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실집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귀실집사는 백제의 왕족으로, 귀실복신의 아들로 추정된다. 백제가 멸망한 후 왜국으로 망명하여, 덴지 천황에 의해 소금하에 임명되었고 백제 유민들과 함께 오미국에 정착했다. 671년에는 학직두에 임명되었으며, 일본의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688년에 사망했으며, 묘비가 발견되어 귀실신사에 모셔졌다. 그의 후손들은 백제공의 작위를 받았고, 구마모토현의 기쿠치 씨를 포함한 여러 일본 씨족의 조상이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귀실씨 - 귀실신사
귀실신사는 묘비 진위 논란, 조성 시기 추정, 관련 기록, 시가 문화재 보호 협회의 입장이 논의되는 곳이며, 묘비는 위조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무로마치 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다이안지 자재록에 관련 기록이 있고, 시가 문화재 보호 협회는 특정 연결고리를 강조하며, 대중교통으로 접근 가능하다. - 688년 사망 - 이정 (월경왕)
이정은 당나라 태종의 아들이자 월왕으로, 무측천의 통치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실패 후 자결하고 명예가 회복되었다. - 688년 사망 - 이충 (낭야왕)
이충은 당 태종의 손자이자 낭야왕에 봉해진 인물로, 측천무후 시기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어 살해당했지만, 사후 복권되어 당나라 왕조의 정통성을 지키려 한 황족의 저항으로 평가받는다. - 아스카 시대의 외국인 - 혜자
혜자는 고구려 출신의 승려로서 일본 아스카 시대 불교 발전에 기여하고,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621년 쇼토쿠 태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 해 죽음을 예언하고 실제로 사망했다. - 아스카 시대의 외국인 - 풍왕
풍왕은 백제의 왕족으로, 외교적 인질로 일본에 갔다가 백제 부흥 운동을 위해 귀국하여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귀실집사 | |
---|---|
귀실집사 | |
본관 | 귀실(鬼室) |
생몰년 | 미상 |
자 | 미상 |
부모 | 아버지: 귀실복신 |
형제자매 | 형: 귀실사비 |
주요 이력 | |
소속 | 백제 부흥군 |
주요 활동 | 백제부흥운동 참여 |
관직 | 백제 좌평 |
2. 생애
귀실집사는 백제의 왕족으로 귀실복신의 아들로 추정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일본서기》 덴지 천황 4년(665년) 2월조에는 귀실집사의 본래 관위가 달솔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덴지 천황 8년(669년)조에는 관위가 좌평(佐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
귀실집사의 묘비에는 그가 688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21][22]
2. 1. 백제에서의 활동
집사는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백제의 16관등 중 2번째 관등인 달솔이었다.[3][4]2. 2. 일본으로의 망명과 정착
귀실집사는 백제의 왕족으로 귀실복신의 아들로 추정되지만 명확하지 않다. 《일본서기》 덴지 천황 4년(665년) 2월조에는 귀실집사의 본래 관위가 달솔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덴지 천황 8년조에는 관위가 좌평(佐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가족 및 유민들과 함께 왜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15] 665년 음력 2월에 덴지 천황은 귀실집사를 12위 관품인 소금하(小錦下, 쇼킨게)에 임명하였고,[16] 백제 유민 400여 명을 오미국(近江國) 가마에군(神前郡)[17]에서 살게 했다.[18] 그해 음력 3월에 가마에군(神前郡)의 백제인들에게 토지를 지급했다. 669년 좌평 여자신(餘自信)과 좌평 귀실집사(鬼室集斯) 등 남녀 700명이 오미국(近江國) 가모군(蒲生郡)(오늘날의 일본 시가현 가모군 히노(日野)정)으로 옮겨졌다. 그들의 후손이 스즈카 산맥 류오산 아래에서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귀실집사를 모시는 귀실신사(鬼室神社, 기시쓰진쟈)를 관리한다고 한다.[19]
671년 정월, 교육부 장관 격인 학직두(學職頭)[20]에 임명되었다. 일본의 교육학자 쿠키 유키오(久木幸男)는 귀실집사가 가모군(蒲生郡)에 옮겨지고 나서, 서임된 후 약 1년 남짓 동안에 왜국의 대학료(大學寮)의 원형이 성립했고, 귀실집사가 그 장이 되었다고 하는 가설을 주창하기도 했다.
백강 전투에서 백제군이 궤멸된 지 3년 후인 663년에, 귀실집사는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665년 2월, 덴지 천황은 집사에게 "소금하"(小錦下)의 관위를 하사하고 그를 교육부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시가현 가모군 오미국에 정착했다.[5]
일본 서기에 따르면, 663년 백촌강 전투 이후 귀실집사는 일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665년 2월에 소금하 관위를 받았으며, 이는 좌평 복신의 공으로 인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부흥에 힘쓰다 2년 전에 죽은 귀실복신의 근친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관계는 불분명하다. 집사의 백제에서의 관위는 달솔이었다. 일본 서기는 이어서 백제의 남녀 400여 명이 오미국 신전군(후의 간자키군)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집사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월에는 신전군의 백제인에게 논밭이 주어졌다.
669년에 좌평 여자신과 좌평 귀실집사 등 남녀 700여 명이 오미국 가모군으로 이주했다.
671년 1월에 귀실집사는 소금하의 관위를 받았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이전(665년)에 부여된 관위와 같다. 이때 집사는 학직두였다. 학식두는 율령제에서의 대학두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2. 3. 일본 조정에서의 활동
665년 음력 2월, 덴지 천황은 귀실집사를 12위 관품인 소금하(小錦下 쇼킨게)에 임명하고,[16] 백제 유민 400여 명을 오미국(近江國) 가마에군(神前郡)[17]에 살게 했다.[18] 그해 음력 3월에는 가마에군의 백제인들에게 토지를 지급했다. 669년, 좌평 여자신(餘自信)과 함께 남녀 700여 명이 오미국 가모군(蒲生郡)(오늘날의 일본 시가현 가모군 히노정(日野))으로 옮겨졌다.[19] 이들은 스즈카 산맥 류오산 아래에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귀실집사를 모시는 귀실신사(鬼室神社 기시쓰진쟈)를 관리한다고 한다.671년 정월, 귀실집사는 교육부 장관 격인 학직두(學職頭)[20]에 임명되었다. 일본의 교육학자 쿠키 유키오(久木幸男)는 귀실집사가 가모군으로 옮겨진 후 서임되기까지 약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왜국의 대학료(大學寮) 원형이 성립되었고, 귀실집사가 그 장이 되었다는 가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백촌강 전투 이후 663년에 귀실집사가 일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665년 2월에 덴지 천황에게 소금하 관위를 받았으며, 이는 귀실복신의 공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관계는 불분명하다. 671년 1월에는 학직두로서 다시 소금하 관위를 받았다.
3. 사망과 묘비
일본 에도 막부 시기, 오미국(近江國) 가모군(蒲生郡) 오노무라(小野村)의 니시노미야(西宮) 신사에서 팔각 묘비가 발견되었다. 이 묘비에는 "귀실집사묘(鬼室集斯墓)"라는 묘비명과 함께 "슈초(朱烏) 3년[24] 무자(戊子) (음력) 11월 8일 조(殂)[25]"라는 사망 날짜와 "서손 미성이 세웠다.(庶孫美成造)"라는 비문(碑文)이 발견되었다.[26] 이후 이 신사는 귀실 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27]
귀실집사는 688년 11월 8일 또는 12월 5일에 사망했다. 그의 묘는 일본 시가현 가모군 히노정 오노에 위치한 귀실 신사에 있다.
그의 아버지 복신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에 모셔져 있다. 이 때문에 히노정과 은산면은 1990년에 자매 도시가 되기로 결정했다.
에도 시대에 오미국 가모군 오노 촌(현재의 시가현 히노정 오노)의 사이노미야 신사에 있던 돌로 된 팔각 기둥은 인어총이라고 불렸다. 닌쇼지 번 의사 사이쇼 카이츄가 조사한 결과, "귀실집사 묘"라고 적힌 면이 정면이고, 오른쪽 면에는 "슈초 3년 무자 11월 8일 운", 왼쪽에는 "서손 미성 조"라고 적혀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히가시사쿠라다니 촌 향인 사카모토 린페이와의 사이에서 진위 논쟁이 벌어졌다.[10] 슈초 3년은 지토 천황 2년(688년)에 해당하지만, 이 묘석은 11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11]
코구치 야스오의 『오미 조정과 도래인 - 백제 귀실씨를 중심으로』(1996년)에서는 귀실집사 묘비가 거짓 명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고대 묘비·묘지명에 "졸", "몰", "운"과 같은 사망 기사 표기 용례가 없다.
# 고대 묘비·묘지명에 조립 관계자에게 "서손"이라는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 "슈초 3년/무/자"와 같이 간지를 세로로 작은 글씨로 가로로 적는 기년명 기재 형태는 덴교 9년(946년)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지만, 일반적이 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이다.
메이지 시대에 신불 분리령에 의해 후도도는 사이노미야 신사로 개명하고 가구쓰치노미코토를 제신으로 했다.[12] 가모 군장이었던 엔도 무네요시가 1903년에 『귀실집사 묘비고』를 저술한 후, 귀실집사가 합사되었다.[13] 나중에 이 신사는 귀실 신사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4년에는 히노정의 오아자 테라지리에 있는 노다미치 유적(7세기 후반)에서 온돌과 매우 유사한 석조 연도의 유구를 갖는 수혈 건물 터가 출토되었다.
4. 가계
5. 후손
761년 귀실집사의 후손들은 백제공(百済公)의 작위를 수여받았다.[7] 귀실집사는 구마모토현 큐슈의 유력 가문인 기쿠치 씨를 포함한 여러 일본 씨족의 조상이 되었다.[8]
6. 기타
백제 귀족 귀실집신(鬼室集信)은 귀실집사와 비슷한 시기에 왜국으로 망명했다. 귀실집신과 귀실집사의 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에도 시대에 오미국 가모군 오노 촌(현재의 시가현 히노정 오노)에 있는 사이노미야 신사(당시 후도도)에는 돌로 된 팔각 기둥이 있었다. 이 돌은 인어총이라고 불렸는데, 닌쇼지 번 의사인 사이쇼 카이츄가 조사한 결과 "귀실집사 묘"라고 적힌 면이 정면이고, 오른쪽 면에는 "주조 3년 무자 11월 8일 운", 왼쪽에는 "서손 미성 조"라고 적혀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히가시사쿠라다니 촌 향인 사카모토 린페이와 진위 논쟁이 벌어졌다.[10] 주조 3년은 지토 천황 2년(688년)에 해당하지만, 이 묘석은 11세기 이후의 것이다.[11]
코구치 야스오의 『오미 조정과 도래인 - 백제 귀실씨를 중심으로』(웅산각출판, 1996)에서는 귀실집사 묘비의 진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짓 명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고대 묘비·묘지명에 "졸", "몰", "운"과 같은 사망 기사 표기 용례가 없다.
# 고대 묘비·묘지명에 조립 관계자에게 "서손"이라는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 "주조 3년/무/자"라는 간지를 세로로 작은 글씨로 가로로 적는 기년명 기재 형태는 덴교 9년(946)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지만, 일반적이 되는 것은 가마쿠라 시대이다.
메이지 시대에 신불 분리령으로 후도도는 사이노미야 신사로 개명하고 카구츠치노미코토를 제신으로 했다.[12] 가모 군장이었던 엔도 무네요시가 1903년에 『귀실집사 묘비고』를 저술한 후, 귀실집사가 합사되었다.[13] 나중에 이 신사는 귀실 신사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이안지 재산록 발서』(성립은 중세 이후)에는 현재의 시가현 야스시 오오시노하라에 귀실집사 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향토사 연구가 츠카모토 요이치 씨와 오오사사하라 신사 · 궁사 야마카와 이즈미 씨에 의해 이 기록과 일치하는 돌이 발견되었다.[14]
1994년에는 히노정 오아자 테라지리에 있는 노다미치 유적(7세기 후반)에서 온돌과 매우 유사한 석조 연도의 유구를 갖는 수혈 건물 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일본서기』의 기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7. 귀실신사
일본 에도 막부 시기, 오미국(近江國) 가모군(蒲生郡) 오노무라(小野村)[23]의 니시노미야(西宮) 신사에서 팔각 묘비가 발견되었다. 이 묘비에는 귀실집사묘(鬼室集斯墓)라는 묘비명과 ‘슈초(朱烏) 3년[24] 무자(戊子) (음력) 11월 8일 조(殂)[25](朱鳥三年戊子十一月八日殂)’, 왼쪽에는 '서손 미성이 세웠다.(庶孫美成造)'라는 비문(碑文)이 있었다.[26] 그 후 이 신사는 귀실 신사(鬼室神社)로 이름이 바뀌었다.[27]
귀실집사는 688년 11월 8일 또는 12월 5일에 사망했다. 그의 묘는 일본 시가현 가모군 히노정 오노에 있는 귀실 신사(鬼室神社, Kishitsu-jinja)에 있다.
1994년에는 히노정 오아자 테라지리에 있는 노다미치 유적(7세기 후반)에서 온돌과 매우 유사한 석조 연도의 유구를 갖는 수혈 건물 터가 출토되었다. 이는 『일본서기』의 기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8. 현대적 의의
집사는 구마모토현 규슈의 유력 가문인 기쿠치 씨를 포함한 여러 일본 씨족의 조상이 되었으며,[7] 대륙으로부터 많은 지식을 가져와 일본인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참조
[1]
서적
Samguk Sagi
[2]
서적
Samguk Yusa
[3]
서적
Samguk Sagi, Scroll 28
[4]
서적
Nihon Shoki, Scroll 26
[5]
웹사이트
HIMEMIKO*WEB: 2006年01月 アーカイブ
http://www.himemiko.[...]
2008-08-27
[6]
서적
Paekche of Korea and the Origin of Yamato Japan
Kudara International
1994
[7]
서적
Shinsen Shōjiroku
[8]
서적
『新撰姓氏録』右京諸蕃
[9]
간행물
「滋賀文化財だより」no.204,財団法人滋賀文化財保護協会,1994.12.20,『興福寺領近江国蒲生郡長寸郷奥津野保左久良十七郷摠絵図』
[10]
서적
『鬼室集斯墓詩并序』
日野町教育会
1806
[11]
기타
関西学院大学講師・朴鐘鳴の説による。
[12]
서적
近江蒲生郡志巻6,721p
[13]
서적
『日本の中の百済文化-師走祭りと鬼室神社を中心に』p209
第一書房
2001
[14]
서적
『近江朝と渡来人-百済鬼室氏を中心として』,p124~126
日野町教育会
1930
[15]
기타
일부 한국 언론들은 일본서기에 귀실집사가 백강 전투 1년 전에 백제 유민 700여명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소개한 바 있지만, 일본서기에 그런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16]
기타
일본서기에는 귀실복신(鬼室福信)의 공 때문에 받은 직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7]
기타
후의 간자키군(神崎郡)
[18]
뉴스
백제 유민, 망명지로 왜를 택하다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09-07-03
[19]
뉴스
한국에선 잊혀진 백제 왕족… 日서 1500년간 조상신 추모
http://news.donga.co[...]
동아닷컴
2015-10-11
[20]
기타
학직두(學職頭)는 일본의 율령제에서 대학두(大學頭)의 전신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21]
웹사이트
귀실집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
[22]
기타
일부 한국 언론들은 일본서기에 귀실집사가 688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소개한 바 있지만, 일본서기에 그런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23]
기타
현재의 시가현(滋賀縣) 히노쵸(日野町) 오노(小野) 시
[24]
기타
지토(持統) 천황 2년에 해당된다.
[25]
기타
귀인(貴人)이 사망했다는 뜻.
[26]
기타
다만 해당 비문은 11세기 가마쿠라 시대에 제작된 가짜 비문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27]
뉴스
1311년 전 일본에 와서 유명해진 백제인 귀실집사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0-04-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