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공산당 자금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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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은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레닌 정부가 일제에 항거하는 한민족을 지원하기 위해 지원한 자금을 둘러싸고 발생한 독립운동 세력 간의 갈등을 의미한다. 1차 자금사건은 한인 사회주의자들 간의 파벌 다툼으로, 2차 자금사건은 임시정부와 한인사회당 간의 노선 대립으로 나타났다. 특히 2차 사건에서는 김립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이 사건들은 임시정부의 약화, 사회주의 운동의 분파 형성, 그리고 자금 유용 의혹과 관련된 논란을 남겼다.
레닌 정부는 일본 제국에 항거하는 한민족을 지원하기 위해 200만 루블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자금은 한인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파벌 갈등으로 인해 분란의 씨앗이 되었다. 1922년 레닌이 지원한 자금 중 이동휘, 한형권 등은 60만 루블만 받아 사용했다.[1]
1920년 1월 하순, 이동휘는 자신의 측근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했고, 한형권은 1922년 겨울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며 레닌과 비밀협정을 맺어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금화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다.[4] 그러나 이 자금은 다시 한번 독립운동 세력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2. 제1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1919-1921)
1차 자금사건은 사회주의 운동 세력 내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내부 노선 투쟁을 불러왔고, 2차 자금사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 한인사회당의 사회주의 노선과 민족주의 노선 간의 분열을 야기했다.[3]
2. 1. 코민테른 자금 지원과 한인사회당
1919년 한인사회당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 가입을 결정하고, 박진순 등 대표 3명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선전비 명목으로 400만 루블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모스크바를 떠나 이르쿠츠크에 머무르는 동안 문제가 발생했다.[1]
볼셰비키당 이르쿠츠크 지부인 "이르쿠츠크 공산당" 내의 한인들이 "전러한인공산당"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1919년 9월 10일 한인사회당 일행이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자 정통성을 지닌 자신들의 당이 코민테른 자금을 가져야 한다며 자금을 탈취했다.
당시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이자 고려공산당원이었던 이동휘는 1919년 11월에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박진순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이르쿠츠크파의 자금 탈취 횡포를 규탄했고, "한인사회당을 끝까지 지원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 등을 보냈다. 그 결과, 한인사회당은 유일한 조선사회주의 당으로 인정받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2]
2. 2.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갈등
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열린 대회에서 한인사회당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 가입을 결정하고, 박진순 등 대표 3명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선전비로 400만 루블을 받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모스크바를 떠나 이르쿠츠크에 머무르는 동안 문제가 발생했다.[1]
몇 년 전, 볼셰비키당 이르쿠츠크 지부인 "이르쿠츠크 공산당" 내의 한인들이 "전러한인공산당"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볼셰비키당에서 파견된 보리스 스미야스키의 지원 하에 자신들만이 유일한 시베리아 한인들의 정통적인 당이라고 주장하였다. 9월 10일 한인사회당 일행이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자, 이들은 정통성을 지닌 자신들의 당이 코민테른 자금을 가져야 한다며 자금을 탈취했다.
당시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이자 고려공산당원이었던 이동휘는 그해 11월에 이 소식을 듣고 박진순을 다시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이르쿠츠크파의 자금 탈취를 규탄하고 "한인사회당을 끝까지 지원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냈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는 실질적으로 한인사회당의 정부이며 한인사회당은 공산주의 운동을 위하여 심신을 바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보냈고, 한인사회당은 유일한 조선 사회주의 당으로 인정받게 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2]
3. 제2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1920-1922)
3. 1. 자금 운반과 사용처를 둘러싼 갈등
1920년 1월 하순, 이동휘는 자신의 측근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했고, 한형권은 1922년 겨울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며 레닌과 비밀협정을 맺어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금화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다.[4] 1920년 10월, 한형권은 이 중 60만 루블을 우선 받았으나, 운반의 어려움 때문에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맡기고 40만 루블만 상해로 가져왔다.
상해로 가는 도중, 한형권은 치타에서 한인사회당 대표로 코민테른에 파견되어 가던 김립과 만나 이 자금을 임시정부에 보내지 않고 한인사회당의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는 데 협의했다. 12월에 김립이 상해로 가져온 코민테른 자금은 많은 좌파 운동가의 독립 자금으로 사용되었지만, 이 자금의 소재를 둘러싸고 상해 임시정부와 한인사회당 사이에 알력이 발생했다.[4]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내주지 않고 한인사회당 등 한국, 중국, 일본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사용하자, 임시정부는 이동휘가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했다.[5]
임시정부 관계자는 이동휘에게 자금 관계에 대한 경과 보고를 요구했으나, 이동휘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김립이 코민테른 자금 일부를 개인적으로 사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1921년 1월 이동휘, 김립, 한형권 등은 한인사회당 대표 회의를 소집하여 자금 분쟁과 관련한 최종적 태도를 확정하고,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4]
3. 2. 임시정부와 한인사회당의 대립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한인사회당 등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사용하였다. 레닌의 자금을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에 사용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는 주지 않자 임시정부는 그가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하였다.[5]
임시정부 관계자는 이동휘에게 자금 관계에 대한 경과 보고를 요구했으나, 이동휘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김립이 코민테른의 일부 자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1921년 1월 이동휘, 김립, 한형권 등은 한인사회당 대표회를 소집하여 자금 분쟁과 관련한 최종적 태도를 확정하고 마침내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4]
3. 3. 김립 암살 사건 (1922)
1922년 2월 11일,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원 오면직, 노종균 등이 김립을 암살했다.[5] 이 사건은 레닌이 지원한 자금이 임시정부가 아닌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등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혁명 사업비로 사용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여겨진다.[5]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했으나,[12] 최근 연구에서는 김립의 횡령 혐의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12]
김립은 상하이 불조계 자베이(閘北) 거리에서[11] 김철수, 유진희, 김하구 등과 함께 있다가 오면직, 노종균, 양여주에게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5] 그는 곧 상하이 불조계 근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김철수는 김립의 시신과 문서를 수습하고 은행의 남은 돈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14] 최동욱, 이호반, 한광우 등 상하이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임시정부에 복수를 기도하기도 했다.[14] 김립의 시신은 상하이 송경령공원(원 상해 만국공묘)에 안장되었고,[14] 상하이로 오던 안병찬 역시 임시정부 경무국원에게 피살되었다.[14]
김립 암살에 상하이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분개했다. 김립의 동지들은 김구를 암살하려 했으나, 지운 김철수는 독립운동 동지끼리의 희생을 막고자 했다.[15] 소련 공산당은 상하이의 한인 공산당 조직 해소 및 이동을 지시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한 호의를 거두었다.
김립 암살로 나머지 140만 루블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1] 이 자금이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를 통해 동아일보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박열 등 불령사 회원들은 1923년 4월 미국 유학을 위해 도쿄를 경유하던 장덕수를 지요다구 간다에서 구타했으나(장덕수 구타사건), 장덕수의 자금 횡령 의혹은 증거가 없다.[17]
3. 3. 1. 암살 사건의 배경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이후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부들이 대부분 러시아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 집단과 군권 투쟁을 벌이는 동안, 김립은 혼자서 상해 본부를 지키고 있었다.[8] 김철수 등 소수가 상하이의 고려공산당 근거지를 함께 지켰다.
당시 임시정부는 신규식 등이 이끌며 내분을 종식하려 노력했으나,[7] 무장투쟁 계열 인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1922년 1월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이동휘와 김립 등은 성토문을 발표했고, 두 계열은 난투극을 벌였다.[9] 결국 의정원 의원이 대거 사퇴했고, "반동의 괴수는 모화주의자 신규식이다."라는 비난이 쏟아졌다.[9]
한편,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사회당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발생 후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부들이 러시아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 집단과 군권 투쟁을 벌일 때, 김립은 혼자 상해 본부를 지켰다.[10]
3. 3. 2. 사건 관련자 명단
구분 | 인물 | 비고 |
---|---|---|
현장 소재자 | 김립 | 고려공산당 상해파 간부, 현장 피살[5] |
현장 소재자 | 김철수 | 고려공산당 상해파 간부[5] |
현장 소재자 | 유진희 | 고려공산당 상해파 간부[5] |
현장 소재자 | 김하구 | 고려공산당 상해파 간부[5] |
현장 소재자 | 한형권 | 고려공산당 상해파 간부 |
현장 소재자 | 노종균 |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원, 김립 암살 가담[5] |
현장 소재자 | 오면직 |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원, 김립 암살 가담[5] |
현장 소재자 | 양여주 |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원, 김립 암살 가담[5] |
현장 소재자 | 안병찬 | 고려공산당 상해파 간부, 상하이로 귀환하다 피살[14] |
기타 관련자 | 김구 | 김립 암살 지휘[13] |
기타 관련자 | 신규식 | |
기타 관련자 | 이동휘 | 고려공산당 총수 |
기타 관련자 | 김만겸 | |
기타 관련자 | 임원근 | |
기타 관련자 | 박헌영 | |
기타 관련자 | 장건상 | 증언자 |
기타 관련자 | 이강훈 | |
기타 관련자 | 블라디미르 레닌 | 처음에 돈을 준 사람.[12] |
4. 사건의 영향과 역사적 의미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진영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 세력 간의 이념 갈등을 표면화시켰고, 이는 결국 임시정부의 약화로 이어졌다.[3] 사회주의 세력 내에서도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노선 투쟁이 벌어지는 등 분열이 심화되었다.[3]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둘러싼 갈등은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는 임시정부의 재정난을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신뢰도에도 타격을 주었다.[3]
4. 1. 임시정부의 분열과 약화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둘러싼 갈등은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간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1920년 10월, 김립은 코민테른 자금 40만 루블을 상하이로 가져왔으나, 이 자금은 임시정부가 아닌 한인사회당의 운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4]이 자금이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되지 않고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이자, 임시정부는 이동휘가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비난했다.[5]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이동휘에게 자금 관련 보고를 요구했으나, 이동휘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1921년 1월,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4]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임시정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
4. 2.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초기 분파 형성
국제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민족을 돕기 위해 200만 루블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자금은 이동휘, 한형권 등이 일부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이르쿠츠크파가 탈취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1] 이 사건은 사회주의운동 세력 내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 간의 노선 투쟁을 불러왔다.[3]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이후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부들이 러시아로 이동하면서 이르쿠츠크파와 군권 투쟁을 벌였다.[8]4. 3. 새로운 사실들과 남은 의혹들
1990년대에 들어 구 소련 비밀문서 등이 공개되면서 김립이 임정의 자금을 횡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박노자는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고 평가했다.[12] 레닌 정부가 지원한 200만 루블은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 등에 전달되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혁명 사업비로 사용되었지만, 김구 등 임시정부 우파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5]김립 암살 이후 증발한 나머지 140만 루블[1]의 행방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이 돈이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를 통해 동아일보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박열 등 불령사 회원들은 1923년 4월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도쿄를 경유하던 장덕수를 지요다구 간다에서 붙잡아 구타하는 사건(장덕수 구타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장덕수가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에 대한 구체적인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17]
참조
[1]
뉴스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2]
문서
MBC 다큐멘터리 5부작, 러시아 혁명 part3 참조
[3]
문서
실제로, 한국의 독립운동은 내부분열이 상상이상으로 심각했었다. 이점은 매우 커다란 한계를 가지고 있다.
[4]
서적
여운형 평전
실천문학사
[5]
뉴스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한겨레 21)2007년04월12일 제655호
http://www.hani.co.k[...]
[6]
서적
한인 사회주의운동연구:한국사연구총서 21
국학자료원
1999
[7]
서적
한국사 이야기 21:해방 그날이 오면
한길사
2004
[8]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people.aks.ac[...]
2016-04-27
[9]
서적
한국사 이야기 21:해방 그날이 오면
한길사
2004
[10]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people.aks.ac[...]
2016-04-27
[11]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people.aks.ac[...]
2016-04-27
[12]
웹인용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칼럼 : 한겨레21
http://www.hani.co.k[...]
2011-03-25
[13]
서적
백범일지
돌베개
2006
[14]
웹인용
불멸의 발자취(47)—상해에서의 공산주의운동 / 중앙인민방송국
http://www.krcnr.cn/[...]
2016-04-27
[15]
뉴스
상해, 공산주의자로 독립운동에 온힘을 쏟다
http://www.ibuan.com[...]
[16]
서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17]
웹사이트
http://star.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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