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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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히데요시 사후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잠재적 위협으로 여겨졌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견제하며 갈등을 빚었고, 호코지 종명 사건을 계기로 오사카 전투가 발발했다. 오사카 겨울 전투와 여름 전투에서 도요토미군은 패배했고,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에서 자결하며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다. 그는 구게풍 교육을 받았으며, 예술적 재능이 있었고, 관련 문화 작품으로 소설과 드라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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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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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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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도요토미 히데요리 |
원어 이름 | 豊臣 秀頼/羽柴 秀頼 |
출생 | 1593년 8월 29일 |
사망 | 1615년 6월 4일 |
출생지 | 불명 |
사망지 | 오사카성 |
묘소 | 교토시히가시야마구 요겐인 교토시 우쿄구 세이료지 고야산 오쿠노인 가고시마시다니야마 묘소 |
어린 시절 이름 | 히로이마루(拾丸) |
별명 | 후지키치로(藤吉郎) |
계명 | 기쟈쿠산 고요지덴 슈산 다이코지(帰寂山高陽寺殿秀山大居士) |
가문 | 도요토미 씨 |
관위 | 종3위 사콘에곤노주조(従三位左近衛権中将) 종2위 곤주나곤(従二位権中納言) 곤다이나곤(権大納言) 정2위(正二位) 나이다이진(内大臣) 우다이진(右大臣) |
가몬 | Goshichi no kiri.svg (오동나무 가몬) |
가계 | |
아버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어머니 | 요도도노(아자이 나가마사의 장녀) |
의붓아버지 | 도쿠가와 히데타다 |
형제 | 이시마쓰마루 쓰루마쓰 히데요리 |
배우자 | 정실: 센히메(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측실: 와키노카타(伊茶, 와타나베 고헤의 딸), 고이시노카타(成田助直의 딸) |
자녀 | 구니마쓰 텐슈니 도요토미 모토마루 도요토미 도키마루 |
정치 및 군사 활동 | |
소속 | 도요토미 씨 |
직책 | 도요토미 씨 제2대 당주 |
임기 시작 | 1598년 |
임기 종료 | 1615년 |
전임자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후임자 | (단절) |
지휘 부대 | 오사카성 |
주요 전투 | 오사카 전투 (1614-1615)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도쿠가와 히데타다(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외조부) 도요토미 히데나가(숙부) 도요토미 히데쓰구(사촌) 네네(계모) 아자이 나가마사(외조부) 오이치(외조모) 오하쓰(이모) 오에요(이모) |
2. 생애
1593년 히데요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히데요리의 탄생은 잠재적인 계승 문제를 야기했고, 히데요시는 조카이자 후계자였던 히데쓰구를 고야산으로 유배 보낸 후 1595년 8월에 자결을 명령했다.[1] 히데쓰구의 가족들은 교토에서 살해되었는데, 여기에는 31명의 여성과 여러 아이들,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도 포함되었다. 히데요시는 히데쓰구의 측실이 되려던, 남편을 만나지도 못한 요시아키의 딸의 목숨조차 구하지 않았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히데요리 대신 통치하도록 임명된 5명의 섭정들은 서로 권력을 다투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다른 섭정들을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했다.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7살 손녀인 센히메의 정략결혼은 도요토미 가문의 불화와 음모를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2] 이 시기에 여덟 살 소년이었던 히데요리는 온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는 글씨를 연습했다.[3]
14년 후,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에 거주하는 젊은 다이묘가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이자 정당한 후계자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젊은 히데요리를 잠재적인 위협으로 계속 여겼다. 이에야스에 반대하는 많은 사무라이들이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그가 일본의 정당한 통치자라고 주장했다.
2. 1. 탄생과 성장
히데요시는 불임으로 고생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서 잡아온 호랑이의 음경을 히데요시에게 보냈고, 히데요시는 이것을 먹었다. 분로쿠 2년(1593년) 히데요시의 나이 57세 때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히데요시의 측실이자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내였고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이치의 장녀 차차였다. 유모는 구나이쿄노 쓰보네(宮内卿局), 우쿄다이부노 쓰보네(右京大夫局)[32] 및 쇼에이니(正栄尼)였으며, 친어머니 차차의 유모인 오쿠라쿄노 쓰보네(大蔵卿局)의 보살핌도 받았다.히데요리가 태어났을 당시, 히데요시의 누나 닛슈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간파쿠 자리에 있었다. 히데요시는 히데쓰구를 회유하고자 히데요리 생후 2개월째인 분로쿠 2년 10월, 히데쓰구의 딸과 히데요리의 혼약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로쿠 4년(1595년) 7월, 히데쓰구를 할복시키고 그의 처자 또한 몰살, 다수의 다이묘에게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판 서약서를 강요하여 히데요리의 후계자 지위를 확립시켰다. 이후 후시미성이 완공되자 부자가 함께 거처를 옮겼다.
게이초 원년(1596년) 9월, 히데요리는 관례를 치르고 '''히데요리'''(秀頼)로 개명하였다. 히데요시는 고다이로(五大老), 고부교(五奉行) 제도를 도입,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체제를 수립했다. 게이초 3년(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히데요리가 그의 뒤를 이었고, 오사카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히데요시 사후, 고다이로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신 합의제 원칙을 어기고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갈등이 커졌다.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고, 고부교이자 친 도요토미파인 이시다 미쓰나리가 실각하면서 이에야스가 어린 히데요리를 제치고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2. 1.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이 맞는가?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서 잡아온 호랑이의 음경을 먹고 1593년에 57세의 나이로 히데요리를 얻었다.[32] 그러나 히데요시는 키가 약 140cm에 원숭이 같은 얼굴이었던 반면, 히데요리는 키가 약 197cm에 돼지 같은 얼굴이었기 때문에,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친아들이 아니라 요도도노의 사생아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 요도도노를 비롯해 외조부 아자이 나가마사, 외조모 이치가 모두 장신이었으므로, 히데요리와의 체격 차이가 반드시 그가 히데요시의 친자가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다.2. 2.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갈등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사후, 중신 합의제 원칙을 어기고 영향력을 행사하여 히데요리와 갈등이 증폭되었다.[32]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데요리는 셋쓰, 가와치, 이즈미를 다스리는 65만 석의 일개 다이묘로 전락했다. 이시미 은산, 오이누마 은산 등 도요토미 가문의 주요 재원은 이에야스의 직할령이 되었고, 나가사키, 사카이에도 이에야스의 가신이 임명되었다.[9][10]게이초 8년(1603년), 이에야스는 정이대장군에 취임하고 에도 성 보수 공사를 실시하며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 히데요리는 점차 권력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히데요리는 히데타다의 딸 센히메와 결혼하고, 조정으로부터 예우를 받는 등, 도쿠가와 가문과 어느 정도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9][10]
게이초 10년(1605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신하의 예를 요구했으나, 히데요리의 생모 요도도노는 이를 거절했다. 게이초 16년(1611년), 니조 성에서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회견이 이루어졌으나, 이 회견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13]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건립한 호코지 개원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오사카 성을 떠날 것을 요구했지만, 히데요리 측은 이를 거부했고, 1614년 오사카 성 포위로 이어졌다.
2. 3.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5년(1600년) 이시다 미쓰나리를 필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군사를 일으켜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였다. 이때 히데요리는 고다이로의 일원이자 서군의 총대장으로 옹립된 모리 데루모토의 비호 아래 있었으며, 히데요리의 친위대인 나나테구미(七手組)의 일부 또한 서군에 참가하여 사실상 미쓰나리의 서군 편에 속하였다. 전투는 이에야스의 동군 승리로 끝났으나, 명분상 서군과 동군 모두 "히데요리 공을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음을 천명하였으므로 히데요리는 이에야스를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물로 치하하며 위로하였다. 그러나 전후 처리에서 이에야스는 셋쓰, 가와치, 이즈미 직할령을 제외하고 각 다이묘와 가신이 운영하던 도요토미 종가 영지[33]를 마음대로 분리, 분배하였다. 이로써 히데요리는 일본 전국에 퍼져 있던 220만 석 대영주에서 65만 석 일개 다이묘로 전락하였다.[34]2. 4. 오사카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건립한 호코지(교토 대불)의 개원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는 마치 이에야스의 죽음과 도쿠가와 가문의 몰락을 기원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오사카성을 떠날 것을 명령했지만, 성 안의 사람들은 이를 거부하고 사무라이들을 소집하여 성 안에 모였다. 그 후 1614년, 도쿠가와 측은 히데요리에 맞서 오사카 성을 포위했다.[4]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지휘 아래 도쿠가와 측은 1614년 겨울,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히데요리를 공격했다. 공격은 실패했지만, 히데요리는 휴전에 서명하고 오사카성의 방어 시설을 해체하도록 유도되었다. 1615년 4월,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이전보다 더 많은 군대를 모으고 있으며 오사카성 해자를 메우는 것을 막으려 한다는 소식을 받았다. 도요토미군은 오사카 근처의 쇼군군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1615년 6월 5일, 도쿠가와군은 "오사카 여름 전투"를 개시, 오사카성을 공격했다. 도요토미군이 패배하기 시작하자 히데요리가 직접 이끄는 소규모 부대가 오사카성에서 너무 늦게 돌격했고, 진격하는 적에게 쫓겨 성으로 돌아왔다. 성을 제대로 방어할 시간이 없었고, 곧 성은 불타고 포격을 받았다.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는 할복했고, 도쿠가와 지배에 대한 마지막 주요 반란은 약 250년 동안 종식되었다.
제임스 머독(James Murdoch)의 저서 『초기 외교 시대의 일본사』에 따르면,[4] 사나다 유키무라는 오사카 성 외곽 결전의 전술가였다. 수적으로 열세임을 인지한 그들은 도쿠가와 진영에 기습과 혼란을 유발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먼저 오사카 성의 지휘관 아카시 모리시게가 도쿠가와 선봉대의 후방으로 이동하여 기습 공격을 가하고, 도쿠가와군이 아카시에게 집중하는 사이 사나다 유키무라와 그의 부대, 그리고 오사카의 로닌들을 지휘하는 모리 가츠나가가 도쿠가와군 전면에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혼란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에서 친위 부대를 이끌고 나와 도쿠가와군에게 마지막 타격을 가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카시는 도쿠가와군의 후방으로 이동하기 전에 발각되었고, 전투를 갈망하던 모리의 로닌들이 사나다 유키무라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도쿠가와군에게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로닌들에게 사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사격을 강화했다. 모리 가츠나가는 로닌들의 적극성을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을 전방으로 진격시켰다. 이에 사나다 유키무라는 원래 계획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도 로닌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가츠나가의 부대와 함께 도쿠가와군에게 돌격했으며, 히데요리에게 계획보다 빨리 출격하라는 사자를 보냈다.
히데요리는 부대를 이끌고 오사카 성을 나섰다. 한편, 오사카군은 수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전하고 있었다. 머독의 책에는 이 사건에 대한 선교사의 편지 내용을 인용하여, 오사카군의 공격이 실제로 매우 성공적이었고 도쿠가와군을 곧바로 후퇴시켰다고 언급되어 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이에야스 자신이 승리가 눈앞에 보이면 자신을 죽이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머독은 다른 기록을 인용하여 이에야스가 승리가 불확실해지자 할복을 고려했었다고 말한다.
지볼트(Siebold)에 따르면, 히데요리가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오사카 성을 나서는 긴박한 순간, 이에야스는 도쿠가와측 인질이었던 오사카 성의 지휘관 오노 하루나가의 아들을 오사카 성으로 보냈다. 오노 하루나가의 아들은 성에 들어가 이에야스의 편지를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편지에는 "히데요리가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라. 성 안에 음모가 있고, 히데요리가 성을 나가는 순간 후방에서 공격을 받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지볼트에 따르면, 이 편지 때문에 히데요리의 계획이 실패했다. 그는 출격하려는 순간 편지 내용을 전해 듣고 출격을 멈추었다.
결국 오사카군의 맹렬한 공격과 초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군의 수적 우세는 너무 컸다. 일본전사(Nihon Senshi)에 따르면, 히데요리는 로닌들의 패배 소식을 듣고 "나는 오랫동안 죽음을 각오해 왔다"라고 말하고,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 위해 성에서 나서려고 했지만, 그의 부장 중 한 명인 하야미가 "최고 사령관이 혼란 속에서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라며 만류했다.
그리고 혼란 속에서 히데요리는 후퇴했다. 성에 불이 붙었고 혼란이 극에 달했다. 히데요리, 그의 아내(쇼군의 딸이자 이에야스의 손녀), 그리고 그의 어머니 요도기미는 성 안의 방화벽이 있는 건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히데요리의 아내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히데요리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머독에 따르면, 그녀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도착했을 때, 그는 차갑게 "왜 남편과 함께 죽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동정심을 가장하여 도쿠가와의 부장 이이(Ii)와 안도(Ando)에게 히데요리의 안전한 퇴거를 맡겼다.
그러나 히데요리는 어머니와 함께 방화벽이 있는 건물에 남아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에게 사자를 보내고 답변을 기다렸다. 아무런 답변도 없었고, 이이와 안도의 부대가 그 건물에 공격을 가하자, 히데요리는 할복 자살을 했고, 그 건물은 파괴되었다. 이이는 히데요리의 안전한 퇴거를 책임졌지만, 얼마 후 이에야스에게 보고하면서 명령을 어겼다고 말하고 처벌을 요청했는데, 머독의 책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이는 이에야스의 곁을 떠났다. 몇 주 후 이이는 오미(Omi) 히코네(Hikone)의 석고(koku) 수입이 증가했다.
오사카 전투의 계기가 된 호코지 종명 사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원한 호코지 대불(교토의 대불)의 재건 과정에서 발생했다. 히데요시의 칼 사냥으로 모은 도검류를 "국토 안전 만민 쾌락"을 내걸고 재료로 사용된 호코지 대불 및 대불전은 도요토미 가문을 상징하는 존재였고, 멸실 후 도요토미 가문의 위신 회복을 위해 1607년 히데요리에 의해 재건이 계획되었다.
대불전 재건 공사는 1610년 8월 22일부터 행해졌고,[14] 1612년 1월 29일부터 지붕 기와를 잇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1612년 중에 대불전은 거의 완성되었고, 공사 착공부터 2년도 채 되지 않는다는 이례적인 속도로 재건이 완료되었다. 호코지 대불·대불전의 재건 공사는 도요토미 가문의 단독 사업이 아니라,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공동 사업이었다는 설도 있다.
1614년 호코지 종명 사건을 구실로 히데요리와 결렬, 오사카 겨울 전투가 발발한다. 히데요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도요토미 가문의 은혜를 입은 다이묘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오사카 측에 가담한 다이묘는 없었다.[15] 오사카 성에는 사나다 마사유키, 고토 모토쓰구 등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개역된 전 다이묘나 로닌 등 수만 명의 무사가 입성했다.
오사카 겨울 전투 초반, 기즈가와구치 전투, 하쿠로부치 전투 등 오사카 성 주변 요새가 함락되고, 노다·후쿠시마 전투에서도 패배한다. 이마후쿠 전투, 시기노 전투에서도 패배했지만, 사타케 요시노부 군을 일시적으로 몰아붙이는 저항을 보였다. 오사카 성 전투에서는 낭인들의 활약과 방어력으로 막부군은 고전했고, 사나다마루 전투에서는 막부 측이 피해를 입었다.
결국 양측 모두 식량과 탄약이 바닥나자, 이에야스는 화의를 제안, 오사카 성 해자 파괴를 조건으로 체결되었다. 막부는 공사를 진행하여 해자를 메웠고 성곽 일부도 파괴했다. 오사카 측은 항의했지만, 막부는 본마루를 남기고 해자를 모두 메웠다.
1615년, 오사카 측은 낭인 추방과 오사카성 철거를 거부하고 해자를 파기 시작, 이에야스는 화의 파기 및 전쟁 재개를 선포, 오사카 여름 전투가 발발한다. 오노 하루후사가 야마토코리아마시에 출격, 제압·약탈하고 귀환했다. 오사카 측은 阪南에서 북상하는 막부 군대를 좁은 지역에서 맞서 격퇴하고자 야오 지방으로 진군, 야오·와카에 전투, 도메이지 전투에서 조소카베 모리치카가 후지 도도 다카토라 군을 궤멸시켰다. 그러나 기무라 시게나리, 고토 모토쓰구가 전사, 철수했다. 오노 하루후사 등은 아사노 나가아키라 토벌을 위해 기이국에 출격, 가시이 전투에서 반 나오유키가 패배, 귀성했다.
패전이 계속되자 오사카 측은 이에야스·도쿠가와 히데타다 부자가 오사카에 포진한 곳에 결전을 걸었다. 덴노지·오카야마 전투이다. 오카야마 지방에서는 오노 하루후사가 히데타다 본진에 접근했지만, 막부 대군에 철수했다. 덴노지 지방에는 사나다 유키무라, 모리 가쓰나가 등이 포진, 사나다 유키무라는 이에야스 본진에 접근, 여러 차례 돌격을 감행, 이에야스에게 자결을 각오하게 할 정도였지만, 사나다 유키무라는 후퇴 중 전사했다.
2. 4. 1. 오사카 겨울 전투
게이초 19년(1614년), 호코지(方廣寺) 종명(鐘銘) 사건을 계기로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이 결별하면서 오사카 겨울 전투가 발발하였다.
이때 히데요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요시아키라 등 도요토미 가문의 휘하에서 싸우며 은혜를 입은 전적이 있는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격문을 날렸으나 도요토미 측에 가담하는 다이묘는 거의 없었다. 반면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개역(改易)을 당하여 다이묘의 지위를 상실한 사나다 노부시게, 고토 모토쓰구, 조소카베 모리치카, 모리 가쓰나가, 아카시 다케노리(明石全登) 등과 그 외에도 주군이 서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개역당하면서 낭인이 된 수만 명의 무사들은 도요토미의 격문에 반응하여 곧장 오사카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들 낭인들은 사기가 매우 높았던 데 반해 오합지졸로 통제가 어려웠고, 낭인 무리와 오노 하루나가 및 요도도노 측이 전투의 마지막까지 서로 대립하여 갈등을 빚었다. 전술에 있어서도 사나다 노부시게 등은 교토로 진격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하루나가 등의 반대로 결국 오사카 성에서 농성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전쟁 초반, 기쓰가와구치 전투(木津川口の戦い), 바쿠로부치 전투(博労淵の戦い) 등에서 도쿠가와군에게 연패한 도요토미군은 노다・후쿠시마 수상전투(野田・福島の戦い) 및 이마후쿠 전투(今福の戦い), 시기노 전투(鴫野の戦い) 등에서도 패배하여 결국 남은 주변 성채를 모두 버리고 오사카 본성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오사카 성에서의 전투에서는 도쿠가와군이 도요토미 측 낭인들의 활약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격퇴당하면서 성내 진입이 좌절되었고, 특히 사나다마루 전투(:ja:真田丸の戦い) 때에는 도쿠가와 측이 큰 손해를 입었다. 이에 도쿠가와군은 전술을 바꾸어 심리적인 압박감을 줄 의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사카 성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윽고 도요토미 측과 도쿠가와 측 양쪽이 식량과 탄약이 고갈되면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 측에 화친을 제의하였다. 당초 히데요리는 이에 반대하였으나 요도도노 등의 설득으로 결국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운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받아들였다.[35]
2. 4. 2. 오사카 여름 전투
화의는 맺어졌으나 도쿠가와 측은 도요토미 측이 스스로 요건을 이행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해자를 메웠으며 성곽의 일부도 파괴하였다. 이에 도요토미 측이 크게 항의하였으나 도쿠가와 측은 이를 일축하고 오히려 낭인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영지의 일부를 교환할 것을 도요토미 측에 요구하였다. 결국 이듬해인 게이초 20년(1615년) 도요토미 측이 도쿠가와 측의 요구를 모두 거부하고 해자를 도로 파내면서 이에야스는 전쟁의 재개를 선포, 오사카 여름 전투가 발발하였다.도요토미 측 장수인 오노 하루후사가 야마토 코리야마 성(大和郡山城)으로 출격하여 제압, 약탈을 벌이고 되돌아온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도요토미 측은 한난(阪南, 오사카 남서부)으로부터 오사카 쪽으로 북상하고 있던 도쿠가와의 대군을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군대로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좁은 지역인 야오(八尾)로 진군하였다. 결국 야오와 와카에(若江), 도묘지(道明寺)에서의 전투에서 조소카베 모리치카 휘하의 도요토미군은 도도 다카토라 휘하의 도쿠가와군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요 장수인 기무라 시게나리, 고토 모토쓰구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도요토미군 또한 타격을 입었다. 또한 오노 하루후사 등이 출정한 기슈(紀州)에서의 가시이 전투(樫井の戦い)에서 선봉인 반 나오유키의 도요토미군이 아사노 나가아키라의 도쿠가와군에게 패퇴하고 나오유키 또한 전사하면서 도요토미군은 후퇴하여 오사카 성으로 물러났다.

잇따른 패전으로 전력을 잃고 피폐해진 도요토미 측은 도쿠가와의 수장인 이에야스, 히데타다가 오사카에 포진한 때를 노려 최종 결전을 다짐하였다. 이 때 사나다 노부시게가 도요토미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총대장인 히데요리가 직접 전선에 나와 군사들을 독려할 것을 히데요리에게 촉구하였으나, 전장이 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한 요도도노의 완강한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요도도노 본인은 자주 전선을 방문하였다.
같은 해 5월 7일 도요토미 측의 모리 가쓰나가 부대가 도쿠가와 측의 혼다 다다노부 부대를 사격한 것을 시작으로 오사카 전투의 마지막 전투인 덴노지·오카야마 전투(天王寺・岡山の戦い)가 발발하였다. 순식간에 전투가 모든 전선에 파급되어 전장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오노 하루후사의 도요토미군이 오카야마구치(岡山口)의 히데타다 본진으로 돌진하였으나 이는 저지되었다. 반면 덴노지 방면에 포진한 사나다 노부시게, 모리 가쓰나가의 군은 차례 차례 도쿠가와 측을 무너뜨려 한 때 이에야스가 자결을 각오할 정도로 도쿠가와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특히 사나다 노부시게는 적과 아군 양 쪽에서 「일본 제일의 용사(日本一の兵)」로 칭송받았을 만큼 여러 차례 장렬한 돌진을 감행하며 분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에야스에게 미치지 못한 노부시게는 퇴각 중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고, 다른 도요토미군도 서서히 괴멸되었다.
2. 5.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도쿠가와 군이 오사카 성에 입성하면서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본성을 버리고 야마자토마루(山里丸)로 피신하였으나 곧이어 도쿠가와군에 포위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때 오노 하루나가가 센히메의 신병을 넘기는 조건으로 히데요리 모자의 목숨을 보전해 줄 것을 도쿠가와 측에 탄원하였다고 하나 진위는 불분명하다. 히데요리는 야마자토마루에서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하였다.[4]
묘소는 교토 히가시야마 구의 요겐인(養源院)이다. 그 밖에 오사카 도요쿠니 신사(豊国神社)에서도 부친 히데요시, 숙부인 히데나가와 함께 히데요리 또한 신으로 모시고 있다.
1980년 오사카 성의 산노마루(三ノ丸) 철거지에서 히데요리로 추측되는 유골이 교토 세이료지(清凉寺)에 안치되었으나 실제 히데요리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측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는 몸을 숨겼으나 도쿠가와군에 발각되어 살해되었다. 딸 나아히메 역시 처형당할 처지에 놓였으나 센히메의 양녀가 되어 불문에 귀의하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진 뒤 1645년 후사 없이 병사하였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지휘 아래 1614년 겨울, "겨울의 오사카 전투"로 알려진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리를 공격했다. 공격은 실패했지만, 히데요리는 휴전에 서명하고 오사카성의 방어 시설을 해체하도록 유도되었다.
1615년 4월,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이전 11월보다 더 많은 군대를 모으고 있으며 오사카성 해자를 메우는 것을 막으려 한다는 소식을 받았다. 도요토미군은 오사카 근처의 쇼군(쇼군)군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615년 6월 5일, 도쿠가와군은 오사카성을 공격했는데, 이는 "여름의 오사카 전투"로 알려져 있다. 도요토미군이 패배하기 시작하자 히데요리가 직접 이끄는 소규모 부대가 오사카성에서 너무 늦게 돌격했고, 진격하는 적에게 쫓겨 성으로 돌아왔다. 성을 제대로 방어할 시간이 없었고, 곧 성은 불타고 포격을 받았다.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는 할복했고, 도쿠가와 지배에 대한 마지막 주요 반란은 약 250년 동안 종식되었다. 그의 미망인은 재혼했지만 나중에 불교 비구니가 되었다.
제임스 머독(James Murdoch)의 저서 『초기 외교 시대의 일본사』(A History of Japan During The Century of Early Foreign Discourse)에 따르면, 다수의 일본 자료(일본서기(Nihon Shoki), 미요시기(Miyoshi-Ki) 등)와 예수회 선교사들의 연례 보고서,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의 서신, 애덤스의 네덜란드 동료들의 일기 등을 바탕으로 히데요리의 죽음과 오사카 성 함락 과정은 다음과 같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오사카 성 외곽 결전의 전술가였다. 수적으로 열세임을 인지한 그들은 도쿠가와 진영에 기습과 혼란을 유발하는 전략을 시도하기로 했다. 먼저 오사카 성의 지휘관 아카시 모리시게(Akashi Morishige)가 도쿠가와 선봉대의 후방으로 이동하여 기습 공격을 가하고, 도쿠가와군이 아카시에게 집중하는 사이 사나다와 그의 부대, 그리고 오사카의 로닌(浪人)들을 지휘하는 모리 가츠나가(Mōri Katsunaga)가 도쿠가와군 전면에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혼란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에서 친위 부대를 이끌고 나와 도쿠가와군에게 마지막 타격을 가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머독에 따르면, 아카시는 도쿠가와군의 후방으로 이동하기 전에 발각되어 교전을 벌이게 되면서 계획은 실패했다. 전투를 갈망하던 모리의 로닌(浪人)들이 사나다(전투의 전술가이자 지휘관이기도 했다)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도쿠가와군에게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나다는 로닌(浪人)들에게 사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사격을 강화했다. 모리 가츠나가는 로닌(浪人)들의 적극성을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을 전방으로 진격시켰다. 이에 사나다는 원래 계획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도 로닌(浪人)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가츠나가의 부대와 함께 도쿠가와군에게 돌격했으며, 히데요리에게 계획보다 빨리 출격하라는 사자를 보냈다.
히데요리는 부대를 이끌고 오사카 성을 나섰다. 한편, 오사카군은 수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전하고 있었다. 머독의 책에는 이 사건에 대한 선교사의 편지 내용(당시 오사카 성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있었다)을 인용하여, 오사카군의 공격이 실제로 매우 성공적이었고 도쿠가와군을 곧바로 후퇴시켰다고 언급되어 있다. 도쿠가와군의 혼란을 야기하려는 계획이 성공했고,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중앙군의 최종 지원군으로 참전한 이에야스 자신이 승리가 눈앞에 보이면 자신을 죽이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뿐만 아니라, 머독은 다른 기록을 인용하여 이에야스가 승리가 불확실해지자 할복을 고려했었다고 말한다.
지볼트(Siebold)에 따르면, 히데요리가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오사카 성을 나서는 긴박한 순간, 이에야스는 도쿠가와측 인질이었던 오사카 성의 지휘관 오노 하루나가(Ōno Harunaga)의 아들을 오사카 성으로 보냈다. 오노 하루나가의 아들은 성에 들어가 이에야스의 편지를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편지에는 "히데요리가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라. 성 안에 음모가 있고, 히데요리가 성을 나가는 순간 후방에서 공격을 받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지볼트에 따르면, 이 편지 때문에 히데요리의 계획이 실패했다. 그는 출격하려는 순간 편지 내용을 전해 듣고 출격을 멈추었다.
결국 오사카군의 맹렬한 공격과 초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군의 수적 우세는 너무 컸다. 일본전사(Nihon Senshi)에 따르면, 히데요리는 로닌(浪人)들의 패배 소식을 듣고 "나는 오랫동안 죽음을 각오해 왔다"라고 말하고,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 위해 성에서 나서려고 했지만, 그의 7명의 부장 중 한 명인 하야미(Hayami)가 "최고 사령관이 혼란 속에서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히데요리는 성을 끝까지 방어해야 한다. 성이 함락되면 그때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다!"라고 만류했다.
그리고 혼란 속에서 히데요리는 후퇴했다. 성에 불이 붙었고 혼란이 극에 달했다. 그의 7명의 부장 중 한 명인 하야미는 결국 히데요리, 그의 아내(쇼군의 딸이자 이에야스의 손녀), 그리고 그의 어머니 요도기미(Yodogimi)를 성 안의 방화벽이 있는 건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히데요리의 아내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히데요리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머독에 따르면, 그녀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도착했을 때, 그는 차갑게 "왜 남편과 함께 죽지 않느냐?"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당시 관례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동정심을 가장하여 도쿠가와의 부장 이이(Ii)와 안도(Ando)에게 히데요리의 안전한 퇴거를 맡겼다.
그러나 히데요리는 어머니와 함께 방화벽이 있는 건물에 남아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에게 사자를 보내고 답변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답변도 없었고, 이이와 안도의 부대가 그 건물에 공격을 가하자, 히데요리는 할복 자살을 했다고 전해지며, 그 건물은 파괴되었다.
이이는 히데요리의 안전한 퇴거를 책임졌지만, 얼마 후 이에야스에게 보고하면서 명령을 어겼다고 말하고 처벌을 요청했는데, 머독의 책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이는 이에야스의 곁을 떠났다. 몇 주 후 이이는 오미(Omi) 히코네(Hikone)의 석고(koku) 수입이 18만 석에서 23만 석으로 증가했고, 1617년에는 28만 석으로 더욱 증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고, 히데요리가 오사카에서 탈출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머독에 따르면 이 소문은 도쿠가와 막부를 우려하게 할 만큼 신빙성이 있었다. 이 문제는 리처드 콕스와 윌리엄 애덤스의 동료의 일지에도 언급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콕스의 일지에서 발췌한 다음 내용은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1616년 9월 18일
애덤스 선장이 우리의 파견을 얻기 위해 다시 에도의 조정에 갔는데, 모든 의회가 생사에 관련된 사법 문제로 바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 남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함께 성에 있었다는 이유로 도요토미 히데요리(Fidaia Samme)에 대해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 남자는 그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또는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자백하도록 심하게 고문을 받았지만, 그가 무언가를 자백했는지 여부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1616년 5월 5일
나가사키(Langasaque)의 도노의 아들(오사카 함락 때 살해된 일본 예수회 신부의 형제)이 13척의 배에 병사들을 태우고 타카사키(Taccasange) 섬, 즉 우리가 폼오사 섬이라고 부르는 섬을 점령하기 위해 바다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고토에 있으며, 교토(Miaco)에서 올 더 많은 지원을 기다리고 있으며, 류큐(Lequea)로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리(Fidaia Samme)를 찾을 생각이라고 전해집니다."
"1616년 7월 7일
사쓰마(Xaxma)의 도노 혹은 왕이 도요토미 히데요리(Fidaia Samme)를 위해 새로운 덴노(히데타다)에 맞서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말이 퍼져 있습니다. 그들은 히데요리가 살아있다고 전하며, 나가사키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현재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1616년 10월 15일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리(Fidaia Samme)가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습니다."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8세)는 사로잡혀 참수되었고, 그의 딸 나아히메(나아 공주)(7세)는 가마쿠라의 수녀원인 도케이지로 보내졌고, 후에 텐슈인(1608~1645)이라는 스무 번째 비구니가 되었다.
오사카 방위군을 몰아낸 막부군은 오사카성 안으로 입성했다. 히데요리 모자는 천수각에 올라가 자결하려 했으나, 하야스이 카이(速水甲斐)의 간언에 따라, 히데요리 모자는 야마자토마루(山里丸)로 피하여 화공을 피했다.
오노 하루나가는 센히메를 억지로 탈출시켜, 히데요리 모자의 목숨을 구걸하려고 생각하여, 키무라 곤에몬(木村権右衛門)에게 명하여 호위하게 했다. 모리 히데모토의 편지에 따르면 “대고쇼(大御所)께서는, 쇼군(将軍) 댁의 뜻에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쇼군(将軍) 댁의 뜻은, 이미 한 번도 아닌 일, 빨리 결단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기한벌열록유루(萩藩閥閲録遺漏)』)라고 적혀 있으며,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모자의 목숨을 구하는 것을 단호하게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야마자토마루(山里丸)에 대한 총공격이 행해지고, 히데요리는 요도도노와 오노 하루나가 등과 함께 자결하여 죽었다고 전해진다. 향년 23세(만 21세 사망).
아들인 국송은 도망쳤으나 결국 붙잡혀 처형되었다. 딸인 천수니는 센히메의 간청으로 불문에 들어가는 것을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다. 또한 겐로쿠 초기에 80세로 사망한 구염은 임종 직전 자신이 대판성 함락 당시 3세였던 히데요리의 차남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토본조고승전』). 구염의 말이 사실이라면, 히데요시의 혈통이 끊긴 것은 천수니가 사망한 1645년이 아니라 구염 상인이 사망한 겐로쿠 원년(1688년)이 된다.
묘소는 교토시히가시야마구의 양원원 등이 있다. 또한 오사카시주오구의 도요쿠니 신사는 아버지 히데요시와 삼촌 히데나가와 함께 히데요리도 신으로 모시고 있다.
1980년, 오사카성 3의 마루 터 발굴 조사에서 한 사람의 두개골과 목이 없는 두 사람의 뼈, 말 한 마리의 머리뼈가 발견되었다. 뼈는 인위적으로 매장된 것으로 보이며, 두개골은 20대 남성의 것이고 턱에 介錯된 것으로 보이는 상처와 왼쪽 귀에 장애가 있었을 가능성이 확인되어, 나이와 뼈로 추정하는 체격으로 미루어 히데요리의 것이 아닌가 추측되었다.[16] 뼈는 1983년, 교토의 청량사에 매장되었다.
2011년 10월 13일, 오사카성 3의 마루에 위치한 오사카성 진수사인 다마즈쿠리 이나리 신사에 히데요리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3. 인물 및 평가
- 구게(公家) 풍의 교육을 받았으며, 현존하는 필적은 예술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 『메이료코한(明良洪範)』에 따르면 키 6자 5치(약 197cm), 체중 43관(약 161kg)의 거구였다고 한다.[21] 『나가사와 문서(長澤聞書)』에서도 히데요리의 체격에 대해 '세상에 보기 드물 만큼 몸이 크다'라고 기록하였다.[19][20]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한 것은 니조 성(二條城)에서 히데요리와 만난 후, 그의 당당한 체격과 풍모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히데요리의 큰 체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자가 맞는지 의심을 받게 하였으나, 생모 요도도노 (약 168cm)를 비롯해 외조부 아자이 나가마사, 외조모 이치가 모두 장신이었으므로, 히데요시와의 체격 차이가 크다는 것이 반드시 친자가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다.
- 일각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이 아니라 요도도노가 불륜으로 낳은 사생아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히데요시와 히데요리는 부자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외모에서 닮은 부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키 약 140cm 정도에 마른 몸과 원숭이 같은 얼굴이지만, 히데요리는 키 약 197cm 정도에 고도비만인 몸과 돼지 같은 얼굴로, 아버지와 외모가 심하게 다르다.
-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있었으며, 카마보코(蒲鉾, 어묵의 일종)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 히데요리의 정실 센히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그의 정실 오에요(お江与) 사이의 장녀이다. 오에요는 요도도노의 자매로, 센히메와 히데요리는 이종사촌 남매이기도 하다. 두 부부는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녀는 없었다.
- 후지와라 마사히데(藤原正秀)의 소년(小姓)을 지낸 나가사와 쿠로베에(長澤九郎兵衛)의 기록인 『나가사와 문서(長澤聞書)』에는 "세상에 없는 엄청난 비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아내인 센히메(千姫)와 사이에 자식이 없었으므로, 측실의 아이를 센히메의 양자로 삼았다.
-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히데요리의 전기 『호우내기(豊内記)』에는 "히데요리 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유언을 따라 천하의 실권을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将軍) 이에야스 공(家康公)에게 맡기고 오사카 성(大坂城)에 은거하였다. 예를 중시하고 의를 행하며, 성현의 풍모를 사모하고 사악한 마음을 버리고, 사욕을 슬퍼하며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국가가 부유해지는 것만을 아침저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군주가 정치를 맡았다면 일본에 두 번의 엔기·텐랴쿠의 치(延喜・天暦の治)가 나타났을 것이다. 사람들은 큰 가뭄에 비를 내리는 구름을 바라는 것처럼 히데요리의 정치를 고대했을 것이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 일본 연구가 레옹 파제스(レオン・パジェス)는 저서 『일본 기리시탄 종문사(宗門史)』에서 "히데요리의 실패는 그의 완고한 미신 때문이며 유감으로 여길 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버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1537년 - 1598년 | |
어머니 | 요도도노 | 1569년 - 1615년 | 아자이 나가마사의 장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 |
정실 | 센히메 | 1597년 - 1666년 |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혼다 타다토키의 정실, 호는 천수원(天樹院) |
측실 | 와키노카타(이차) | ? - ? | 와타나베 고헤이의 딸 |
측실 | 코이시노카타 | ? - ? | 나리타 스케나오의 딸 |
장남 | 도요토미 쿠니마츠 | 1608년 - 1615년 | 와키노카타 소생 |
장녀 | 텐슈니 | 1609년 - 1645년 | 코이시노카타 소생 |
전승적·불명확한 자녀 | 구엔 | ? - 1688년 | 임종 직전에 히데요리의 둘째 아들이라고 고백, 도요토미 쿠니마츠는 형이라고 함[29] |
5. 히데요리 관련 문화 작품
오사카 성이 함락되었을 때, 히데요리 일행이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 없고, 시체도 발견되지 않아 생존설이 있었다.[22] 히데요리의 생존설은 다음과 같다.
- 히라도에 있던 리처드 콕스가 동인도회사에 보낸 편지에는 사쓰마・류큐로 도망쳤다는 내용이 있다.[23] 당시 교토에는 "꽃 같은 히데요리 님을, 귀신 같은 사나다가 데리고, 멀리 멀리 가고시마로 갔다"라는 동요가 유행했고, 사나다 노부유키가 있던 마쓰시로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 『채요록』에는 사쓰마 국 다니야마에 겐나 초기에 낭사가 정착하여 국주로부터 집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주민들은 그를 히데요리 공이 아닌가 하고 은밀히 소문냈다고 한다.
- 가고시마 시시모후쿠모토초에는 히데요리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탑이 있고, 근처의 기노시타가와에는 전 가신의 무덤 2기가 있다고 한다.
- 쇼와 42년(1967년)부터 43년(1968년)에 가고시마현의 향토사가 고토 무네오는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 함락 후, 고쿠마쓰와 함께 규슈로 도망쳐 히데번주 키노시타 노부토시의 보호를 받아 소우렌이라는 이름으로 45세까지 살았다는 설을 제창했다.
- 구 히데 번주 키노시타가 18대 당주인 키노시타 토시히로는 저서에서 히데요리는 소우렌이라고 하며, 히데번 키노시타가가 도망친 히데요리와 고쿠마쓰를 은밀히 보호했다는 내용의 생존설을 제시했다.[26]
- 도요토미 정통 14대를 자칭하는 키바 사다키는 『역사와 여행』[27] 1983년 8월 임시 증간호에서 "태합의 후예는 멸망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구전의 히데요리 사쓰마 망명과 그 이후를 발표하고 있다.
- 에도 시대의 소설 『사나다 삼대기』[28]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 주도로 히데요리가 시마즈가의 도움을 받아 사쓰마로 도망쳤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히데요리 생존설은 다양한 형태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모두 전설적인 일화이며,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1992년, 이노우에 야스요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간행하며 히데요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2012년 하토리 히데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 비실자(非実子)"설을 주장하면서, 1차 사료에 기반한 실증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30]
히데요시의 비실자설은 분로쿠의 역 당시 히데요시가 주로 히젠 나고야 성에 체류하던 시기와 요도도노의 임신 시기가 겹치고, 히데요시의 자식으로 여겨지는 것이 히데요리와 요절한 형 쓰루마쓰뿐이라는 점 때문에 제기되었다. 루이스 프로이스도 히데요시에게 자식이 없다는 추측이 당시 이미 강했던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는 나가하마 성주 시대에 이시마쓰마루 히데카쓰와 여자아이가 있었다는 설도 있어, 요도도노와의 사이에만 아이가 태어났다는 설은 성립하지 않게 된다.
;소설
:* 토요토미 가의 사람들(시바 료타로 저): 토요토미 일족을 소재로 한 연작 단편.
:* 성채(시바 료타로 저): 오사카의 진을 소재로 한 장편.
:* 성 안의 사람들(호시 신이치 저): 히데요리의 일생을 다룬 중편. 가도카와 문고 『성 안의 사람들』 수록 작.
:* 톱핀파라리노 후타로(만조메 마나부 저): 장편.
:* 줍는 분(키노시타 마사키 저): 오사카 여름의 진을 소재로 한 단편. 고분샤 『전국 24시 마지막 순간』(문고화에 따라 『전국 십이각 끝의 때』로 개제) 수록 작.
:* 누가 센히메를 죽였는가 뱀신 탐정 토요토미 히데요리(다나카 히로후미 저)
5. 1.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관한 소설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5. 2. 텔레비전 드라마
- 여인 태합기(1981년, NHK 대하드라마, 연: 이노우에 준이치)[13]
- 여인들의 오사카성(1983년, 닛테레, 연: 후나코시 에이이치로)[13]
- 사나다 태평기(1985년~1986년, NHK, 연: 엔도 히로시)[13]
- 카스가쓰쿠(1989년, NHK, 연: 와타나베 토오루)[13]
- 풍운! 사나다 유키무라(1989년, 텔레비 도쿄, 연: 아라이 마사카즈)[13]
- 아오이 덕가 삼대(2000년, NHK 대하드라마, 연: 오노에 키쿠노스케)[13]
- 에~히메타치노센고쿠~(2011년, NHK 대하드라마, 연: 타이가)[13]
- 그림자 무사 도쿠가와 이에야스(2014년, 텔레비 도쿄, 연: 타카치 유고)[13]
- 사나다마루(2016년, NHK 대하드라마, 연: 나카가와 다이시)[13]
- 하는가 이에야스(2023년, NHK 대하드라마, 연: 사쿠마 류토)[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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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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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코 쿠라이리치(太閤蔵入地)라고도 한다.
[34]
문서
그러나 이후에도 일부 영지에서는 여전히 수입이 있었던 기록이 있다.
[35]
문서
요도도노가 화의를 강력하게 주장한 데에는 도쿠가와군의 포격 당시 한 발의 포탄이 혼마루의 요도도노의 처소에 떨어지면서 시녀 중 한 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자 요도도노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이 그 이유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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