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시타 도시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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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노시타 도시후는 1573년 기노시타 이에사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와카사 다카하마 2만 석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시기에는 히젠 나고야성에 주둔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하여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여 1615년 빗추 아시모리 번의 다이묘로 복직했다. 1637년에 65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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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시타 가쓰토시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가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처벌을 받았고, 이후 교토에서 가인으로 활동하며 고미즈노오 천황에게 인정받고 고보리 마사카즈, 다테 마사무네 등과 교류하며 와카 작품을 남겼다. - 1573년 출생 - 도이 도시카쓰
도이 도시카쓰는 에도 막부 초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쓰 3대 쇼군을 섬기며 막부의 정치, 행정, 재정 등 여러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막번 체제 확립과 외교, 통화 제도 개혁에 기여했으나, 후반에는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된 인물이다. - 1573년 출생 - 시몬 마리우스
시몬 마리우스는 독일의 천문학자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별개로 목성의 주요 위성들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으며, 안드로메다 은하를 관측하는 등 업적을 남겼으나, 우주 구조에 대한 견해는 지동설을 지지하지 않았다. - 기노시타씨 - 도요토미 히데나가
도요토미 히데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복형으로, 뛰어난 행정 능력과 온화한 성품으로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에 공헌한 무장이자 다이묘이며, 오다 노부나가 시대부터 형을 보좌하여 다수의 전투에 참여했고, 야마토 116만 석의 대다이묘이자 종이위 다이나곤까지 승진했으나, 통솔력과 정치적 능력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 기노시타씨 - 요도도노
요도도노는 아자이 나가마사와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 사이에서 태어난 아자이 삼자매의 맏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았으며,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도요토미 가문의 실권을 장악하고 도쿠가와 막부와 대립하다 오사카 전투에서 패배하여 히데요리와 함께 자결한 인물이다.
기노시타 도시후사 | |
---|---|
기본 정보 | |
씨명 | 기노시타 씨(스기하라 씨) |
씨족 | 기노시타 씨(스기하라 씨) |
이름 | 기노시타 도시후사 |
이명 | 가쓰요시(초명), 도시후사 |
별명 | 가쓰요시 (가쓰후지), 유이슌 |
통칭 | 미야우치쇼유, 기노시타 미야우치 |
시호 | 엔토쿠인덴 한코규오 거사 |
묘소 | 고다이지엔도쿠인(교토시히가시야마구) |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생년 | 덴쇼 원년 (1573년) |
사망일 | 간에이 14년 6월 21일 (1637년 8월 11일) |
관위 | 종5위하미야우치쇼유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이에미쓰 |
번 | 비추아시모리 번 번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기노시타 이에사다 |
어머니 | 운쇼인(스기하라 이에쓰구 딸) |
형제 | 가쓰토시, 도시후사, 노부토시, 도시사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도시타다, 히데노리, 슈난 쇼슈쿠 |
정실 | 오다 노부카네 딸 |
계실 | 신도 마사쓰구 딸 |
자녀 | 도시마사, 도시쓰구 |
양자 | 도시후루 |
추가 정보 | |
특기 사항 | 차남 도시쓰구는 고다이인의 양자가 되어 막부에서 인정받은 제2 도요토미 씨의 후계자이다. |
2. 생애
1573년 기노시타 이에사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와카사 다카하마 2만 석을 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해 다이쇼지 성에 원군을 보냈다가 영지를 몰수당했다.
아버지 사후 유산 상속 문제로 형 가쓰토시와 다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유산을 몰수당했다.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1615년 빗추 아시모리 번 2만 5천 석 다이묘로 복직, 1637년 사망했다.
2. 1. 출생과 초기 이력
1573년 기노시타 이에사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와카사 다케다 씨의 당주 다케다 모토아키와 정실 교고쿠 다쓰코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다.[3] 친척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와카사 다카하마 2만 석을 받았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히젠 나고야성에 주둔하였다.[4] 1594년 기노시타 가쓰토시에게 오바마 성 6만 2천 석이 주어졌을 때, 도시후사에게도 인접한 다카하마 2만 석이 주어졌으며,[4] 1596년에는 영지가 3만 석으로 증가하였다.[4]2. 2. 세키가하라 전투와 개역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하여 다이쇼지 성을 공격하던 동군 측에 원군을 보냈다.[5] 그 책임으로 영지를 몰수당했다.[3]형 기노시타 가쓰토시는 동군에 속했으나, 후시미 성 전투에서 도리이 모토타다에게 퇴거를 명령받고 물러난 일 때문에 전후 적전 도주로 간주되어 영지를 몰수당했다. 형제는 아버지 기노시타 이에사다를 의지하여 빗추 아시모리로 피신했다.
2. 3. 유산 상속 분쟁과 오사카 전투
1608년 아버지 기노시타 이에사다가 사망하자, 기노시타 도시후사는 형 가쓰토시와 빗추 아시모리 번 2만 5천 석의 유산 상속을 두고 다투었다.[3]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분쟁에 개입하여 유산을 모두 몰수하는 결정을 내렸다.[3]이후 오사카 전투가 발발하자, 도시후사는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와의 교섭에 나서려던 고다이인을 제지하기 위해, 에도 막부에 의해 호위라는 명목으로 감시역에 붙여졌다는 기록이 있다.
오사카 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1615년 빗추 아시모리 번 2만 5천 석의 다이묘로 복직하였다.[3]
2. 4. 만년
1637년 6월 21일 65세로 사망하였다.[3] 법명은 한코큐오(範虎久翁)이다.3. 가족 관계
아버지 | 기노시타 이에사다 |
---|---|
어머니 | 운쇼인 (스기하라 이에쓰구의 딸) |
정실 | 오다 노부카네의 딸 (이혼) |
계실 | 신도 마사쓰구의 딸 |
장남 | 기노시타 도시마사 |
차남 | 기노시타 도시쓰구 |
양자 | 기노시타 도시히사 (신도 마사쓰구의 손자) |
참조
[1]
웹사이트
福井県史
http://www.archives.[...]
福井県
[2]
문서
木下勝俊 (足守藩主)
[3]
서적
寛政重修諸家譜
[4]
서적
木下家譜
[5]
간행물
史料綜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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