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조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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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겐조 천황은 일본의 제23대 천황으로, 485년부터 487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아버지 이치노헤노시하 황자가 유랴쿠 천황에게 살해된 후 형 닌켄 천황과 함께 도망쳐 숨어 지내다 세이네이 천황의 후계자가 없어 왕족임을 밝히고 궁중에 들어가 닌켄 천황에게 왕위를 양보받아 즉위했다. 그는 백성을 아끼는 정치를 펼쳤으며,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겐조 천황의 무덤은 나라현에 위치해 있으며, 그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과 함께, 고대 일본의 민속적 배경을 보여주는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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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조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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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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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겐조 천황 |
원래 이름 | 顕宗天皇 (Kenzō-tennō) |
휘 | 오케 (弘計) |
시호 (한풍) | 겐조 (顕宗) |
시호 (화풍) | 오케노 이와스와케노 미코토 (袁祁之石巣別命) |
재위 | 485년 2월 1일 – 487년 6월 2일 (전통적 날짜) |
능호 | 가타오카노이와츠키노오카노키타 능 (傍丘磐坏丘南陵) |
출생 | 450년 |
사망 | 487년 6월 2일 (향년 36–37세) |
사망 장소 | 야마토 아스카 |
매장지 | 가타오카노이와츠키노오카노미나미노미사사기 (나라) |
정치 | |
작위 | 일본 천황 |
전임자 | 세이네이 천황(또는 이이토요 왕녀) |
후임자 | 닌켄 천황 |
왕조 | 일본 황실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이치노베노오시와 |
어머니 | 와에히메 |
배우자 | 나니와노오노 왕녀 |
2. 생애
《일본서기》에 따르면 안코 천황 3년 10월 1일, 아버지인 이치노헤노시하 황자(市辺押磐皇子)가 유랴쿠 천황에게 살해당하고, '''오케'''(弘計, 후의 겐조 천황)는 형인 '''오케'''(億計, 후의 닌켄 천황)와 함께 도망쳐 숨었다.[5] 단바국(丹波国) 요사군(与謝郡, 지금의 일본 교토부 단고 반도의 동쪽)으로 갔고, 이후 하리마국(播磨国) 아카시(明石)며 미키(三木)의 시로(志染) 동굴에 숨어 살면서 형제 모두 이름을 다니와노 와라와(丹波小子)라 바꾸고 시지미노미야케노 오비토(見屯倉首)를 섬기며 오랫동안 말과 소의 사육에 종사하고 있었다.[6]
세이네이 천황 재위 2년 11월에 니야(新室)에서 벌어진 연회 자리에서 노래로서 스스로 왕족임을 밝혔다.[6] 아이가 없었던 세이네이 천황은 기뻐하며 칙사를 보내 이듬해 두 황자를 궁중에 맞아들이고, 4월 7일(5월 10일)에 형인 '''오케'''(億計)를 황태자로 삼았다. '''오케'''(弘計) 자신은 황자가 되었다.
세이네이 천황이 재위 5년 2월 27일에 사망하고, 황태자였던 '''오케'''(億計)는 신분을 밝힌 큰 공로를 이유로 남동생 '''오케'''(弘計)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고, '''오케'''(弘計)는 이를 사양하면서 한동안 공석이 된 왕위를 이이토요노키요 황녀(飯豊青皇女)가 집정하였다. 결과적으로 형의 설득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오케'''(弘計)가 '''겐조 천황'''으로 즉위하였다.[7] 황태자는 '''오케'''(億計)가 계속해서 맡았는데, 천황의 형이 황태자였던 사례는 그 이후 찾아볼 수 없다.
죄없이 죽임을 당한 아버지를 조문하고, 또한 아버지를 죽인 유랴쿠 천황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무덤을 파괴하려 했으나, 외지에서 오랜 생활을 한 탓에 민중을 아끼고 사랑하는 정치를 했다고 전한다.
재위 3년 4월 25일에 사망하였다. 《고사기(古事記)》에는 38세(다만 치세는 8년이라고도 한다), 《일대요기(一代要記)》에는 48세로 되어 있으며, 즉위 전에 시비노오미(志毘臣, 헤구리 씨(平群氏))과 사랑 싸움을 벌이다 밤에 그를 습격해 죽였다는 이야기도 《고사기》에 전하고 있다.
2. 1. 어린 시절과 도피
《일본서기》에 따르면 안코 천황 3년 10월 1일, 아버지인 이치노헤노시하 황자(市辺押磐皇子)가 유랴쿠 천황에게 살해당하자,[5] '''오케'''(弘計, 후의 겐조 천황(顕宗天皇, 일본 제23대 천황))는 형인 '''오케'''(億計, 후의 닌켄 천황(仁賢天皇, 일본 제24대 천황))와 함께 도망쳐 숨었다.[6] 단바국(丹波国) 요사군(与謝郡, 지금의 일본 교토부 단고 반도의 동쪽)으로 갔고, 이후 하리마국(播磨国) 아카시(明石)며 미키(三木)의 시로(志染) 동굴에 숨어 살면서 형제 모두 이름을 다니와노 와라와(丹波小子)라 바꾸고 시지미노미야케노 오비토(見屯倉首)를 섬기며 오랫동안 말과 소의 사육에 종사하고 있었다.[6]
세이네이 천황 2년 11월, 오타테라는 자가 천황의 다이조사이(大嘗祭, 신조사이(新嘗祭)라고도 함)를 위해 하리마로 파견되었으며, 시지미노 미야케노 오비토의 신축 축하연에 방문했다. 이때 구메노와카코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6] 아이가 없었던 세이네이 천황은 기뻐하며 칙사를 보내 이듬해 두 황자를 궁중에 맞아들였다.[6]
《고지키》에 따르면, 호케(엔키) 왕은 우다노 오비토(菟田首)의 딸 오오오(大魚)를 좋아하여 시비노 오미(志毘臣)와 사랑 싸움을 벌였고, 이를 야습하여 주살했다고 한다. 시비노 오미는 《니혼쇼키》에서의 헤구리노 시비와 동일 인물로 여겨지며, 시비는 《고지키》의 시비노 오미와 마찬가지로 사랑 싸움이 발단이 되어 주살되지만, 《니혼쇼키》에서는 사랑 싸움의 상대가 부레쓰 천황, 싸움의 대상이 된 여성은 모노노베노 아라카비의 딸 카게히메(影媛)가 된다[12]。
2. 2. 황족 신분 회복
《일본서기》에 따르면 안코 천황 3년 10월 1일, 아버지인 이치노헤노시하 황자(市辺押磐皇子)가 유랴쿠 천황에게 살해당하고, '''오케'''(弘計, 후의 겐조 천황(顕宗天皇, 일본 제23대 천황))는 형인 '''오케'''(億計, 후의 닌켄 천황(仁賢天皇, 일본 제24대 천황))와 함께 도망쳐 숨었다.[5] 단바국(丹波国) 요사군(与謝郡, 지금의 일본 교토부 단고 반도의 동쪽)으로 갔고, 이후 하리마국(播磨国) 아카시(明石)며 미키(三木)의 시로(志染) 동굴에 숨어 살면서 형제 모두 이름을 다니와노 와라와(丹波小子)라 바꾸고 시지미노미야케노 오비토(見屯倉首)를 섬기며 오랫동안 말과 소의 사육에 종사하고 있었다.[6]세이네이 천황 재위 2년 11월에 니야(新室)에서 벌어진 연회 자리에서 노래로서 스스로 왕족임을 밝혔다.[6]에 따르면, 그들은 하리마 국의 아카시에서 은신하며 숨어 살았다. 당시의 역사 기록은 두 형제가 평범한 목동 행세를 하며 이 시골 공동체에 융화되려 했다고 설명한다. 오타테라는 자가 천황의 다이조사이(大嘗祭, 신조사이(新嘗祭)라고도 함)를 위해 하리마로 파견되었으며, 시지미노 미야케노 오비토의 신축 축하연에 방문했다. 구메노와카코는 신분을 밝힐 때가 지금밖에 없다고 형에게 호소했다. 형은 목숨을 아껴 간했지만 동생의 결의가 굳어 결국 형제는 목숨을 걸게 되었다. 그리고 축하연 자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와 노래에 담아 왕족의 신분을 밝혔다. 아이가 없었던 세이네이 천황은 기뻐하며 칙사를 보내 이듬해 두 황자를 궁중에 맞아들이고, 4월 7일(5월 10일)에 형인 '''오케'''(億計)를 황태자로 삼았다. '''오케'''(弘計) 자신은 황자가 되었다.
세이네이 천황(清寧天皇))이 재위 5년 2월 27일에 사망하고, 황태자였던 '''오케'''(億計)는 신분을 밝힌 큰 공로를 이유로 남동생 '''오케'''(弘計)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고, '''오케'''(弘計)는 이를 사양하면서 한동안 공석이 된 왕위를 이이토요노키요 황녀(飯豊青皇女)가 집정하였다. 결과적으로 형의 설득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오케'''(弘計)가 '''겐조 천황'''(顕宗天皇, 일본 제23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7] 황태자는 '''오케'''(億計)가 계속해서 맡았는데, 천황의 형이 황태자였던 사례는 그 이후 찾아볼 수 없다.
죄없이 죽임을 당한 아버지를 조문하고, 또한 아버지를 죽인 유랴쿠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무덤을 파괴하려 했으나, 외지에서 오랜 생활을 한 탓에 민중을 아끼고 사랑하는 정치를 했다고 전한다.
《고사기(古事記)》에 따르면, 호케(엔키) 왕은 우다노 오비토(菟田首)의 딸 오오오(大魚)를 좋아하여 시비노 오미(志毘臣)와 사랑 싸움을 벌였고, 이를 야습하여 주살했다고 한다. 시비노 오미는 《일본서기》에서의 헤구리노 시비와 동일 인물로 여겨지며, 시비는 《고사기》의 시비노 오미와 마찬가지로 사랑 싸움이 발단이 되어 주살되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사랑 싸움의 상대가 부레쓰 천황, 싸움의 대상이 된 여성은 모노노베노 아라카비의 딸 카게히메(影媛)가 된다[12]。
2. 3. 즉위와 아버지의 복수
《일본서기》에 따르면 안코 천황(安康天皇) 3년 10월 1일, 아버지인 이치노헤노시하 황자(市辺押磐皇子)가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에게 살해당하고, '''오케'''(弘計, 후의 겐조 천황(顕宗天皇, 일본 제23대 천황))는 형인 '''오케'''(億計, 후의 닌켄 천황(仁賢天皇, 일본 제24대 천황))와 함께 도망쳐 숨었다. 단바국(丹波国) 요사군(与謝郡, 지금의 일본 교토부 단고 반도의 동쪽)으로 갔고, 이후 하리마국(播磨国) 아카시(明石)며 미키(三木)의 시로(志染) 동굴에 숨어 살면서 형제 모두 이름을 다니와노 와라와(丹波小子)라 바꾸고 시지미노미야케노 오비토(見屯倉首)를 섬기며 오랫동안 말과 소의 사육에 종사하고 있었다.세이네이 천황(清寧天皇) 재위 2년 11월에 니야(新室)에서 벌어진 연회 자리에서 노래로서 스스로 왕족임을 밝혔다. 아이가 없었던 세이네이 천황은 기뻐하며 칙사를 보내 이듬해 두 황자를 궁중에 맞아들이고, 4월 7일(5월 10일)에 형인 '''오케'''(億計)를 황태자로 삼았다. '''오케'''(弘計) 자신은 황자가 되었다.
세이네이 천황(清寧天皇))이 재위 5년 2월 27일에 사망하고, 황태자였던 '''오케'''(億計)는 신분을 밝힌 큰 공로를 이유로 남동생 '''오케'''(弘計)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고, '''오케'''(弘計)는 이를 사양하면서 한동안 공석이 된 왕위를 이이토요노키요 황녀(飯豊青皇女)가 집정하였다. 결과적으로 형의 설득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오케'''(弘計)가 '''겐조 천황'''(顕宗天皇, 일본 제23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황태자는 '''오케'''(億計)가 계속해서 맡았는데, 천황의 형이 황태자였던 사례는 그 이후 찾아볼 수 없다.
즉위한 해, 치목 노구(오키메노오미나)의 안내로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내어 다시 능을 쌓았다. 천황은 치목의 공적을 칭찬하며 궁중에 거처를 마련하게 했지만, 그녀는 다리가 약해져 궁중에 밧줄을 치고 탁(鐸)을 걸어 걷게 했다. 그러나 이듬해 9월, 치목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천황은 그녀를 배웅하며 시를 읊었다.
즉위 2년,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의기명에게 유랴쿠 천황의 능을 파괴하라고 명했으나, 의기명은 "오하츠세 천황은 아버지의 원수이면서 숙부(실제로는 사촌)이며, 천하를 다스린 천황이므로, 그 능을 파괴하면 후세 사람들의 비방을 살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머레이는 겐조 천황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주요 사건은 살해된 그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관련된 것이라고 전한다. 겐조 천황은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하여 황제의 아들이자 또 다른 황제의 아버지에 걸맞은 능에 재매장하도록 조치했다.[10]
2. 4. 죽음
겐조 천황은 3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재위 기간은 단 3년이었다.[8] 그 역시 후계자가 없었기에 그의 형제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황후는 오카노와쿠고 친왕의 딸(이와키 친왕의 손녀이자 유랴쿠 천황의 증손녀)인 나니와노오노/難波小野王일본어; 489년 사망)였다. 겐조 천황의 실제 묘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2] 겐조 천황은 전통적으로 오사카에 있는 신사 기념 신사 (''미사사기'')에서 숭배받는다. 궁내청은 이곳을 겐조 천황의 능으로 지정했다. 공식 명칭은 ''Kataoka no Iwatsuki no oka no kita no misasagi''이다.[11]3. 기노오이와노스쿠네의 난
《일본서기》에 따르면 겐조 천황이 사망한 해에, 한반도의 임나에서 기노오이와노스쿠네(紀生磐宿禰)가 삼한(三韓)의 왕이 되고자 가야인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백제(百濟)의 공격으로 실패하고 기노오이와노스쿠네는 왜(倭)로 돌아갔다는 기사를 전하고 있다.
4. 가족 관계
- 조부 : 일본 제17대 리추 천황(336?~405)
- 조모 : 구로히메(黒媛)
- 아버지 : 이와사카오리치노헤노오시하노미코(磐坂市辺押磐皇子, ?~456)
- 어머니 : 하에히메(荑媛)
- 황후 : 나니와노오노노미코(?~489), 오카노와쿠고 친왕의 딸 (이와키 친왕의 손녀이자 유랴쿠 천황의 증손녀)
『일본서기』에는 황자녀에 대한 기재가 없고, 『고사기』에도 "자식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5. 연표
- 인교 천황 39년?
- * 탄생[13]
- 안강 천황 3년
- * 10월, 아버지 이치노베노오시와 황자가 오오하츠세 황자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형인 오케 왕과 함께 도망쳤다.[13]
- * 11월, 오오하츠세 황자가 유랴쿠 천황으로 즉위했다.[13]
- 유랴쿠 천황 23년
- * 8월, 유랴쿠 천황 붕어[13]
- 세이네이 천황 원년
- * 1월, 시라카 천황이 즉위했다.[13]
- 세이네이 천황 2년
- * 11월, 형인 오케 왕과 함께 하리마에서 발견되었다.[13]
- 세이네이 천황 3년
- * 1월, 형인 오케 왕과 함께 황자로 인정받아 궁중에 들어갔다.[13]
- * 4월, 오케 왕이 태자가 되었다.[13]
- 세이네이 천황 5년
- * 1월, 시라카 천황이 붕어. 오케 황자와 왕위를 서로 양보하였다. 다카기노츠노사시노미야에 도읍이 옮겨지고, 이토요노아오노히메미코가 섭정했다.[13]
- * 11월, 이토요노아오노히메미코 훙거[13]
- 겐조 천황 원년
- * 1월, 지카아스카노야츠리노미야에서 즉위. 태자는 오케 황자 그대로였다.[13]
- * 2월, 아버지 이치노베노오시와 황자의 유골을 발견했다.[13]
- 겐조 천황 2년
- * 8월, 오오하츠세 천황의 능을 파괴하려 했으나 오케 황자에게 간언받았다.[13]
- 겐조 천황 3년
- * 4월, 후쿠쿠사베를 정했다.[13]
- * 4월, 붕어[13]
- 닌켄 천황 원년
- * 1월, 오케 황자가 즉위했다.[13]
- * 4월, 소노오카노이와사카노오카노미사사기에 장사지냈다.[13]
6. 무덤
겐조 천황의 능(미사사기)은 '''방구강환구남릉'''(카타오카노이와츠키노오카노미나미노미사사기)이다. 궁내청에 의해 나라현카시바시 키타이마이치의 고분에 지정되어 있으며, 궁내청상의 형식은 전방후원분이다.[14]
(나라현카시바시)
나라현야마토타카다시 츠키야마에 있는 궁내청의 '''반원능묘참고지'''(이와소노료보산코치)에서는 겐조 천황이 피장 후보자로 상정되어 있다.[14] 유적명은 "츠키야마 고분"이다.
황거에서는 황령전(궁중삼전 중 하나)에서 다른 역대 천황·황족과 함께 천황의 영이 제사 지내지고 있다. 또한 고베시니시구 오시베다니초 키즈에는 겐조·닌켄 양 제를 제신으로 하는 겐조닌켄 신사가 있다. 이 신사 외에도 니시구 내나 아카시시에는 연고를 칭하는 신사가 많이 있다.
7. 평가 및 의의
쓰다 소키치는 억계(겐조 천황)·홍계(닌켄 천황) 2왕의 발견담은 전형적인 귀종류리담이기 때문에, 그 사실성을 의심하여,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15]
"현종 천황(오케), 인현 천황(오케)의 아버지(이치노베노오시와 황자)는 권력 다툼으로 웅략 천황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하리마 국으로 도망쳐, 말, 소를 치는 노예가 되어 몸을 숨겼다. 연회 자리에서, 형제는 춤을 추고, 이중 천황의 손자임을 노래 가사로 나타내, 아이가 없었던 청녕 천황은 이것을 받아들여, 궁정에 올리고, 자신의 황태자와 황자로 삼았다."라는 기기 소전의 내용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 그 원인이다.
천황의 손자였던 인물이 소나 말을 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나, 춤의 노래로부터 처음으로 신분이 귀한 신분임이 밝혀져, 궁에 올라 천황으로 즉위했다는 것은 너무나 극적인 전개이다. 이는 태생이 귀한 신분의 인물이 실망한 신세가 되어, 유랑의 여행을 하고 성장하는 귀종류리담의 전형적인 것이다. 왜 이러한 이야기가 구사에 받아들여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최근에는 이 전승에 사실성을 인정하는 설도 나오고 있다. 형제가 기내 주변을 방황하고, 성스러운 신실 연회에서 주문을 외운 것, 홍계의 별명인 "구메노와카코"가 구메마이를 계승하는 구메베를 연상시키는 것, 가구라가에서의 추임새를 "오케오케"라고 하는 것 등에서, 당시에 거슬러 올라가는 민속적 배경이 엿보인다.
히라타 아츠타네는 양서에 등장하는 부상국의 국왕 '''을기'''(오케)가, 인현 천황의 이름 '''억계'''(오케)와 통하는 것, 재위 연대도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부터, 을기는 인현 천황이며 부상국은 일본이라고 주장했다.
양 황자 발견담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해도 "사실이 아닌 이야기·전설이 부가되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인물로서의 실존성이나 천황 계통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16]
참조
[1]
웹사이트
Genealogy of the Emperors of Japan
http://www.kunaicho.[...]
Kunaicho.go.jp
2013-08-29
[2]
웹사이트
顕宗天皇 (23)
http://www.kunaicho.[...]
2013-08-29
[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4]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5]
서적
Japan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서적
Nihongi
1998
[10]
서적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11]
문서
[12]
논문
『日本書紀』の編纂と大伴氏の伝承
塙書房
2012
[13]
서적
日本書紀(三)
岩波書店
[14]
서적
事典陵墓参考地 もうひとつの天皇陵
吉川弘文館
2005
[15]
서적
もう一度学びたい古事記と日本書紀
西東社
2006
[16]
문서
田中卓、安本美典な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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