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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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테말라 혁명은 19세기 후반 커피 수출을 중심으로 한 과테말라 경제의 불평등 심화와 미국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의 영향력 확대로 인한 사회 불안을 배경으로 발생했다. 1931년 호르헤 우비코의 독재 정권은 원주민 강제 노동, 낮은 임금, 살인 합법화 등으로 악화된 민심을 자극했고, 1944년 민중 봉기와 쿠데타로 우비코가 축출되었다. 이후 후안 호세 아레발로 정부는 "정신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노동 개혁, 외교 정책 추진, 1949년 쿠데타 미수 사건을 겪었다. 1950년 하코보 아르벤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농지 개혁을 추진했으나, UFC와의 갈등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개입으로 1954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아르벤스 정부가 붕괴되었다. 쿠데타 이후 군사 독재 정권 수립과 좌익 게릴라의 반란으로 과테말라 내전이 발발하여 1996년까지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대규모 인권 침해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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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과테말라 -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는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반군이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을 축출한 사건으로, UFC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미국의 개입과 아르벤스 대통령의 토지 개혁 정책에 대한 반발, 냉전 시대의 반공주의적 분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다.
과테말라 혁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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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과테말라 혁명 |
다른 이름 | 10년의 봄 (Diez años de primavera) |
원인 | 권위주의와 경찰 국가 마누엘 에스트라다 카브레라와 호르헤 우비코 정부에 의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를 위한 토지 강탈 노동권 축소 |
동기 | 자유민주주의 토지 개혁 |
장소 | 과테말라 |
기간 | 1944년 10월 - 1954년 6월 |
결과 | |
주요 결과 | 집권 군부 사임 1944년 최초의 자유 대통령 및 의회 선거 실시. 후안 호세 아레발로 대통령 당선 법령 900호를 포함한 진보적인 사회 및 농업/토지 개혁 시작 노동자 권리 증진을 위한 노동법 통과 (작업장의 보건 및 안전 기준, 비-농장 노동자를 위한 표준화된 8시간 근무일 및 45시간 근무 주간, 임금 차별 금지, 노동자 자녀를 위한 초등학교 건설 의무화 등) 카리브해 군단과 같은 다른 국가의 반권위주의 운동 지원을 위한 외교 정책 전환 1949년 정부에 대한 군사 쿠데타 시도 실패 1950년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 당선 CIA가 1954년 쿠데타를 지원하여 성공 (Operation PBFortune) 과테말라 내전은 1960년에 시작됨 1995년까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는 시행되지 않음 |
2. 배경
19세기 말 이후 커피 수출은 과테말라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과테말라 정부는 커피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원주민 마야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플랜테이션 농업에 강제 노동을 동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미국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는 과테말라에서 막대한 토지를 획득하며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마누엘 에스트라다 카브레라 대통령은 UFC에 세금 감면 등 각종 특혜를 제공하며 성장을 도왔다.
1929년 대공황으로 과테말라 경제가 어려워지자, 사회 불안이 커졌다. 이에 대토지 소유주들은 1931년 호르헤 우비코 이 카스타녜다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우비코는 부랑 방지법(Ley contra la Vagancia)을 제정하여 토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강제 노동을 부과했고, 낮은 임금을 유지했다. 또한 토지 소유자의 재산 보호를 위한 살인을 합법화했으며, 경찰의 권한을 강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지키기 위한 공군 기지를 과테말라 국내에 설치하는 것을 허가했다.
호르헤 우비코는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 노동 운동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지만, 당선 후 그의 정책은 빠르게 권위주의적으로 변했다. 그는 채무 예속 제도를 폐지하고,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모든 노동 연령의 남성이 최소 100일의 중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부랑자법으로 대체했다. 또한, 국가는 도로 및 철도와 같은 공공 기반 시설에 무급 원주민 노동력을 사용했다. 우비코는 또한 임금을 매우 낮은 수준으로 동결했으며, 토지 소유주가 재산을 방어하기 위해 취한 모든 조치에 대해 기소 면제를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역사학자들이 살인을 합법화하는 행위라고 묘사했다. 그는 경찰력을 크게 강화하여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조직 중 하나로 만들었다. 경찰은 노동법을 위반한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사살하고 투옥할 수 있는 더 큰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법률의 결과는 농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야기했다.
우비코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베니토 무솔리니같은 파시스트 지도자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멕시코의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동맹으로 여겼고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41년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우비코도 이에 따랐고, 미국의 지시에 따라 과테말라에 거주하는 모든 독일계 사람들을 체포했다. 그는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과테말라에 공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에 큰 양보를 하여, 항구를 건설하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20만 헥타르의 공공 토지를 제공했다. 그는 나중에 경제 위기를 언급하며 이 의무에서도 회사를 해제했다. UFC는 과테말라에 진출한 이후, 소작농을 몰아내고 농지를 바나나 농장으로 전환하여 토지 소유를 확장해왔다. 이러한 과정은 우비코 정권 하에서 가속화되었고, 그의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세기 말 이후 과테말라에서는 커피 수출이 정부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정부는 커피 생산을 지원하기 위해 원주민인 마야인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법을 통과시키고, 노동법을 개정하여 플랜테이션이 채무를 이용한 강제 노동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증가하고 노동자들의 사회 불안이 발생하자 혁명을 두려워한 대토지 소유주는 1931년 대통령 선거에서 호르헤 우비코를 지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과테말라의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고, 우비코 정권은 항의 운동을 더욱 격렬하게 진압하게 되었다. 1944년 엘살바도르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대통령을 사임시켰다. 반란은 과테말라로 번져 우비코는 6월에 사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과테말라의 경제 불안을 심화시켰고, 우비코는 모든 형태의 항의나 반대에 대해 더욱 가혹하게 탄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44년, 이웃 나라인 엘살바도르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 독재자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가 잠시 실각했다가 빠르게 권력을 되찾았고, 이로 인해 많은 엘살바도르 혁명가들이 과테말라로 망명했다. 이는 과테말라 시티에 있는 대학교에서 일련의 시위가 벌어진 시기와 맞물렸다. 우비코는 1944년 6월 22일 헌법을 정지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학생과 노동자뿐만 아니라 많은 중산층 구성원도 시위에 참여하여 총파업을 요구하며 다음 날 우비코에게 헌법 복귀를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제시했다. 그들은 또한 311명의 가장 저명한 과테말라 시민들이 서명한 청원서를 그에게 전달했다. 우비코는 경찰을 보내 시위대에 발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호르헤 우비코 대통령의 사임 이후, 민주주의 회복은 즉각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비코는 페데리코 폰세 바이드스, 에두아르도 비야그란 아리사, 부에나벤투라 피네다 3명의 장군으로 구성된 군사 평의회(훈타)를 임명하여 임시 정부를 이끌게 했다. 며칠 후, 폰세 바이드스는 의회를 설득하여 자신을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하도록 했다. 폰세는 자유 선거를 약속했지만, 동시에 시위를 탄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정지시키는 등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이어갔다.
정부는 다가올 선거에서 군사 평의회(훈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을 사용하여 원주민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일부 대중들 사이에서 무장 혁명에 대한 지지가 커졌다. 군대 내 진보 세력은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1944년 10월 1일, 야당 신문 ''엘 임파르시알''의 편집인 알레한드로 코르도바가 암살되자, 군부 쿠데타 음모자들은 시위 지도자들에게 접촉하여 쿠데타를 대중 봉기로 전환하려 했다. 폰세 바이드스는 선거를 발표했지만, 친민주주의 세력은 그가 선거를 조작하려 한다며 규탄했다.
2. 1. 20세기 초 과테말라
19세기 말부터 커피 수출은 과테말라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과테말라 정부는 커피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원주민 마야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플랜테이션 농업에 강제 노동을 동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미국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는 과테말라에서 막대한 토지를 획득하며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마누엘 에스트라다 카브레라 대통령은 UFC에 세금 감면 등 각종 특혜를 제공하며 성장을 도왔다.1929년 대공황으로 과테말라 경제가 어려워지자, 사회 불안이 커졌다. 이에 대토지 소유주들은 1931년 호르헤 우비코 이 카스타녜다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우비코는 부랑 방지법(Ley contra la Vagancia)을 제정하여 토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강제 노동을 부과했고, 낮은 임금을 유지했다. 또한 토지 소유자의 재산 보호를 위한 살인을 합법화했으며, 경찰의 권한을 강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지키기 위한 공군 기지를 과테말라 국내에 설치하는 것을 허가했다.
2. 2. 호르헤 우비코 독재 정권 (1931-1944)
호르헤 우비코는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 노동 운동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지만, 당선 후 그의 정책은 빠르게 권위주의적으로 변했다. 그는 채무 예속 제도를 폐지하고,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모든 노동 연령의 남성이 최소 100일의 중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부랑자법으로 대체했다. 또한, 국가는 도로 및 철도와 같은 공공 기반 시설에 무급 원주민 노동력을 사용했다. 우비코는 또한 임금을 매우 낮은 수준으로 동결했으며, 토지 소유주가 재산을 방어하기 위해 취한 모든 조치에 대해 기소 면제를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역사학자들이 살인을 합법화하는 행위라고 묘사했다. 그는 경찰력을 크게 강화하여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조직 중 하나로 만들었다. 경찰은 노동법을 위반한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사살하고 투옥할 수 있는 더 큰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법률의 결과는 농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야기했다.
우비코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베니토 무솔리니같은 파시스트 지도자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멕시코의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동맹으로 여겼고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41년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우비코도 이에 따랐고, 미국의 지시에 따라 과테말라에 거주하는 모든 독일계 사람들을 체포했다. 그는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과테말라에 공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에 큰 양보를 하여, 항구를 건설하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20만 헥타르의 공공 토지를 제공했다. 그는 나중에 경제 위기를 언급하며 이 의무에서도 회사를 해제했다. UFC는 과테말라에 진출한 이후, 소작농을 몰아내고 농지를 바나나 농장으로 전환하여 토지 소유를 확장해왔다. 이러한 과정은 우비코 정권 하에서 가속화되었고, 그의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세기 말 이후 과테말라에서는 커피 수출이 정부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정부는 커피 생산을 지원하기 위해 원주민인 마야인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법을 통과시키고, 노동법을 개정하여 플랜테이션이 채무를 이용한 강제 노동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증가하고 노동자들의 사회 불안이 발생하자 혁명을 두려워한 대토지 소유주는 1931년 대통령 선거에서 호르헤 우비코를 지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과테말라의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고, 우비코 정권은 항의 운동을 더욱 격렬하게 진압하게 되었다. 1944년 엘살바도르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대통령을 사임시켰다. 반란은 과테말라로 번져 우비코는 6월에 사임했다.
2. 3. 1944년 6월 총파업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과테말라의 경제 불안을 심화시켰고, 우비코는 모든 형태의 항의나 반대에 대해 더욱 가혹하게 탄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44년, 이웃 나라인 엘살바도르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 독재자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가 잠시 실각했다가 빠르게 권력을 되찾았고, 이로 인해 많은 엘살바도르 혁명가들이 과테말라로 망명했다. 이는 과테말라 시티에 있는 대학교에서 일련의 시위가 벌어진 시기와 맞물렸다. 우비코는 1944년 6월 22일 헌법을 정지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학생과 노동자뿐만 아니라 많은 중산층 구성원도 시위에 참여하여 총파업을 요구하며 다음 날 우비코에게 헌법 복귀를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제시했다. 그들은 또한 311명의 가장 저명한 과테말라 시민들이 서명한 청원서를 그에게 전달했다. 우비코는 경찰을 보내 시위대에 발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2. 4. 임시 정부 수립
호르헤 우비코 대통령의 사임 이후, 민주주의 회복은 즉각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비코는 페데리코 폰세 바이드스, 에두아르도 비야그란 아리사, 부에나벤투라 피네다 3명의 장군으로 구성된 군사 평의회(훈타)를 임명하여 임시 정부를 이끌게 했다. 며칠 후, 폰세 바이드스는 의회를 설득하여 자신을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하도록 했다. 폰세는 자유 선거를 약속했지만, 동시에 시위를 탄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정지시키는 등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이어갔다.정부는 다가올 선거에서 군사 평의회(훈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을 사용하여 원주민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일부 대중들 사이에서 무장 혁명에 대한 지지가 커졌다. 군대 내 진보 세력은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1944년 10월 1일, 야당 신문 ''엘 임파르시알''의 편집인 알레한드로 코르도바가 암살되자, 군부 쿠데타 음모자들은 시위 지도자들에게 접촉하여 쿠데타를 대중 봉기로 전환하려 했다. 폰세 바이드스는 선거를 발표했지만, 친민주주의 세력은 그가 선거를 조작하려 한다며 규탄했다.
3. 10월 혁명
1944년 10월 1일, 반체제 성향 신문인 《El Imparcial》의 편집장 알레한드로 코르도바가 암살당했다. 이 사건은 군부 내 쿠데타 세력이 쿠데타를 민중 봉기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0월 19일,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아라나와 야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이 이끄는 소규모 육군 장교 그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초기에는 혁명군이 불리했지만, 노조원과 학생들의 지원 요청으로 세력이 확장되어 폰세 바이드스에게 충성하는 경찰과 군대를 제압했다. 10월 20일, 폰세 바이드스는 무조건 항복했다.
폰세 바이드스는 안전하게 국외로 추방되었고, 군사 훈타는 아르벤스, 아라나, 그리고 시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호르헤 토리에요로 구성된 3인 훈타로 대체되었다. 아라나는 강력한 과르디아 데 오노르(명예 경비대)를 혁명가들에게 가져온 공로로 훈타에 합류했다. 훈타는 대통령, 국회, 제헌 의회 선거를 약속했다.
학자들은 폰세 바이드스의 사임과 훈타 창설은 과테말라 혁명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훈타는 즉시 토지 엘리트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았고, 파치시아에서 일어난 시위를 신속하고 잔혹하게 진압하여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3. 1. 쿠데타 발발
1944년 10월 19일,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아라나와 야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이 이끄는 소규모 육군 장교 그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초기에는 혁명군이 불리했지만, 노조원과 학생들의 지원 요청으로 세력이 확장되어 폰세 바이드스에게 충성하는 경찰과 군대를 제압했다. 10월 20일, 폰세 바이드스는 무조건 항복했다.폰세 바이드스는 안전하게 국외로 추방되었고, 군사 훈타는 아르벤스, 아라나, 그리고 시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호르헤 토리에요로 구성된 3인 훈타로 대체되었다. 아라나는 강력한 과르디아 데 오노르(명예 경비대)를 혁명가들에게 가져온 공로로 훈타에 합류했다. 훈타는 대통령, 국회, 제헌 의회 선거를 약속했다.
폰세 바이드스의 사임과 훈타 창설은 과테말라 혁명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훈타는 즉시 토지 엘리트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았고, 파치시아에서 일어난 시위를 신속하고 잔혹하게 진압하여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3. 2. 혁명 평의회 구성
10월 혁명 이후, 야코보 아르벤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아라나, 그리고 시민 대표 호르헤 토리에요 3인으로 구성된 혁명 평의회가 새 정부를 구성했다. 아라나는 강력한 과르디아 데 오노르(명예 경비대)를 혁명에 가담시킨 대가로 평의회에 합류했다. 혁명 평의회는 대통령, 국회의원, 제헌 의회 선거를 약속했다. 학자들은 폰세 바이드스의 사임과 혁명 평의회 구성을 과테말라 혁명의 시작으로 본다.혁명 평의회는 파치시아에서 일어난 원주민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
4. 후안 호세 아레발로 정부 (1945-1951)
1944년 12월 19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호세 아레발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는 문맹이 아닌 남성만이 선거권을 가졌지만,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로 여겨진다. 비슷한 역사적 상황에 있던 많은 경우와 달리, 평의회 구성원 중 아무도 입후보하지 않았다. 주요 경쟁 상대는 아드리안 레시노스였지만, 선거에서 아레발로가 압승을 거두어 다른 모든 후보의 표를 합친 것보다 4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다.
1945년 3월 15일 아레발로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시 국내는 사회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우비코 시대에 무상 노동이 도로 건설에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교통은 전혀 정비되지 않았다. 국민의 70%는 문맹이었으며, 영양 부족과 불건강이 만연했다. 토지 소유자의 2%가 농지의 4분의 3 가까이를 소유했고, 그 결과 농경지는 국토의 1%에 미치지 못했다. 선주민 노동자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거나, 자급자족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토지만을 소유했다. 산업의 4분의 3는 농업이었으며, 공업은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아레발로의 배경과 이념'''
후안 호세 아레발로는 중산층 출신의 교육자였다. 아르헨티나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자신의 이념을 "정신적 사회주의"(Socialismo Espirituales)라고 규정했다. 그는 대부분의 과테말라 국민들의 후진성을 완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온정적인 정부를 통해서라고 믿었다. 그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그 혜택이 전체 인구에게 돌아가도록 규제되는 자본주의 사회를 믿었다. 아레발로의 국가 경제 비전은 사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아레발로의 이념은 그가 취임한 직후 과테말라 의회가 비준한 새 헌법에 반영되었는데, 이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 중 하나였다. 이 헌법은 문맹 여성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보통 선거를 보장하고, 권력 분산을 명시 하였으며, 다당제 시스템을 위한 조항을 마련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금지되었다. 헌법과 아레발로의 사회주의 이념은 아레발로와 (이후) 하코보 아르벤스 하에서 시행된 많은 개혁의 기초가 되었다. 비록 미국 정부는 이후 혁명의 이념을 급진적인 공산주의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좌편향으로의 큰 변화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확고한 반공주의였다.
'''노동 운동'''
1944년 혁명과 후안 호세 아레발로의 당선은 노동조합 운동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1944년 시위는 노동 운동을 강화시켰고, 폰세 바에데스는 1945년 헌법에서 폐지된 억압적인 부랑자법 시행을 중단하게 되었다. 아레발로는 1945년 5월 1일 조직 노동을 기념하는 연설을 했고, 언론의 자유는 과테말라 시티의 가혹한 노동 조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노동조합은 공산주의 계열과 비공산주의 계열로 나뉘었다. 호르헤 우비코 정부의 탄압으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운동은 지도자 석방으로 강화되었다. 미겔 마르몰, 빅토르 마누엘 구티에레스, 그라시엘라 가르시아 등이 석방된 지도자들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수도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학교인 '에스쿠엘라 클라리다'(클라리다 학교)를 설립하여 노조 조직을 도왔으나, 아레발로는 학교를 폐쇄하고 외국인 운동 지도자들을 추방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 운동은 교원 노조를 중심으로 생존했다.
아레발로는 500명 미만 노동자가 있는 사업장의 농촌 노동조합을 불법화했지만,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바나나 노동자 노조는 이 법에서 살아남았다. 1946년 이 노조의 파업으로 아레발로는 새 노동법이 통과될 때까지 모든 파업을 금지했다.
1947년 제정된 노동법은 여러 면에서 혁명적이었다. 이 법은 나이, 인종, 성별, 국적, 종교, 정치적 소속에 따른 임금 차별을 금지하고, 직장 안전 기준, 8시간 노동, 주 45시간 근무를 표준화했다 (농장은 제외). 또한 농장주에게 노동자 자녀를 위한 초등학교 건설을 요구하고 노동자의 지위를 존엄하게 만드는 데 대한 일반적인 약속을 했다. 1948년 행정 메커니즘이 만들어지면서 여러 조항이 체계적으로 시행될 수 있게 되었다. 이 법은 평균 임금을 3배 이상 인상시키는 등 노동자 권리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외교 정책'''
아레발로 정부는 해외에서도 민주주의 이상을 지원하려 했다. 아레발로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그는 두 차례의 범미 회의에서 라틴 아메리카 공화국들에게 권위주의 정권을 인정하고 지원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국이 지원하는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과 같은 독재 정권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에 아레발로는 니카라과 정부 및 라파엘 트루히요의 도미니카 공화국 정부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다른 라틴 아메리카 정부와의 협력에서 성과가 없자, 아레발로는 무력으로라도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독재 정권을 민주주의로 대체하려는 카리브 군단을 지원했다. 이로 인해 아레발로 행정부는 이 지역의 독재 정부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아레발로 정부는 중앙 아메리카 연방의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는 민주주의적인 중앙 아메리카 국가의 여러 지도자들에게 접근했지만, 엘살바도르의 살바도르 카스타녜다 카스트로 대통령을 제외하고 모두 거절당했다. 두 지도자는 연합을 구축하기 위한 회담을 시작했고, 1945년 말 연합 결성을 발표했지만, 양국의 내부 문제로 인해 지연되었고, 1948년 카스트로 정부는 오스카 오소리오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1949년 쿠데타 미수'''
10월 혁명 당시 최고위 군 장교였던 프란시스코 아라나는 민간 정부에 권력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쿠데타 이후 임시 정부를 구성한 3인 군사 정부를 이끌었으며, 처음에는 1944년 선거를 연기하려 했고, 그 다음에는 무효화하려 했다. 아레발로가 대통령이 되도록 허락하는 대가로 아라나는 신설된 "무장군 최고 사령관" 직위를 얻었고, 국방부 장관보다 높은 지위를 받았다. 이 직위는 6년 임기였으며 모든 군 인사 임명을 통제했다. 1945년 12월, 아레발로는 심각한 부상을 입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혁명 행동당 (PAR) 지도자들은 군사 쿠데타를 두려워하여 아라나와 협정을 맺었는데, 이 협정에서 당은 쿠데타를 자제하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1950년 선거에서 그의 후보 지명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아라나에 대한 지지는 아레발로의 개혁에 위협을 느낀 토지 귀족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48년 총선에서 그는 다수의 야당 후보를 지지했지만, 모두 패배했다. 1949년까지 국민 쇄신당과 PAR은 모두 아라나에게 공개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인민 해방 전선의 작은 분파가 그를 지지하기 위해 분열되었다. 좌익 정당들은 아르벤스를 대신 지지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군 장교만이 아라나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49년 7월 16일, 아라나는 아레발로에게 최후 통첩을 전달하여 아르벤스의 모든 지지자를 내각과 군대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쿠데타를 위협했다. 아레발로는 아르벤스와 다른 진보 지도자들에게 최후 통첩을 알렸고, 모두 아라나를 망명시켜야 한다고 동의했다. 이틀 후, 아레발로와 아라나는 또 다른 회의를 가졌다. 돌아가는 길에 아라나의 호송대는 아르벤스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에 의해 가로막혔다. 총격전이 벌어져 아라나를 포함해 세 명이 사망했다. 군대의 아라나 지지자들은 봉기했지만, 지도자가 없었고 다음 날 반군은 협상을 요청했다. 쿠데타 시도로 약 15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했다.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를 포함한 아라나의 많은 지지자들이 망명했다.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4. 1. 아레발로의 배경과 이념
후안 호세 아레발로는 중산층 출신의 교육자였다. 아르헨티나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자신의 이념을 "정신적 사회주의"(Socialismo Espirituales)라고 규정했다. 그는 대부분의 과테말라 국민들의 후진성을 완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온정적인 정부를 통해서라고 믿었다. 그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그 혜택이 전체 인구에게 돌아가도록 규제되는 자본주의 사회를 믿었다. 아레발로의 국가 경제 비전은 사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아레발로의 이념은 그가 취임한 직후 과테말라 의회가 비준한 새 헌법에 반영되었는데, 이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 중 하나였다. 이 헌법은 문맹 여성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보통 선거를 보장하고, 권력 분산을 명시 하였으며, 다당제 시스템을 위한 조항을 마련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금지되었다. 헌법과 아레발로의 사회주의 이념은 아레발로와 (이후) 하코보 아르벤스 하에서 시행된 많은 개혁의 기초가 되었다. 비록 미국 정부는 이후 혁명의 이념을 급진적인 공산주의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좌편향으로의 큰 변화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확고한 반공주의였다.
4. 2. 노동 운동
1944년 혁명과 후안 호세 아레발로의 당선은 노동조합 운동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1944년 시위는 노동 운동을 강화시켰고, 폰세 바에데스는 1945년 헌법에서 폐지된 억압적인 부랑자법 시행을 중단하게 되었다. 아레발로는 1945년 5월 1일 조직 노동을 기념하는 연설을 했고, 언론의 자유는 과테말라 시티의 가혹한 노동 조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노동조합은 공산주의 계열과 비공산주의 계열로 나뉘었다. 호르헤 우비코 정부의 탄압으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운동은 지도자 석방으로 강화되었다. 미겔 마르몰, 빅토르 마누엘 구티에레스, 그라시엘라 가르시아 등이 석방된 지도자들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수도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학교인 '에스쿠엘라 클라리다'(클라리다 학교)를 설립하여 노조 조직을 도왔으나, 아레발로는 학교를 폐쇄하고 외국인 운동 지도자들을 추방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 운동은 교원 노조를 중심으로 생존했다.
아레발로는 500명 미만 노동자가 있는 사업장의 농촌 노동조합을 불법화했지만,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바나나 노동자 노조는 이 법에서 살아남았다. 1946년 이 노조의 파업으로 아레발로는 새 노동법이 통과될 때까지 모든 파업을 금지했다.
1947년 제정된 노동법은 여러 면에서 혁명적이었다. 이 법은 나이, 인종, 성별, 국적, 종교, 정치적 소속에 따른 임금 차별을 금지하고, 직장 안전 기준, 8시간 노동, 주 45시간 근무를 표준화했다 (농장은 제외). 또한 농장주에게 노동자 자녀를 위한 초등학교 건설을 요구하고 노동자의 지위를 존엄하게 만드는 데 대한 일반적인 약속을 했다. 1948년 행정 메커니즘이 만들어지면서 여러 조항이 체계적으로 시행될 수 있게 되었다. 이 법은 평균 임금을 3배 이상 인상시키는 등 노동자 권리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4. 3. 외교 정책
아레발로 정부는 해외에서도 민주주의 이상을 지원하려 했다. 아레발로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그는 두 차례의 범미 회의에서 라틴 아메리카 공화국들에게 권위주의 정권을 인정하고 지원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국이 지원하는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과 같은 독재 정권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에 아레발로는 니카라과 정부 및 라파엘 트루히요의 도미니카 공화국 정부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다른 라틴 아메리카 정부와의 협력에서 성과가 없자, 아레발로는 무력으로라도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독재 정권을 민주주의로 대체하려는 카리브 군단을 지원했다. 이로 인해 아레발로 행정부는 이 지역의 독재 정부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아레발로 정부는 중앙 아메리카 연방의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는 민주주의적인 중앙 아메리카 국가의 여러 지도자들에게 접근했지만, 엘살바도르의 살바도르 카스타녜다 카스트로 대통령을 제외하고 모두 거절당했다. 두 지도자는 연합을 구축하기 위한 회담을 시작했고, 1945년 말 연합 결성을 발표했지만, 양국의 내부 문제로 인해 지연되었고, 1948년 카스트로 정부는 오스카 오소리오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4. 4. 1949년 쿠데타 미수
10월 혁명 당시 최고위 군 장교였던 프란시스코 아라나는 민간 정부에 권력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쿠데타 이후 임시 정부를 구성한 3인 군사 정부를 이끌었으며, 처음에는 1944년 선거를 연기하려 했고, 그 다음에는 무효화하려 했다. 아레발로가 대통령이 되도록 허락하는 대가로 아라나는 신설된 "무장군 최고 사령관" 직위를 얻었고, 국방부 장관보다 높은 지위를 받았다. 이 직위는 6년 임기였으며 모든 군 인사 임명을 통제했다. 1945년 12월, 아레발로는 심각한 부상을 입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혁명 행동당 (PAR) 지도자들은 군사 쿠데타를 두려워하여 아라나와 협정을 맺었는데, 이 협정에서 당은 쿠데타를 자제하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1950년 선거에서 그의 후보 지명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아라나에 대한 지지는 아레발로의 개혁에 위협을 느낀 토지 귀족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48년 총선에서 그는 다수의 야당 후보를 지지했지만, 모두 패배했다. 1949년까지 국민 쇄신당과 PAR은 모두 아라나에게 공개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인민 해방 전선의 작은 분파가 그를 지지하기 위해 분열되었다. 좌익 정당들은 아르벤스를 대신 지지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군 장교만이 아라나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49년 7월 16일, 아라나는 아레발로에게 최후 통첩을 전달하여 아르벤스의 모든 지지자를 내각과 군대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쿠데타를 위협했다. 아레발로는 아르벤스와 다른 진보 지도자들에게 최후 통첩을 알렸고, 모두 아라나를 망명시켜야 한다고 동의했다. 이틀 후, 아레발로와 아라나는 또 다른 회의를 가졌다. 돌아가는 길에 아라나의 호송대는 아르벤스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에 의해 가로막혔다. 총격전이 벌어져 아라나를 포함해 세 명이 사망했다. 군대의 아라나 지지자들은 봉기했지만, 지도자가 없었고 다음 날 반군은 협상을 요청했다. 쿠데타 시도로 약 15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했다.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를 포함한 아라나의 많은 지지자들이 망명했다.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5. 하코보 아르벤스 정부 (1951-1954)
아르벤스는 국방장관으로서 이미 차기 대통령의 주요 후보였지만, 쿠데타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인해 더욱 그 위신이 높아졌다. 1950년, 중도 성향의 국가통일당(PIN)이 아르벤스를 대통령 후보로 발표하고, 혁명행동당을 포함한 좌익 정당 및 노동조합의 찬동을 얻었다 . 다른 주요 후보로는 혁명을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상류·중류 계급의 지지를 얻은 호르헤 가르시아 그라나도스와, 우비코 정권 하에서 장군을 역임했으며 혁명에 강하게 반대하는 미겔 이디고라스 푸엔테스가 있었다. 선거 운동에서 아르벤스는 아레발로의 개혁을 지속·확대할 것을 약속했다. 1950년 11월 15일에 선거가 치러졌고, 아르벤스가 60%가 넘는 표를 얻었다. 1951년 3월 15일에 아르벤스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5. 1. 아르벤스의 배경
하코보 아르벤스는 1913년 스위스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5년 과테말라의 국립 군사 학교인 에스쿠엘라 폴리테크니카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우비코 정권 아래에서 과테말라 육군 장교로 복무했다. 장교 시절, 아르벤스는 죄수들을 호송하는 과정에서 급진화되었고, 노동 운동과 연계를 맺기 시작했다. 1938년 그는 사회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마리아 비야누에바를 만나 결혼했다.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준 또 다른 인물은 과테말라 공산주의자 호세 마누엘 포르투니였다. 1944년, 우비코의 권위주의 정권에 혐오감을 느낀 아르벤스는 동료 장교들과 함께 정부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폰세 바이데스가 의회를 협박하여 대통령으로 임명되자, 아르벤스는 이에 분노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타도했고, 혁명에서 대중 시민 운동과 연계를 맺고 유지한 몇 안 되는 장교 중 한 명이었다.5. 2. 농지 개혁
아르벤스(Árbenz) 정부의 근대화 계획의 핵심은 농지 개혁이었다. 아르벤스는 공산주의 지도자들과 비공산주의 경제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법안을 작성했으며,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경제학자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1952년 6월 17일 국회에서 통과된 이 법안은 즉시 시행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초점은 대규모 토지 소유주로부터 경작되지 않은 토지를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이전하여, 그들이 스스로 생존 가능한 농장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농지 개혁 법안의 공식 명칭은 칙령 900이었다. 이 법안은 673에이커(272ha)보다 큰 토지 소유주로부터 모든 미경작 토지를 수용했다. 224에이커(91ha)에서 672에이커(272ha) 사이의 토지는 사용된 면적이 3분의 2 미만인 경우에만 미경작 토지를 수용했다. 소유주에게는 정부 채권으로 보상했는데, 그 가치는 수용된 토지의 가치와 같았다. 토지 자체의 가치는 소유주가 1952년 세금 신고서에 신고한 가치였다. 재분배는 토지 소유주, 노동자, 정부 대표로 구성된 지역 위원회에서 조직했다. 약 35만 개의 사유지 중 1,710개만 수용의 영향을 받았다. 비록 법 자체는 온건한 자본주의 틀로 작성되었지만, 매우 빠르게 시행되어 때때로 임의적인 토지 몰수가 발생하기도 했다.
1954년 6월까지 140만 에이커(57만 헥타르)의 토지가 수용되어 분배되었다. 이 시점까지 약 50만 명, 즉 인구의 6분의 1이 토지를 받았다. 이 칙령에는 토지를 받은 사람들에게 금융 신용을 제공하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1953년 7월 7일에 설립된 국립농업은행(Banco Nacional Agrario, BNA)은 1954년 6월까지 900만 달러 이상의 소액 대출을 제공했다. 53,829명의 지원자가 평균 225달러를 받았는데, 이는 과테말라 1인당 소득의 두 배였다. BNA는 매우 효율적인 정부 관료제로 명성을 얻었다. 대출 상환율은 높았으며, 1953년 3월부터 11월까지 지급된 3,371,185달러 중 1954년 6월까지 3,049,092달러가 상환되었다. 이 법에는 재분배된 토지를 통과하는 도로의 국유화 조항도 포함되어 있어, 농촌 공동체의 연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정부의 비판자들이 예측한 것과는 달리, 이 법은 과테말라의 농업 생산성을 약간 증가시켰고, 경작 면적을 늘렸다. 농업 기계 구매도 증가했다. 전반적으로 이 법은 수천 명의 농민 가족, 대부분이 원주민의 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역사학자 피에로 글레이헤세스/Piero Gleijeses영어는 이 법에 의해 바로잡힌 불의가 비교적 적은 수의 임의적인 토지 몰수의 불의보다 훨씬 더 컸다고 말했다. 역사학자 그렉 그랜딘/Greg Grandin영어은 이 법이 여러 면에서 결함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근본적인 권력 이동을 나타냈다고 평가했다.
5. 3.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와의 갈등
1899년 설립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 UFC)는 중앙 아메리카 전역에 토지와 철도를 소유하며 바나나 수출 사업을 확장했다. 1930년에는 과테말라 최대 토지 소유주이자 고용주였으며, 호르헤 우비코 정권과 유리한 계약을 체결하여 세금 면제 등의 특권을 누렸다. 1950년에는 연간 순이익이 과테말라 정부 수입의 두 배에 달했다.1944년 혁명 이후, UFC는 유비코 정권과의 관계로 인해 과테말라의 발전을 저해하는 존재로 여겨졌고, 유색 인종 차별로 인해 이미지가 더욱 악화되었다. 아레발로 정부의 노동 개혁으로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인정받자, UFC는 개혁이 자사를 표적으로 삼았다고 여기고 신법규를 위반하며 협상을 거부했다. 1952년 야코보 아르벤스 정부의 농지 개혁법(법령 900호)으로 UFC 소유 토지의 상당 부분이 수용 대상이 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다.
UFC는 미국 정부에 로비를 펼쳐 과테말라 정부를 비난하게 했고, 과테말라 정부는 UFC를 국가 발전의 장애물로 여겼다. 1953년, 정부는 UFC의 미경작지를 수용하고 보상금을 지급했으나, UFC는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등과의 관계를 이용해 로비를 강화했다. 또한, 홍보 전문가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고용하여 UFC를 피해자로 묘사하는 홍보 활동을 펼쳤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과테말라 정부를 비판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 UFC는 과테말라 정부 전복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
6. 1954년 CIA 쿠데타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집중적인 로비를 펼쳐, 많은 미국 국회의원과 상원 의원들이 과테말라 정부가 회사의 이익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게 만들었다. 과테말라 정부는 회사가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장애물이라고 맞섰다. 1953년, 과테말라 정부는 200,000 에이커(약 809.37 km²)의 미경작지를 수용하고, 에이커당 2.99 미국 달러의 보상금을 제시했는데, 이는 회사가 해당 토지를 매입했을 때 지불한 금액의 두 배였다. 이후 추가적인 토지 수용으로 총 400,000 에이커(약 1618.74 km²)가 수용되었고, 정부는 UFC가 세금 목적으로 자체 부동산을 평가한 비율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했다. 이는 워싱턴에서의 추가 로비 활동으로 이어졌는데, 특히 회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을 통해 이루어졌다. 회사는 과테말라 정부를 깎아내리는 홍보 활동을 시작하여, 홍보 전문가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고용해 여러 해 동안 회사를 과테말라 정부의 피해자로 묘사하는 집중적인 노력을 펼쳤다. 회사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52년에 당선된 후 이러한 노력을 강화했다. 여기에는 강경한 것으로 알려진 회사에 과테말라에 대한 연구 조사를 의뢰하는 것이 포함되었으며, 이 연구는 과테말라 정부를 매우 비판하는 235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역사학자들은 그 보고서가 "과장, 악의적인 묘사, 기괴한 역사 이론"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고서는 보고서를 전달받은 국회의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회사는 전반적으로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해야 한다는 여론을 미국 내 입법자들과 대중에게 설득하기 위해 50만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
UFC의 로비 외에도, 1954년 미국이 아르벤스를 전복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이끈 몇 가지 다른 요인들이 있었다. 과테말라 혁명 기간 동안,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쿠바 등 다른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에서도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강력한 반공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정부들과 아르벤스 사이에 긴장을 조성했고, 이는 아레발로가 카리브 군단을 지원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지원은 또한 미국과 중앙정보국(CIA)을 불안하게 했다. 역사학자 리처드 임머만에 따르면, 냉전 초기 미국과 CIA는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아레발로가 공산당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의 주요 인물들은 혁명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침투당했고 미국에 위협이 된다고 믿었다. 혁명 기간 동안, 이러한 믿음을 더욱 강화하는 여러 보고서와 각서가 미국 정부 기관 사이에서 돌았다.
1952년 11월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반공적인 경향이 강해졌으며,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 및 그의 동생이자 CIA 국장인 앨런 덜레스는 UFC와 밀접한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이 아이젠하워가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려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1954년, 아르벤스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무기를 수입했는데, 이는 동구권에서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무기가 수입된 사례였다. 이 사실이 CIA가 최종적으로 쿠데타를 결심하는 원인이 되었다.
6. 1. 정치적 동기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집중적인 로비를 펼쳐, 많은 미국 국회의원과 상원 의원들이 과테말라 정부가 회사의 이익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게 만들었다. 과테말라 정부는 회사가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장애물이라고 맞섰다. 1953년, 과테말라 정부는 200,000 에이커(약 809.37 km²)의 미경작지를 수용하고, 에이커당 2.99 미국 달러의 보상금을 제시했는데, 이는 회사가 해당 토지를 매입했을 때 지불한 금액의 두 배였다. 이후 추가적인 토지 수용으로 총 400,000 에이커(약 1618.74 km²)가 수용되었고, 정부는 UFC가 세금 목적으로 자체 부동산을 평가한 비율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했다. 이는 워싱턴에서의 추가 로비 활동으로 이어졌는데, 특히 회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을 통해 이루어졌다. 회사는 과테말라 정부를 깎아내리는 홍보 활동을 시작하여, 홍보 전문가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고용해 여러 해 동안 회사를 과테말라 정부의 피해자로 묘사하는 집중적인 노력을 펼쳤다. 회사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52년에 당선된 후 이러한 노력을 강화했다. 여기에는 강경한 것으로 알려진 회사에 과테말라에 대한 연구 조사를 의뢰하는 것이 포함되었으며, 이 연구는 과테말라 정부를 매우 비판하는 235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역사학자들은 그 보고서가 "과장, 악의적인 묘사, 기괴한 역사 이론"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고서는 보고서를 전달받은 국회의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회사는 전반적으로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해야 한다는 여론을 미국 내 입법자들과 대중에게 설득하기 위해 50만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UFC의 로비 외에도, 1954년 미국이 아르벤스를 전복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이끈 몇 가지 다른 요인들이 있었다. 과테말라 혁명 기간 동안,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쿠바 등 다른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에서도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강력한 반공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정부들과 아르벤스 사이에 긴장을 조성했고, 이는 아레발로가 카리브 군단을 지원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지원은 또한 미국과 중앙정보국(CIA)을 불안하게 했다. 역사학자 리처드 임머만에 따르면, 냉전 초기 미국과 CIA는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아레발로가 공산당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의 주요 인물들은 혁명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침투당했고 미국에 위협이 된다고 믿었다. 혁명 기간 동안, 이러한 믿음을 더욱 강화하는 여러 보고서와 각서가 미국 정부 기관 사이에서 돌았다.
1952년 11월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반공적인 경향이 강해졌으며,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 및 그의 동생이자 CIA 국장인 앨런 덜레스는 UFC와 밀접한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이 아이젠하워가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려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1954년, 아르벤스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무기를 수입했는데, 이는 동구권에서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무기가 수입된 사례였다. 이 사실이 CIA가 최종적으로 쿠데타를 결심하는 원인이 되었다.
6. 2. 작전명 PBFortune과 PBSuccess
해리 트루먼 행정부는 과테말라 정부가 공산주의에 잠식되었다고 판단했지만, 외교적, 경제적 수단을 통해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했다. 미국은 1944년 이후 과테말라에 대한 무기 판매를 거부했고, 1951년부터는 과테말라가 다른 국가로부터 무기를 구매하는 것을 막았다. 1952년, 트루먼은 작전명 PBFortune을 승인하여 과테말라 정부 전복을 계획했다. 이 계획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니카라과 독재자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 라파엘 트루히요 도미니카 공화국 독재자와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베네수엘라 독재자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가 이 작전을 이끌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가 이 음모를 발견하고,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을 설득하여 계획은 중단되었다.1952년 11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보다 적극적인 반공 정책이 추진되었다.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과 그의 형제이자 CIA 국장인 앨런 덜레스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는 아이젠하워가 야코보 아르벤스 전복을 지지하는 배경이 되었다.
1953년 8월, 아이젠하워는 Operation PBSuccess를 승인하고 CIA에 아르벤스 정부 전복을 지시했다. 이 작전에는 270만 달러의 예산이 배정되었고, 100명 이상의 CIA 요원이 참여했다. CIA는 쿠데타 이후 암살될 인물 목록을 작성하고, 암살 기술 매뉴얼을 만들었으며, 군부가 처리할 사람들의 목록도 작성했다. CIA는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를 쿠데타 지도자로 선정하고 그를 지원했다. 미국 국무부는 과테말라 정부를 공산주의 및 소련과 연계하여 국제적 고립을 유도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1954년, 아르벤스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비밀리에 무기를 획득했는데, 이는 소련 블록 국가가 미주 지역에 무기를 선적한 첫 번째 사례였다. 이 무기 선적은 CIA가 쿠데타를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6. 3. 과테말라 침공
1954년 6월 18일,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는 48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온두라스에서 과테말라로 국경을 넘었다. 이들에게는 중앙정보국(CIA)이 무기를 제공하고 훈련을 지원했다. 혁명 당시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쿠바 등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에서는 강력한 반공주의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고, 이는 과테말라와의 긴장을 고조시켰다.CIA는 카스티요 아르마스 군대가 과테말라 국경 내에 주둔하면서, 과테말라 국민과 정부에게 그의 승리가 기정사실임을 설득하는 심리전을 계획했다. 여기에는 가톨릭 사제를 동원한 반공 설교, CIA 항공기를 이용한 공습, 해상 봉쇄, 전단 살포, 라디오 방송 등이 포함되었다. "해방의 소리"라는 라디오 방송은 카스티요 아르마스가 이끄는 과테말라 망명자들이 곧 국가를 해방할 것이라고 선전했다.
카스티요 아르마스 군대는 사카파와 푸에르토바리오스를 향해 진격했지만, 과테말라 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러나 CIA의 선전은 과테말라 조종사들이 탈주하게 만들었고, 아르벤스는 공군 전체의 탈주를 우려하여 모든 항공기를 묶어두었다. CIA는 미국인 조종사가 조종하는 비행기로 과테말라 마을을 폭격하여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과테말라는 유엔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이 사건을 과테말라의 내부 문제라고 주장하며 조사를 거부했다. 6월 25일, CIA 비행기가 과테말라 시를 폭격하여 정부의 주요 유류 비축 시설을 파괴했다. 아르벤스는 군대에 지역 농민과 노동자에게 무기를 분배하도록 명령했지만, 군대는 이를 거부하고 아르벤스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결국 아르벤스는 1954년 6월 27일 사임하고 카를로스 엔리케 디아스에게 권력을 넘겼다. 이후 미국 대사 존 퓨리포이의 중재로 엘살바도르에서 군 지도부와 카스티요 아르마스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고, 카스티요 아르마스는 1954년 7월 7일 군사 평의회에 포함되었으며, 며칠 후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미국은 7월 13일 새 정부를 승인했다. 10월 초에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모든 정당은 참여가 금지되었고, 카스티요 아르마스가 유일한 후보로 9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엘살바도르 회담의 결과 중 하나는 혁명이 가져온 진보적인 개혁의 대부분을 되돌릴 새로운 헌법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6. 4. 아르벤스 사임과 쿠데타 성공
중앙정보국(CIA)의 폭격과 심리전에 과테말라 군은 동요했고, 아르벤스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1954년 6월 25일, CIA의 항공기는 수도 과테말라 시를 폭격하여 정부의 주요 석유 비축 기지를 파괴했다. 공포에 질린 아르벤스는 군에 무기를 농민과 노동자에게 분배할 것을 요구했다. 군은 이를 거부하고, 아르벤스의 사임 또는 카스티요 아르마스와의 협의를 요구했다. 군의 협력을 잃은 아르벤스는 1954년 6월 27일에 사임하고 권력을 군에 이양했다.미국의 중재로 엘살바도르에서 과테말라 육군과 카스티요 아르마스 간의 회의가 열렸고, 이로 인해 카스티요 아르마스는 군사 평의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며칠 후에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7월 13일에 미국 정부는 신정부를 승인했다. 10월 초에 선거가 치러졌지만, 다른 정당의 참가는 금지되었고, 유일한 후보인 카스티요 아르마스가 99%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엘살바도르에서의 회의 결과로 새로운 헌법이 기안되었고, 혁명으로 가져온 진보적 개혁의 대부분은 원상태로 되돌아갔다.
7. 쿠데타 이후
쿠데타 이후, 수백 명의 농민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역사학자 그레그 그랜딘은 "오늘날 학자들과 과테말라 지식인들 사이에는 1954년이 서반구에서 가장 억압적인 국가의 시작을 알렸다는 일반적인 합의가 있다"고 말했다. 쿠데타와 군사 독재 정권 수립 이후, 시골 지역에서 일련의 좌익 반란이 시작되었고, 이들은 종종 상당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1996년까지 이어진 과테말라 내전을 촉발했다. 이러한 운동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것은 빈곤 게릴라군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최대 규모일 때 27만 명의 회원을 보유했다. 20만 명의 민간인이 전쟁에서 사망했으며, 민간인 학살, 강간, 공중 폭격, 그리고 강제 실종을 포함한 수많은 인권 침해가 발생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침해의 93%가 1980년대 원주민 마야족을 상대로 한 대량 학살적인 초토화 작전을 포함하여 미국이 지원하는 군대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추정한다.
7. 1. 과테말라 내전 (1960-1996)
1954년 쿠데타로 군사 독재 정권이 수립된 후, 지방에서 좌익 게릴라들이 발생하여 1996년까지 과테말라 내전이 이어졌다. 이들은 종종 상당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가장 큰 규모는 빈곤 게릴라군이었다. 내전 기간 동안 2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대량 학살, 강간, 공중 폭격, 강제 실종 등 수많은 인권 침해가 발생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인권 침해의 93%가 미국이 지원하는 군대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1980년대 원주민 마야족을 상대로 한 대량 학살적인 초토화 작전도 포함된다고 추정한다.
7. 2.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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