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기쿠마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기쿠마번은 메이지 원년(1868년) 5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슨푸번으로 이봉되면서 누마즈 번주 미즈노 다다노리에게 가즈사국 이치하라군 기쿠마 일대의 영지를 하사하여 세워진 번이다. 미즈노 다다노리는 번청 건설과 번교 창설에 힘썼으나,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어 기쿠마 현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 기사라즈 현에 통합되었다. 기쿠마 번은 가즈사국 이치하라군과 미카와국에 영지를 두었으며, 번교 메이신칸을 개설하고, 테시마 세이이치 등 여러 인물을 배출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치하라시 - 쓰루마이번
    쓰루마이번은 1868년 이노우에 마사나오의 이봉으로 성립되었으나 1871년 폐지된 번으로, 영민들의 반발 속에서 산업 진흥과 사회 질서 유지 정책을 시행했으며 현재는 '일본 최후의 성하 마을'로 불린다.
  • 이치하라시 - 야와타번
    야와타번은 1610년 호리 가문이 지바현 야와타에 진야를 설치하며 성립된 1만 2천 석 규모의 작은 번으로, 항구 마을로서 번성했으나 1868년 번주 이전으로 폐지되었고 막부 말기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했다.
  • 미즈노 데와노카미가 - 다누마 오키마사
    다누마 오키마사는 에도 시대 인물로 다누마 오키쓰구의 아들이자 미즈노 다다토모의 양자이며, 아버지 실각 후 가문 재건을 위해 노력하여 옛 영지로 복귀했고 막부에서 오반가시라와 와카도시요리를 역임했다.
  • 미즈노 데와노카미가 - 미즈노 다다노리 (1851년)
    미즈노 다다노리는 에도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무사이자 다이묘, 화족으로, 누마즈 번 하타모토 출신으로 미즈노 다다자네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계승하고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신정부에 협력하여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화족의 지위를 유지했다.
  • 가즈사국의 번 - 류가사키번
    보신 전쟁 이후 요네키츠 씨가 영지를 옮겨와 시작된 류가사키번은 짧은 존속 기간 동안 재정난을 겪다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고 류가사키현이 설치되었다.
  • 가즈사국의 번 - 이치노미야번
    이치노미야번은 1826년 가노 히사토모가 가문 본부를 이전하면서 성립되었으며, 군대 현대화를 시도하고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을 지원했으며, 폐번치현으로 이치노미야현이 되었다.
기쿠마번
개요
국호菊間藩 (기쿠마 번)
위치이요 국 오치 군 기쿠마 (지금의 에히메 현 이마바리 시 기쿠마초)
번주 가문구루시마 씨
등급도자마 다이묘
석고1만 4천 석
역사
입번세키가하라 전투 후
번 성립게이초 6년 (1601년)
폐번메이지 4년 (1871년)
설명폐번치현으로 기쿠마 현이 됨
역대 번주
초대구루시마 야스치카 (종오위하, 분고노카미)
2대구루시마 나가치카 (종오위하, 분고노카미)
3대구루시마 미치하루 (종오위하, 분고노카미)
4대구루시마 미치마사 (종오위하, 분고노카미)
5대구루시마 미치타카 (종오위하, 분고노카미)
6대구루시마 미치요시 (종오위하, 분고노카미)
7대구루시마 미치토시 (종오위하, 분고노카미)
8대구루시마 미치야스 (종오위하, 분고노카미)
9대구루시마 미치후사 (종오위하, 분고노카미)
10대구루시마 미치아키라 (분고노카미)
번 위치 정보

2. 역사

1869년, 노만 지구의 황무지를 번사에게 1인당 평균 5반씩 불하하고 차 재배를 경영하게 했다. 또한, 번사 11명이 자금을 출연하여 "노만 개척사"를 결성하여 황무지 개척에 힘썼다.

1871년 3월, 미카와 국의 비지령에서 종교 정책을 둘러싼 오하마 소동(기쿠마 번 소동, 와시즈카 소동)이 발생했다. 오하마 진야에 파견된 소참사 핫토리 쥰이 메이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사찰 통폐합과 신도 의례 도입을 추진하려 했고, 정토진종(동본원사) 승려와 문도인 미카와 호법회가 이에 대립했다. 이 과정에서 번 관리인 후지오카 카오루가 살해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사건 후 미카와 호법회 지도자 이시카와 다이레이와 문도 1명이 처형되었다.

1871년 7월, 폐번치현에 따라 기쿠마 번은 폐지되고 '''기쿠마 현'''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기쿠마 현은 제1차 부현 통합에 의해 기사라즈 현에 통합되었다.

2. 1. 성립 배경

1868년 5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사토슨푸번으로 옮겨가면서, 누마즈 번주였던 미즈노 다다노리의 영지 중 누마즈 일대 2만 3천 7백 석이 이에사토의 영지로 편입되었다. 그 대신 다다노리는 가즈사 국 이치하라 군 기쿠마 일대의 2만 3천 7백 석 영지를 받고 기쿠마 번을 세웠다.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1868년) 5월, 신정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스루가 국・도토미 국 내 70만 석을 주어 (슨푸 번) 슨엔(駿遠)의 다이묘에게 보소(房総)로의 이전을 명령했다. 누마즈 번 5만 석의 번주였던 미즈노 다다노리도 스루가 국내의 영지 2만 3700석이 상지(上知)되어, 가즈사 국 이치하라 군 내에서 대지가 주어졌다. 7월 13일, 기쿠마 촌으로의 번청 이전을 정식으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기쿠마 번'''이 성립했다. 8월 30일, 누마즈 성이 신정부에 인도되었다.

새로운 영지에는 선발대가 파견되어 야와타슈쿠(현재의 이치하라시야와타)의 여관 "후지타야"를 임시 진야로 하여 토지 측량이나 마을 구획 등을 실시했다. 나중에 임시 진야는 기쿠마의 센코인으로 옮겨졌다. 번주인 다다노리는 에도 저택에 있었고, 이 사이에 반적봉환에 따라 기쿠마 번지사로 임명되었다. 다다노리는 1869년 7월 26일에 기쿠마에 들어갔다.

번사의 이전은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868년부터 1872년까지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누마즈 성 인도에 따라, 먼저 번사는 누마즈 주변의 여러 마을에 분숙했다. 가옥은 해체되어 하마모토(이치하라시 야와타)까지 해로로 수송하고, 기쿠마까지 무라타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2. 2. 번의 운영과 폐지

메이지 원년(1868년) 5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사토슨푸번으로 이봉되면서 누마즈 번주였던 미즈노 다다노리의 영지 중 일부가 이에사토의 소령으로 편입되었다. 다다노리는 그 대신 가즈사 국 이치하라 군 기쿠마 일대의 영지를 받고 기쿠마 번을 세웠다. 그는 새로운 번청 건설과 번교 창설에 힘썼다. 기쿠마 번은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다.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1868년) 5월, 신정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스루가 국・토토미 국 내 70만 석을 주었고(슨푸 번), 슨엔(駿遠)의 다이묘에게 보소(房総)로의 이전을 명령했다. 누마즈 번 5만 석의 번주였던 미즈노 다다노리도 스루가 국내의 영지 2만 3700석이 상지(上知)가 되어, 가즈사 국이치하라군 내에서 대지가 주어졌다. 7월 13일, 기쿠마 촌으로의 번청 이전을 정식으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기쿠마 번'''이 성립했다. 8월 30일, 누마즈 성이 신정부에 인도되었다.

새로운 영지에는 선발대가 파견되어, 야와타슈쿠(현재의 이치하라시야와타)의 여관 "후지타야"를 임시 진야로 하여 토지 측량이나 마을 구획 등을 실시했다. 나중에 임시 진야는 기쿠마의 센코인으로 옮겨졌다. 번주인 미즈노 다다노리는 에도 저택으로 옮겨져 있었고, 이 사이에 반적봉환에 따라 기쿠마 번지사로 임명되었다. 1869년 7월 26일에 미즈노 다다노리는 기쿠마에 들어갔다.

번사의 이전은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868년부터 1872년에 걸쳐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누마즈 성의 인도에 따라, 먼저 번사는 누마즈 주변의 여러 마을에 분숙했다. 가옥은 해체되어 하마모토(이치하라시 야와타)까지 해로로 수송하고, 기쿠마까지 무라타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1869년, 노만 지구의 황무지를 번사에게 불하하고 (1인당 평균 5반), 차원을 경영하게 했다. 또한, 번사 11명이 자금을 출연하여 "노만 개척사"를 결성하여, 황무지 개척에 힘썼다.

1871년 3월, 미카와 국의 비지령에서 종교 정책을 둘러싼 사건(오하마 소동, 기쿠마 번 소동, 와시즈카 소동)이 발생한다. 오하마 진야에 파견된 소참사 핫토리 쥰이 메이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사찰 통폐합과 신도 의례 도입을 추진하려 했고, 정토진종(동본원사)의 승려・문도인 미카와 호법회와 대립하면서, 번 관리인 후지오카 카오루가 살해되는 사태로 발전했다. 사건 후에 미카와 호법회의 지도자였던 이시카와 다이레이와 문도 1명이 처형되었다.

1871년 7월, 폐번치현에 따라 기쿠마 번은 폐지되어, '''기쿠마 현'''이 되었다. 기쿠마 현은 같은 해 11월, 제1차 부현 통합에 의해 기사라즈 현에 통합되었다.

3. 역대 번주

미즈노 다다노리(水野忠敬|미즈노 다다노리일본어) 재위 1868년 ~ 1871년

4. 영지

메이지 원년(1868년) 5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사토슨푸번으로 이봉되면서, 누마즈 번주였던 미즈노 다다노리의 영지 중 누마즈 일대 2만 3천 7백 석이 이에사토의 소령으로 편입되었다. 다다노리는 가즈사 국 이치하라 군 기쿠마 일대의 2만 3천 7백 석 영지를 받고 기쿠마 번을 세웠다. 기쿠마 번은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다.

4. 1. 가즈사 국


  • 가즈사국
  • * 이치하라군 - 75개 촌(구 하타모토령 3촌, 쓰루마키번 영 3촌, 다카오카번 영 3촌, 마에바시번 영 3촌, 세이사이번 영 1촌, 사누키번 영 1촌, 니시오다이라번 영 1촌, 아와카즈사 지현사령 70촌[내역은 구 막부령 18촌, 하타모토령 56촌, 동심급지 6촌, 요리키 급지 1촌, 쓰루마키번령 1촌, 세이사이번령 6촌]. 또한 아이급이 존재하기 때문에 촌수의 합계는 일치하지 않음)

4. 2. 미카와 국

미카와국

미카와국 비지령의 변천은 "구고구령 취조장"에서는 이미 누카타현의 소속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불명.

오하마 진야 광장에 있는 진야비. 화살통인 우츠보를 본떠 만들었다。


미카와 국의 월경지를 관할하기 위해 헤키카이군 오하마 촌(현재의 아이치현헤키난시하네 정 주변)에 오하마 진야가 설치되었다。

메이와 5년(1768년), 하타모토 미즈노 타다토모가 소요닌으로 임명되었을 때, 오하마 주변에서 6000석이 가증되어, 다이묘(오하마번 주)가 되었다. 메이와 6년(1769년)에 오하마 진야가 설치되었다。 타다토모는 후에 스루가 국 누마즈로 거성을 옮기지만(누마즈번), 오하마 진야에는 누마즈에서 다이칸(군대)·테다이가 파견되었다。

진야 터는 "헤키난시 오하마 진야 광장"(헤키난시 하네 정 1정목)이 되었으며, "키쿠마번 진야지"라고 쓰인 기념비("진야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처음 1911년(메이지 44년)에 건립되었으나, 태평양 전쟁 중에 청동이 공출되어 받침대만 남게 되어, 1959년(쇼와 34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4. 3. 이즈 국 (논란)

『일본 대백과사전(니포니카)』 및 『카도카와 일본 지명 대사전』의 "기쿠마 번" 항목에서는 기쿠마 번이 이즈국에도 관할지를 가졌다고 한다.

누마즈번 시대, 이즈국 기미사와군, 가모군, 다가타군 내에 영지가 있었다。기미사와 군 나카무라(시즈오카현 미시마시 나카)의 스즈키 가문의 저택 내에 설치된 "나카무라 관청"에서 기미사와 군·다가타 군의 여러 마을을 관할했다。분세이 연간에 가모 군 시라하마 촌 이타도 잇시키(시모다시 시라하마)에 진야를 설치했다。

메이지 원년(1868년), 누마즈성을 넘겨준 미즈노 다다요시는 다가타 군 도다 촌(누마즈시 도다)의 촌장 스구로 가문에 잠시 몸을 의탁했다고 한다。 『도쿄 신문』의 하시모토 게이시(이즈학 연구회 이사장) 기고문에 따르면, 누마즈 번의 이즈국 내 영지는 기쿠마 번으로의 이봉 후에도 이어져 기쿠마 번령이 되었다고 한다。단, 『카도카와 일본 지명 대사전』의 각 촌 기사에서는 메이지 원년에 누마즈 번에서 니라야마현의 관할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5. 문화

기쿠마 번은 번교로서 "메이신칸"을 개설했다. 메이신칸의 이름은 누마즈 번 시대에 설치했던 번교의 이름을 계승한 것이다. 누마즈 성이 넘겨진 후, 메이신칸은 한때 에도 번저로 옮겨졌으며, 메이신칸 내에 "양학국"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1872년 학제 시행 후에는 초등학교가 되었으며 (현재의 이치하라 시립 기쿠마 초등학교), 번사가 교원을 맡았다. 이 외에도 사숙을 세운 번사도 있었다.

6. 관련 인물

테시마 세이이치는 기쿠마 번 출신으로, 일본 공업 교육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에도 번저에서 태어나 기쿠마의 묘신관에서 배웠으며, 1870년에 미국으로 유학했다. 테시마 세이이치의 친형인 타나베 사다키치는 기쿠마 번 소참사를 역임하고, 후에 실업계에서 활약했다.

에가와 히데타츠에게 포술을 배운 미우라 치히로(사타로)는 기쿠마 번 대참사를 역임했고, 니다마쥬쿠에서 숙두를 역임했다. 미우라 치히로의 아들인 미우라 토오루는 영어를 배우고, 후에 프로테스탄트 목사로 활동했다.

오하마 소동의 당사자인 핫토리 쥰은 에가와 히데타츠에게 포술과 란학을 배웠다. 핫토리 쥰은 막말기에 누마즈 번에서 탈번을 꾀하다 붙잡힌 경력이 있다. 핫토리 쥰의 아들인 핫토리 아야오는 교육자, 정치가로 활동했다.

모토야마 스스무는 유신 후 에도에 설치된 기쿠마 번 서양 학국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1869년에 해군병학교에 들어가 해군 소장까지 올랐다. 타카미자와 시게루는 1871년에 공진생이 되어 오사카 병학료(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서 공부했지만, 저널리스트로 전향하여 민권파 신문 『닛신 신지시』의 기자, 편집장을 역임했고, 『도쿄 개화 번성지』를 저술했다.

이소카와 츄는 기쿠마 번 권대참사, 공의인을 역임하고 1870년에 미국으로 유학했다. 이소카와 츄는 1872년 문부성 박람회에 미국의 "맹인원"에서 가져온 시각 장애인의 왕복 서간을 출품하여, 서양의 시각 장애인 교육을 일본에 소개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유술가인 토츠카 히코스케는 누마즈 번에 있다가 미즈노 가문의 이봉과 함께 기쿠마로 이주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