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 오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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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노 오이와는 5세기 후반 일본의 인물로, 백제와 갈등을 겪고 임나를 장악하려 했던 인물이다. 465년 백제로 건너가 소가노 카라코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귀국했다. 487년에는 임나를 장악하고 고구려와 결탁하여 삼한의 왕이 되려 했으며, 백제와 전투를 벌였으나 실패하고 왜국으로 돌아갔다. 《일본서기》에는 나기타갑배와 함께 백제를 괴롭힌 인물로 언급되며, 기노 미마사의 아버지라는 설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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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 오이와 | |
---|---|
기본 정보 | |
이름 | 기노 오이와 |
본성 | 기노 씨 |
계통 | 기노오미 씨 |
묘지 | 고분 오사카 부 미나미카와치 군 다이시 정 에가노 |
2. 생애
기노 오이와의 생애는 주로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465년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백제로 갔으나, 그곳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고노 오이와와 갈등을 겪었다. 487년에는 임나를 장악하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삼한의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으나, 결국 왜국으로 귀국했다.
『일본서기』 긴메이 천황 2년 7월조에는 성명왕이 신라와 내통한 임나일본부 관리를 비판하면서 언급한 "위가가군"이 기노 오이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또한, 같은 책 긴메이 천황 2년 7월 조에 나타나는 기노 미마사의 아버지라는 설도 존재한다.[4]
2. 1. 초기 활동과 백제와의 갈등
465년 5월, 기노 오이와는 아버지 오토모노노 가타리가 유랴쿠 천황의 명을 받아 신라와의 교전 중에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백제에서 횡포한 행동으로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고노 오이와의 분노를 샀다.[5] 고노 오이와는 소가노 카라코를 꾀어 그를 암살하려 했지만, 카라코는 오히려 죽임을 당하고, 기노 오이와는 귀환길에 각국(지금의 야마구치현)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기노 오이와도 일시 귀국했다.[2]2. 2. 임나에서의 활동과 고구려와의 관계
487년, 기노 오이와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 임나를 장악하고 고구려와 결탁하여 삼한(조선 남부)의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6] 그는 정부 기구를 정비하고 군호를 "신성(神聖)"이라고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다.[6] 임나의 좌로(左老)·나기타갑배(那奇他甲背) 등이 기노 오이와의 계략을 도와 백제인을 살해하고, 대산성(大山城)을 쌓아 백제군을 군량 부족으로 괴롭혔다.[6]이에 격노한 백제왕은 장군 고이해(古爾解) 등이 이끄는 군대를 보냈으나, 기노 오이와의 맹공에 패배했다.[6] 기노 오이와의 군대는 가는 곳마다 적이 없을 정도로 쾌진격을 계속했지만, 그 해 안에 갑자기 왜국으로 귀국했다.[6] 백제에서는 기노 오이와가 떠난 후 남겨진 좌로·나기타갑배를 비롯한 300명 가까이를 처형했다.[6]
『일본서기』 긴메이 천황 2년 7월조에는 성명왕이 신라와 내통한 임나일본부의 가와치 나오·이나사·마도를 비판하면서, 그 조상으로 여겨지는 나간타갑배와 "위가가군(백제본기운, 위가기미, 나유비키)"이 백제를 괴롭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위가가군'은 기노 오이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6]
2. 3. 백제와의 전투 및 귀국
겐조 천황 3년(487년), 기노 오이와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 임나를 장악하고 고구려와 결탁하여 삼한(조선 남부)의 왕이 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정부 기구를 정비하고 군호를 신성이라고 자처하였다. 임나의 좌로(左老)·나기타갑배들은 계략을 맡아 백제인을 살해하고 도와 항구를 막기 위해 오비야마성을 쌓고 백제군을 군량 공세로 괴롭혔다.[6]이에 격노한 백제왕은 장군 고이해(古爾解) 등이 이끄는 군대를 보냈지만, 기노 오이와의 맹공에 패배하였다. 기노 오이와의 군은 가는 곳마다 적이 없는 상태로 쾌진격을 계속했지만, 그 해 안에 갑자기 왜국으로 귀국했다. 백제에서는 남아있던 좌호·나기타갑배를 비롯한 300명 가까이를 처형(処刑일본어)했다.[6]
3. 역사적 기록과 평가
『일본서기』 긴메이 천황 2년 7월조에는 성명왕이 신라와 내통한 임나일본부의 관료들을 비판하면서, 그 조상으로 여겨지는 나기타갑배와 "위가가군(백제본기운, 위가기미, 나유비키)"이 백제를 괴롭혔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여기서 "위가가군"은 기노 오이와(己能王)로 추정되기도 한다.[7]
같은 책 긴메이 천황 2년 7월조에 등장하는 기노 미마사(紀臣奈率彌麻沙)의 아버지라는 설이 있다.[7]
4. 한국 역사 속의 오토모노노 이와마로
465년 5월, 오토모노노 이와마로는 아버지 (오토모노노 가타리)가 유랴쿠 천황의 명을 받아 신라와의 전투 중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로 향했다.[5] 그러나, 그는 횡포한 행동으로 오가노 스쿠네의 분노를 샀다. 오가노 스쿠네는 소가노 카라코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토모노노 이와마로는 귀국길에 각국에 머물렀다.[5]
487년, 오토모노노 이와마로는 다시 한반도로 건너가 임나를 장악하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삼한(한반도 남부)의 왕이 되려고 했다.[6] 그는 정부 기구를 정비하고 군호를 신성(神聖)이라 칭했다.[6] 임나의 좌로(左老)·나기타갑배 등이 계략을 맡아 백제인을 살해하고, 길과 항구를 막기 위해 오비야마성(대산성)을 쌓아 백제군을 식량 부족으로 괴롭혔다.[6] 이에 분노한 백제왕은 장군 고이해(고이카) 등이 이끄는 군대를 보냈지만, 오토모노노 이와마로의 맹공에 패배했다.[6] 오토모노노 이와마로의 군대는 가는 곳마다 적이 없을 정도로 진격을 계속했지만, 그 해 안에 갑자기 왜국으로 귀국했다.[6] 백제에서는 남아있던 좌호·나기타갑배를 비롯한 300명 가까이를 처형했다.[6]
『일본서기』 긴메이 천황 2년 7월조에는 성명왕이 신라와 내통한 임나일본부의 관리들을 비판하면서, 그 조상으로 여겨지는 나간타갑배와 "위가가군"(백제본기에는 위가기미, 나유비키)이 백제를 괴롭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7] 위가가군은 기노 오이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7]
참조
[1]
문서
大磐も生磐も読みはオヒハ(おいわ)で同音の表記違い。別名なのではない
[2]
서적
日本書紀
[3]
서적
日本書紀
[4]
논문
古代東アジアにおける政治的流動性と人流
https://senshu-u.rep[...]
専修大学社会知性開発研究センター
2017-03
[5]
서적
日本書紀
[6]
서적
日本書紀
[7]
URL
https://senshu-u.r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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