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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친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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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친야도는 일본의 전통적인 숙박 시설이다. 에도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에도 시대, 메이지 시대, 쇼와 시대를 거치며 변화해왔다. 대한민국에도 기친야도와 유사한 숙박 시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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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친야도
기친야도
유형숙박 시설
위치일본
특징
설명에도 시대에 존재했던 저렴한 숙박 시설의 일종
주로 일용직 노동자나 가난한 여행자들이 이용
어원방세 대신 장작을 내는 것에서 유래
시설기본적인 숙박 공간만 제공
식사, 목욕 등의 서비스는 제공되지 않음
현대적 의미현대 일본에서는 저렴한 숙박 시설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

2. 역사

기친야도(木賃宿)는 원래 에도 시대 이전 가도 부근에서 여행자를 싼 값에 묵게 하던 여관을 의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변화하여,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저렴하고 조악한 숙박 시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에도 시대 이전에는 봉비(棒鼻)라고 불린 숙참 마을 외곽에 위치하여, 연료 비용 정도의 싼 값으로 여행자를 숙박시켰다. 에도 시대에는 메이와 연간(1764년~1772년)에 처음 개업한 기록이 있으며, 숙박자는 스스로 밥을 짓고 땔감 값을 지불해야 했다.

메이지 이후에는 숙참 제도가 없어지면서, 단순히 값싸고 조악한 숙소를 의미하게 되었다. 1887년에는 여관 영업 단속 규칙에 의해 나무 품삯 숙소의 정의가 규정되기도 했다. 도시 빈민가에 주로 위치하며, 노동자나 무숙자들이 묵는 열악한 시설로 묘사되기도 했다. "야도"를 거꾸로 한 "도야"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다.

쇼와 시대에는 가족 단위 숙박객을 위한 시설도 있었으며, 1931년에는 간이 여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32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14,451채의 나무 품삯 숙소가 있었고, 도쿄에만 33만 명이 넘는 숙박객이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현대까지 이어져 간이 숙소가 되었다.[1]

2. 1. 에도 시대 이전

에도 시대 이전의 가도 부근, 봉비(棒鼻)라고 불린 숙참 마을 외곽에 위치하여, 연료 비용 정도 또는 그에 상응하는 숙박료로 여행자를 숙박시킨 최하층 여관을 의미한다. 숙박자는 대개 대규모 방에서 묵었으며, 침구는 자가 부담인 경우가 많았다. 식사는 숙박객이 쌀 등 식자재를 내놓고 땔감 값 상당을 지불하여 요리해 먹는 것이 원칙이었다. 나무 품삯의 '나무'는 장작 대금을 의미하며, 목전 숙소(木錢宿)라고도 불렸다.[1]

2. 2. 에도 시대

메이와 연간(1764년~1772년)에 시타야 야마자키초(후의 만넨초)에서 니키 모씨가 처음 개업했다.[1] 숙박자는 스스로 밥을 짓고, 땔감 값으로 3문을 지불했다. 상인 숙소, 직인 숙소 등을 포함하기도 했다.

기소 가이도 육십 구차에 그려진 나무 품삯 숙소


도카이도 오십 삼차에 그려진 나무 품삯 숙소

2. 3. 메이지 시대 이후

숙참 제도가 없어진 메이지 이후에는, 단순히 저렴하고 조악한 숙박 시설이나 싼 숙소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1887년 10월 13일의 "여관 영업 단속 규칙"에서는 나무 품삯 숙소를 숙박 시설의 한 형태로, "식사를 제공하지 않고, 나무 품삯 및 기타 제 비용을 받고 사람을 숙박시키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1] 장소도 가도에서 도시부의 이른바 빈민가로 증가하여, 노동자나 무숙자를 대규모 방에 1인당 돗자리 한 장 정도로 잡숙하게 하는 빈민의 소굴이 되었다. 메이지 말기에 요코야마 겐노스케, 코토쿠 슈스이 등이 체험 조사를 실시하여 기록을 남겼는데, 실내나 침구(베개는 통나무)는 악취를 풍겨 불결하기 그지없고, 벼룩이나 빈대 등 기생충이 횡행하는 "보기에도 듣기에도 그저 놀라움과 두려움밖에 없는 별세계, 황천에도 이런 산 지옥이 있을까"라고 표현되는 열악한 시설이었다. "야도"를 거꾸로 한 "도야"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다.

2. 4. 쇼와 시대 이후

가족 단위로 지속적으로 숙박하는 사람들에게는 1실을 전세 내어, 가족이라면 몇 명이 숙박해도 좋다는 곳도 있었다.[1] 1931년 6월 23일, 경시청은 나무 품삯 숙소 조합 연합회의 희망에 따라 나무 품삯 숙소의 명칭을 간이 여관으로 개정했다. 1932년 12월 말, 전 현에서 영업하는 나무 품삯 숙소는 14451채였다. 도쿄 지방에서는 경시청령으로 나무 품삯 숙소 영업지가 한정되었고, 1932년 도쿄의 나무 품삯 숙소 478채에 숙박한 사람은 33만 4138명(남자 30만 1360명, 여자 3만 2778명)이었다. 이 형태의 나무 품삯 숙소는 현대까지 존속하여, 간이 숙소가 되었다.

3. 같이 보기

간이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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