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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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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종균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21년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김구 휘하에서 활동했다. 1922년 김립 암살에 가담했으며, 이후 대한노병회 특별구국책진위원, 한인애국단 특무공작국 국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중국 국민당과 협력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친일파 처단 활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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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노종균
본명노종균(盧種均 → 盧鍾均)
출생일1894년 07월 18일
사망일1939년 06월 13일
거주지대한제국 황해도 안악군 안막면 판팔리 472번지
출생지조선 황해도 안악군 안막면 판팔리 472번지
사망지일제 강점기 조선 황해도 해주 소재 평남평양형무소 황해 해주형무분소
활동 기간1916년~1939년
사망 원인병사(옥사)
학력경성 보성전문학교 문과 1학년 중퇴(1913년 6월)
별칭1921년 당시 경기 인천·개성·평남 진남포·평양·평북 용천·신의주 잠입 시절 백운서(白雲瑞·白運西)·안봉선(安峯仙)·김동우(金東宇·金東愚)·양동오(楊東五)라는 가명(假名)을 잠시나마 사용.
직업항일 독립 운동가
국적대한제국
경력전직 동아일보 황해도 안악지국 판매부 부장 출신
본관교하
상훈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1995. 08. 15.)
관련 활동독립운동
주요 활동임정 관련 활약
웹사이트두피디아

2. 생애

1921년 동아일보 황해도 안악지국 판매부장으로 일하던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부장 비서실 군자금 모집 특파원 홍완기(洪完基)가 일제에 붙잡힌 것을 알고 구출하려다 실패,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 망명 후 김구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 국장 김구의 명령에 따라 오면직 등과 함께 소련 군자금 횡령 혐의로 김립권총으로 사살했다.

1922년 10월, 김구, 신규식 등이 대한독립군 등 무력 기반 확충을 위해 대한노병회(大韓勞兵會)를 조직하고 발기 총회를 개최하자, 대한노병회 특별구국책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2년 12월, 대한노병회의 중화민국 군사 학교 파견 계획에 따라 베이징 학병단(北京 學兵團)으로 파견되어 1년간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24년 1월 상하이로 돌아오다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26년 한국노병회 특별구국책진위원,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의경대장(義警隊長) 겸 병인의용대장(丙寅義勇隊長)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좌파 세력들의 도전을 견제하고 김구의 후원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1931년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특무공작국 국장에 임직되어 이봉창 의사의 의거 등 특무 공작 활동에 관여했다. 1932년 임정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과 함께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이라는 별개의 특무 기구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김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31년 후반기부터 일제의 중화민국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김구는 국민당 정부와 국제적 연대를 형성하고 독자적인 투쟁 역량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1933년김구장제스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 행정원 원장 등과 회합하여 중화민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하기로 합의하였다. 1933년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동하던 그는 김구의 명령에 따라 군관학교 입교 희망생을 모집하여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2월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洛陽 分校)에 한인특별반이 조직되자, 한인특별반의 교육간부로 보호계를 맡아 학생들을 관장하고 한인 입교 희망생을 모집하였다. 1934년 12월 뤄양 군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특무대 독립군(大韓民國 特務隊 獨立軍)을 조직하여 민간감찰중대장 및 조사부장에 선임, 오면직, 안공근 등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간부들과 함께 항일 특무 활동 공작원 양성에 힘썼다. 1935년 2월 김구의 주도로 학생훈련소(學生訓練所)가 설치되자, 수용된 대원들의 감독 책임을 맡아 군관학교 입교에 필요한 예비 교육을 실시하였다.

1935년 12월, 한인애국단 단원 김창근(金昌根)에게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참사관 도이 게이오(藤井 景夫) 암살을 지시했다. 1936년 7월, 비밀결사단체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하고 상하이를 근거로 군자금 모집을 결의하였다. 1936년 8월 남경에서 한국독립당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1938년 1월, 상하이에서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인 조선인민회 회장 이갑령(李甲寧)을 저격하는 등 특무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1939년 6월 13일,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2. 1.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21년 동아일보 황해도 안악지국 판매부장으로 일하던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부장 비서실 군자금 모집 특파원 홍완기(洪完基)가 일제에 붙잡힌 것을 알고 구출하려다 실패,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 망명 후 김구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 국장 김구의 명령에 따라 오면직 등과 함께 소련 군자금 횡령 혐의로 김립권총으로 사살했다.

1922년 10월, 김구, 신규식 등이 대한독립군 등 무력 기반 확충을 위해 대한노병회(大韓勞兵會)를 조직하고 발기 총회를 개최하자, 대한노병회 특별구국책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2년 12월, 대한노병회의 중화민국 군사 학교 파견 계획에 따라 베이징 학병단(北京 學兵團)으로 파견되어 1년간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24년 1월 상하이로 돌아오다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26년 한국노병회 특별구국책진위원,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의경대장(義警隊長) 겸 병인의용대장(丙寅義勇隊長)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좌파 세력들의 도전을 견제하고 김구의 후원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1931년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특무공작국 국장에 임직되어 이봉창 의사의 의거 등 특무 공작 활동에 관여했다. 1932년 임정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과 함께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이라는 별개의 특무 기구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김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31년 후반기부터 일제의 중화민국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김구는 국민당 정부와 국제적 연대를 형성하고 독자적인 투쟁 역량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1933년김구장제스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 행정원 원장 등과 회합하여 중화민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하기로 합의하였다. 1933년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동하던 그는 김구의 명령에 따라 군관학교 입교 희망생을 모집하여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2월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洛陽 分校)에 한인특별반이 조직되자, 한인특별반의 교육간부로 보호계를 맡아 학생들을 관장하고 한인 입교 희망생을 모집하였다. 1934년 12월 뤄양 군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특무대 독립군(大韓民國 特務隊 獨立軍)을 조직하여 민간감찰중대장 및 조사부장에 선임, 오면직, 안공근 등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간부들과 함께 항일 특무 활동 공작원 양성에 힘썼다. 1935년 2월 김구의 주도로 학생훈련소(學生訓練所)가 설치되자, 수용된 대원들의 감독 책임을 맡아 군관학교 입교에 필요한 예비 교육을 실시하였다.

1935년 12월, 한인애국단 단원 김창근(金昌根)에게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참사관 도이 게이오(藤井 景夫) 암살을 지시했다. 1936년 7월, 비밀결사단체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하고 상하이를 근거로 군자금 모집을 결의하였다. 1936년 8월 남경에서 한국독립당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1938년 1월, 상하이에서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인 조선인민회 회장 이갑령(李甲寧)을 저격하는 등 특무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1939년 6월 13일,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2. 2. 중국 국민당과의 협력 및 독립군 양성

2. 3. 친일파 처단 및 최후

3.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5년 8월 15일을 기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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