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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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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몽주는 고려 말의 문신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며 신진 사대부 세력을 이끈 지도자이다. 그는 이성계와 함께 왜구 및 여진족을 토벌하고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정몽주는 조선 건국에 반대하며 이방원과의 갈등 끝에 암살당했다. 사후 충절의 상징으로 숭앙받아 문묘에 종사되었으나, 조선 건국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충신으로 미화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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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몽주 초상화
초상화
한글정몽주
한자鄭夢周
히라가나てい むしゅう
가타카나チョン・モンジュ
로마자 표기Chong Mong-ju
초명정몽란(鄭夢蘭), 정몽룡(鄭夢龍)
달가(達可)
포은(圃隱)
시호문충(文忠)
추증 작위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
생애
출생1338년 1월 13일 (1337년 음력 12월 22일)
출생지고려 경상도 영천군 (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천시)
사망1392년 5월 4일 (음력 4월 4일) (향년 54세)
사망지고려 개경 선지교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성특급시 선죽교)
본관연일 정씨
종교유교(성리학)
가족 관계
배우자경순택주 경주 이씨
자녀아들 정종성(鄭宗誠), 아들 정종본(鄭宗本), 서자 정종화, 서자 정종함
부모아버지 정운관, 어머니 영천 이씨 부인
형제아우 정과(鄭過), 아우 정후(鄭厚), 아우 정도(鄭蹈)
친인척사촌 형 정항신(鄭恒臣), 손녀 오천군부인 정씨, 손녀사위 선성군, 사돈 정종, 서손녀 정씨, 서손녀사위 한명회
경력
주요 직책문화찬성사, 예문관제학, 인물추변도감제조관
임기1379년 ~ 1380년
군주우왕
분야문신, 성리학자, 정치가, 외교가
웹사이트
웹사이트연일 정씨(延日鄭氏) - 부산역사문화대전

2. 생애

영일(현 포항시) 또는 영천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설에는 영주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주자학을 깊이 공부하였고, 1360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고려 말의 혼란한 시기 속에서 무장 이성계 등과 함께 북방의 여진과 남쪽의 왜구 토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특히 1377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무로마치 막부규슈 지역 책임자인 이마가와 사다요(료슌)와 직접 교섭하여 왜구 문제 해결을 시도하고, 포로로 잡혀갔던 고려인들을 귀환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자, 정몽주는 초기에는 그와 협력하며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조선)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정몽주는 이에 반대하며 고려 왕조를 지키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로 인해 이성계 세력과의 갈등이 깊어졌고, 결국 1392년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훗날 조선 태종)이 보낸 자객에 의해 개성의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정몽주는 정치 활동 외에도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써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이로 인해 후대에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록 조선 건국에는 반대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조선 왕조 시대 내내 충절의 상징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기억되고 있다.

2. 1. 생애 초기

고려 말의 혼란한 시기에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과 왜구 토벌에 참여하여 무공을 세웠다. 1360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377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무로마치 막부규슈 지역 책임자인 이마가와 료슌과 교섭하여 왜구 문제 해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2. 1. 1. 출생과 가계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형양(滎陽)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며, 진현관 제학을 지낸 정종흥(鄭宗興)의 5대손이다. 그의 고조부 정림(鄭林)은 판도판서에 이르렀고, 증조부 정인수는 검교군기감을 지냈으며 사후에 증 개성부윤으로 추증되었다. 조부는 직장동정(同正) 등을 지냈으나, 아버지 정운관은 성균관의 재생(유생과 같은 의미)이었다.[5]

정몽주는 고려 말에 등장한 중소 지주 기반의 신진사대부였다. 그가 활동한 경상북도 중부 내륙 지방은 성리학의 시조 격인 안향(영주 출신)의 영향 아래, 지방 향리 출신이자 중소 지주의 경제적 기반을 둔 신진사대부들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 출신 인물로는 포은 정몽주(영천 출신[5]), 야은 길재(구미 출신), 목은 이색(영덕 출신), 도은 이숭인(성주 출신), 삼봉 정도전(영주 출신) 등이 있으며, 정몽주는 자연스럽게 이색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6]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영천 이씨는 품에 안고 있던 난초 화분을 떨어뜨리는 태몽을 꾸었다고 하여, 처음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지었다. 그러나 이후 아버지 정운관이 꿈에서 중국 주나라주공(周公)을 만났다고 하여 이름을 '몽주'(夢周)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성균관 재생이었으나, 그의 가문은 대대로 관료를 배출한 양반 가문이었기에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출생지는 영주로 알려져 있다.[5]

2. 1. 2. 유년기와 수학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이며, 진현관제학 정종흥(鄭宗興)의 5대손이다. 고조부 정림(鄭林)은 판도판서를, 증조부 정인수는 검교군기감을 지냈고 증 개성부윤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직장동정(同正) 등을 지냈으나, 아버지 정운관은 성균관 재생(유생과 같은 의미)이었다.[5] 그의 선조 3대는 검교직과 동정직을 가졌을 뿐 현직은 가지지 못한 지방의 사족이었으나, 대대로 관직에 있었기에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정몽주는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대표적인 인물로, 안향, 이색 등 성리학의 주요 인물들이 활동했던 경북 내륙 지방 출신이다. 이 지역은 지방 향리 출신이자 중소 지주의 경제적 기반을 둔 신진사대부들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6]

태어날 때 어머니 영천 이씨가 품고 있던 난초 화분을 떨어뜨리는 태몽을 꾸어 처음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지었다. 이후 아버지 정운관이 꿈에서 중국 주나라의 현명한 정치가였던 주공을 만난 것을 계기로 이름을 몽주(夢周)로 고쳤다. 한때 몽룡(夢龍)으로 고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암기력이 뛰어났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 영천 이씨는 아들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백로가'(白鷺歌)라는 시를 지어주며 처신에 대한 교훈을 주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울세라

청강(淸江)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7][8]

정몽주에게는 세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정과(鄭過)는 예조판서에, 정후(鄭厚)와 정도(鄭蹈)는 사재령 판서에 이르렀다. 아버지 정운관은 향시에 합격한 뒤 성균복응제생의 벼슬에 올랐으며, 후에 정몽주의 공으로 신덕수의성근익조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병조사상호군영경령전사에 추증되고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어머니 영천 이씨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유년기에는 아버지 정운관에게서 한학을 배우다가,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이색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배웠다. 소년기에는 영일 청림동에서 외가가 있는 영천으로 이사했다고 전해진다. 스승 이색은 고려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백이정의 학통을 이은 이제현의 제자였다. 이색은 이제현, 백이정, 권부, 안향 등의 학문을 계승했으며,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9] 정몽주는 이색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후에 이숭인, 길재 등을 통해 조선 사림파에 학통을 전수했고, 다른 제자인 권우는 세종대왕 등을 가르치게 된다.

스승 목은 이색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는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을 만났다. 특히 정도전과는 뜻이 맞아,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 사회로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하며 깊은 관계를 맺었다. 청소년기부터 두 사람은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했으나, 훗날 고려 왕조의 유지와 역성혁명이라는 각기 다른 길을 선택하며 정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1355년(공민왕 4년) 19세 때 아버지 정운관이 세상을 떠나자, 영천 도일동에 장사를 지내고 3년 동안 묘소 옆에서 여묘살이를 했다. 이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공민왕은 그의 집에 포상을 하고 정표(旌表)를 세워주었다.

2. 1. 3. 과거 급제와 관직 생활 시작

1357년(공민왕 6년) 여름, 어사대부 신군평이 주관한 감시(監試)에 합격하였고, 1360년(공민왕 9년) 10월에는 문과에서 세 번의 시험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10] 당시 과거 시험의 지공거는 난계 김득배였고, 동지공거는 한방신이었다. 김득배 등에 의해 선발되어 장원 급제한 후,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여진족 토벌에 참여하였다. 이후 예문관 검열·수찬(修撰) 등을 역임하였고, 1362년에는 다시 예문관 검열과 직한림원(直翰林院)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스승인 김득배가 홍건적을 격파하고 개경을 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용(金鏞)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가 상주에서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득배가 역적으로 몰리자 그의 문생들 대부분이 나서기를 꺼렸으나, 정몽주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홀로 나서 왕에게 간청하여 김득배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내주었다.[11] 정몽주는 직접 김득배의 시신을 거두고 추모하는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 아아 황천이여! 나의 죄가 무엇이며, 아아 황천이여! 이사람이 누구입니까? 대개 듣건대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림은 하늘이요, 선인을 상주고 악인을 벌함은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나 그 이치는 하나인 즉,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하였으나,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김은 과연 무슨 이치며,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함은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

: 지난날 홍건적이 침입하여 임금이 서울을 떠나시니 국가의 운명이 한가닥 실 끝에 달린 것처럼 위태롭거늘, 오직 공이 먼저 대의(大義)를 선창하자 원근이 향응하였고 몸소 만번 죽을 계책을 내어 능히 삼한의 대업을 회복하였으니, 무릇 이제 사람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자는 것이 그 누구의 공입니까?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써 덮는 것이 옳을 것이요. 죄가 공보다 무겁더라도 반드시 그 죄를 자복시킨 뒤에 베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 그런데 이제 말의 땀이 마르지 않고 개선하는 노래가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태산 같은 공을 오히려 칼날의 피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써 하늘에 묻는 바입니다.

: 나는 그 충혼(忠魂)과 장혼(壯魄)이 천추 만세토록 반드시 九泉의 아래서 울음을 머금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아 명이로구나!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이후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에는 낭장(郎將) 겸 합문지후를 거쳐 다시 위위시승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선덕랑(宣德郞)으로 승진하여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다시 출정하여 화주(和州)에서 여진족 토벌에 참여하였고, 이때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는 데 기여했다.

2. 2. 관료 생활

영주 출신으로, 주자학을 배우고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고려 말 내우외환의 시기 속에서 군인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족과 왜구(전기 왜구) 토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또한 1377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무로마치 막부의 규슈 탐제인 이마가와 사다요(료슌)와 외교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초기에는 그와 노선을 같이했으나, 점차 조선 건국을 추진하는 이성계 및 정도전 등과 대립하는 길을 걸었다. 결국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개성의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

정몽주는 교육에도 힘을 쏟아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이로 인해 후대에 '동방 이학(理學)의 조'라는 칭송을 받았다. 비록 조선 건국에 반대하였으나, 역설적이게도 조선 왕조로부터 충절의 상징으로 인정받았으며, 오늘날까지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2. 2. 1. 초기 관료 생활과 외교 활동

1364년 이성계를 따라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삼개를 치는 데 종군하였다. 이때 그는 이성계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의 노선에 동조하게 되었으나, 훗날 고려 왕조 유지와 역성혁명을 두고 갈등하게 된다. 여진 정벌에서 돌아온 뒤 1364년 전보도감 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고, 이후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임명되었다. 전농시승으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여 일시적으로 사직했다가 복직하였는데, 당시 상을 치르는 제도가 문란하여 사대부들도 100일만 지나면 상복을 벗었으나 그는 부모상 때 묘소를 지키고 애도와 예절을 극진히 하여 왕이 그의 마을을 표창하기도 했다.[12]

복직 후 예조 정랑성균관 박사·성균관 사예를 지냈다. 1367년에는 통직랑(通直郞) 전공정랑(典工正郞)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성균관 박사로 활동했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명나라가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임을 들어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고, 이를 통해 고려와 명나라 간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1371년(공민왕 20년)에는 태상소경(太常少卿)·보문각 응교 겸 성균관직강(寶文閣應敎兼成均館直講) 등을 거쳐 성균관 사성에 올랐다.

성균관 경내


정몽주가 성균관 박사로 재직하며 유교 경전을 강의할 당시, 고려에는 《주자집주(朱子集註)》 외에는 주자학 관련 서적이 많지 않았음에도 그의 강의는 막힘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전해지자 정몽주의 해석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사람들이 감탄했다. 이에 대사성 이색(李穡)은 정몽주를 높이 평가하여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고 칭했다.[11] 훗날 조선 시대에 들어온 다른 유교 경전들과 비교했을 때도 그의 학설에 오류가 없어, 정몽주는 동방 성리학의 실질적인 창시자 또는 중시조로 여겨지게 되었다.

1377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당시 규슈 지역을 다스리던 무로마치 막부의 규슈 탐제 이마가와 사다요(료슌)와 교섭하여 왜구 문제 해결을 논의하는 등 외교적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2. 2. 2. 신돈의 죽음과 정치적 시련

신돈이 신진사류를 발탁하면서 정몽주 역시 중요한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1371년 7월, 신진사류의 정치적 성장에 기여했던 신돈이 역모죄로 몰려 사형당하는 큰 정치적 변화가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정몽주 또한 신돈의 일파라는 의심을 받으며 정치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신돈의 죽음으로 인해 정치적 시련을 겪었지만, 정몽주를 포함한 신진사류는 당시 새롭게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잡은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13] 정몽주는 신돈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지지만, 훗날 우왕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정치적 모략에 가담하여 그들을 폐위시키는 데 협력하게 된다.

2. 2. 3. 왜구 문제 해결 노력과 복귀


金陵市上醉佳人 / 금릉 땅 저자에서 가인과 취했노라[14]

1374년(공민왕 23년) 경상도 안렴사로 부임했으나, 그해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예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당시 고려는 공민왕 시해 사건과 김의(金義) 등이 명나라 사신을 살해한 일로 명나라의 책임 추궁을 받으며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많은 이들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으나, 정몽주는 사신을 보내 명나라에 해명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375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유학 진흥에 힘썼다. 1376년(우왕 2년) 우사의대부를 거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된 그는,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이인임 등이 추진하던 배명친원(排明親元), 즉 명나라를 배척하고 북원과 가까이 지내려는 외교 정책에 반대하며 친명 외교를 주장했다. 이인임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동시에 북원에서 온 사신을 맞이하려는 이중 외교를 시도하자, 정몽주는 박상용, 김구용 등 10여 명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대간들도 이인임을 탄핵하며 비판했다.

>“점점 강해지는 명나라를 버리고 쇠퇴해가는 원나라와 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원나라와의 외교 재개 시도를 문제 삼아, 정책을 주도한 이인임지윤의 처벌까지 주장했다.[15] 1375년(우왕 1년) 5월에는 원나라 사신을 사로잡고 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15]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움직임은 이인임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고, 정몽주, 정도전을 포함한 신진사류 21명이 죽거나 유배되는 결과를 낳았다.[15] 정몽주는 이인임의 친원 정책을 비판하다가 1376년 울산 언양(彦陽)으로 유배되었으나, 1377년(우왕 3년)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풀려나 복귀했다.

복귀 후 정몽주는 외교적 노력과 함께 당시 큰 문제였던 왜구 문제 해결에도 힘썼다. 1377년에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무로마치 막부규슈 지역 책임자인 이마가와 사다요(료슌)와 교섭하며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한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다. 또한, 고려 말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족 및 왜구(전기 왜구) 토벌에 참여하여 군사적인 공을 세우기도 했다.

2. 2. 4. 개혁 정치 참여와 이성계와의 협력

1374년(공민왕 23년) 경상도 안렴사로 부임했으나, 그해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다시 중앙 정계로 돌아와 예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당시 고려는 공민왕 피살 사건과 김의(金義) 등이 명나라 사신을 살해한 일로 인해 명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 명나라가 고려 조정에 책임을 추궁하자 국내는 혼란스러웠고, 대부분의 신료들이 명에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그러나 정몽주는 사신 파견을 통해 명나라에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375년에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유학 진흥에 힘썼다. 이듬해인 1376년(우왕 2년) 우사의대부를 거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그는 당시 권력자였던 이인임 등이 추진하던 배명친원(排明親元), 즉 명나라를 배척하고 북원(北元)과 가까이 지내려는 외교 정책에 반대하며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주장했다. 이인임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동시에 북원에서 온 사신을 맞이하려는 이중 외교를 시도하자, 정몽주는 박상용, 김구용 등 10여 명의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대간들도 이인임을 탄핵했다. 그는 "점점 강성해지는 명나라를 버리고 쇠퇴해가는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단순히 외교 정책에 대한 반대를 넘어,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이인임지윤(池奫)을 제거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으로까지 발전했다.[15] 정몽주 역시 1375년(우왕 1년) 5월, 원나라 사신을 사로잡고 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15] 그러나 이러한 신진사류의 개혁 시도는 이인임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고, 정몽주를 포함한 정도전 등 21명의 신진사류가 죽거나 유배되는 결과를 낳았다.[15] 정몽주는 이인임의 친원 정책을 비판하다가 울산 언양(彦陽)으로 유배되었으나, 1377년(우왕 3년)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정몽주는 이전과는 다른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외교적,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정치적으로 성장했으며[16], 우왕 대에 복귀한 이후에는 현실 정치에 어느 정도 순응하며 권력자들과의 관계 유지에도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16]

한편, 당시 고려는 극심한 왜구의 침입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정몽주는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파견하여 화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1377년 9월 스스로 사신을 자청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규슈 지방의 실권자인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만나 왜구의 약탈 문제를 지적하고 단속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아냈다. 또한 뛰어난 학식과 외교술로 이마가와 료슌을 감복시켜,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데리고 귀국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1378년 7월, 수천 명의 고려인 포로를 데리고 돌아온 그의 공로는 큰 명망을 얻게 했다.

이후 정몽주는 우산기상시, 보문각 제학, 전공판서, 예의 판서, 전법판서, 판도판서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1380년에는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의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신흥 무인 세력인 이성계와 협력 관계를 맺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황산대첩에서 승리한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 잔치에서 새 왕조 개창의 야심을 드러내자, 정몽주는 이에 반발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와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시를 지으며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는 향후 두 사람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정몽주는 외교 분야에서도 지속적으로 활약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나 여진족의 방해와 명나라 측의 입국 거부로 요동에서 되돌아와야 했다. 1384년에는 정당문학에 올랐고, 명나라가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고 사신을 억류하는 등 압박을 가해오자, 다시 한번 사신을 자청하여 명나라로 향했다. 그는 명 태조 주원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로 파견되어 어려운 협상 끝에 세공 감면과 5년간 미납된 세공 면제를 받아내고, 억류되었던 사신 홍상재(洪尙載) 등을 석방시키는 등 악화되었던 대명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1385년1386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하여 인재를 선발했으며, 문하평리에 올랐다. 1386년 명나라와의 외교에서는 공물 면제뿐 아니라, 고려의 흉년과 옷감 부족을 호소하여 명나라로부터 의복과 옷감 지원을 받아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16]

1387년,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며 원나라 시기부터 관리하던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자 고려 조정은 큰 갈등에 휩싸였다. 최영 등은 요동 정벌을 주장하며 강경하게 맞섰으나, 정몽주는 이성계, 정도전과 함께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이들의 주장을 지지했다. 이는 정몽주가 이성계 세력과의 협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하륜, 이숭인 등과 함께 백관의 복식을 중국식으로 개정하여 호복(胡服)을 폐지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했으며, 정도전과 함께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고 성리학을 장려하는 등 개혁 정치에도 힘썼다. 이러한 활동 속에서 그는 당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을 비판하여 실각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 시기 정몽주는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외교적 난제를 해결하는 한편, 이성계와의 협력을 통해 고려 말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갔다.

2. 2. 5. 공양왕 옹립과 수문하시중 취임

1388년(창왕 1년) 삼사좌사에 임명되었고,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같은 해 도당(都堂)에서 사사로이 보유한 토지(사전, 私田) 문제가 논의되어 사전혁파(私田革罷)가 거론되었으나, 정몽주는 이에 대해 명확한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그 해 문하찬성사·지서연사(知書筵事)를 거쳐 1389년(창왕 2년) 6월에는 예문관 대제학, 정당문학을 지냈고, 같은 해 11월 다시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이때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하자, 정몽주는 이성계 등과 함께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을 주장하며 신종의 6대손이자 정원부원군의 차남인 정창군 왕요를 공양왕으로 옹립하는 데 참여했다.

1389년 말, 정몽주는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이성계 세력이 조정을 장악하려는 의도와도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이성계의 위세가 커지고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정몽주는 이들을 경계하며 숙청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우왕 복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창왕 역시 폐위되었다. 정몽주는 공양왕 옹립에 적극적으로 찬성했으며[17], 공양왕 즉위 후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 아홉 명과 함께 공양왕 옹립 공신에 책봉되었다.[19] 같은 해 8월,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21]에 책록되고 중대광(重大匡)으로 승진하여 문하찬성사 겸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상서시사 진현관 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同判都評議使司事 判戶曹尙瑞寺事 進賢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으며,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해졌다.

1390년(공양왕 2년)에는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오르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겸 도평의사사, 병조상서시판사(兵曹尙瑞寺判事), 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등을 겸임하며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으로 진봉되었다. 수문하시중이 된 정몽주는 풍년에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의창(義倉)을 다시 세우는 등 민생 안정에 힘썼다. 그는 수문하시중으로 임명되어 당시 함께 수문하시중이었던 이성계와 나란히 최고위직에 있었으나,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파는 '이씨(李氏)가 나라를 얻는다'는 의미의 목자득국(木子得國)이라는 노래와 소문을 퍼뜨리며 세력을 넓혀갔다.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에 대한 견제를 본격화했다. 그는 정도전을 탐욕스럽다고 비판하고, 우현보 가문에 사적인 원한을 품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우씨 집안의 노비였고 외할아버지는 우씨 집안의 인척 승려 김진이었다는 점을 들어, 정도전과 그의 아들들을 폄하했던 우현보 일가에 대한 정도전의 악감정을 겨냥한 것이었다. 정몽주는 정도전의 출신 배경을 문제 삼아 외가가 노비 출신임을 들어 혈통이 바르지 못하다고 공격했으며, 이로 인해 감정이 상한 정도전은 정몽주를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정몽주는 이성계 주변 인물들에 대한 공격을 지속하며 고려 왕조를 지키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2. 3. 생애 후반

고려 말의 내우외환 속에서 군인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왜구(전기 왜구)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1377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무로마치 막부의 규슈 탐제였던 이마가와 사다요(료슌)와 직접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정몽주는 초기에는 그와 정치적 노선을 함께하며 협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선양의 형식으로 조선을 건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정몽주는 이들과 명확히 대립각을 세우며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했다. 이러한 갈등은 점차 깊어져, 결국 1392년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훗날 조선 태종)이 보낸 자객에 의해 개성의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정몽주는 정치 활동 외에도 교육에 힘써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이로 인해 후대에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 건국에는 반대했지만, 역설적으로 조선 왕조 시대 내내 충절의 상징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기억되고 있다.

2. 3. 1. 이성계와의 갈등과 역성혁명 반대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을 때, 정몽주는 초기에 그와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고려 왕조를 끝내고 선양의 형식으로 조선을 건국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자, 정몽주는 이들과 명확히 대립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1]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귀국하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 도중 말에서 떨어져 황주에 머무르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몽주는 이를 이성계 세력을 제거할 기회로 보았으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그날 밤으로 이성계를 개성으로 복귀시키면서 정몽주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1]

이후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회유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정몽주는 정세를 파악할 겸 병문안을 명분으로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 만남에서 이방원은 하여가(何如歌)를 읊으며 정몽주에게 새 왕조 창업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1]

> 此亦何如彼亦何如 /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 — 이방원, 《하여가》

그러나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하며 고려 왕조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다짐하고 이방원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1]

>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 정몽주, 《단심가》

정몽주의 오랜 친구였던 정도전 역시 여러 차례 그를 찾아가 새 왕조 건립에 힘을 보태달라고 설득했지만, 정몽주는 종묘사직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협력을 거부했다.[1]

정몽주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결국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정몽주 또한 자신의 심복 부하였던 변중랑을 통해 암살 계획을 미리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성계와 정도전 등 역성혁명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문하생들과 이색의 문하생들을 움직여 그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했다.[1]

1392년 봄, 이성계 일파가 본격적으로 역성혁명을 준비하고 있음을 감지한 정몽주는 이성계가 병을 핑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고 사람을 보내 그의 동태를 살폈다. 이성계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했으나 이성계가 계속 병을 이유로 물러나 있자, 정몽주 역시 병을 핑계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해 4월,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이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직접 문병을 갔다. 하지만 이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개성의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의 자객에게 피살되었다.[1] 이는 고려 왕조를 지키려던 정몽주의 노력이 조선 건국을 추진하던 이성계 세력과의 충돌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사건이었다.

2. 3. 2. 이방원에 의한 피살

1392년 5월 4일(공양왕 4년 음력 4월 4일) 새벽, 정몽주는 불길한 꿈을 꾸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고 전해진다. 그날 아침, 그는 조상 제단에 절한 뒤 부인과 두 아들에게 '충효를 숭상하는 가문의 전통을 지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새 조정에서 벼슬을 주더라도 거절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같은 날 저녁, 정몽주는 낙마로 부상당한 이성계를 문병하고 정세를 살피기 위해 이성계의 집을 방문했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피살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 방문은 이방원이 계략을 써서 정몽주를 초청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미 이방원은 심복 조영규에게 철퇴를 준비시켜 선죽교 다리 밑에 숨어 있다가 정몽주를 살해하라고 지시했으며, 정몽주는 변중량을 통해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정몽주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말을 타고 이성계의 집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친구 집에 들러 술을 마신 뒤,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게 했다고 한다. 이유를 묻는 마부에게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찍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라고 답하였다고 전해진다.

마부가 선죽교(善竹橋)를 향해 말을 끌고 가 다리를 넘으려 할 때, 궁사가 쏜 화살에 말 혹은 정몽주가 맞아 쓰러졌다. 이때 조영규가 이끄는 고여(高呂[22]), 조평(趙評) 등 5~10여 명의 괴한이 나타났다. 정몽주는 이들의 비겁함을 꾸짖으며 말을 달리려 했으나, 부상을 입은 채 도망치던 그를 추격자들이 따라잡아 철퇴 또는 몽둥이와 철편으로 살해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6세였다.

이때 정몽주가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돌다리에 묻었는데, 백범일지에 따르면 1945년 이후 김구(金九)가 선죽교를 방문했을 때까지도 그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선죽교 돌 틈에서 대나무가 솟아나 그의 충절을 상징한다는 전설이 생겨났으며, 이로 인해 원래 선지교(選地橋)라 불리던 다리가 선죽교(善竹橋)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송도 지역에는 정몽주가 선죽교 근처가 아닌, 피습 후 개경부 태묘동까지 피를 흘리며 피신했으나 결국 뒤쫓아온 이방원의 자객에게 살해되었다는 전승도 있다.

정몽주는 죽음을 예감하고 자손들에게 자신의 묘비에는 반드시 고려의 관직만을 기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392년 4월, 그는 역적으로 규정되어 시신은 이방원의 수하들에 의해 수습되지 못하고 개경 저잣거리에 내걸렸다. 방치되었던 그의 시신은 후에 우현보(禹玄寶)와 송악산(松嶽山)의 승려들에 의해 수습되어 개경 풍덕(豊德)에 가매장되었다가, 훗날 경기도 용인 능원리의 현재 위치로 이장되었다.

정몽주의 죽음에 대해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을 크게 질책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성계는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 알려졌는데, 너희가 함부로 대신을 죽였으니 세상 사람들이 내가 모르는 일이라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치는 것은 충효를 바라기 때문인데, 네가 이토록 불효한 짓을 하니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꾸짖었다고 한다.

한편, '선죽(善竹)'이라는 지명 자체는 정몽주가 사망하기 이전인 이색의 《목은집》에도 등장한다.[32]용재총화》, 《해동악부》 등 초기 기록에는 '선죽교'에서의 순절 기록이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 중기 이후 '선죽교 순절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32] 개성부립박물관장을 지낸 고유섭은 「선죽교 변(辯)」이라는 글에서 정몽주가 순절한 곳이 선죽교가 아니라 대묘동 입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학설을 제시하기도 했다.[33]

3. 사상과 정책

현종 이후 유교가 국가의 주요 이념이었으나, 고종 이후 몽골의 침입을 겪으며 불교가 다시 호국 사상으로 부상했다. 정몽주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불교가 제시하는 이상 세계(극락 등)가 현실적이지 않으며 백성을 현혹한다고 비판했다. 대신 그는 유교, 특히 성리학을 사회의 근본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장려하는 데 힘썼다.[29]

그는 당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불교식 예법을 비판하고, 사대부들이 주희가 정리한 예법서인 〈주자가례〉에 따라 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각 가정에 조상을 모시는 사당인 가묘(家廟)를 세우고 5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무화하고자 했다.[29] 또한, 성리학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성균관의 학생 수를 늘리고, 수도인 개성에 5부학당(五部學堂)을 추가로 설치하여 교육 기회를 확대했다. 나아가 지방의 향교, 서원, 서당 설립을 적극 장려하며 성리학 이념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노력했다.[29]

정몽주의 이러한 노력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길재, 이숭인 등은 스승의 뜻을 따라 고향으로 내려가 지역 사회에 성리학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이들은 향촌 사회의 지식인 그룹을 형성했고, 이들의 학문적 후예들은 세조 대부터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이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훈구파와 대립할 수 있는 정치 세력, 즉 사림파를 형성하게 된다. 사림파는 연산군 시절 갑자사화와 같은 정치적 탄압을 겪기도 했으나, 중종 반정 이후 점차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여 중종 말기에는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29]

고려 말, 권문세족과 일부 불교 승려, 외척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국가의 법질서가 크게 흔들렸다. 정몽주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바로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기존 법령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새로운 법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를 위해 중국 원나라의 법전인 〈지정조격〉, 주희의 예법서인 〈주자가례〉,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률〉을 비롯하여 고대 중국 법가 사상가 상앙의 형률, 그리고 고려와 고대 국가들의 고유 형법까지 폭넓게 연구하고 분석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391년 (공양왕 3년), 성리학과 주자가례, 대명률의 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법령 제정을 강력히 추진하여 관철시켰다.[29]

1390년 수문하시중으로 재직할 당시에는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엄단하고, 의창(義倉) 제도를 부활시켜 농촌 경제 안정에도 힘썼다. 의창은 풍년기에 곡식을 미리 비축해 두었다가 흉년기에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구휼 제도였다. 정몽주는 의창을 전국적으로 설치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고, 이는 이후 조선 시대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민생 안정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후대 국가의 곡물 관리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29]

정몽주는 이색의 제자로서 정도전과 함께 공부했으나, 고려 왕조를 유지하며 점진적 개혁을 추구한 정몽주와 달리 정도전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역성혁명을 주장하면서 정치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학문적으로는 그의 제자인 권우가 훗날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또 다른 제자 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사림파 학맥의 시조가 되어 그의 성리학 사상이 조선 시대 내내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29]

4. 평가와 논란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평가받는 정몽주이지만, 그의 사후 평가는 시대 상황과 정치적 필요에 따라 변화해왔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한때 역적으로 간주되기도 했으나, 1401년 태종에 의해 복권되어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고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25] 이는 태종 이방원이 과거 자신이 제거했던 정몽주를 끌어안음으로써 왕조의 정당성과 포용성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세종대왕은 왕자 시절 정몽주의 문하생이었던 권우에게 직접 학문을 배우기도 했으며, 즉위 후 편찬한 《삼강행실도》 충신편에 그의 이야기를 수록하여 부왕 태종에 이어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더욱 부각시켰다.

이후 성종 대에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사림 세력은 자신들의 학문적 뿌리이자 성리학의 정통 계승자로서 정몽주를 더욱 높이 평가하고 추앙하는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중종 때 마침내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고,[26] 1555년(명종 10년)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임고서원이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개성 숭양서원(1573년), 용인 충렬서원(1576년), 영일 오천서원(1588년) 등 전국 13곳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특히 퇴계 이황은 임고서원 건립을 주도하며 직접 제문과 축문을 지어 정몽주의 높은 학문과 굳은 충절을 기렸다.

숙종 때에는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김수증이 글씨를 쓴 신도비(神道碑)가 1699년에 세워졌다. 학문적으로는 고려 말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고 후학 양성에 힘써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는 높은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우왕과 창왕 폐위에 가담한 문제,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 및 정도전조선 건국 세력과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사후 조선 왕조와 사림파에 의해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는 과정 등에서 비판적인 시각과 여러 논란 또한 존재한다.

4. 1. 긍정적 평가

정몽주는 사후 평가가 시대에 따라 변화한 인물이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한때 간신(姦臣)으로 규정되기도 했으나,[24] 불과 9년 뒤인 1401년에는 태종권근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에게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겸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이라는 최고위 관직을 추증했다. 이는 태종이 자신이 제거했던 인물을 복권시킴으로써 정치적 포용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23] 이후 왕조의 기틀이 안정되자 태종은 사대부와 백성들의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해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부각시켰다. 정몽주의 제자였던 권우에게 학문을 배운 세종대왕 시대에 이르러서는 성인(聖人)으로까지 추앙받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몽주의 충절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서울 마포구 양화대교 북단에는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충효(忠孝)의 귀감으로 국어 및 국사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물론 이후 교육과정 개편으로 그 비중은 다소 줄어들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정도전과 같은 다른 역사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정몽주가 과도하게 부각된 측면이 있다는 비판적 시각과 함께 재조명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는 그를 6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는 등[28], 오늘날까지도 그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정몽주는 고려 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선 학자 관료였다. 그는 《주자가례》를 기반으로 사회 윤리와 도덕 규범을 바로 세우고 의례 제도를 합리적으로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불교 중심의 고려 사회를 유교 이념에 기반한 정치 체제로 전환하려 시도했으며, 비록 그의 생전에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정도전 등 후대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어 조선 건국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교육에도 힘을 쏟아 길재, 이숭인, 권우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이들은 훗날 사림파의 학문적 연원을 형성하거나 조선 초기 학계와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학문적 업적과 영향력으로 인해 그는 후대에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는 높은 찬사를 받았다.

학문적 성취 외에도 정몽주는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지방관들의 부정부패를 근절하고자 노력했으며, 의창을 설치하여 빈민 구제에도 힘썼다. 불교의 폐단을 줄이고 유교적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해 개성에 5부 학당을,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하여 교육 진흥을 꾀했다. 또한 법질서 확립을 위해 중국의 법률인 《대명률》을 참고하여 고려의 실정에 맞는 새로운 법률, 《신율》(新律) 편찬을 주도하기도 했다. 외교와 국방 분야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1377년에는 직접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당시 규슈 지역의 실력자였던 이마가와 사다요(료슌)와 교섭하여 왜구 문제 해결을 시도했으며,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족 및 왜구 토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한때 그의 친구이자 동문이었던 정도전조차 정몽주를 '도덕의 으뜸'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처럼 정몽주는 기울어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학문, 정치, 외교, 국방 등 다방면에 걸쳐 헌신적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새로운 왕조를 열고자 했던 이성계 및 신흥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깊이와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정, 그리고 국가를 위한 개혁 노력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4. 2. 부정적 평가와 논란

1384년 과거 시험에서 부책임자인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았을 때, 우왕의 후궁 의비의 동생 노구산(盧龜山)이 2차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자 우왕이 분노하였다.[16] 당시 권력자였던 이성림(李成林)과 염흥방(廉興邦) 등이 개입하여 노구산을 다른 불합격자 10여 명과 함께 최종 시험에 응시하게 하여 결국 합격시켰다.[16] 무장 최영은 이러한 부정 행위를 비판했지만, 정몽주는 이를 묵인했다는 지적이 있다.[16] 그러나 《고려사》 열전에는 정몽주가 표절한 응시자를 내쫓는 등 올바르게 처결하려 했으나, 당시 지공거였던 염국보(廉國寶) 등 권력층이 이를 방해했다는 다른 기록도 존재한다.

또한 정몽주는 이성계, 정도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시키는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眞)' 논리에 동조하고 이를 실행하는 데 가담하였다.[19] 이는 이성계 일파가 정치적 필요에 의해 우왕창왕신돈의 자손으로 몰아 제거한 사건으로, 정몽주 역시 이들이 왕위에 오를 때는 문제 삼지 않았으나 폐위에는 동참한 것이다.[19] 이러한 행위는 그가 내세운 성리학적 충(忠) 사상이나 고려 왕조에 대한 일편단심과는 모순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34]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도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며,[17]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7] 이는 폐위된 우왕을 찾아가 눈물을 흘린 이색의 행보와는 대비되는 모습이다.[17] 그는 공양왕 옹립의 공으로 순충론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에 책록되기도 하였다.[20]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했던 정치적 행보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4. 2. 1. 성역화와 우상화 논란

정몽주 사후 조선태종은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하였다.[25] 세종대왕은 왕자 시절 정몽주의 문하생 권우에게서 배웠으며, 즉위 후에는 《삼강행실도》 충신편에 정몽주를 수록하여 부왕 태종에 이어 그를 충절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조선 초 간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정몽주는 태종 대에 이르러 충신으로 평가가 바뀌기 시작했다.[24] 성종 때 훈구파 견제를 위해 사림파가 등용되면서, 사림파는 자신들의 학문적 뿌리인 정몽주를 성균관 문묘에 모시려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성리학을 조선 유학의 정통으로 삼으려는 사림파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24] 세조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정몽주에 대한 성역화가 본격화되었다.[30]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청했고, 중종은 이를 받아들여 논의를 거쳐 결정하도록 했다.[26] 1509년 시강관 조광조가 다시 종사를 발의하고 기준(奇遵) 등이 지지했다. 조광조는 정몽주가 도학의 연원을 열었고, 그 학통이 길재김종직김굉필로 이어졌으며, 김굉필은 주자와 같은 위치에 올랐으므로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정여창, 김굉필, 성삼문, 박팽년 등의 종사도 함께 논의되었다.[26] 이에 대해 훈구파는 정몽주가 고려 말 우왕창왕을 섬겼다는 점을 들어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고 반박했으며,[24] 김굉필이나 정여창 등은 사림의 스승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일부 온건파 사림도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결국 여러 논란 끝에 정몽주만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중종 12년(1517년) 문묘에 종사되었다.[24] 그러나 사림파는 이후에도 스승들인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의 문묘 종사를 계속 추진했다. 일각에서는 정몽주의 문묘 종사가 실제로는 그의 문하이자 사림파의 직계 스승들을 종사시키기 위한 명분 쌓기였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한편 1511년에는 참찬관 이자의 건의로 중종이 예조 정랑 이순(李純)을 보내 정몽주의 묘를 수리하고 치제를 지내기도 했다.[27][26]

정몽주에 대한 추숭 사업은 계속 이어졌다. 1555년(명종 10년)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임고서원이 세워졌고, 이후 개성 숭양서원(1573년), 용인 충렬서원(1576년), 영일 오천서원 및 상주 도남서원(1588년), 울산 구강서원, 언양 반구서원 등 전국 13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특히 임고서원은 퇴계 이황의 주도로 그의 문인들인 김응생, 정윤량, 노수 등이 중심이 되어 창건되었으며, 이황은 직접 제문과 상향 축문을 지어 정몽주의 학문과 충절을 기렸다. 임고서원은 '포은집'을 간행하고, 입구에는 정몽주의 어머니 영천 이씨의 '백로가'와 정몽주의 '단심가' 시비를 세웠다.

숙종 때에는 송시열이 글을 짓고 김수증이 글씨를 쓴 신도비(神道碑)가 1699년에 세워졌다. 이처럼 정몽주는 조선 건국에 반대하였으나, 태종 이방원정도전 등을 폄하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를 현창하고 미화하여 이용한 측면이 있으며, 후일 사림파의 집권 이후에도 그들의 정치적, 학문적 선조로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몽주에 대한 현창과 성인화 작업은 계속 이어졌다.

5. 기타

정몽주

  • 가족 관계

구분관계이름비고
증조부정인수(鄭仁壽)
조부정유(鄭裕)
아버지정운관 (鄭云瓘)? - 1355년 음력 1월
어머니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영천 이씨
동생정과(鄭過)예조판서, ? - 1392년 음력 4월
동생정후(鄭厚)
동생정도(鄭蹈)
장인이사약판사사(判事士)
부인경순택주(敬順宅主) 경주 이씨(慶州李氏)? - 1392년 12월 12일
장남정종성(鄭宗誠)1374년 - 1442년
손자장남의 아들정보(鄭保)
손부장남의 며느리정부인(貞夫人) 죽산 박씨제학 박중용의 딸
증손녀장남의 손녀연일 정씨
증손녀 사위장남의 손녀사위이석형(李石亨)1415년 - 1477년
손녀장남의 딸순성군 부인 연일 정씨
차남정종본(鄭宗本)1377년 - 1443년


  • 시문과 서화

시문(詩文)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 외에 많은 한시(漢詩)가 전하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 '''우국시(憂國詩)'''

:: 千仞崗頭石逕橫 (천인강두석경횡) / 천길 바위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 登臨使我不勝情 (등림사아불승정) /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근심이여

:: 靑山隱約夫餘國 (청산은약부여국) /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서하던 부여국은

:: 黃葉檳紛百濟城 (황엽빈분백제성) / 누른 잎은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

:: 九月高風愁客子 (구월고풍수객자) / 구월의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이 짙은데

:: 百年豪氣誤書生 (백년오기오서생) / 백년기상 호탕함이 서생을 그르쳤네

:: 天涯日沒浮雲合 (천애일몰부운합) / 하늘가 해는 지고 뜬 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

:: 矯首無由望玉京 (교수무유망옥경) / 다리를 지나며 고개를 들어 하염없이 송도만 바라보네

:* '''춘흥(春興) : 봄의 흥취'''

:: 春雨細不滴 (춘우세부적) /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 夜中微有聲 (야중미유성) / 밤 깊어 희미하게 빗소리 들려라

:: 雪盡南溪漲 (설진남계창) / 눈 다 녹아 남쪽 개울에 물 불어날 것이니

:: 多少草芽生 (다소초아생) / 풀싹은 얼마나 돋았을까

  • 저서
  • 《포은집》(圃隱集)
  • 《포은시고》(圃隱詩藁) : 시문집, 아들 정종성과 동생 정도가 정리

  • 후손 관련 인물

이성계의 차남 정종의 다섯째 서자 선성군 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었다. 선성군의 부인은 정몽주의 손녀이자 정종성의 딸인 오천군 부인 연일 정씨이다.

또한 정종성의 서녀는 한명회의 첩이 되었는데, 한명회는 예종의 비 장순왕후성종의 비 공혜왕후의 아버지이다.

참조

[1] 웹사이트 연일 정씨(延日鄭氏) - 부산역사문화대전 http://busan.grandcu[...] 2022-08-06
[2] 문서 다른 이름은 정거민
[3] 서적 圃隱先生文集 (포은선생문집) http://db.itkc.or.kr[...] 2013-04-07
[4] 문서 또는 사은. 목은, 도은과 포은을 삼은이라 하나 이숭인을 포함하여 사은으로도 부른다.
[5] 문서 그의 수문하시중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직책은 사후 아들 정몽주의 출세로 증직된 것이다.
[6] 웹인용 신진사대부 (新進士大夫) http://mtcha.com.ne.[...] 2014-02-20
[7] 서적 고시조 산책:2003 국학자료원
[8] 문서 영천이씨의 백로가는 구전으로 전하다가 후일 정몽주를 배향한 임고서원 입구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9]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0] 문서 고려 후기의 문과는 초장, 중장, 종장의 3단계로 구성되었다.
[11] 웹사이트 정몽주 : 네이트 한국학 http://koreandb.nate[...]
[12] 웹사이트 정몽주:daum http://enc.daum.net/[...]
[13] 서적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14] 뉴스 문학의 숲…/ 몸의 자유, 마음의 자유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5] 서적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16] 서적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17] 서적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8] 서적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19] 서적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 서적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21] 문서 좌명공신은 국왕의 즉위를 도운 신하에게 내리는 공신호이다.
[22] 문서 정몽주를 살해한 공로로 공신에 책록되었다. 태종실록 1402-10-16
[23] 서적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24] 뉴스 조선선비들의 死後 청문회, 문묘종사논쟁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10-04-15
[25] 문서 이후 그는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하고, 조선의 건국에 참여한 정도전은 무도한 인물로 격하시켰다.
[26]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7]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8] 웹사이트 http://news.chosun.c[...]
[29] 문서 이때 만들어진 법령은 조선 건국 후에도 정도전에 의해 채택되어 계속 유지된다.
[30] 문서 그의 손자 정보는 세조의 반정에 반대하였으나 정몽주의 손자라는 이유로 목숨을 구했다.
[31]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32] 웹인용 선죽교의 핏자국은 정말 있는가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6-03-03
[33] 웹인용 치밀한 고증으로 고려 황도의 전설을 넘어서다 http://www.incheonil[...] 인천일보 2013-09-24
[34] 서적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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