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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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규흥은 1872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로, 1911년 한국인 최초로 신해혁명에 참여했다. 그는 고종의 밀명을 받아 중국에서 한인 무관 양성을 계획했으나 일제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대한자강회 활동, 중국 망명 후 신해혁명 참여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중국 광둥에서 혁명 활동을 지원하고, 동제사를 통해 독립지사를 양성했으며,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하여 무장 투쟁을 지원했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으나, 2016년부터 밀정 의혹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김규흥은 1872년 6월 13일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젊은 시절 일본에서 신문물을 접한 뒤 고향 옥천에 창명학교를 세웠으며, 고종의 밀명을 받아 중국에서 한인 무관을 양성하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김규흥의 생가는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춘추민속관 내 별관(건축면적 220m2)인 문향헌(聞香軒)이다. 이 건물은 1760년(영종 36년) 문향 김치선이 건립한 250여 년 된 전통 한옥이다. 옥천군은 보존을 위해 2009년 12월 28일 문향헌을 향토유적으로 지정했다.[5]
김규흥의 밀정 의혹은 2016년 충북대 박걸순 교수가 우쓰노미야 타로의 일기를 근거로 처음 제기하였다. 이 문제는 학술대회와 언론 인터뷰, 옥천신문 보도 등을 통해 알려지며 논쟁이 시작되었다.
2. 생애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의 국권 회복을 염원하며 이름을 김복(金復|김복중국어)으로 바꾸었다. 상하이上海|상하이중국어, 난징南京|난징중국어, 광둥 등지에서 활동하며 중국 혁명파와 교류하고 신해혁명에 한국인 최초이자 핵심 인물로 참여했다. 이러한 공로로 혁명 성공 후 광둥 정부의 군부 고위직인 호군사서(護軍使署|호군사서중국어) 고문원(顧問員|고문원중국어)에 임명되었다.[2]
이후 비밀결사 동제사同濟社|동제사한국어 조직, 홍콩에서의 한·중 합작 잡지 《향강(香江|향강중국어)》 발간, 프랑스 조계 내 박달학원博達學院|박달학원한국어 설립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1년에는 독립운동가 박용만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위한 '흥화실업은행' 설립을 추진하고, 베이징과 만주 지역에서 군사 단체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자금 문제 등으로 계획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며, 1936년 8월 16일 중국 톈진에서 별세했다. 유해는 대한민국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신해혁명 참여와 독립운동 자금 지원 등의 공로를 인정하여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3][4]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활동
1872년 6월 13일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부친이 별세했지만, 경성에 머물며 학업에 정진하고 동지들을 규합하는 데 집중하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일본을 방문하여 신문물을 접한 뒤, 고향인 옥천에 창명학교를 세워 교육 활동에 힘썼다.
이후 고위직에 있던 외가 친척의 주선으로 고종의 밀명을 받아 활동하기도 했다. 이는 중국 아청은행에 예치된 고종의 비자금을 활용하여 중국에서 한인 무관을 양성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중국으로 향하던 중 일제에 발각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06년에는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장지연, 박은식, 양기탁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관계를 다졌다.
2. 2. 중국 망명과 신해혁명 참여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장지연, 박은식, 양기탁 등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고 관계를 다졌다. 1906년 말에서 1907년 초 사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上海|상하이중국어와 난징南京|난징중국어 등지에서 활동했다. 망명 직후 조선의 국권 회복을 염원하며 이름을 김복(金復|김복한국어)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 중국 혁명파와 교류하며 한인 무관 양성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는 등 활동을 펼쳤다.
더 활발한 독립운동을 위해 1907년 말에서 1908년 초에는 광둥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본격적인 혁명 활동에 나섰다. 광둥 혁명 활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추노(鄒魯|추노중국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규흥은 성실함을 인정받아 비밀 문건 보관 및 전달을 도맡았으며, 청나라 군인을 상대로 혁명을 선전하고 동참을 유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임무는 보안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의 구체적인 행적은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11년 10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신해혁명에 참여했으며, 혁명을 일으킨 핵심 인물 6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그는 1911년 3월 7일자 미주 한인회에 보낸 편지에서 광둥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광둥은 가장 개화가 빠르고 왜적에 대한 증오도 깊어 독립운동을 도모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밝혔다.[2] 신해혁명 성공 후, 1913년 초 광둥에 혁명 정부가 들어서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군부 서열 2~3위에 해당하는 광둥 호군사서(護軍使署|호군사서중국어) 고문원(顧問員|고문원중국어)에 임명되었다.
또한 비밀결사 동제사同濟社|동제사한국어를 통해 독립지사를 양성했으며, 1913년 12월 20일에는 홍콩에서 최초의 한·중 합작 잡지인 《향강(香江|향강중국어)》을 발간했다. 1913년에는 프랑스 조계 내에 박달학원博達學院|박달학원한국어을 설립하여 독립지사 양성에 힘썼다.
2. 3. 독립운동 지원과 흥화실업은행 설립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장지연, 박은식, 양기탁 등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관계를 다졌다. 1906년 말에서 1907년 초 사이, 조선의 국권 회복을 목표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름도 김복(金復)으로 바꾸었다. 상하이와 난징 등지에서 활동하며 중국 혁명파와 교류하고 한인 무관 양성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더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1907년 말에서 1908년 초 사이에는 활동 무대를 광둥으로 옮겨 본격적인 혁명 활동에 나섰다. 그는 신해혁명에 참여했는데, 1911년 3월 7일 미주한인회에 보낸 편지에서 광둥이 개화가 빠르고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 독립운동을 도모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2]
또한 비밀 단체인 ‘동제사’를 통해 독립지사를 양성했으며, 1913년 12월 20일 홍콩에서 동제사를 통해 최초의 한·중 합작 잡지인 ‘향강’을 발간했다. 같은 해 프랑스 조계 내에 박달학원을 건립하여 많은 독립지사를 양성했다.
1921년에는 독립운동가 박용만과 함께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하여 무장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자 했다. 흥화실업은행은 금융기관을 표방했지만, 실제 목적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데 있었다. 이와 함께 베이징과 만주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고 동지들을 모아 경작하게 하면서, 여러 군사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그러나 1923년 자본금 확충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 은행 운영과 토지 계획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신해혁명 참여와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흥화실업은행 설립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3][4]
2. 4. 만년과 죽음
1921년 독립운동가 박용만과 함께 무장 투쟁 지원을 목적으로 금융기관을 표방한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했다. 이는 사실상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한 기관이었다. 베이징과 만주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고 동지들을 모아 경작하게 하면서, 흩어져 있던 각 군사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23년 은행의 자본(주식금) 확충 계획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면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다 1936년 8월 16일 톈진에서 별세했다.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중국 신해혁명에 참여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3][4]
후손으로는 손자 김치영, 증손자 김상훈 등이 있으며, 이들은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 거주하고 있다. 김규흥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상승 역시 그의 증손자이다.
3. 사후 추모와 기념 사업
2010년에는 '범재 김규흥과 3·1혁명'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김규흥의 증손자인 김상철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공저자인 김상구와 함께 펴낸 것이다.[6]
2016년 10월 15일에는 김규흥의 삶과 항일 무장투쟁을 조명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옥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 옥천군과 옥천문화원, 사단법인 김규흥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이 학술대회는 그의 고향인 옥천에서 처음으로 열린 행사였다.[7]
2018년 10월에는 '범재 김규흥 선생 기념비' 제막식이 옥천읍 하계리에 위치한 죽향초등학교 교정에서 열렸다. 김규흥은 이 학교의 전신인 사립 창명학교(彰明學校)의 설립자로, 교육을 통한 자강운동에 힘을 쏟아 1906년 목화밭에 학교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8]
같은 해 12월에는 김규흥 평전(저자 김상구)이 출간되었다. 옥천문화원과 김규흥 기념사업회 등으로 구성된 편찬위원회에서 펴냈으며, 총 1500권이 제작되어 전국 사학과 소재 대학 도서관과 학교 등에 무료로 배포되었다.[9][10]
4. 밀정 의혹과 논란
이후 2017년과 2018년에 걸쳐 옥천군 등지에서 관련 학술 세미나가 개최되었으나, 김규흥이 조선총독부의 요구에 응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결론이 주로 제시되었다.[11]
2019년 8월, KBS의 '시사기획 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 방송을 통해 김규흥을 밀정 혐의자로 보도하면서 논란이 다시 크게 확산되었다.[12][13] 이 보도에 대해 관련 문서를 발굴했던 배경한 부산대학교 교수는 김규흥의 밀정 여부가 불분명하다는 신중한 입장을 밝혔고[14][15], KBS 측은 해당 보도가 학계의 논의와는 별개로 언론의 문제 제기 차원이라고 설명했다.[16]
(사)범재 김규흥기념사업회는 KBS의 보도가 심각한 역사 왜곡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기념사업회는 공식 입장을 통해 KBS에 사과 방송과 관련 영상 삭제 등을 요구했으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사자명예훼손죄로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경고했다.[17]
4. 1. 박걸순 교수의 문제 제기 (2016)
김규흥의 밀정설은 충북대 박걸순 교수가 2016년에 처음으로 제기했다. 2016년 10월 15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열린 '제1회 김규흥기념학술대회'에서 박걸순 교수는 "옥천지역 근대의 기억과 독립운동가"라는 제목의 기조강연을 통해 이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우쓰노미야 타로의 일기에 등장하는 '김복'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소개하며,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독립운동가로서 김규흥을 전면 재평가해야 한다는 불행한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박 교수는 2017년 8월 16일 옥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규흥이 일제의 밀정일 가능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주장했다. 이 인터뷰 기사는 "김규흥 관련 자료 참담하고, 충격적이었다"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으며, 옥천신문은 박 교수의 주장에 대한 반박 의견을 포함하여 이 논란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김규흥 밀정설 논란이 확산되자, 이를 공론화하여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17년 11월 16일, (사)옥천향토사연구회가 주관하고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주최하는 '제2회 김규흥 선생의 대한독립운동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주요 발표자로는 박걸순 교수와 김규흥 연구자인 김상구(범재 김규흥과 3·1운동 공동저자, 김규흥 평전 저자)가 초청되었으나, 박 교수는 세미나 참여를 거부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세미나가 끝난 후 옥천신문은 "조선군사령관 일기만 갖고 '밀정' 확정 안돼", "김규흥 밀정? 확실한 밀정 흔적, 어디에도 없다"와 같은 기사를 통해 김규흥 밀정설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다. 또한 2018년 12월 21일에 열린 '제3회 김규흥 선생의 대한독립운동 학술세미나'에서도 밀정설이 다시 논의되었지만, 옥천신문은 "김규흥 밀정 논란, 선생이 조선총독부 요구 응했다는 근거 없어"라는 기사를 통해 세미나의 결론, 즉 밀정설의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보도했다.[11]
4. 2. 학술 세미나와 반론 (2017)
김규흥의 밀정설은 충북대학교 박걸순 교수가 2016년에 처음 제기하였다. 2016년 10월 15일, 옥천군에서 열린 '제1회 김규흥기념학술대회'에서 박걸순 교수는 기조강연("옥천지역 근대의 기억과 독립운동가")을 통해 우쓰노미야 타로의 일기에 등장하는 '김복'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근거로 들며, 이것이 사실일 경우 "독립운동가로서 김규흥을 전면 재평가해야 한다는 불행한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박 교수는 2017년 8월 16일 옥천신문과의 인터뷰("김규흥 관련 자료 참담하고, 충격적이었다")에서 2016년 학술대회 발표 내용보다 더 구체적으로 김규흥의 일제 밀정 가능성을 주장했다. 옥천신문은 박 교수의 주장에 대한 반박 글을 포함하여 이 논란에 대해 여러 차례 다루었다.
밀정설 논란이 확산되자, (사)옥천향토사연구회 주관 및 옥천군·옥천문화원 주최로 '제2회 김규흥 선생의 대한독립운동 학술세미나'가 2017년 11월 16일에 개최되었다. 이 세미나에는 박걸순 교수와 김규흥 관련 서적 『범재 김규흥과 3·1 운동』의 공동 저자이자 『김규흥 평전』을 집필 중이던 김상구의 참여가 추진되었으나, 박 교수는 참여를 거부하고 참관하지 않았다.
세미나 종료 후 옥천신문은 "조선군사령관 일기만 갖고 ‘밀정’ 확정 안돼", "김규흥 밀정? 확실한 밀정 흔적, 어디에도 없다" 등의 기사를 통해 김규흥 밀정설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또한 2018년 12월 21일에 열린 '제3회 김규흥 선생의 대한독립운동 학술세미나'에서도 밀정설이 다시 언급되었지만, 옥천신문은 "김규흥 밀정 논란, 선생이 조선총독부 요구 응했다는 근거 없어"라는 제목의 기사로 세미나의 결론을 보도하며 밀정설에 대한 근거가 부족함을 시사했다.[11]
4. 3. KBS 방송과 논란의 확산 (2019)
2019년 8월 20일, KBS는 '시사기획 창'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 밀정 2부작 중 '밀정 2부 - 임시정부를 파괴하라'를 통해 김규흥의 밀정 혐의를 보도했다.[12][13] 이는 같은 해 8월 13일 방송된 '밀정 1부 - 배신의 기록'의 후속편으로, 1부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기밀문서 5만 장을 분석하여 한국인 밀정 혐의자 895명을 특정하고 그 명단을 공개했으며, 안중근 의사의 동지였던 우덕순과 김좌진 장군의 비서였던 이정을 대표적인 밀정 사례로 지목한 바 있다.[12]
그러나 김규흥 관련 문서를 발굴했던 배경한 부산대학교 교수는 김규흥의 밀정 여부에 대해 명확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14][15] KBS 측은 이러한 학계의 신중론에도 불구하고, 해당 방송이 "학계의 연구와 토론이 좀 더 필요한 부분"이지만 "학계의 토론과는 별개로 '대중적 관점'에서 분명한 사실"이 존재하며, "역사학계의 진지한 토론과 국가보훈처의 면밀한 서훈 심사도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그와 별도로 언론의 문제 제기"라고 주장하며 방송의 정당성을 강조했다.[16]
KBS의 방송 이후, (사)범재 김규흥기념사업회는 공식 홈페이지((사)범재 김규흥기념사업회 홈페이지)를 통해 보도 내용에 반박하는 입장을 밝혔다. 김규흥의 증손자인 김상승 이사장은 2019년 8월 28일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김규흥 밀정설 보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시하여, KBS가 김규흥을 일제의 밀정으로 단정한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라고 지적했다. 이 글에서 기념사업회는 김복(김규흥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이 밀정이라고 단정한 근거가 있는지 등 8가지 질문을 던지며 KBS의 해명을 요구했다. 또한 사과 방송과 함께 방영된 2편의 VOD 서비스 중단 및 김규흥 관련 내용 삭제를 요구했으며,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KBS 및 관련자들을 형법 제308조의 사자명예훼손죄로 고소·고발할 예정이라고 경고했다.[17]
이 반박문은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의 공지사항이 아닌 자유게시판에 게시되었는데, 이는 KBS 방송 이후 제기된 비판적 여론에 대한 답변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기념사업회의 이러한 입장이 KBS 측에 공식적으로 전달되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해당 내용은 김규흥 관련 블로그(김규흥 관련 블로그)에도 '[공지] 김규흥 밀정에 대한 입장, 범재 김규흥에 대한 허위보도'라는 제목으로 게시되었다.
4. 4. 계속되는 논쟁
KBS의 밀정 관련 방송 이후, (사)범재 김규흥기념사업회는 해당 보도에 반박하는 글을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상승(김규흥의 증손자)은 2019년 8월 28일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김규흥 밀정설 보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KBS가 김규흥을 일제의 밀정으로 단정한 것은 심각한 역사왜곡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김복이 밀정이라는 단정의 근거 등을 포함한 8가지 질문을 던지며, 사과방송 요구와 함께 해당 방송 2편의 다시보기 차단 및 김복 관련 내용 삭제를 요구했다. 만약 제기된 문제점에 대한 의혹 해명이 없을 경우, KBS 및 관련자를 형법 제308조의 사자명예훼손죄로 고소·고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17]
해당 반박문은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의 공지사항이 아닌 자유게시판에 게시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KBS 방송 이후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비판 의견에 대한 답변 성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기념사업회의 이러한 입장이 KBS 측에 공식적으로 전달되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김규흥 밀정설 보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김규흥 관련 블로그에도 "[공지] 김규흥 밀정에 대한 입장, 범재 김규흥에 대한 허위보도"라는 제목으로 게시되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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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밀정, 우리 안의 적
지식너머
2020
[2]
저널
中 신해혁명 지도부에 조선인 김규흥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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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1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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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흥 선생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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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투데이
2018-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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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신해혁명의 별 김규흥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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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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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김규흥 선생 옥천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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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 선생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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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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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무장투쟁의 선봉 김규흥 선생 학술대회 고향 옥천서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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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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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무장투쟁 선구자' 김규흥 고향 옥천에 기념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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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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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독립운동가 김규흥선생 평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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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재 김규흥기념사업회
2019-08-28
[12]
저널
시사기획 창 임정 수립 100주년 특집 밀정 2부작, 오늘(20일) 2부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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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2019-08-20
[13]
저널
김규흥, 독립운동가인데 친일을? 누구길래, 해외 무장 독립투쟁의 선구자지만..
http://www.anewsa.co[...]
아시아뉴스통신
2019-08-20
[14]
저널
“임시정부를 파괴하라”…집요한 밀정 공작
https://news.naver.c[...]
KBS
20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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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탐사K/앵커의 눈]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일제의 밀정 공작"
https://news.naver.c[...]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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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재 김규흥기념사업회
201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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