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도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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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무라 도쿠타로는 일본의 법조인, 정치인, 검도인이다. 그는 1886년 나라현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시데하라 내각에서 검찰총장, 요시다 내각에서 법무대신을 역임했으며, 공직 추방 이후 법무총재를 거쳐 참의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전일본검도연맹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검도와 일본도 수집에도 조예가 깊었다. 훈일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았으며, 198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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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라 도쿠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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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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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
출생일 | 1886년 2월 7일 |
출생지 | 나라현 고조정 |
사망일 | 1982년 8월 8일 |
출신 학교 |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현 도쿄대학 법학부) |
전직 | 변호사 |
소속 정당 | ( 무소속 →) 자유민주당 (이시이파) |
칭호 및 훈장 | 정삼위 [[파일:JPN Zuiho-sho 1Class BAR.svg|40px]] 훈1등 서보장 [[파일:JPN Kyokujitsu-sho 1Class BAR.svg|40px]] 훈1등 욱일대수장 전일본검도연맹 검도전당 현창 |
정치 경력 | |
초대 방위청 장관 | 내각: 제5차 요시다 내각 임기 시작일: 1954년 7월 1일 임기 종료일: 1954년 12월 10일 |
초대 - 제2대 보안청 장관 | 내각: 제4차 요시다 내각, 제5차 요시다 내각 임기 시작일: 1952년 10월 30일 임기 종료일: 1954년 6월 30일 |
초대 법무대신 | 내각: 제3차 요시다 제3차 개조 내각 임기 시작일: 1952년 8월 1일 임기 종료일: 1952년 10월 30일 |
제8대 행정관리청 장관 | 내각: 제3차 요시다 제3차 개조 내각 임기 시작일: 1952년 1월 18일 임기 종료일: 1952년 4월 5일 |
제6대 법무총재 | 내각: 제3차 요시다 제3차 개조 내각 임기 시작일: 1951년 12월 26일 임기 종료일: 1952년 8월 1일 |
제47대 사법대신 | 내각: 제1차 요시다 내각 임기 시작일: 1946년 5월 22일 임기 종료일: 1947년 5월 24일 |
제19대 검찰총장 | 임기 시작일: 1946년 2월 8일 임기 종료일: 1946년 5월 22일 |
참의원 의원 | 선거구: 나라현 선거구 당선 횟수: 2회 임기 시작일: 1953년 4월 24일 임기 종료일: 1965년 6월 1일 |
2. 약력
- 1886년(메이지 19년): 나라현 고죠정에서 키무라 이노쿠라와 마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 1907년 (메이지 40년): 구제 고죠 중학교를 거쳐 구제 제7고등학교 조시관을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다.
- 1911년 (메이지 44년): 도쿄제국대학교 법학부 영법과를 졸업하고, 변호사 등록. 후에 제국변호사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 1941년 (쇼와 16년): 대일본무덕회 검도부 회장에 취임했다.
- 1946년 (쇼와 21년): 시데하라 내각의 검찰총장, 제1차 요시다 내각의 법무대신 (민간인 각료).
- 1947년 (쇼와 22년): 공직추방.
- 1950년 (쇼와 25년): 추방 해제[1].
- 1951년 (쇼와 26년): 제1도쿄변호사회 회장. 제3차 요시다 제3차 개조 내각의 법무총재. 모리타 마사지, 우메츠 칸베이와 반공 抜刀隊의 설립을 계획.
- 1952년 (쇼와 27년): 제3차 요시다 제3차 개조 내각의 행정관리청장관(일시 겸임), 법무대신. 제4차 요시다 내각의 보안청장관. 전일본검도연맹 초대 회장에 취임.
- 1953년 (쇼와 28년): 제5차 요시다 내각의 보안청장관, 방위청장관.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당선.
- 1955년 (쇼와 30년): 재판관 소추위원회 위원.
- 1956년 (쇼와 31년): 검찰관 적격심사회 위원.
- 1959년 (쇼와 34년): 제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당선. 헌법조사위원회 위원장.
- 1962년 (쇼와 37년): 재단법인 일본무도관 부회장.
- 1967년 (쇼와 42년): 자유민주당의 원외단 「자유민주당 동지회」회장.
- 1974년 (쇼와 49년): 전일본검도연맹 회장을 사임하고 명예회장. 훈일등 욱일대수장 수상.
- 1982년 (쇼와 57년): 사망(향년 97세).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자유민주당 준당장례 집행. 묘소는 다마 령원[2].
- 2003년 (헤이세이 15년): 전일본검도연맹 검도전당에 헌장됨.
2. 1. 정계 활동
일본의 패전 직후 정관계에 진출하여 시데하라 기주로 (Shidehara Kijūrō) 수상에 의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지는 요시다 시게루 (Yoshida Shigeru) 내각에서는 사법대신으로 첫 입각하였다. 1946년(쇼와 21년) 11월 3일에 공포된 일본국 헌법에는 수상 요시다 시게루, 무임소 국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에 이어 세 번째로 서명하였다.[3]이후, 공직에 관한 취업금지, 퇴직 등에 관한 칙령(公職に関する就職禁止、退職等に関する勅令)에 따라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나, 추방 해제 직후 제3차 요시다 내각 개조 시 법무부 초대 총재로 다시 입각하였다. 법무총재 시절 치안경비 상황에 관한 건으로 중의원 행정감찰 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소환되었다.[4] 또한 1953년 참의원 선거에서 나라현에서 참의원으로 당선되어 2기 동안 재직하였다.
법무총재·법무대신으로서 일본공산당의 폭력혁명에 대한 우려로 치안대책 수립의 중심이 되어, 자신이 제출한 파괴활동방지법(破防法)을 성립시켰다. 1952년(쇼와 27년) 5월 1일에 발생한 피의 메이데이 사건에서는 불신임안이 제출되었으나 부결되어 위기를 넘겼다. 피의 메이데이 사건의 소란은 법무총재실에서 목격하였으며, 취재에 대해 "저것은 혁명의 예행연습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국인에게 그런 폭행을 가한 것은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일본에 큰 오점을 남겼다"라고 말했고, 사건 다음 날 중의원 법무위원회 공청회에서는 파괴활동방지법만 있었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5]
안보투쟁 당시에는 경찰력을 보강하기 위해 전국의 도박꾼(博徒), 노점상(的屋), 폭력단(愚連隊)을 결집한 “반공 抜刀隊” 계획을 전 대일본국수회(大日本国粋会) 이사장 우메쓰 간베에(梅津勘兵衛)에게 제안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메쓰의 사후 모리타 마사시(森田政治)에게 계승되어, 일본국수회(國粹会)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경찰예비대에서 보안대, 경비대로 이어지는 재군비 정책에도 관여하여, 보안청 장관(자위대 발족 후에는 측면 이동으로 방위청 장관)과 대우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보안청 장관 시절인 1953년(쇼와 28년) 6월 9일, 기자단에게 경비 5개년 계획(1957년도에 보안대 20만 명, 함선 100000ton 이상, 항공기 1,000대 이상의 재건을 목표로 하는 장기 방위 계획)에 대해 발언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듬해 1954년(쇼와 29년)에 예비 자위관 제도를 설치하였다.
정계 은퇴 후에는 1967년(쇼와 42년) 10월 자유민주당의 원외단(院外団) “자유민주당 동지회(自由民主党同志会)” 회장에 취임하여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게다가 거리 상인 조합(노점상들의 모임) 고문과의 관계로 원외단의 정치 활동의 배후 실무적 입장에도 있었다.
2. 2. 검도인으로서의 활동
기무라 도쿠타로는 고등학교 시절 격검부(검도부)에 들어가 북진일도류의 고바야시 사다유키(小林定之)에게 검도를 배웠다. 학업보다 검도를 우선시하여 새벽부터 맹훈련을 했다고 하며, 2학년 때는 검도부원 7명과 함께 자취를 시작했다. 대학교에서도 격검부에 소속되어 키노시타 토시노리(木下寿徳), 야마자토 타다노리(山里忠徳), 나카야마 히로미치(中山博道) 사범에게서 검도를 배웠다. 가쿠슈인(学習院) 원장 노기 기덴(乃木希典)이 출稽古(출장 연습)를 왔을 때 상대를 맡은 적도 있었다.1941년,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徳会) 검도부 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나카쿠라 키요시(中倉清) 등 검도가들이 유파를 초월한 검도회를 만들고자 기무라에게 상담했고, 기무라는 흔쾌히 승낙하여 『논어(論語)』에서 따온 "사제회(思斉会)"라는 이름을 짓고 스스로 회장에 취임했다. 사제회는 전후 검도 부흥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지령에 따라 대일본무덕회는 해산되었고, 검도의 조직적인 활동은 금지되었다. 1947년 5월에는 기무라도 공직에서 추방되었지만, 검도 부흥에 전력을 다했다. 1952년,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같은 해 10월 14일, 전일본검도연맹(全日本剣道連盟)이 발족함과 동시에 회장에 취임했다.
1974년, 회장직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에 취임했다. 후임 회장은 전 최고재판소장(最高裁判所長官) 이시다 카즈토(石田和外)였다. 1985년, 나라현의 호토쿠지(芳徳寺) 마사기자카켄젠도죠(正木坂剣禅道場)에 "기무라 도쿠타로(木村篤太郎)翁상"이 건립되었다.
일본도(日本刀)를 수집했고, 국보(国宝)·중요문화재급의 것은 모두 재단법인 도검박물관(財団法人刀剣博物館)에 기증했다. 애도는 나가소네 코테츠 고쇼(長曽禰虎徹興正)였다. 고령이 되어서도 이아이(居合)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검도 대회에서 이아이를 연무(演武)한 적도 있었다.
3. 생애와 인물
기무라 도쿠타로는 검사이자 정치가이며, 검도가로서도 활약한 인물이다.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 정계에 진출하여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에서 검찰총장,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사법대신을 역임했다. 1946년 일본국 헌법 공포 시 요시다 시게루 수상, 시데하라 기주로 무임소 국무대신에 이어 세 번째로 서명했다.[3]
공직 추방 후 제3차 요시다 내각 개조 시 법무부 초대 총재로 재입각, 일본공산당의 폭력혁명 우려에 대한 치안대책 수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자신이 제출한 파괴활동방지법을 성립시켰다. 1953년 참의원 선거에서 나라현에서 당선되어 2선 의원을 지냈다. 피의 메이데이 사건 당시 법무총재로서 불신임안이 제출되었으나 부결되었다.[5]
안보투쟁 당시 경찰력 보강을 위해 전국의 도박꾼, 노점상, 폭력단을 결집한 “반공 抜刀隊” 계획을 제안했다. 경찰예비대에서 보안대, 경비대로 이어지는 재군비 정책에도 관여하여 보안청 장관(자위대 발족 후에는 방위청 장관)과 대우회 회장을 역임했다.
정계 은퇴 후 1967년 자유민주당의 원외단 “자유민주당 동지회” 회장에 취임했다.
고등학교 시절 북진일도류의 고바야시 사다유키에게 검도를 배웠고, 대학교에서도 나카야마 히로미치 사범 등에게 검도를 배웠다. 1941년 대일본무덕회 검도부 회장에 취임, 나카쿠라 키요시 등 검도가들이 유파를 초월한 검도회 "사제회(思斉会)"를 만드는데 기여했다.[1]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지령에 따라 대일본무덕회는 해산되었고, 검도의 조직적인 활동은 금지되었다. 1952년 금지령 해제 후 전일본검도연맹이 발족함과 동시에 회장에 취임했다.[1] 1974년 명예회장에 취임했다.
일본도를 수집했고, 국보·중요문화재급 일본도는 도검박물관에 기증했다.
장인인 이노우에 아쓰타로가 사장이었던 게이오 전기 궤도(현 게이오 전철)의 전무이사를 지낸 적이 있다.
- “일원삼류(一源三流)”라는 말을 좋아하여 휘호했다.
- “낭인훈(浪人訓)”은 자유민주당 동지회의 슬로건이 되었다.
3. 1. 정치인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한 직후 정계에 진출하여 시데하라 기주로(Shidehara Kijūrō) 수상에 의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고,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내각에서는 사법대신으로 처음 입각하였다. 1946년 11월 3일에 공포된 일본국 헌법에는 요시다 시게루 수상, 시데하라 기주로 무임소 국무대신에 이어 세 번째로 서명하였다.[3]이후, '공직에 관한 취업금지, 퇴직 등에 관한 칙령'에 따라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나, 추방 해제 직후 제3차 요시다 내각 개조 시 법무부 초대 총재로 다시 입각하였다. 법무총재 시절 치안경비 상황에 관한 건으로 중의원 행정감찰 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소환되었다.[4] 1953년 참의원 선거에서는 나라현에서 참의원으로 당선되어 2선 의원을 지냈다.
법무총재·법무대신으로서 일본공산당의 폭력혁명에 대한 우려로 치안대책 수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자신이 제출한 파괴활동방지법(破防法)을 성립시켰다. 1952년 5월 1일에 발생한 피의 메이데이 사건에서는 불신임안이 제출되었으나 부결되었다. 피의 메이데이 사건 당시 법무총재실에서 소란을 목격했으며, 취재에 대해 "저것은 혁명의 예행연습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국인에게 그런 폭행을 가한 것은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일본에 큰 오점을 남겼다"라고 말했다. 사건 다음 날 중의원 법무위원회 공청회에서는 파괴활동방지법만 있었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5]
안보투쟁 당시에는 경찰력을 보강하기 위해 전국의 도박꾼, 노점상, 폭력단을 결집한 “반공 抜刀隊” 계획을 전 대일본국수회 이사장 우메쓰 간베에(梅津勘兵衛)에게 제안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메쓰의 사후 모리타 마사시(森田政治)에게 계승되어 일본국수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경찰예비대에서 보안대, 경비대로 이어지는 재군비 정책에도 관여하여, 보안청 장관(자위대 발족 후에는 방위청 장관)과 대우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보안청 장관 시절인 1953년 6월 9일, 기자단에게 경비 5개년 계획(1957년도에 보안대 20만 명, 함선 10만 톤 이상, 항공기 1,000대 이상의 재건을 목표)에 대해 발언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듬해인 1954년에는 예비 자위관 제도를 설치하였다.
정계 은퇴 후에는 1967년 10월 자유민주당의 원외단 “자유민주당 동지회” 회장에 취임하여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거리 상인 조합(노점상들의 모임) 고문과의 관계로 원외단의 정치 활동을 실무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3. 2. 검도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격검부(검도부)에 입부하여 북진일도류의 고바야시 사다유키(小林定之)에게 검도를 배웠다. 학업보다 검도를 우선시하여 새벽부터 맹훈련을 했다고 한다. 2학년 때는 검도부원 7명과 함께 집을 빌려 하숙 생활을 시작하며 자취를 하였다. 대학교에서도 격검부에 소속되어 키노시타 토시노리(木下寿徳), 야마자토 타다노리(山里忠徳), 나카야마 히로미치(中山博道) 사범에게서 검도를 배웠다. 가쿠슈인(学習院) 원장 노기 기덴(乃木希典)이 출稽古를 왔을 때 상대를 맡은 적도 있었다.[1]1941년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徳会) 검도부 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나카쿠라 키요시(中倉清) 등 검도가들이 유파파벌을 초월한 검도회를 만들고 싶어 기무라에게 상담했고, 기무라는 흔쾌히 승낙하여 『논어(論語)』에서 따온 "사제회(思斉会)"라는 이름을 짓고 스스로 회장에 취임했다. 사제회는 전후 검도 부흥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1]
종전 후,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지령에 따라 대일본무덕회는 해산되었고, 검도의 조직적인 활동은 금지되었다. 1947년 5월에는 기무라도 공직추방되었지만, 검도 부흥에 전력을 다했다. 1952년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같은 해 10월 14일, 전일본검도연맹(全日本剣道連盟)이 발족함과 동시에 회장에 취임했다.[1]
1974년 회장직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에 취임했다. 후임 회장은 전 최고재판소장(最高裁判所長官) 이시다 카즈토(石田和外)이었다. 1985년 나라현의 호토쿠지(芳徳寺)마사기자카켄젠도죠(正木坂剣禅道場)에 "기무라 도쿠타로(木村篤太郎)翁상"이 건립되었다.[1]
일본도(日本刀)를 수집했고, 국보(国宝)·중요문화재급의 것은 모두 재단법인 도검박물관(財団法人刀剣博物館)에 기증했다. 애도는 나가소네 코테츠 고쇼(長曽禰虎徹興正)였다. 고령이 되어서도 이아이(居合)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검도 대회에서 이아이를 연무(演武)한 적도 있었다.[1]
3. 3. 기타
장인인 이노우에 아쓰타로가 사장이었던 게이오 전기 궤도(현 게이오 전철)의 전무이사를 지낸 적이 있다. 기무라의 생가는 현재도 고조 신마치도리(고조 신마치)에 남아 있으며, "마치야칸"으로서 서재와 유품이 공개되고 있다.- “일원삼류(一源三流)”라는 말을 좋아하여 휘호(글씨나 그림을 붓으로 씀)했다.
- “낭인훈(浪人訓)”은 자유민주당 동지회의 슬로건이 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그 정도의 지위에 있지 않더라도 그 일을 행하며 자신의 쌀과 소금을 걱정하지 않고 국가의 경륜을 꾀하는 자가 낭인(떠돌아다니는 무사)이다. 즉, 낭인은 정부 또는 국민으로부터 의뢰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천하의 일에 임한다.
4. 수상 내역
5. 저서
- 《卆翁百話 抜抄》 (1984년 11월, 기무라 아츠타로 현창회)
- 《卆翁百話―문과 무의 유문》 (1989년 10월 10일, 시마즈 서방(島津書房)) ISBN 978-4882180210
참조
[1]
뉴스
二万余名を追放解除
日本経済新聞
1950-10-14
[2]
웹사이트
木村篤太郎
http://www6.plala.or[...]
2024-11-27
[3]
웹사이트
日本国憲法の御署名原本
https://www.archives[...]
2024-05-02
[4]
간행물
第13回国会 衆議院 行政監察特別委員会 第21号
https://kokkai.ndl.g[...]
1952-04-25
[5]
잡지
東京メーデー騒擾事件特集[告知板]治安関係首脳者
アサヒグラフ
1952-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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