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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협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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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민협성회는 1910년 3월에 결성된 친일 단체로, 국민협성진보회, 국민협성동진회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 전직 관료 서창보가 발기했으며, 이근명, 이재극, 민영휘 등이 고문, 총재, 부총재, 회장으로 추천되었으나 모두 수락을 거부했다. 이 단체는 한일 병합 조기 실현을 요구하는 서신을 대한제국 내각, 통감부, 일본 정부 등에 보냈으나, 재정 문제와 회원들의 이탈로 활동이 위축되었다. 이후 일진회의 외곽 단체 성격을 띠다가 1910년 9월 12일에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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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협성회
국민협성회

2. 상세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틀 후, 회원들이 일진회 총무 이희덕의 집에 모여 각자의 미래에 대해 협의하는 등 일진회의 외곽 단체적 성격을 띠었다. 1910년 9월 12일에는 일진회를 포함한 다른 정치 단체와 함께 해체되었다.

2. 1. 결성 배경

국민협성진보회, 국민협성동진회와는 이름만 다를 뿐 내부적으로는 거의 같은 단체였다. 발기인은 전직 관료인 서창보였다. 고문장과 총재에는 이근명, 부총재에는 이재극, 회장에는 민영휘가 추천되었지만 그들은 수락을 거부했다.

1910년 3월에 결성된 당시, 서창보는 이 단체에 가입하면 월급이 있고 관직도 얻을 수 있다고 선전하면서 회원을 모집했다. 4월 9일에는 총회를 개최하여, 이때부터 대한제국 내각과 통감부, 일본 정부, 일본의 병합파 단체에 병합의 조기 실시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5월부터는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여 활동이 뜸해졌다. 회원 중 한 명인 심일택이 일본의 병합론자들과 사전에 논의하여 한국평화협회를 발기하고 본격적인 병합 운동을 펼치면서 국민협성회 회원들을 흡수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

2. 2. 주요 활동

국민협성진보회, 국민협성동진회와는 이름만 다를 뿐 내부적으로는 거의 같은 단체였다. 1910년 3월에 결성될 당시, 발기인 서창보(서창보)는 이 단체에 가입하면 월급을 받고 관직도 얻을 수 있다고 선전하면서 회원을 모집했다.

4월 9일에 총회를 개최하여, 이때부터 대한제국 내각과 통감부, 일본 정부, 일본의 병합파 단체에 병합을 조기에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5월부터는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활동이 뜸해졌다. 회원 중 한 명인 심일택(심일택)이 일본의 병합론자들과 사전에 논의하여 한국평화협회를 발기하고 본격적인 병합 운동을 펼치면서 국민협성회 회원들을 흡수한 것도 활동이 뜸해진 원인 중 하나였다.

임시 총회에서 조직을 재정비한 후, 한일 병합 조약 직전인 7월 14일에도 한일 병합을 조기에 실시할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하는 내용의 서신을 내각과 통감부에 보냈다. 이 서신은 한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최영년(최영년)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경무총감부에서 조사를 하기도 했다.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이틀 후, 회원들이 일진회 총무 이희덕(이희덕)의 집에 모여 각자의 미래에 대해 협의하는 등 일진회의 외곽 단체와 같은 성격을 띠었다. 9월 12일에는 일진회를 포함한 다른 정치 단체와 함께 해체되었다.

2. 3. 재정 문제와 활동 위축

1910년 5월부터 국민협성회는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여 활동이 뜸해졌다. 회원 중 한 명인 심일택이 일본의 병합론자들과 사전에 논의하여 한국평화협회를 발기하고 본격적인 병합 운동을 펼치면서 국민협성회 회원들을 흡수한 것도 활동 위축에 영향을 주었다.

2. 4. 조직 재정비와 병합 촉구

1910년 3월에 국민협성회가 결성될 당시, 서창보는 이 단체에 가입하면 월급을 받고 관직도 얻을 수 있다고 선전하면서 회원을 모집했다. 4월 9일에 총회를 개최하여, 이때부터 대한제국 내각과 통감부, 일본 정부, 일본의 병합파 단체에 병합을 빨리 실시하라는 요구 서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5월부터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여 활동이 뜸해졌다. 회원 중 한 명인 심일택이 일본의 병합론자들과 사전에 논의하여 한국평화협회를 발기하고 본격적인 병합 운동을 펼치면서 국민협성회 회원들을 흡수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

임시 총회에서 조직을 재정비한 후, 한일 병합 직전인 7월 14일에도 한일 병합을 빨리 실시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내각과 통감부에 다시 한번 보냈다. 이 서신은 한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최영년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경무총감부에서 조사를 하기도 했다.

2. 5. 해산

1910년 5월부터 국민협성회는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여 활동이 뜸해졌다. 회원 중 한 명인 심일택이 일본의 병합론자들과 사전에 논의하여 한국평화협회를 발기하고 본격적인 병합 운동을 펼치면서 국민협성회 회원들을 흡수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

임시 총회에서 조직을 재정비한 후, 한일 병합 조약 직전인 7월 14일에도 한일 병합의 조기 실시를 다시 한번 촉구하는 내용의 서신을 내각과 통감부에 보냈다. 이 서신은 한학자인 언론인 최영년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경무총감부에서 조사를 하기도 했다.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이틀 후에 회원들이 일진회 총무 이희덕의 집에 모여 각자의 미래에 대해 협의하는 등 일진회의 외곽 단체적 성격을 띠었다. 9월 12일에 일진회를 포함한 다른 정치 단체와 함께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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