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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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귄터 랄은 독일의 공군 군인이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 에이스였다. 그는 1918년 가겐아우에서 태어나 보수적인 개신교 가정에서 자랐으며, 슈투트가르트의 칼스 김나지움을 거쳐 나폴라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이후 육군에 입대하여 조종사 훈련을 받은 후 제52 전투 비행단에서 복무하며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에서 활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서독 공군에 재입대하여 준장으로 진급, 공군 감사를 역임했다. 랄은 F-104 스타파이터 도입에 관여했으며, 퇴역 후에는 항공우주 및 무기 산업에서 컨설턴트로 활동하다가 200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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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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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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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18년 3월 10일 |
출생지 | 가게나우, 독일 제국 |
사망일 | 2009년 10월 4일 (91세) |
사망지 | 바트라이헨할, 독일 |
별칭 | 제국 독수리 |
소속 | |
충성 | 나치 독일 서독 |
군사 | 루프트바페 독일 연방 공군 |
복무 기간 | 1936년 – 1945년 1956년 – 1975년 |
최종 계급 | 소령 (국방군) 중장 (독일 연방군) |
지휘 | 8./JG 52 III./JG 52 II./JG 11 JG 300 제3. 루프트바펜디비전 제1. 루프트바펜디비전 |
참전 | |
전투/전쟁 |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공방전 영국 본토 항공전 동부 전선 바르바로사 작전 청색 작전 치타델레 작전 크림 공세 독일 본토 방공전 |
서훈 | |
훈장 | 백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 독일 연방 공로 훈장 |
기타 | |
기타 활동 | 군수 산업 컨설턴트 |
경력 | |
직책 | NATO 군사 위원회 독일 대표 |
임기 시작 | 1974년 |
임기 종료 | 1975년 |
이전 | 페터 폰 불러 |
이후 | 헤르베르트 트레베슈 |
직책 1 | 공군 참모총장 |
임기 시작 1 | 1971년 |
임기 종료 1 | 1974년 |
이전 1 | 요하네스 슈타인호프 |
이후 1 | 게르하르트 림베르크 |
2. 초기 생애 및 경력
귄터 랄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8년 3월 10일,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의 가겐아우에서 상인 루돌프 랄과 그의 아내 미나(결혼 전 성씨는 하인젤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 누나 롯데는 랄보다 4살 위였다.[1] 랄의 아버지는 ''Der Stahlhelm, Bund der Frontsoldaten''(전선 병사 동맹) 회원이자 독일 국가 인민당과 관련이 있었다.[1]
1922년, 랄 가족은 슈투트가르트로 이사했다.[1] 1928년, 랄은 그곳에서 기독교 보이 스카우트에 가입했다.[1] 1934년, ''Gleichschaltung''(나치 정권의 강제 동조화)으로 기독교 보이 스카우트는 히틀러 유겐트의 일부인 ''Deutsches Jungvolk''(독일 소년단)으로 개편되었다.[1] 그는 슈투트가르트의 ''Volksschule''(국민학교)에 다녔다.[1]
2. 1. 교육
슈투트가르트의 인문학 중심 김나지움인 칼스 김나지움에 다니다가, 나치 독일 치하의 기숙 학교인 바크낭의 국립 정치 교육 기관(나폴라)으로 전학하여 아비투어(대학 입학 자격)를 취득했다.[1] 나폴라 학교는 나치 독일의 정치, 군사, 행정 지도부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2. 2. 군 복무 초기
1936년 12월 4일, 랄은 루드비히스부르크에 있는 육군 13. (뷔르템베르크) 보병 연대(13. (Württembergisches) ''Infanterie-Regiment'')에 ''Fahnenjunker''(사관 후보생)로 입대했다.[1] 1938년 1월 1일부터 6월 31일까지 드레스덴의 군사 학교 ''Kriegsschule''에서 교육받았다.[1] 그해 여름, 랄은 Luftwaffe으로 전출을 요청했고,[1] ''Oberfähnrich''(상급 사관 후보생) 신분으로 운터비베르크 비행장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1] 공군 비행 훈련은 A1, A2, B1, B2 단계(A/B 비행 훈련)로 진행되었는데,[1] A 훈련은 곡예 비행, 항법, 장거리 비행, 무동력 착륙, B 훈련은 고고도 비행, 계기 비행, 야간 착륙, 비상시 항공기 조종 훈련을 포함했다.[1] 1938년 9월 1일, ''Leutnant''(소위)로 진급한[1] 랄은 1939년 7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Jagdfliegerschule'' 베르노이헨 (전투기 조종사 학교)에서 교육받고,[1] 9월 16일 ''Jagdgeschwader'' 52(JG 52—제52 전투 비행단) 4. ''Staffel''(제4 비행대)에 배치되어 ''Rottenführer''(''Rotte'' 비행 지휘관)로 복무했다.[1]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랄은 JG 52 소속으로 참전했다. 1943년, 독일군은 쿠반에서 가을까지 방어선을 유지했고, 제52전투비행단은 쿠르스크 전투와 치타델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랄은 1943년 2월과 3월에 이미 III. ''Gruppe''(제3비행대)의 지휘관 대행을 맡았고, 7월 5일 공식적으로 후베르투스 폰 보닌 소령을 대신하여 이 직책을 맡았다. 제8 ''Staffel''(비행대)의 지휘권은 프리드리히 오브레서 중위에게 넘어갔다. 랄은 42대의 항공기를 지휘했으며, 이 중 35대가 작전 가능했다.
7월 8일, 랄은 에리히 하르트만과 함께 2인 1조로 출격하여 3기를 격추했다. 소련 측 분석에서는 이 교전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프로보로트 지역에서 8대의 Yak-1이 비행 경로에서 벗어난 2대의 Me 109를 발견했다. 적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우리 전투기는 계속 나아갔다. 편리한 순간을 포착한 독일 전투기는 우리 항공기를 공격하여 3대의 Yak-1을 격추했다.
7월 9일, 랄은 소련 전투기와의 교전 후 Bf 109 G-6 (''Werknummer'' 20019)를 벨고로드 북쪽 페트로프카 근처에 불시착시켰다. 4일 후, 공중 충돌로 라보치킨-고르부노프-구드코프 LaGG-3 전투기가 우그림 비행장에서 또 다른 불시착을 야기했다. 7월에 랄은 21기의 공중전을 기록했지만, 독일의 공세는 빠르게 교착 상태에 빠졌다. 붉은 군대는 독일 작전을 저지하고 병력을 파괴하기 위해 반격을 시작했다 (쿠투조프 작전 및 폴코보데츠 루뱐체프 작전). 8월 3일, 랄의 부대는 29대의 Bf 109 중 22대만 작전 가능했다.
1943년 8월, 랄은 중앙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33대의 항공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8월 29일, 쿠이비셰프(현재의 사마라) 부근에서 2대의 LaGG-3 전투기를 격추하여 200기 격추를 달성했다. 헤르만 그라프, 한스 필립에 이어 세 번째로 200기 격추를 달성한 랄은 ''국방군 보고서''에 언급되었고, 9월 12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오크 잎과 검)을 수여받았다. (독일군 34번째 수훈). 수여식은 9월 22일 라슈텐부르크의 볼프스샨체에서 히틀러에 의해 거행되었다.
훈장 수여 후 랄은 9월 말까지 휴가를 떠났다. 10월 한 달 동안 40대의 항공기를 격추했다. 1943년 11월 1일, 랄은 소령으로 진급했다. 11월 28일, 발터 노보트니에 이어 두 번째로 250기 격추를 달성했다. 11월 30일, 그 해의 마지막 격추(252번째)를 기록했고, 1944년 1월 11일 히틀러로부터 오크 잎과 검 증서를 받았다. 1943년 12월 1일부터 1944년 1월 30일까지 휴가를 보냈다.
1944년, 랄은 격추를 이어갔지만 속도는 느려졌다. 4월 8일 소련의 크림 반도 공세가 시작되었고, 5주 후 독일의 크림 반도 점령이 끝났다. 4월 16일, 세바스토폴 부근에서 라보치킨 La-5 전투기를 격추하며 동부 전선에서 마지막 273번째 격추를 기록했다. 1944년 4월 19일, 제11 전투 비행단(JG 11)으로 전출되어 II. ''Gruppe'' JG 11의 ''Gruppenkommandeur''(비행단 지휘관)로 제국 방어 작전에 참여했다.
랄은 미국 육군 항공대(USAAF) 제8 항공군의 폭격기 함대를 상대했다. 4월 29일, 하노버 북쪽에서 록히드 P-38 라이트닝 1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5월 12일, 제8 항공군은 독일의 연료 산업을 목표로 삼았다. 이날 랄은 Bf 109s ''Staffel''(비행대)를 이끌고 휴버트 젬케 대령의 리퍼블릭 P-47 썬더볼트 편대를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그의 ''Staffel''은 P-47에게 기습당했고, 랄은 탈출을 위해 급강하했지만 Bf 109는 썬더볼트를 따돌릴 수 없었다. 제56 전투 비행단 조종사들의 공격으로 엔진과 라디에이터에 피격당하고 왼쪽 엄지가 잘린 랄은 탈출했다. 그는 나소에서 수개월간 입원했으며, 엄지가 피부에만 연결되어 있어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44년 가을, 랄은 바트 뵈리스호펜의 ''야크트플리에거 장군''(부대 지휘관 훈련 학교)에서 교관이 되었다. 훈련의 일부는 노획된 연합국 항공기를 조종하고 학생 조종사에게 능력과 결함에 대한 메모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1945년 2월 20일, 제300 전투 비행단(JG 300)의 ''Geschwaderkommodore''(비행단장)로 임명되었다. JG 300 복무 중에는 적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1945년 3월 2일, JG 300은 JG 301의 지원을 받아 마지막으로 4개 그룹 모두를 출격시켜 미국 공습에 대항했다.
3. 1. 서부 전선
1940년 5월 12일 프랑스 전투에서 호크 75A를 격추하며 첫 격추를 기록했다.[3] 그 후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전하여, 같은 해 7월 JG 52 제8 비행대(Staffel)의 비행대장(Staffelkapitän)으로 임명되었고,[3] 8월에는 상급 중위(Oberleutnant)로 진급했다.[3]3. 2. 발칸 전선
1941년, 랄은 루마니아로 이동하여 루마니아 공군 인력 훈련을 담당했다. 그는 그리스 전투와 크레타 전투에 참전했다.[1]3. 3. 동부 전선
1936년 근로 의무를 마친 후 사관 후보생으로 육군에 입대했지만, 이듬해 공군으로 전속되어, 1939년 말에 조종 교육을 마치고 제52전투항공단(JG52)에 소위로 배속되었다. 1940년 5월 12일 프랑스 상공의 공중전에서 호크 75A를 격추하며 첫 전과를 기록했다. 이어서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가, 같은 항공단 제Ⅲ비행대 제8중대 중대장으로 승진했다.크레타섬 공방전, 불가리아 주둔을 거쳐 독소전이 시작되자 전과는 급격히 증가하여 36기에 달했지만, 1941년11월 28일 격추되어 불시착, 척추가 3군데 골절되고 하반신이 일시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 빈에서 요양 후 1942년 8월에 복귀, 코카서스 전선에 참가하여 전과를 늘렸다. 9월에는 65기 격추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10월 말에는 100기 격추로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43년 4월에는 에리히 하르트만 등 에이스가 많은 제Ⅲ비행대의 비행대장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요양 중에 알게 된 소아과 의사 헤르타 쇤(Hertha Schön)과 결혼했다. 부인과의 사이에는 4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 중 2명은 태어난 직후 사망했다.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되자, 7월 4일 항공단으로서 2500기, 9월 19일 3000기 격추를 기록함과 동시에, 개인 전과도 순조롭게 늘려 8월 9일 175기, 20일 후에는 전군에서 3번째로 200기 격추를 달성했다. 소령으로 진급, 11월 28일 발터 노보트니에 이어 두 번째로 250기 격추를 기록했다.
3. 4. 제국 방어
1944년 3월, 귄터 랄은 독일 본토 방공을 담당하는 제11전투항공단 제Ⅱ비행대(II/JG11)의 비행대장으로 이동했다. 5월 12일 베를린 상공에서 P-47 썬더볼트와 교전 중 격추되어 왼손 엄지손가락을 잃는 중상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병원에서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11월까지 입원해야 했고, 이로 인해 격추 기록은 한동안 멈추게 되었다.[3]3. 5. 종전
1944년 5월 12일 베를린에서 격추되어 왼손 엄지손가락을 잃는 중상을 입었다. 게다가 병원 내에서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11월까지 입원했기 때문에 격추 기록은 멈췄다. 1945년 5월 8일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을 제300전투항공단 사령관으로 맞이했다.4. 전후 생애 및 경력
1956년, 신설된 독일 연방 공군에 소령으로 입대하여 현역으로 복귀했다. 미국에서 연수를 거쳐 제트 전투기 파일럿이 되었다. 제3 항공 사단장, 제4 전술 연합 공군 참모장 등을 거쳐, 1970년에 중장으로 승진하여 공군 지휘 사령부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최고 간부인 공군 총감, 1974년부터 1975년 12월까지 NATO의 주재 무관을 역임했다. 최종 계급은 중장이었으며, 과거의 에이스 파일럿들 중, 연방군의 요직에 오른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1]
공군 총감 재임 중, 도입한 미국제 신형기 F-104 스타파이터의 사고가 잇따르자 비판을 받았다.[1] 이후 강연 등에서 현역 시절의 경험 등을 이야기했다. 1985년에 헤르타 부인과 사별했다. 2004년에는 회고록 "Mein Flugbuch" (직역: 나의 비행 기록)를 출판했다(일본어 번역은 미출판). 2005년에 독일 사회 민주당의 페터 슈트루크 국방장관이 전쟁 범죄를 이유로 Jagdgeschwader 74de의 애칭에서 베르너 묄더스의 이름을 삭제했을 때, 공군 총감 재임 중에 그 명칭을 부여한 당사자인 랄과 공군의 퇴역 군인들은 반대 운동을 벌였지만, 저지할 수는 없었다.
2009년 10월 2일에 심장 발작을 일으켰고, 이틀 후인 10월 4일에, 바이에른주 바트 라이헨할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향년 91세.
4. 1. 민간인 생활

1945년 8월에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공장 등에서 노동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소아과 의사인 부인도 가계를 도왔다.
4. 2. 서독 공군 복무
Bundesluftwaffede 소령으로 재입대했다.[1] 미국에서 연수를 거쳐 제트 전투기 파일럿이 되었다.[1] 제3 항공 사단장, 제4 전술 연합 공군 참모장 등을 거쳐, 1970년 중장으로 승진하여 공군 지휘 사령부 총사령관에 취임했다.[1] 1971년부터 1974년까지 공군 총감을 역임했고, 1974년부터 1975년 12월까지 NATO 주재 무관을 역임했다.[1] 최종 계급은 중장이었다.[1] 랄은 과거 에이스 파일럿 중 연방군 요직에 오른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1]공군 총감 재임 중, 도입한 미국제 신형기 F-104 스타파이터의 사고가 잇따르자 비판을 받았다.[1] 1975년 옛 전우를 만나기 위해 나미비아를 여행했을 때, 인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전 세계의 비난을 받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한 것이 언론 ("슈테른" 지)과 게오르크 레버 국방장관의 비판을 받았다.[1]
4. 3. 은퇴 및 사망
랄은 군 복무를 마치고 은퇴한 후 항공우주 산업과 무기 산업에서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그가 근무한 회사로는 제너럴 일렉트릭, MTU 에어로 엔진스, 게르트 H. 벅이 있었다. 그의 컨설팅 업무는 1989년에 종료되었다.[1] MTU는 F-104 스타파이터에 탑재된 제너럴 일렉트릭 J79 축류 터보제트 엔진을 라이선스, 제작 및 유지보수했다. 이러한 자격으로 랄은 여러 NATO 회원국뿐만 아니라 볼리바르 군사 항공대 및 베네수엘라의 민간 항공과 연락을 담당했다.[2] 벅은 현재 슈나이즐로이트의 일부인 프로나우에 본사를 둔 회사의 소유주였으며, 미사일 방어 시스템, 모든 유형의 레이저 유도 및 레이더 유도 무기를 전문으로 했다. 이 회사는 현재 라인메탈의 자회사이다.[3]1985년 7월 4일, 랄의 아내 헤르타가 사망했다.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다. 첫째 아이인 모니카는 1942년에 임신 6개월 만에 태어났지만 24시간밖에 살지 못했다. 둘째 아이인 알렉스는 1945년에 태어났지만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1950년 9월 28일, 그들의 딸 프란치스카가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고 1955년 3월 17일에는 펠리치타스가 태어났다. 그의 회고록인 ''Mein Flugbuch'' (나의 비행 기록부)는 2004년에 출판되었다.
1975년에는 옛 전우를 만나기 위해 나미비아를 여행했을 때, 인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전 세계의 비난을 받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한 것이 언론 ("슈테른" 지)과 게오르크 레버 국방장관의 비판을 받았다.
2005년에 독일 사회 민주당의 페터 슈트루크 국방장관이 전쟁 범죄를 이유로 Jagdgeschwader 74de의 애칭에서 베르너 묄더스의 이름을 삭제했을 때, 공군 총감 재임 중에 그 명칭을 부여한 당사자인 랄과 공군의 퇴역 군인들은 반대 운동을 벌였지만, 저지할 수는 없었다.
2009년 10월 2일에 심장 발작을 일으켰고, 이틀 후인 10월 4일에, 바이에른주 바트 라이헨할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향년 91세.
2009년 10월 4일, 랄은 이전에 심장마비를 겪은 후 바트 라이헨할에서 사망했다. 10월 15일 바트 라이헨할의 Evangelische Stadtkirche (Bad Reichenhall)de에서 기념 예배를 드린 후 군사 장례로 Friedhof St. Zenode에 묻혔다. 장례식에는 공군 감찰관 Klaus-Peter Stieglitzde가 참석했다.
랄이 1944년 미국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었을 때 착용했던 손상된 비행 장갑은 현재 워싱턴 D.C.의 국립 항공 우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5. 논란
(내용 없음)
6. 훈장
- 철십자 훈장 (1939년)
- * 2급 (1940년 5월 23일)[1]
- * 1급 (1940년 7월)[1]
- 부상장 (1939년) 금색[2]
- 공중 기동 및 관측자 뱃지[2]
- "크레테" 커프타이틀[2]
- 전투기 조종사를 위한 루프트바페 전선 비행 훈장 금색, 깃발 "600"[2]
- 루프트바페 명예 잔 1941년 11월 17일 오버로이테난트(중위)로서[3]
- 독일 십자 훈장 금색 1941년 12월 15일, 제8/''야크트게슈와더'' 52(8./JG 52)의 ''오버로이테난트''로서
-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검 잎과 검 포함)
- * 기사십자 훈장: 1942년 9월 3일, 제8/''야크트게슈와더'' 52(8./JG 52)의 ''슈타펠카피탄''(비행중대장)으로서
- * 134번째 참나무 잎: 1942년 10월 26일, 제8/''야크트게슈와더'' 52(8./JG 52)의 ''오버로이테난트''이자 ''슈타펠카피탄''으로서
- * 34번째 검: 1943년 9월 12일, III/''야크트게슈와더'' 52(III./JG 52)의 ''하우프트만''(대위)이자 ''그루펜코만도어''(비행단장)로서
-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사령관 십자 훈장 (1973년)
참조
[1]
문서
Organization of the Luftwaffe during World War II
[2]
서적
2007
[3]
서적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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