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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단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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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규슈 단다이는 무로마치 시대에 규슈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진제이 단다이를 계승했다. 교토에 막부를 둔 무로마치 막부는 간토, 도호쿠 지역과 함께 규슈를 통치하기 위해 규슈 단다이를 두었으며, 고려(조선)와의 외교 등도 담당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잇시키 노리우지를 다자이후에 남긴 것이 규슈 단다이의 시작이 되었다. 시마즈 씨, 오토모 씨 등의 반발과 남조 세력의 등장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마가와 사다요가 규슈 단다이로 임명되면서 남조 세력을 제압하고 왜구 토벌에 기여했다. 이후 시부카와 씨가 대대로 규슈 단다이를 세습했으나, 쇼니 씨와의 다툼과 오우치 씨의 지원 축소로 쇠퇴하여 센고쿠 시대에는 형식적인 직위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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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단다이
개요
명칭규슈 단다이 (九州探題)
별칭진제이칸레이 (鎮西管領, ちんぜいかんれい)
유형관직
설치 시기가마쿠라 시대 말기
폐지 시기무로마치 시대 전기
주요 역할규슈 지방의 통치 및 군사적 지휘
역사적 배경
가마쿠라 막부규슈 지방의 통치 강화 및 서국 무사의 통제 필요
몽골 침략겐코의 역 이후, 방어 체제 강화
주요 임무
군사적 지휘규슈 지방의 군사 조직 통솔 및 지휘
재판규슈 지방의 소송 및 재판 관할
세금 징수규슈 지방의 세금 징수 및 관리
막부와의 연락규슈 지방의 상황을 막부에 보고 및 연락
조직
단다이장관
히쓰쓰케執事, 단다이를 보좌하는 직책
요리아이寄人, 중요 사항을 결정하는 직책
반슈番衆, 경호 및 경비 담당
쇼반슈所番衆, 관할 구역 순찰 담당
역대 단다이 (일부)
호조 히로토키초대 단다이
호조 가네토키히로토키의 아들
아시카가 다다후유남북조 시대, 남조에 의해 임명
영향
규슈 지방의 정치적 안정가마쿠라 막부의 영향력 유지
무로마치 막부 시대단다이의 권력 약화 및 슈고 다이묘의 성장
기타
관련 용어진제이 부교 (鎮西奉行), 규슈 (九州)

2. 역사적 배경

무로마치 막부의 중신 시바 다카쓰네(斯波高経)의 아들 시바 우지쓰네(斯波氏経)와 시부카와 요시유키(渋川義行)가 규슈 단다이에 임명되었다. 이후 3대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시대인 오안(応安) 3년/겐토쿠(建徳) 원년(1370년)에 간레이(管領)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에 의해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 료슌)가 규슈 단다이로 임명되었다. 료슌은 남조 세력을 몰아내고 고케닌(御家人)을 슈고(守護)의 가신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또한 고려에서 왜구(倭寇) 단속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 정몽주를 맞이하고, 당시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약탈하던 왜구 토벌 요청을 받아들였으며, 막부의 대명(對明) 교역(감합무역) 시작에도 관여하였다.[1]

고랴쿠(康暦) 원년/덴주(天授) 5년(1379년) 고랴쿠 정변(康暦の政変)으로 이마가와 료슌을 지원하던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실각했다. 규슈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던 이마가와 료슌은 오에이 2년(1395년) 해임되고, 후임으로 요리유키의 정적 시바 요시마사의 사위인 시부카와 미쓰요리(渋川満頼)가 취임하여 히젠의 아야베 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시부카와 씨가 규슈 단다이 직위를 세습하였다.

그러나 쇼니 씨와의 전투로 시부카와 씨는 쇠퇴하고, 주고쿠(中国) 지방의 슈고 다이묘 오우치 씨의 후원이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시부카와 요시나가(渋川義長)가 쇼니 씨와 내통하다 덴분(天文) 3년(1534년) 오우치 씨의 공격으로 전사하면서 규슈 단다이는 쇠퇴하였다. 결국 덴분(天文) 24년(1555년) 마지막 단다이 영지였던 지쿠젠의 누이노하마가 오우치 씨에게 넘어가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도 규슈 단다이는 형식적인 막부 직위로 존재하여, 시부카와 씨 멸망 후에는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등이 임명되었다.

2. 1. 규슈 단다이 설치 이전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에이닌(永仁) 원년(1293년)에 설치된 진제이 단다이(鎮西探題)를 답습하는 형태로, 무로마치 시대에 규슈 지역 통치를 위해 설치되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교토에 정권을 세웠기 때문에, 가마쿠라에 설치된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가 간토(関東)를 중심으로, 오슈 단다이(奥州探題)가 도호쿠 지방(東北地方)을 통치했다. 규슈 단다이는 규슈 통치를 담당했으며, 고려(조선)와의 외교 등도 함께 행했다.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에서 이반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교토 공략에 실패하고 규슈로 내려와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쇼니씨(少弐氏)와 함께 다타라하마 전투(多々良浜の戦い)에서 천황 측인 기쿠치 씨(菊池氏) 등을 쳐부수고 동쪽으로 올라갔다. 이때 다카우지는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를 다자이후(大宰府)에 남겨두었는데, 이것이 규슈 단다이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시마즈씨(島津氏), 오토모 씨(大友氏) 등은 이에 따르지 않았고, 규슈에서 기존에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쇼니 씨와도 대립하였다. 이어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인 가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이 기쿠치 씨에게 옹립되어, 잇시키 씨로부터 다자이후를 차지하고 규슈에 남조 세력을 구축하였다.

2. 2. 규슈 단다이의 성립과 발전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에이닌(永仁) 원년(1293년)에 설치된 진제이 단다이(鎮西探題)를 답습하는 형태로 무로마치 시대에 규슈 지역 통치를 위해 설치되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교토에 정권을 세웠기 때문에, 가마쿠라에 설치된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가 간토(関東)를 중심으로, 오슈 단다이(奥州探題)가 도호쿠 지방(東北地方)을 통치했다. 규슈 단다이는 규슈 통치를 담당했으며 고려(조선)와의 외교 등도 함께 행했다.[1]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에서 이반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교토 공략에 실패하고 규슈로 내려와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쇼니씨(少弐氏)와 함께 다타라하마 전투(多々良浜の戦い)에서 천황측인 기쿠치 씨(菊池氏) 등을 쳐부수고 동쪽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를 다자이후(大宰府)에 남겨두었고 이것이 규슈 단다이의 시작이었다.[1]

그러나 규슈에서 시마즈씨(島津氏), 오토모 씨(大友氏) 등은 이를 따르지 않았고, 기존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쇼니 씨와도 대립하였다.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인 가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이 기쿠치 씨에게 옹립되어 잇시키 씨로부터 다자이후를 차지하고 규슈에 남조(南朝) 세력을 구축하였다.[1]

무로마치 막부의 중신인 시바 다카쓰네(斯波高経)의 적남 시바 우지쓰네(斯波氏経)와 시부카와 요시유키(渋川義行)가 규슈 단다이에 임명된 뒤, 막부 3대 쇼군(将軍)인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시대인 오안(応安) 3년/겐토쿠(建徳) 원년(1370년)에 간레이(管領)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에 의해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 료슌)가 규슈 단다이로 임명되었다. 료슌은 남조 세력을 쓸어내고 고케닌(御家人)의 슈고(守護) 피관화(被官化)에 힘썼으며, 고려에서 왜구(倭寇) 금압을 요구하며 사자로 파견된 정몽주를 맞이하고 당시 한반도 및 중국 해안을 약탈하던 왜구 토벌 요청을 수락, 막부의 대명(對明) 교역(감합무역) 개시에도 관여하였다.[1]

2. 3. 시부카와 씨의 세습과 쇠퇴

고랴쿠(康暦) 원년/덴주(天授) 5년(1379년)에 벌어진 고랴쿠 정변(康暦の政変)으로 이마가와 료슌을 지원하던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실각하였다. 규슈에서 독자적 세력을 지니고 있던 이마가와 료슌은 오에이 2년(1395년) 해임되고, 후임으로 요리유키의 정적 시바 요시마사의 사위인 시부카와 미쓰요리(渋川満頼)가 취임하였으며, 히젠의 아야베 성을 규슈 단다이후(九州探題府) 겸 히젠 슈고쇼(守護所)로써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는 계속해서 시부카와 씨가 규슈 단다이 직위를 세습하였다.

그러나 쇼니 씨와의 전투로 시부카와 씨는 쇠퇴하고, 주고쿠(中国) 지방의 슈고 다이묘 오우치 씨의 후원이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시부카와 요시나가(渋川義長)가 쇼니 씨와 내통하다 덴분(天文) 3년(1534년) 오우치 씨의 공격으로 전사하고, 이후 규슈 단다이의 쇠미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덴분(天文) 24년(1555년)에 마지막 단다이 영지였던 지쿠젠의 누이노하마가 오우치 씨에 의해 접수되어, 사실상 규슈 단다이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2. 4. 센고쿠 시대 이후

무로마치 막부교토에 정권을 세웠기 때문에, 가마쿠라에 설치된 가마쿠라 구보가 간토를 중심으로, 오슈 단다이도호쿠 지방을 통치했다. 규슈 단다이는 규슈 통치를 담당했으며 고려(조선)과의 외교 등도 함께 행했다.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에서 이반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 공략에 실패하고 규슈로 내려와 반격 태세를 갖추고 쇼니씨와 함께 다타라하마 전투(多々良浜の戦い)에서 천황 측인 기쿠치 씨(菊池氏) 등을 쳐부수고 동쪽으로 올라갔다. 이때 다카우지는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를 다자이후에 남겨두었는데, 이것이 규슈 단다이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규슈의 시마즈씨, 오토모 씨 등은 이에 따르지 않았고, 규슈에서 기존에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쇼니 씨와도 대립하였다. 이어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인 가네요시 친왕이 기쿠치 씨에게 옹립되어, 잇시키 씨로부터 다자이후를 차지하고 규슈에 남조 세력을 구축하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중신인 시바 다카쓰네(斯波高経)의 적남인 시바 우지쓰네(斯波氏経) 그리고 시부카와 요시유키(渋川義行)가 규슈 단다이에 임명된 뒤, 막부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인 오안 3년/겐토쿠 원년(1370년)에 간레이(管領) 호소카와 요리유키에 의해 이마가와 사다요(료슌)가 규슈 단다이로 임명되었고, 남조 세력을 쓸어내고 고케닌의 슈고(守護) 피관화(被官化)에 힘썼다. 료슌은 또한 고려에서 왜구 금압을 요구하기 위한 사자로써 파견되어 온 정몽주를 맞이하고 당시 한반도 및 중국 해안을 돌며 약탈을 자행하던 일본발 해적 집단인 왜구 토벌에 대한 요청을 수락하였으며, 막부의 대명(對明) 교역(감합무역)의 개시에도 관여하였다.

고랴쿠 원년/덴주 5년(1379년)에 벌어진 고랴쿠 정변으로 인해 이마가와 료슌을 지원하던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실각하게 된다. 규슈에서 독자적 세력을 지니고 있던 이마가와 료슌은 오에이 2년(1395년) 해임되고, 후임으로 요리유키의 정적 시바 요시마사(斯波義将)의 사위인 시부카와 미쓰요리(요시유키의 아들)가 취임하였으며, 히젠의 아야베 성(綾部城)을 규슈 단다이후(九州探題府) 겸 히젠 슈고쇼(守護所)로써 거점으로 삼는다. 이후는 계속해서 시부카와 씨가 규슈 단다이 직위를 이었다.

그러나 쇼니 씨와의 전투로 시부카와 씨는 쇠퇴하고, 주고쿠 지방의 슈고 다이묘 오우치 씨의 후원이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시부카와 요시나가가 쇼니 씨와 내통하다 덴분 3년(1534년) 오우치 씨의 공격으로 전사하고, 이후 규슈 단다이의 쇠미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덴분 24년에 마지막 단다이 영지였던 지쿠젠의 누이노하마(姪浜)가 오우치 씨에 의해 접수되어, 사실상 규슈 단다이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센고쿠 시대에도 규슈 단다이는 형식적인 막부 직위로서 존재해, 시부카와 씨의 멸망 후에는 오토모 소린 등이 여기에 임명되었다.

3. 역대 규슈 단다이

이름재임 기간
잇시키 노리우지1336년 - 1347년
잇시키 나오우지1347년 - 1351년
아시카가 다다후유1351년 - 1361년
시바 우지쓰네1361년 - 1365년
시부카와 요시유키1365년 - 1371년
이마가와 사다요1371년 - 1396년
시부카와 미쓰요리1396년 - 1419년
시부카와 요리토시1419년 - 1428년
시부카와 미쓰나오1428년 - 1434년
시부카와 노리나오1434년 - 1490년
시부카와 마사노리1490년 - 1500년
시부카와 다다시게1500년 - 1504년
시부카와 요시나가1504년 - 1533년
아시카가 타다후유1351년 - 1352년?
북조 측 (타다요시 측) 탄다이
잇시키 나오우지1351년 - 1352년
남조 측 (다카우지 측) 탄다이[1]
잇시키 나오우지1352년 - 1358년
북조 측 (다카우지 측) 탄다이
아시카가 타다후유1353년/1354년? - 1361년
남조 측 (타다후유 측) 탄다이
호소카와 시게우지1358년
시바 우지쓰네1361년 - 1365년
시부카와 요시유키1365년 - 1370년
이마가와 료슌1370년 - 1395년
시부카와 미쓰요리1396년 - 1419년
시부카와 요시토시1419년 - 1428년
시부카와 미쓰나오1428년 - 1434년
시부카와 노리나오1434년 - 1479년
시부카와 마스마루1479년 - 1487년
시부카와 마사노리1490년? - 1500년?[2]
시부카와 다다시게1487년[3] - 1504년?
시부카와 다네나오1504년? - 1533년
시부카와 다카아키?1533년? - 1534년?
시부카와 요시모토1534년? - 1554년?
오우치 측 탄다이
시부카와 우에몬노스케1534년?- 1543년경?
오토모 측 탄다이
오토모 요시시게1559년 - 1578년


4. 참고 사항

규슈 단다이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진제이 단다이(鎮西探題)를 계승하여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규슈 지역 통치를 위해 설치되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교토에 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에,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가 간토(関東) 지방을, 오슈 단다이(奥州探題)가 도호쿠 지방(東北地方)을 통치한 것처럼 규슈 단다이는 규슈 통치를 담당했으며, 고려(조선)와의 외교 등도 함께 수행했다.[1]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에서 이탈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교토 공략에 실패하고 규슈로 가서 반격 태세를 갖추고 쇼니 씨(少弐氏)와 함께 다타라하마 전투(多々良浜の戦い)에서 천황 측인 기쿠치 씨(菊池氏) 등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진격했다. 이때 다카우지는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를 다자이후(大宰府)에 남겨두었는데, 이것이 규슈 단다이의 시작이었다.[1]

그러나 규슈의 시마즈 씨(島津氏), 오토모 씨(大友氏) 등은 이에 따르지 않았고, 기존 세력인 쇼니 씨와도 대립했다. 가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이 기쿠치 씨에게 옹립되어 잇시키 씨로부터 다자이후를 빼앗고 규슈에 남조 세력을 구축했다.[1]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시대인 오안(応安) 3년/겐토쿠(建徳) 원년(1370년)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에 의해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 료슌)가 규슈 단다이로 임명되어 남조 세력을 몰아내고 고케닌(御家人)의 슈고(守護) 피관화(被官化)에 힘썼다. 료슌은 정몽주를 맞이하고 왜구(倭寇) 토벌 요청을 수락했으며, 감합무역 개시에도 관여했다.[1]

고랴쿠(康暦) 원년/덴주(天授) 5년(1379년) 고랴쿠 정변(康暦の政変)으로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실각하면서 이마가와 료슌은 오에이(応永) 2년(1395년) 해임되고, 시부카와 미쓰요리(渋川満頼)가 취임하여 히젠(肥前) 아야베 성(綾部城)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시부카와 씨(渋川氏)가 규슈 단다이 직위를 이었다.[1]

그러나 시부카와 씨는 쇼니 씨와의 전투로 쇠퇴하고 오우치 씨(大内氏)의 후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시부카와 요시나가(渋川義長)가 쇼니 씨와 내통하다 덴분(天文) 3년(1534년) 오우치 씨에게 전사하고, 규슈 단다이는 쇠퇴했다. 덴분(天文) 24년에 마지막 영지였던 지쿠젠(筑前) 누이노하마(姪浜)가 오우치 씨에게 넘어가 사실상 이름만 남게 되었다.[1]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도 규슈 단다이는 형식적으로 존재하여, 시부카와 씨 멸망 후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등이 임명되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에는 사이고쿠 군다이(西国郡代)가 설치되었다.[1]

참조

[1] 문서 足利尊氏가 南朝에 항복했던 기간
[2] 서적 九州戦国史, 守護・戦国大名事典
[3] 기타 일설에 1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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