응

몽골은 1232년(고종 19)에 고려에 왕족과 고위 관리의 자녀 각각 500명과 기술자, 자수 놓는 여인들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공녀의 시작이었다. 충렬왕 초기부터 공민왕 초기까지 약 80년 동안 공식 기록만 50여 차례였으며, 이곡의 상소에 따르면 많을 때는 40~50명에 달해 끌려간 공녀는 2,000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1] 이는 공식 기록만 해당되며, 원나라 사신이나 귀족들이 사사로이 데려간 경우까지 합하면 실제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12] 한번에 500여 명의 공녀를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13]

대부분의 공녀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궁중 시녀나 노비로 일생을 보냈다. 이에 고려인들은 딸을 낳으면 숨기거나 머리를 깎는 등 공녀 선발을 피하려 노력했다.[14]

일부 공녀는 중국이나 몽골 황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나 비빈으로 간택되기도 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은 이씨, 인종 때 영비 달마홀도[15], 원나라 말 기황후[16]권황후[17], 조선의 여비 한씨[18]와 공신부인 한씨[19]가 대표적이다. 공녀 출신이 황후나 후궁이 되면 고려와 조선에 있던 친정은 큰 혜택을 보았는데, 기황후의 친족인 기철, 기원 5형제와 여비 한씨, 공신부인의 남동생인 한확 등이 그 예이다.

공녀들로 인해 고려의 풍습이 원나라에 빠르게 전파되기도 했다.[20] 의복, 신발, 모자 등의 복식과 만두, 떡, 아청주 등의 음식이 전파되었는데, 이를 '고려양'이라 부른다.

1274년 여몽 전쟁 중 문영의 역(대마도 침공)에서 붙잡은 섬 주민을 몽골 왕후 등에게 헌상하기도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140명의 공녀를 보냈고, 두 번째는 공녀 확보를 위해 나라 안의 혼인을 금지했으며, 세 번째 자료에서는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곡은 원나라 황제에게 공녀로 인한 고려 국내의 상황을 상소했다.[4][5]

1332년 충숙왕은 원나라의 쇠퇴와 함께 원나라에 대한 공녀를 폐지했다.

공녀이면서 왕후가 된 여성으로는 기황후(생몰년 미상, 원나라 순제 토곤 테무르의 황후)와 권현비(? - 1410년, 명나라 성조 영락제의 총희[8]) 등이 있다.

2. 4. 고려의 풍습 전파 (고려양)

1232년(고종 19) 몽골이 왕족과 대관(大官)의 동남·동녀 각 500명 및 공장(工匠)·자수부인(刺繡婦人)을 바치라고 요구하면서 공녀가 시작되었다. 공녀들로 인해 원나라에 고려의 풍습이 급속히 전파되기도 하였는데,[20] 특히 의복, 신발, 모자 등의 복식과 만두, 떡 등의 음식, 아청(鴉靑)주 등의 기물이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이를 총칭하여 고려양이라고 부른다.

2. 5. 공녀 출신 왕후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황제의 눈에 띄어 황후가 된 대표적인 인물은 기황후이다.[16] 그녀는 원나라 순제 토곤 테무르의 황후였다. 조선 출신으로는 명나라 영락제의 총희였던 권현비가 있다.[8] 이 외에도 고려 출신으로 원 세조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은 이씨(李氏), 인종 때 영비(英妃) 달마홀도(達麻忽都[15])가 있었다. 조선 출신으로는 여비 한씨[18]와 공신부인 한씨[19]가 공녀 출신으로 후궁이 되었다.

공녀 출신이 황후나 후궁이 되면 고려조선에 있던 그의 친정은 상당한 혜택을 보았다. 기황후의 친족인 기철, 기원 5형제와 여비 한씨, 공신부인 한씨의 남동생인 한확 등이 그 예시이다.

3.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는 중국에 대한 공녀 헌상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중국 본토 사신에 의해 사적으로 끌려간 경우를 포함하면, 한반도에서 헌상된 공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전해진다.[4][5]

고구려신라에서 시작된 조공은 고려에 복속된 이후 더욱 성행했다. 이 사대주의 외교는 ·대에도 이어져 청일 전쟁까지 중국 조선 관계사의 틀을 규정했다. 특히 태종과 세종 재위 시기가 조공이 가장 많았던 시기였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영은문(현재의 독립문)은 한반도의 조공 잔혹사를 상징하며, 은혜로운 중국 사신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세워졌다. 한반도의 미녀를 공녀로 데려가는 중국 대륙의 사신은 압록강 부근 의주에서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다.

1618년 후금명나라에 선전포고 전후, 이씨 조선을 '너'라고 부르는 국서를 보내 "명의 전쟁에 개입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광해군사르후 전투에서 패했으나, 중립 외교로 왕의 체면을 유지했다. 그러나 인조1627년 정묘호란에서 패배하고, 1636년 병자호란에서 (후금의 새 국호)에 맞서 대패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를 하고 삼전도의 맹약을 맺었다. 최대 50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 성 노예로 전락했고, 조선 여성들은 만주족 본처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고국에 돌아온 환향녀는 가문에서 버려지고 혐오와 차별을 받았다. 환향녀는 '''음란한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1][2] 청나라로부터 완전 독립 후, 제도적인 헌상은 없어졌지만, 여성들을 납치해 금전 목적으로 인신매매하는 자들이 많았고, 병합 시대 경찰에 체포되는 조선인은 일본인의 100배였다.

3. 1. 공녀 제도 지속과 백성들의 고통

중국에서 공녀를 선발하는 사신이 방문하면, 조선에서는 선발 기관을 설치하고 순찰사가 각지를 물색했지만, 민중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공녀 후보가 되면 딸의 얼굴에 약을 발라 상처를 내거나 출가시키는 경우가 있었으며, 유아를 시집보내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4][5] 그 때문에 이씨조선 시대에는 "12세 이하의 여자에 대해서는 혼인을 금지한다"는 법령을 내리기도 했다.

태종 8년에는 처녀 30명이 선발되었지만, 중국의 사신은 "아름다운 여자가 없다"며 벌하려 했고, 딸들도 지명을 피하기 위해 장애가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태종은 "처녀를 숨긴 자, 침술을 한 자, 머리를 자르거나 약을 바른 자 등, 선발에서 벗어나려 한 자"를 벌하는 호령을 내렸다. 한국에서 영웅시되는 세종도 "국내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관계되는 것이니, 단지 (중국 황제의) 명령에 따를 뿐"이라고 말했고, 세종 시대에 가장 공물을 바친 여성의 수가 많았다.[4][5]

중국 사신이 1~2개월에 걸쳐 공녀를 골라내는 기간에는 한반도 전역에 혼인 금지령이 내려졌고, 13세~25세의 미혼 여성들이 선발 대상이었기에 딸을 둔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다.[9]

3. 2. 조선 왕조의 노력과 한계

조선은 중국에 공녀를 선발하는 사신이 방문하면 선발 기관을 설치하고 순찰사가 각지를 물색했지만, 민중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공녀 후보가 되면 딸의 얼굴에 약을 바르고 상처를 내거나 출가시키는 경우도 있었으며, 유아를 시집보내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12세 이하의 여자에 대해서는 혼인을 금지한다"는 법령을 내리기도 했다.[4][5]

조선의 태종 8년에는 처녀 30명이 선발되었지만, 중국의 사신은 "아름다운 여자가 없다"며 벌하려 했다. 딸들도 지명을 피하기 위해 장애가 있는 것처럼 위장했으며, 태종은 "처녀를 숨긴 자, 침술을 한 자, 머리를 자르거나 약을 바른 자 등, 선발에서 벗어나려 한 자"를 벌하는 호령을 내렸다. 한국에서 영웅시되는 세종도 "국내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관계되는 것이니, 단지 (중국 황제의) 명령에 따를 뿐"이라고 말했고, 세종 시대에 가장 많은 공녀를 바쳤다.[4][5]

명나라 영락제의 사신이 한반도에서 데려간 권현비(공헌현비) 등 궁녀 8명은 애증으로 인한 허위 독살 소동으로 명나라 궁중에서 참극을 겪었다. 조공 사신의 횡포도 고민거리였고, 요구 조건이 너무나 가혹해서 뇌물을 건네지 않으면 안 되었다. 1429년의 칙사가 귀국할 때 뇌물은 200상자에 달했는데, 한 상자당 8명이 운반했으며 운반 행렬은 수 km에 달했다. 뇌물을 국가 자금으로 조달했기 때문에 국가의 창고가 크게 손실되었다. 사신단의 수행원이 조선인을 때려죽이는 일도 있었다.[9]

3. 3. 공녀 출신 후궁

원 간섭기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공녀 출신으로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된 여성들이 있었다. 고려와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에 공녀를 바쳤는데, 특히 조선 태종과 세종 시대에 공녀 징발이 많았다.[4][5]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이었던 권현비(공헌현비)를 비롯한 조선 출신 궁녀들은 궁중 암투에 휘말려 참극을 겪기도 하였다.[9]

4. 공녀 제도의 폐지와 그 이후

청일 전쟁 이후 조선청나라로부터 완전 독립하면서 공녀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공녀 제도의 관습은 남아있어, 여전히 여성 납치 및 인신매매가 성행했다. 금전적 이득을 목적으로 여성들을 국내외로 팔아넘기는 자들이 많았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경찰에 체포되는 조선인의 수가 일본인의 100배에 달했다.

4. 1. 청나라 시기

1618년 후금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한 전후, 조선에 국서를 보내 "명의 전쟁에 조선은 개입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광해군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에 패했으나, 전쟁 후 중립 외교를 펼쳐 왕으로서의 체면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왕이 된 인조1627년 정묘호란1636년 병자호란에서 에 멸망적인 대패를 겪었다. 인조는 한겨울 남한산성에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를 하고 삼전도의 맹약을 맺었다.[1][2]

병자호란 당시 최대 50만 명이 포로로 잡혀갔고, 성 노예로 전락한 조선 여성들은 만주족 본처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는 등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고국으로 귀국한 이들조차 '''환향녀'''로서 고국 가문에서 버려지고, 온갖 혐오와 차별을 받았다. 환향녀는 이후 조선에서 '''음란한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1][2]

4. 2. 근대 이후

이씨조선 시대에는 12세 이하의 여자에 대해서는 혼인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태종 8년에는 처녀 30명이 선발되었지만, 중국의 사신은 "아름다운 여자가 없다"며 벌하려 했고, 딸들도 지명을 피하기 위해 장애가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태종은 "처녀를 숨긴 자, 침술을 한 자, 머리를 자르거나 약을 바른 자 등, 선발에서 벗어나려 한 자"를 벌하는 호령을 내렸다.[4][5] 세종도 "국내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관계되는 것이니, 단지 (중국 황제의) 명령에 따를 뿐"이라고 말했고, 세종 시대에 가장 많은 공녀를 바쳤다.[4][5]

고구려신라에서 시작된 조공은 고려에 복속된 이후 더욱 성행했다. 이 사대주의 외교의 유산은 대에도 이어져 청일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중국 조선 관계사의 전체적인 틀을 정하게 되었다. 특히 태종과 그의 아들 세종 재위 당시가 조공이 가장 많았던 시기였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영은문 (현재의 독립문)은 한반도의 조공 잔혹사를 상징하고 있다. 영은문은 은혜로운 중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세워진 곳이며, 한반도의 미녀를 공녀로 데려가는 중국 대륙의 사신은 압록강 부근의 의주에서 매우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다.

청나라로부터 완전 독립을 이룬 후에는 제도적인 헌상은 없어졌지만, 이 관습에서 여성들을 납치하여 금전 목적으로 국내외로 인신매매하는 자들이 다수 존재했고, 병합 시대 경찰에 체포되는 조선인의 수는 일본인의 100배에 달했다.

참조

[1] 뉴스 【噴水台】帰郷 http://japanese.join[...] 2006-06-13
[2] 뉴스 【コラム】中国、我が歴史のトラウマ(1)=韓国 http://japanese.join[...] 2011-07-22
[3] 뉴스 コシアン / コシアンタウン:코시안/코시안타운 https://mottokorea.c[...] 2014-07-09
[4] 뉴스 高麗・朝鮮王朝時代の「貢女」の実態とは(上) http://www.chosunonl[...] 2011-04-24
[5] 뉴스 高麗・朝鮮王朝時代の「貢女」の実態とは(下) http://www.chosunonl[...] 2011-04-24
[6] 문서 蛮子とは南宋出身の漢人部隊。
[7] 문서 匹は2反。従って12匹は24反となる。
[8] 문서 厳密には高麗時代ではない。
[9] 뉴스 숨은 역사 2cm '조공외교' 조선 미녀들 중국 궁궐서 몰살됐다 http://www.yonhapnew[...] 2017-03-30
[10] 간행물 고려(高麗)의 원(元)에 대(對)한 공녀(貢女) 1957
[11] 간행물 고려의 원에 대한 공녀 1957
[12] 간행물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 및 공녀 2005
[13] 서적 『고려사 세가』, 충렬왕 2년(1276), 3월 29일 기사
[14] 문서 Ibid
[15] 웹사이트 기황후-고려 http://history.zoglo[...]
[16] 문서 원나라 순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황후가 된다.
[17] 문서 원나라 소종의 황후
[18] 문서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으로 영락제 사후 순장당하였다.
[19] 문서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
[20] 문서 後亦多畜高麗美人, 大臣有權者, 輒以此遺之, 京師達官貴人, 必得高麗女, 然後爲名家. 自至正以來, 宮中給事使令, 大半高麗女, 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 皆仿高麗, 擧世若狂. 원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 모든 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鑒) 卷214, 원기(元紀)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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