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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다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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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다라지는 750년 구다라노코니시키 교후쿠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족의 후손인 구다라노코니시키 씨족과 관련이 있으며, 11~12세기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지 않았다. 1932년 시작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야쿠시지 사찰과 유사한 가람 배치가 확인되었으나, 이후 회랑이 발견되면서 신라의 가논지 절 유적과 더 유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재 유적지는 게이한 가타노선 미야노사카역 인근에 위치하며, 구다라노코니시키 씨족을 기리는 구다라오 신사가 인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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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다라지 - [지명]에 관한 문서
개요
구다라지 가람
구다라지 가람 (중앙 오른쪽에 동탑, 왼쪽 뒤에 서탑, 오른쪽 뒤에 금당)
위치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 나카미야 니시노초
종교불교
창건자구다라노코니시키 교후쿠
완공 시기750년
현재 상태폐허
지정일본 특별 사적
상세 정보
이름구다라지 (百済寺)
로마자 표기Kudara-ji
종류도시 공원 (역사 공원)
면적2.2 ha
개원1966년 (쇼와 41년) 4월 11일
운영히라카타시
웹사이트히라카타시 HP

2. 역사

구다라노코니시키 쿄후쿠가 750년에 구다라지를 창건한 이후, 이 절은 구다라노코니시키 씨족이 정치계에서 사라진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11세기와 12세기 경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재건되지 않았다.[2]

1932년, 1965년, 2005년에 걸쳐 여러 차례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1932년 첫 발굴에서는 남문, 중문, 한 쌍의 일본식 탑, 본당, 강당으로 구성된 "야쿠시지" 양식의 배치를 확인하였고, 1941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65년 두 번째 발굴에서는 회랑이 본당과 중문을 연결하여 신라의 가논지 절 유적과 더 유사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2005년 세 번째 발굴에서는 대형 부조 형태의 불상 조각이 발견되었다.[5][6]

枚方시 내 가타노가하라의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한 구다라지는 금당과 강당, 식당을 중앙에 두고, 동서에 탑을 배치한 가람 양식을 가지며, 중문, 남문, 동문, 동원의 흔적과 함께 회랑의 흔적이 중문에서 동서 양 탑을 둘러싸 금당에 연결되어 있다. 현재 건축물은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기단과 초석을 복원한 형태로 "백제사 터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2. 1. 건립 배경

660년 백제는 나당 연합에 의해 멸망했고,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중국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의 아들 부여풍은 일본으로 탈출하여 야마토 시대의 장군 아베노 히라후와 함께 백제 부흥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또 다른 아들인 젠코(善光 또는 禅広)는 일본에 정착하여 일본 천황으로부터 구다라노코니시키(百濟王, "백제의 왕")라는 성씨를 받았다. 구다라노코니시키 씨족은 처음에는 특권을 누렸지만 691년에 일본 귀족에 동화되었다.[2] 구다라노코니시키 쿄후쿠는 젠코의 증손자였으며, 무쓰국의 명목상 지사로서 나라의 도다이 지에 있는 대불 완성을 위해 궁정에 기증할 금광을 발견했다. 구다라지(그 ''한자''는 "백제"와 같다)는 이 사건 직후인 750년에 구다라노코니시키 쿄후쿠에 의해 창건되었다.

2. 2. 백제사 건립

구다라노코니시키 쿄후쿠가 750년에 구다라지를 창건했다. 660년 백제는 나당 연합에 의해 멸망했고, 의자왕당나라로 끌려갔다. 그의 아들 부여풍은 일본으로 탈출하여 백제 부흥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또 다른 아들인 젠코(善光 또는 禅広)는 일본에 정착하여 일본 천황으로부터 구다라노코니시키 (百濟王, "백제의 왕")라는 성씨를 받았다. 구다라노코니시키 씨족은 처음에는 특권을 누렸지만 691년에 일본 귀족에 동화되었다.[2] 쿄후쿠는 젠코의 증손자였으며, 무쓰국의 명목상 지사로서 나라도다이 지에 있는 대불 완성을 위해 궁정에 기증할 금광을 발견했다. 구다라지(그 ''한자''는 "백제"와 같다)는 이 사건 직후에 건설되었다.

이 절은 11세기와 12세기 경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는 구다라노코니시키 씨족이 정치계에서 사라진 시기와 거의 일치하며, 재건되지 않았다.

1932년에 처음 고고학적 발굴이 되었고, 1941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65년에 두 번째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회랑본당과 중문을 연결하고 있어 배치가 야쿠시지보다는 신라의 가논지 절 유적과 더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2005년에는 세 번째 발굴이 이루어졌다.

枚方시 내, 가타노가하라의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하며, 금당과 강당, 식당을 중앙에 두고, 그 동서에 탑을 배치한 가람 양식을 가지며, 각각 초석이 남아 있다. 또한 중문, 남문, 동문, 동원의 흔적도 알 수 있다. 회랑의 흔적은 중문에서 동서 양 탑을 둘러싸 금당에 연결되어 있다. 이 가람 양식은 야쿠시지와 유사하지만, 약사사는 회랑이 강당에 연결되므로 백제사(百済寺)와 다르며, 백제사는 오히려 신라의 감은사와 동일한 형식이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5][6]

건축물은 여러 차례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기단과 초석을 복원한 형태로 "백제사 터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2. 3. 소실과 발굴

구다라노코니시키 씨족이 정치계에서 사라진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11세기와 12세기 경, 이 절은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재건되지 않았다.[2]

1932년에 처음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발견된 주춧돌을 바탕으로 남문, 중문, 나란히 있는 한 쌍의 일본식 탑, 본당, 강당으로 구성된 "야쿠시지" 양식의 배치를 가지고 있으며, 각 변이 약 200m인 구역 내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발견을 바탕으로 1941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그 후 유적지는 나무 뿌리로 매우 무성하게 덮여 기반을 손상시켰다. 1965년에 두 번째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회랑이 본당과 중문을 연결하고 있어 배치가 야쿠시지보다는 신라의 가논지 절 유적과 더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2005년에는 손상된 부분을 복구하고 두 번째 조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세 번째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발굴 과정에서 대형 부조 형태의 불상 조각이 발견되었다.[5][6]

건축물은 여러 차례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기단과 초석을 복원한 형태로 "백제사 터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현재는 재정비 중이다.

2007년까지 3차례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 1차 조사는 1932년 오사카사담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탑의 기단과 회랑의 초석이 조사되었으며, 대략 동서 양탑을 갖춘 약사사식 가람으로 간주되었다. 이 성과로 1941년 사적 지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 고목과 관목이 무성하게 자랐다.
  • 1965년, 데라시마 소이치로 시장이 제2차 발굴 조사를 계획했다. 그 결과, 회랑이 중문에서 금당으로 이어지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신라의 감은사(感恩寺)와 같은 형식임이 밝혀졌다.
  • 2005년부터 제3차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조사 결과, 대형 다존 전불(浮き彫り状の仏像)의 파편이 나라 시대의 유물로서는 처음 발견되었다. 이는 백제사(百済寺)의 격식과 백제왕씨의 세력을 짐작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3. 가람 배치

가타노가하라의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금당과 그 뒤편의 강당, 식당을 중앙에 두고, 그 동서에 탑을 배치한 가람 양식을 가지며, 각각 초석이 남아 있다. 또한 중문, 남문, 동문, 동원의 흔적도 알 수 있다. 회랑의 흔적은 중문에서 동서 양 탑을 둘러싸 금당에 연결되어 있다. 이 가람 양식은 약사사와 유사하지만, 약사사는 회랑이 강당에 연결되므로 구다라지와 다르며, 구다라지는 오히려 신라의 감은사와 동일한 형식이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5][6]. 이로 미루어, 고대 일본과 한반도 간의 교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임이 알려져 있다.

4. 난바 백제사와의 관계

백제왕씨가 가와치국 가타노의 땅으로 이주하기 전, 셋츠국 나니와쿄에도 "백제사(百済寺)", "백제니사(百済尼寺)"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일본령이기』 제14화에 "나니와 백제사"라고 언급되어 있으며, 나니와의 "백제사"는 사이메이 천황 시대(7세기 중엽)부터 10세기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7]

"백제사"는 현재의 오사카시 텐노지구 도가시 폐사(현 도요카와이나리 오사카별원 부지 내), "백제니사"는 같은 구의 사이쿠다니 유적에 비정되어 있다. 1997년, 사이쿠다니 유적에서는 "백제니(百済尼)", "백니사(百尼寺)"의 묵서가 있는 나라 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어 "백제니사"의 존재가 판명되었다. 두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의 형식에도 공통성이 보인다.[7][8][9] "백제니사"에서 와도카이친의 가지전이 발견되었다. 사이쿠다니 유적에서도 화폐 주조를 짐작하게 하는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셋츠국에는 "백제군"이 존재했던 적이 있는데, 이곳 부근이 그 서쪽 끝으로 여겨진다. 나니와에는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백제왕씨는 원래 셋츠국 백제군을 거점으로 삼았으나[10], 백제왕경복이 749년, 무츠국(현재의 미야기현 도다군 와쿠야정)에서 발견한 황금[11]헤이조쿄쇼무 천황에게 헌상함으로써, 종5위상 무츠노카미에서 종3위 가와치노카미로 이례적인 승진을 이루었고, 이를 기회로 가와치국 가타노의 땅을 다음 거점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5. 백제왕 신사

660년 나당 연합이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마지막 왕 의자왕은 중국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의 아들 부여풍은 일본으로 탈출, 야마토 시대 장군 아베노 히라후와 백제 부흥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또 다른 아들 젠코(善光 또는 禅広)는 일본에 정착하여 천황으로부터 구다라노코니시키(百濟王, "백제의 왕") 성씨를 받았다. 구다라노코니시키 씨족은 처음에는 특권을 누렸지만 691년 일본 귀족에 동화되었다.[2]

6. 교통

게이한 본선 미야노사카역에서 내려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

참조

[1] 웹사이트 百済寺跡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08-20
[2] 간행물 "Kudara no Konishiki" sei no seiritsu to Kudara no Konikishi shi no gakubu sōjō
[3] 웹사이트 「特別史跡百済寺跡再整備基本計画」について(枚方市HP) https://www.city.hir[...]
[4] 문서 平成18年度調査 http://www.city.hira[...]
[5] 문서 현지의 안내碑(昭和60年3月文化庁・大阪府教育委員会・枚方市)による。
[6] 서적 朝鮮半島からみた枚方の寺院造営と瓦生産 大巧社
[7] 서적 百済王氏と百済郡 大巧社
[8] 서적 「百済尼寺」の発見 大巧社
[9] 서적 摂津国百済寺考 新人物往来社
[10] 문서 百済王氏の本拠地は天王寺区東部、生野区周辺と考えられる。
[11] 문서 陸奥守として赴任したとき、小田郡(現在の宮城県遠田郡涌谷町付近)で黄金を発見。折しも東大寺大仏の造営時であった。
[12] 웹사이트 平成18年度調査 http://www.city.hi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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