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유랴쿠 천황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랴쿠 천황은 5세기 일본의 통치자로, 인교 천황의 아들이자 본명은 오하쓰세노와카타케루이다. 안코 천황 사후 정적을 제거하고 야마토 왕권의 오키미에 올랐으며, 기비, 하리마, 이세 등 지방 호족을 토벌하며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중국 남조와 교류하고 백제 부흥을 지원하는 등 대외 관계에도 힘썼으며, 이세 신궁의 외궁을 세우는 등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는 강력한 통치로 '다이아쿠 천황'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중앙 집권 강화와 국가 발전에 기여한 긍정적 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나리야마 검 등 유물을 통해 그의 통치 영역과 당시의 정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인교 천황의 자녀 - 안코 천황
    안코 천황은 인교 천황의 아들로, 형의 폐태자 후 일본 제20대 천황으로 즉위했으나 오쿠사카 황자 살해 및 황후 책봉, 그리고 암살당하는 파란만장한 삶으로 왜왕 무 비정설과 함께 역사가들의 논쟁 대상이 되고 있다.
  • 418년 출생 - 보지 (승려)
    보지는 남조 시대의 승려로, 기이한 행적과 예언 능력, 독특한 외모로 유명하며, 당나라 시대에는 십일면관음의 화신으로 여겨져 민간 신앙과 융합되는 모습을 보였다.
  • 유랴쿠 천황 - 기비씨의 난
    기비씨의 난은 5세기 후반 유랴쿠 천황 재위기에 기비 지역 호족 기비씨가 일으킨 반란으로, 천황의 문란한 사생활, 신라와의 관계 악화, 기비씨의 정치적 불만과 경제적 부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으며, 와카히메 사건이 발단이 되어 야마토 정권에 반기를 들었으나 진압되었고, 이후 정치적 혼란의 배경이 되었다.
  • 유랴쿠 천황 - 이나리야마 고분 철검
    이나리야마 고분 철검은 1968년 일본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115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진 철검으로, 고대 일본의 정치 상황과 사회 구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사이타마현에 기증되어 보관되고 있다.
유랴쿠 천황
기본 정보
이름유랴쿠 천황
로마자 표기Yūryaku-tennō
일본어 표기雄略天皇
일본어 (고유)오하츠세 와카타케루노 미코토 (大泊瀬幼武尊)
다른 이름오하츠세와카타케루노 미코토 (大泊瀬幼武尊)
오나가타니와카타케루노미코토 (大長谷若建命)
오나가타니 왕 (大長谷王)
오하츠세와카타케루 (大泊瀬幼武)
재위456년 – 479년 (전통적)
승하479년
묘소다지히노타카와시노하라 능 (丹比高鷲原陵)
묘소 위치하비키노, 오사카
출생일417년–418년
사망일479년 (61–62세)
사망 장소하츠세노 아사쿠라 궁
아버지잉교 천황
어머니오시사카노 오오나카츠히메
배우자구사카노 하타비히메
자녀세이네이 천황
기타...
왕가일본 황실
칭호
한풍 시호유랴쿠 천황 (雄略天皇)
화풍 시호오하츠세 와카타케루노 미코토 (大泊瀬幼武尊天皇)
통치
시대전승 시대 (고분 시대)
궁궐하츠세노 아사쿠라 궁 (泊瀬朝倉宮)
기타
참고"고지키"에는 유랴쿠 천황이 124세의 "고령"으로 사망했다고 기록됨.
"니혼쇼키"에는 유랴쿠 천황이 104세까지 살았다고 기록됨.
파피노는 유랴쿠 천황의 나이를 62세로 기록함
이미지
유랴쿠 천황의 멧돼지 사냥
유랴쿠 천황의 멧돼지 사냥, 아다치 긴코 (1896)

2. 생애

大泊瀬稚武天皇|오하쓰세노와카타케루 천황일본어인교 천황의 다섯째 아들로, 본명은 오하쓰세노와카타케루(大泊瀬稚武皇子)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뛰어난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감각을 지녔으나, 잔혹하고 냉혹한 면모도 함께 지녔다고 한다.

안코 천황이 암살된 후, 왕위 계승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오키미(大王)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형제들과 사촌들을 살해하는 등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 즉위 후에도 잦은 처형으로 훗날 '다이아쿠 천황(大惡天皇)'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다이아쿠 천황'에 대한 기록은 부레쓰 천황에게도 나타나므로,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真鳥)를 오오미(大臣)로, 오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와 모노노베노 메(物部目)를 오무라지(大連)로 삼아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제 왕권을 확립했다. 연합적인 성격을 띠던 주변 소왕국들을 야마토 왕권 아래 복속시키려 했으며, 특히 당시 최대 지역 정권이었던 기비를 군사적으로 굴복시켰다. ('기비 씨의 난'). 469년 하리마의 아야시노 오마로(文石小麻呂), 474년 이세의 아사케노 이라쓰코(朝日郎)를 군사적으로 토벌한 기록도 있다.

이 밖에도 중국 송(宋)으로부터 수공업 기술자들을 초빙하고, 흩어져 있던 하타 씨(秦氏) 백성에 대한 통솔을 강화하여 양잠업을 장려했다.

재위 22년 1월 1일(478년 2월 18일), 아들 시라카 황자(白髪皇子, 훗날의 세이네이 천황)를 황태자로 삼고, 이듬해 8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양서》에는 502년 '(武)'라는 왜왕을 정동장군으로 임명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유랴쿠 천황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유랴쿠 천황의 아버지인 인교 천황은 453년에 사망하였으나 왜왕 무(武)의 부친은 478년에 사망했으므로 동일 인물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90]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검의 명문에 있는 "獲加多支鹵"(와쿠(각)카타키(시)루(로))가 유랴쿠 천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져, "고고학적으로 존재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천황"이라고도 한다.

2. 1. 즉위 과정

안코 천황이 재위 3년 만에 마요와 왕(眉輪王)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86]일본서기》 및 《고사기》에 따르면, 이 사건은 마요와 왕이 안코 천황을 암살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안코 천황의 암살 소식을 들은 오하쓰세 황자(훗날의 유랴쿠 천황)는 자신의 형들을 의심하여, 우선 야쓰리노시로히코 황자(八釣白彦皇子)를 죽였다.[86] 이어서 사카이노쿠로히코 황자(坂合黒彦皇子)와 마요와 왕을 죽이려 했다. 두 사람이 오오미(大臣) 가쓰라기노 쓰부라(葛城円)의 저택으로 도망쳐 숨자, 오하쓰세는 저택에 불을 질러 이들 두 사람은 물론 가쓰라기노 쓰부라마저 태워 죽였다.[86]

게다가 사촌 형제였던 이치노헤노오시와 황자(市辺押磐皇子)·미와노 미코(御馬皇子) 형제마저 살해하여 자신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88] 그해 11월에 야마토 왕권의 오키미(大王)에 오르게 되었다.

2. 2. 가족 관계

草香幡梭姫皇女|구사카노하타비히메 황녀일본어닌토쿠 천황의 딸로, 유랴쿠 천황의 황후가 되었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직위이름출신자녀
황후
(황후)
草香幡梭姫皇女|구사카노하타비히메 황녀일본어닌토쿠 천황의 딸없음
왕비
()
葛城韓媛|가쓰라기노 카라히메일본어가쓰라기노 쓰부라 오오미(大臣)의 딸
왕비
()
吉備稚媛|기비노 와카히메일본어기비노 시모쓰미치노 오오미의 딸
왕비
()
和珥童女君|와니노 와라와키미일본어가스가노와니노오미후카메(春日和珥臣深目)의 딸



유랴쿠 천황과 가쓰라기노카라히메(葛城韓媛) 사이에서 태어난 시라카노미코(白髪皇子)는 세이네이 천황으로 즉위했다. 유랴쿠 천황의 핏줄은 부계로는 끊어졌지만, 가쓰라기노카라히메 소생의 딸인 가스가노오이라쓰메 황녀가 닌켄 천황의 황후가 되어 낳은 딸 다시라카 황녀(手白香皇女)가 다시 게이타이 천황(継体天皇)의 황후가 되고 긴메이 천황(欽明天皇)을 낳음으로서, 모계를 통해 현재의 일본 황실까지 이어지고 있다.

3. 업적 및 통치

雄略天皇일본어은 강력한 통치력을 바탕으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대외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유력 호족들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양잠을 장려하고 중국 남조의 송(宋)나라와 교류하는 등, 국가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기기』에 따르면, 유랴쿠 천황의 치세는 폭정과 잔혹함으로 가득했다. 그는 잘못된 애정 때문에 소녀의 사지를 나무에 묶어 불태워 죽이라고 명령했으며, 사냥 중 시종이 고기를 다루는 방법을 몰라 그를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15] 또한 고위 관리를 먼 곳으로 좌천시켜 그의 아내를 차지하기도 했다.[15] 백성들은 그를 '''대악천황'''이라고 불렀으나, 황후의 훈계 이후에는 행실을 다소 개선했다는 기록도 있다.[16]

이 시기는 『일본서기』의 연표에서 유랴쿠 덴노(雄略天皇)의 즉위 전후로 나뉘는 시점이다. 그의 이름이 『만엽집』과 『일본령이기』의 서두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역사적 전환점으로 여겨진다.[22][23] 이전의 일본 열도는 여러 지역의 강력한 지배 가문들의 연합체였으나, 유랴쿠 덴노의 등장과 함께 대왕(Okimi)의 독재적 통치가 확립되고 대왕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24]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검의 명문에 있는 "獲加多支鹵"(와쿠(각)카타키(시)루(로))가 『고사기』에 있는 명칭 "대장곡 약건" 중 "약건"(와카타케루)과 『일본서기』의 명칭 "대박세 유무" 중 "유무"(이것도 와카타케루)와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것으로부터 "고고학적으로 존재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천황"이라고 여겨진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랴쿠 천황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52]

칭호주요 업적
允恭 (윤쿄)7년12월탄생
雄略 (유랴쿠)2년7월백제에서 이케즈히메가 헌상되었으나, 입궁 전 간통하였기에 처형함.
3년4월이세 신궁의 사이궁에 임명된 타쿠하타 황녀가 유언비어로 인해 자살함.
4년2월가쓰라기산에서 사냥을 함.
5년4월백제에서 이케즈히메 대신 왕의 동생 곤시가 파견됨.
6년4월송이 사신을 파견함.
8년2월미사사손 아오·히와쿠마 타미쓰카이 하쿠토쿠를 송에 파견함 (왜왕 무의 사신?)
9년2월오사카노아타이 카시와 채녀를 무나카타타이샤에 보냄.
3월키 코유미·소가 간지·오오토모 토모·오지카 히노코네에게 신라 정벌을 명함.
5월신라 정벌군에 내분이 일어나 철군함.
10년9월미사사손 아오·히와쿠마 타미쓰카이 하쿠토쿠가 귀국함.
11년7월백제에서 송국인을 자칭하는 기신이라는 자가 망명함.
12년4월미사사손 아오·히와쿠마 타미쓰카이 하쿠토쿠를 오에 파견함 (왜왕 무의 사신?)
13년3월에카노나가노무라를 모노베 메노오이에게 하사함.
15년전국에 분산되어 있던 하타씨를 하타 사케노미코에게 통솔하게 함.
16년7월하타 사케노미코에게 양잠·방적 기술의 보급을 명함.
17년3월니에 도시베를 설치함.
19년3월아나호베를 둠.
20년백제고구려에 멸망함.



긍정적인 면으로는 유랴쿠 천황 재위 기간 동안 예술과 공예가 크게 발전했다는 점이다. 황후가 누에를 치게 하고, 백제(한국)에서 뛰어난 장인들을 초빙했다.[15]

3. 1. 중앙 집권 강화

유랴쿠 천황은 유력한 호족들을 복속시키고 대왕 중심의 강력한 통치를 확립하고자 했다. 즉위 7년(463년), 최대 지방 호족이었던 기비 씨에 대해 반란 진압을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기비 씨의 난) 기비 시모쓰미치노오미 사키쓰야와 기비 가미쓰미치노오미 다사의 "반란"을 토벌하여 기비 씨를 약화시켰다.[47]

고고학적 조사에서도 와카타케 대왕(유랴쿠 천황으로 추정)이 재위했던 것으로 보이는 5세기 말경부터 지방 호족 수장 묘에서 대형 전방후원분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48] 이는 야마토 왕권이 지방 세력을 억압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했음을 보여준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유랴쿠 천황의 중앙 집권 강화 관련 업적은 다음과 같다.

칭호업적
安康 (안코)3년8월천황을 암살한 마륜왕을 주살하고, 형인 백언·흑언을 살해, 가쓰라기 일족을 주멸함.
10월사촌 형제인 이치베 오시와나 친왕·미우마 친왕을 살해함.
11월즉위. 하쿠세 아사쿠라궁으로 천도함.
雄略 (유랴쿠)1년3월쿠사카하타사소히메를 황후로 삼음.
7년8월기비 씨의 난 발발. 기비 시모미치 쇼미 마에쓰야를 주살하고, 기비 가미미치 타사로부터 아내 기비 와치히메를 빼앗아 비로 삼음.
13년8월하리마의 분세키 코마로를 정벌함.
18년8월모노베 메가 이세의 아사히로를 토벌함.


3. 2. 대외 관계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랴쿠 천황 8년(서기 464년) 2월에 일본부의 군대가 고구려를 쳐부수고, 이듬해인 9년 5월에 다시 신라를 공격했으나, 장군인 기노 고유미(紀小弓)가 전사하여 패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인의 침공이 자비 마립간 5년(462년)과 6년(463년) 5월에 있었고, 삽량성을 공격하다가 신라 장군 벌지(伐智)와 덕지(德智)의 매복 작전에 격파당했다고 기록되어, 신라가 왜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20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멸하였으나(개로왕 피살), 백제의 나머지 군사들을 모두 죽이자는 권고에 장수왕이 "백제는 일본 천황의 관가로서 그 유래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그것을 멸망시킨다면 천황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라며 그만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1년에는 오하쓰세노오키미가 임나(任那)의 하치호리현에 속한 구마나리(久麻那利)의 땅을 백제에게 내주어 백제를 부흥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장수왕의 한성 공략과 백제 개로왕의 서거가 475년 9월에 있었고, 문주왕이 그 해에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476년으로 1년의 차이를 보이며, 멸망할 뻔한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거나 장수왕이 왜를 두려워해서 백제를 더 공격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는 식으로 왜곡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479년 4월에는 백제의 삼근왕(三斤王)이 사망하자, 왜에 인질로 있던 미다(未多)를 쓰쿠시(筑紫)의 병사 500명을 주어 귀국하게 도왔을 뿐 아니라, 그 병사를 이끌었던 아치노오미(安致臣) ・ 우마카히노오미(馬飼臣)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토벌했다고 《일본서기》는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

476년 고구려


유랴쿠 천황이 중국 기록에 나오는 백제의 무(武)왕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송서》에 따르면, 무왕은 477년과 478년에 송(유송) 순제에게 사신을 파견했다. 첫 번째 사신은 중국 황제에게 와(왜)의 고왕(안코 천황)이 죽고 그의 형이 왕위에 올랐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33]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와(일본)의 왕"이자 여러 왕국의 군사 지휘관이라고 칭했다.[34][35] 이듬해 순제는 무왕에게 동방평정장군(東平將軍)의 칭호를 수여했다.

《송서》의 기록에는 무왕의 조상들이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동서로 세력을 확장하여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진출하여 한반도 남부에 이르렀다고 기술되어 있다. 와(일본)의 왕들은 송나라 황제에게 백제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인정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송나라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위치한 백제를 중시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송나라 황제들은 백제에 대한 인정을 하지 않음으로써 북위를 견제하고, 와(일본)와 갈등을 빚고 있던 고구려의 반발을 피할 수 있었다.[36]

무왕에 관한 다른 두 가지 기록은 《남제서》와 《양서》에 언급되어 있다. 478년의 기록과 비교하면, 이 기록들은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37] 일본 역사가 모리 기미아키(森公章)는 이 두 가지 임명 모두 각 왕조의 건국 연도와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행정적인 문제로 보이며, 무왕(유랴쿠 천황) 자신이 요청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38] 479년에 남제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설이 적어도 하나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諸番職貢図巻일본어 (《애일음로서화속록》(愛日吟盧書画続録)에 포함)의 제목에 있는 설명에만 근거한다.[37] 무왕(유랴쿠 천황)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되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임명은 그의 기록된 시대 밖에 있다. 《기기》에 유랴쿠 천황이 479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502년이라는 마지막 연도는 있을 수 없다.

송서》에는, 477년에 왜국이 사신을 보내 형인 “흥”(안강천황으로 비정)이 죽고 아우인 “무”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보고했고, 무는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칠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이라고 자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75][76] 이듬해 478년에는 무가 상표문을 올렸고, 이에 대해 순제는 무를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서임하는 것을 조서했다고 한다.[75][76]

상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장은 『시경』·『춘추좌씨전』의 영향이 지적되고 있다.[67] 문장에는 선조 대대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동서로 세력을 확장하고, 바다를 북쪽으로 건너 한반도 남부에 이른 모습이 서술되어 있다. 왜왕들은 황제에게 한반도 남부의 군사적 지배권을 인정해줄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무의 상소에서도 백제에 대해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는 송이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백제를 중시한 것과, 또 왜와 대립하는 고구려의 반발을 피하려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80]

일본서기》에서는 웅략천황이 송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는 “오”나라에 사절을 파견한 기사가 있다. 하지만 연대는 『송서』의 기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3. 3. 문화 발전

유랴쿠 천황은 중국 남조의 송나라로부터 한직(漢織)(아야하토리)와 오직(呉織)(쿠레하토리) 등의 수공업 기술자들을 초빙하였다.[52] 또한, 흩어져 있던 진씨(秦氏)의 후예들을 모아 통솔을 강화하고 양잠업을 장려하는 등, 귀화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중용하였다.[52]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랴쿠 천황이 신뢰하고 총애했던 인물은 사부(書記官)였던 귀화계 인물 미사노스구리아오(무사노스구리아오)와 히노쿠마노타미노츠카이하카토코(檜隈民使博徳)(히노쿠마노타미노츠카이하카토코)였다.[52] 이 두 사람은 유랴쿠 천황 즉위 8년과 12년에 대륙으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52]

이와 관련하여 유랴쿠 천황 즉위 6년에 오국(남조 송)으로부터 사신이 왔다는 짧은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52] 헤이안 시대 초기에 편찬된 『도유기신궁의식장』에 따르면, 유랴쿠 천황은 즉위 22년(붕어하기 전 해)에 이세 신궁 외궁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4. 평가 및 논란

大悪天皇일본어 또는 雄徳天皇일본어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유랴쿠 천황은 강력한 통치로 야마토 왕권을 확립했지만, 잔혹한 행위로 비판받기도 했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사람을 자주 처형하고, 부하를 멧돼지로 착각하여 죽이려 했다는 등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15]

하지만 유랴쿠 천황 시대에 예술과 공예가 크게 발전했고, 백제에서 뛰어난 장인들을 초빙했다는 긍정적인 기록도 있다.[15] 또한, 양잠을 장려하고, 신라에 출병하며, 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4. 1. 폭군 논란

일본서기》에서는 유랴쿠 천황이 즉위 후에도 사람을 자주 처형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다이아쿠 천황(大悪天皇, 몹시 나쁜 천황)'이라 비방받았다고 전한다. 이러한 '몹시 나쁜 천황'이라는 평은 후대의 부레쓰 천황에게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에 근거하여 《일본서기》의 유랴쿠 천황과 부레쓰 천황이 실제로는 동일인물이 아니었느냐는 설도 존재한다.

《일본서기》에 수록된 에피소드에 따르면, 어느 날 사냥을 나간 천황이 멧돼지를 보고도 쏘아 죽이지 못하는 부하를 보고 격노해 쏘아 죽이려 했는데, 옆에서 황후가 "지금 멧돼지를 먹자고 부하를 죽이는 것은 승냥이이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렸다고 한다. 승냥이나 이리를 잔인한 사람에 빗대는 것은 《후한서》에도 기술되어 있기에 이러한 에피소드 자체가 후세의 창작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천황의 성격을 보여주는 기술이기도 하다.

《일본서기》 유랴쿠 기 2년 10월 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또한, 《일본서기》 5년 2월 조에는 이러한 유랴쿠의 행동을 황후 초향반사희황녀가 꾸짖었다는 일화도 있다.

즉위 13년 9월에는 당시 결코 칼날을 잘못 대지 않는 장인으로 소문난 목공 흑승장인 이나베 마네에게 정말로 그런지 묻자 “결코 잘못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유랴쿠 천황은 채녀들을 불러 모아 옷을 벗기고 샅바만 남겨놓은 채 사람들 앞에서 스모를 붙게 했다. 그 모습을 본 이나베 마네는 순간 칼날을 잘못 댔고, 유랴쿠 천황은 이나베를 물베에 넘겨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그 때 흑승 장인의 기술이 사라지는 것을 아까워한 동료들이 지은 와카를 읊었고, 그것을 들은 천황은 후회하며 “함부로 사람을 잃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사자를 형장에 보내 사면을 내리고 석방했다.

이러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유랴쿠 천황은 친정이 토벌된 후에 황후나 비를 맞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왕권 강화를 위해 유력 황족이나 호족을 정벌한 후 그 잔당을 달래 야마토 왕권에 통합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형인 안코 천황의 방식을 따른 것뿐만 아니라 유력 호족에게까지 확대 적용하여 야마토 왕권 강화를 강행했고, 그렇게 정벌당한 황족과 호족의 원망이 유랴쿠 천황에 대한 '폭군'이라는 기술 속에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랴쿠 천황은 '''유덕천황'''(おむおむしくましますすめらみこと)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일본서기》 4년 2월 조에서는 가쓰라기 산에서 일언주 신과 조우한 유랴쿠 천황이 신과 함께 사냥을 즐기고, 돌아올 때는 라이메이즈이(다카토리 강)까지 배웅받았다. 그 대담함에 감탄한 백성들은 입을 모아 “유덕천황”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57]

계보상 손자에 해당하는 소박세 천황(무렬천황)의 기록에 "빈번히 여러 악행을 저지르고, 단 하나의 선행도 하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부터, "대악천황"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름이 비슷한 대박세대왕(웅략천황)과 동일인물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4. 2. 역사적 재평가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유랴쿠 천황의 통치 방식과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강력한 통치는 야마토 왕권의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 국가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15][2] 또한, 그가 중국 남조와 교류하고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한다.[36][15]

학자 프랜시스 브링클리(Francis Brinkley)는 유랴쿠 천황을 "원시 역사 시대 군주"로 분류하며, 일부 역사가들이 그를 "엄격한" 인물로 묘사했지만, "그의 기록을 읽는 사람들 중 그러한 관대한 평가에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언급한다.[15] 스코틀랜드 동양학자이자 언론인 제임스 머독(James Murdoch)은 유랴쿠 천황을 "다소 잔혹했지만 강력한 통치자였던, 많이 오해받는 인물"로 여긴다.[2]

2024년 국립일본문학연구소는 "일본서기"에서 해독된 인지 분석을 실시했다. 이 분석에서 유랴쿠 천황은 "충동적인 살인과 격분하는 경향"의 예시로 포함되었다. 유랴쿠 천황은 "간헐적 폭발 장애", 일종의 "충동 조절 장애"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시된다.[16]

고고학적 연구는 또한 유랴쿠 천황이 통치하던 5세기 말경부터 지역 지배 가문의 수장들에게 속한 대형 열쇠구멍 모양의 고분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했다.[19] 이는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

유랴쿠 천황이 중국 기록에 나오는 백제의 부(武)왕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송서에 따르면, 부왕은 477년과 478년에 순제에게 사신을 파견했다. 그는 자신을 "의 왕"이자 여러 왕국의 군사 지휘관이라고 칭했다.[34][35] 의 왕들은 송나라 황제에게 백제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인정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송나라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위치한 백제를 중시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36]

5. 유적 및 유물



궁내청은 오사카부 하비키노시에 있는 시마이즈미마루 산 고분(둘레 76m)과 히라즈카 고분(한 변 50m)을 유랴쿠 천황의 무덤으로 지정했다.[9]고사기》에는 겐조 천황이 아버지 이치노헤노오시하 황자의 복수를 위해 유랴쿠 천황의 무덤 일부를 파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오사카부 마쓰바라 시와 하비키노 시에 걸쳐 있는 가와치 오쓰카 산 고분군이 유랴쿠 천황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지만, 하니와(埴輪)가 없는 등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종말기 양식일 가능성이 높아 유랴쿠 천황의 사망 시기와는 수십 년의 차이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39][40]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 명문에는 "獲加多支鹵"(와카타케루)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유랴쿠 천황의 이름과 유사하여 그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5. 1. 이나리야마 고분 철검

이나리야마 검


1968년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이나리야마 검이 발견되었다.[24] 1978년 X선 분석 결과, 최소 115자의 금상감 명문이 확인되었다.[25] 검에 새겨진 연도는 중국 육십갑자(sexagenary cycle)에 따른 "신해(辛亥)"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60년마다 반복되는 연호이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471년으로 여겨지지만, 적어도 한 명의 역사학자는 531년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25]

고분에 묻힌 사람의 이름은 "와와케(Wowake)"로, 당시 지역의 영향력 있는 무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나오는 와카 타키루(Waka Takiru) 왕은 『일본서기』에 언급된 오하쓰세 와카타케루노 미코토(Ōhatsuse-wakatakeru-no-mikoto), 즉 유랴쿠 천황의 다른 이름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26]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검에는 "辛亥년 7월 중순, 기록하다"로 시작하는 금상감명이 새겨져 있었다. 이 명문에는 "獲加多支鹵大王"이라는 당시 대왕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으며, 이 "獲加多支鹵"(와카타케루)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유랴쿠 천황의 실명인 "와카타케루" (고사기 "대장곡약건", 일본서기 "대박세유무")와 매우 유사하다.[65]

1873년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은상감명 대도에도 대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대왕 이름 부분이 상당히 훼손되었다. 과거에는 그 명문을 "치천하□□□□치대왕"으로 읽고, "다지히노미즈하와케"(多遅比弥都歯別)라는 실명을 가진 18대 반정 천황(일본서기에 따름. 고사기에서는 "수치별")에 해당한다는 설이 유력했다. 그러나 이나리야마 고분 철검이 발견된 이후로는 "치천하獲□□□鹵대왕"으로 읽고, 이를 "獲加多支鹵大王"으로 해석하는 설이 유력해졌다.[66][67]

유랴쿠 천황의 이름이 새겨진 철도·철검이 구마모토사이타마에서 발견된 것은 5세기 후반에 이미 야마토 왕권의 지배 영역이 규슈에서 간토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미쳤음을 보여준다.[68][69] 각 명문에는 "장도인"(무관?) "전조인"(문관?)이라는 당시 관직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일본서기』의 유랴쿠 천황 기에 "○인"이라는 관명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함께, 왕권에 봉사하는 집단을 직무에 따라 분류한 부민제의 싹이 이 시대에 이미 나타나 있었음을 시사한다.[70][71]

6. 결론

유랴쿠 천황은 뛰어난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감각을 바탕으로 야마토 왕권의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대외 관계를 확장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양잠을 장려하고, 신라에 출병했으며, 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44][45] 그러나 왕위 계승 과정에서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유력 호족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보인 잔혹하고 냉혹한 모습은 비판받기도 한다.[46]

유랴쿠 천황의 통치 시기는 고대 일본 사회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로 평가받는다. 유랴쿠 천황 이전까지 각 지역의 유력 호족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했던 일본 열도는 유랴쿠 천황의 등장으로 대왕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가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검의 명문은 유랴쿠 천황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지기도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Genealogy of the Emperors of Japan http://www.kunaicho.[...] 2024-03-27
[2] 서적 Yuryaku (457–479) https://books.google[...] Ponsonby Memorial Society
[3]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4-30
[4] 서적 The Imperial Family of Japan https://books.google[...] Ponsonby Memorial Society
[5] 서적 Japan Houghton Mifflin
[6]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Japan to 1945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7] 서적 A Translation and Study of the Gukanshō, an Interpretative History of Japan Written in 1219 Gukanshō
[8]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Royal Asiatic Society, Oriental Translation Fund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9] 웹사이트 雄略天皇 (21) http://www.kunaicho.[...]
[10] 서적 雄略天皇の古代史 Shigakusha 2021-06-30
[11] 웹사이트 The Emperor Oho-Hatsuse Wakatake https://books.google[...] London: Kegan Paul, Trench, Trubner
[12] 웹사이트 Sect. CXLVL - Emperor Anko (Part III - Prince Oho Hatsuse Slays Princes Kuro-Biko and Shiro-Biro) https://sacred-texts[...] R. Meiklejohn and Co.
[13] 웹사이트 Sect. CXLVIII - Emperor Anko (Part V - Prince Oho-Hatsuse Slays Prince Oshiha) https://sacred-texts[...] R. Meiklejohn and Co.
[14] 서적 Japan; Geschichte nach japanischen Quellen und ethnographische Skizzen https://books.google[...] W. Baensch
[15] 서적 A History of the Japanese Peopl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End of the Meiji Era https://books.google[...] Encyclopædia Britannica
[16] 웹사이트 Congenital Anomalies in Ancient Japan as Deciphered in the Nihon shoki (Chronicles of Japan) https://www.nijl.ac.[...] National Institute of Japanese Literature
[17] 웹사이트 Kofun Culture http://www.t-net.ne.[...]
[18] 간행물 The Manyōshū Nippon Gakujutsu Shinkokai
[19] 서적 Understanding the Nihonshoki and Songshu: The Mysterious Fourth Generation Machine and the Five Kings of Wa Seishun Publishing Co., Ltd., Seishun Shinsho Intelligence
[20] 서적 A Translation and Study of the Gukanshō, an Interpretative History of Japan Written in 1219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1] 서적 Japanese Politics: Fixed and Floating Worlds https://books.google[...] Prentice Hall
[22] 서적 Emperor Yuryaku and His Era Yoshikawa Kobunkan
[23] 서적 Kojiro Naoki talks about the ancient times 6: The formation of ancient states: from the Yuryaku dynasty to the Keitai and Kinmei dynasties Yoshikawa Kobunkan
[24] 서적 Understanding the Nihonshoki and Songshu: The Mysterious Fourth Generation Machine and the Five Kings of Wa Seishun Publishing Co., Ltd., Seishun Shinsho Intelligence
[25] 서적 A History of Writing in Japan Brill Academic Publishers
[26] 서적 The Emergence of Japanese Kingship Stanford University Press
[27] 서적 Kojiro Naoki talks about the ancient times 6: The formation of ancient states: from the Yuryaku dynasty to the Keitai and Kinmei dynasties Yoshikawa Kobunkan
[28] 서적 Emperor Yuryaku and His Era Yoshikawa Kobunkan
[29] 웹사이트 Regarding plasma preservation treatment of inlaid artifacts https://www.tobunken[...] Tokyo National Research Institute for Cultural Properties
[30] 서적 Detailed explanation of Japanese history Yamakawa Publishing
[31] 서적 A History of the Japanese Peopl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end of the Meiji Era https://archive.org/[...] Encyclopaedia Britannica Company
[32] 서적 Nihongi: Chronicles of Japan from the Earliest Times to A.D. 697, Volume 2 https://books.google[...] The Japan Society London 1896
[33] 서적 Gateway to Japan: Hakata in War and Peace, 500-130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34] 서적 East Asian Ethnic History 1 Official History of the Toiden Heibonsha
[35] 서적 Wakokuden: Japan depicted in official Chinese history Kodansha Academic Library
[36] 서적 Emperor Yuryaku and His Era Yoshikawa Kobunkan
[37] 서적 The Five Kings of Wa: Throne Succession and East Asia in the Fifth Century Chuoko Shinsho
[38] 서적 The Five Kings of Wa: 5th Century East Asia and the Statue of the Wa Kings Yamakawa Publishing Co., Ltd.
[39] 서적 Hiokiso Nishimachi Kiln System Haniwa and Kawachi Otsukayama Kofun Haniwa Study Group
[40] 서적 Wa Kingship and the Anterior and Posterior Mounds Hakushobo
[41] 서적 The Emperor Oho-Hatsuse Wakatake https://books.google[...] London: Kegan Paul, Trench, Trubner
[42] 학술지 古事記崩年干支に関する数理的検討 http://id.nii.ac.jp/[...] 情報処理学会 2023-10-30
[43] 학술지 古事記崩年干支に関する数理的検討 http://id.nii.ac.jp/[...] 情報処理学会 2023-10-30
[44] 서적
[45] 서적
[46] 서적
[47] 서적
[48] 서적
[49] 문서 即位8年を機械的に西暦に換算すると464年となるが、『三国史記』新羅本紀によれば倭人が462年(慈悲麻立干5年)5月に新羅の活開城を攻め落とし、463年(慈悲麻立干6年)2月にも侵入したが、最終的に新羅が打ち破ったと記載されている。
[50] 문서 雄略天皇20年を西暦に換算すると476年となるが、『日本書紀』が引用する『百済記』では乙卯年(475年)とする。『三国史記』高句麗本紀・百済本紀によれば、475年(高句麗長寿王63年・百済蓋鹵王21年)9月に高句麗に都を攻め落とされて蓋鹵王は殺され、子の文周王は同年熊津に遷都している。『日本書紀』が引用する『日本旧記』では文周王でなく末多王(東城王)に久麻那利を与えたという。
[51] 문서 即位23年を西暦に換算すると479年であり、『三国史記』にも同年東城王が即位したとある。
[52] 서적 日本書紀(三) 岩波書店
[53] 간행물 ヤマト王権中枢部の有力地域集団 国立歴史民俗博物館研究報告 第211 集
[54] 서적 事典陵墓参考地 もうひとつの天皇陵 吉川弘文館
[55] 간행물 日置荘西町窯系埴輪と河内大塚山古墳 埴輪論叢
[56] 서적 倭王権と前方後円墳 塙書房
[57] 문서 ただし、『古事記』では一言主の威を畏れた雄略天皇が、弓と矢を捨て衣服まで脱いで伏し拝んだと記されている。
[58] 웹사이트 御由緒 {{!}} 八方除 寒川神社 https://samukawajinj[...] 2023-06-14
[59] 웹사이트 石徹白の歴史・沿革 http://www.gujo.ed.j[...] 2023-06-14
[60] 웹사이트 湯島天満宮縁起 https://www.yushimat[...] 2023-06-14
[61] 웹사이트 宮内の嫐打ち神事 /とっとり文化財ナビ /とりネット /鳥取県公式ホームページ http://db.pref.totto[...] 鳥取県 地域社会振興部 文化財局 文化財課 2024-12-05
[62] 웹사이트 Manyoshu [Book 1] http://etext.lib.vir[...] バージニア大学 2010-01-08
[63] 웹사이트 Manyoshu [Book 9] http://etext.lib.vir[...] バージニア大学 2010-01-08
[64] 서적 画期としての雄略朝 塙書房
[65] 뉴스 "空白の五世紀" 大きな発見 稲荷山出土の鉄剣から、雄略天皇の名解読 毎日新聞 1978-09-19
[66] 서적
[67] 서적
[68] 서적
[69] 서적
[70] 서적
[71] 논문
[72] 서적 ヤマト王権 岩波新書
[73] 논문
[74] 논문
[75] 서적 東アジア民族史 1 正史東夷伝 平凡社
[76] 서적 倭国伝 中国正史に描かれた日本 講談社
[77] 문서 逕
[78] 문서
[79] 웹사이트 漢籍電子文献資料庫 http://hanchi.ihp.si[...]
[80] 논문
[81] 논문
[82] 논문
[83] 논문
[84] 논문
[85] 논문
[86] 문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사카모토노아손
[87] 문서 일본 고대 장신구
[88] 문서 닌켄 천황과 겐조 천황의 아버지
[89] 문서 일본 건축에서 신사의 마룻대 위 장식
[90] 서적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91] 문서 유랴쿠 천황과 와카히메, 호시카와카미야 황자의 이야기
[92] 문서 다카하시 황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