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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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사량은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활동한 소설가로, 본명은 김시창이며 필명으로 활동했다. 1914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도쿄 제국대학에서 독일 문학을 전공했다.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재일 조선인의 삶을 그린 단편소설 <빛 속에>로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올랐다. 이후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여 르포 <노마만리>를 집필했으며,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6.25 전쟁 중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현실을 묘사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했으며,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다른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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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고등보통학교 동문 - 이태희 (1911년)
이태희는 일제 강점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법조인으로 해방 후 검찰총장,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장 등을 역임했으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 평양고등보통학교 동문 - 김창영 (18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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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광은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 암살 미수와 육영수 여사 살해를 저지른 범인으로, 조총련의 영향을 받아 좌익 사상에 심취하여 범행을 계획했으며 사형 집행되었다.
김사량 | |
---|---|
기본 정보 | |
본명 | 김시창 |
출생 | 1914년 3월 3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평양부 |
실종일 | 1950년 10월 (36세) |
실종 장소 | 대한민국 강원도 원주 부근 |
직업 | 소설가 |
언어 | 일본어, 한국어 |
장르 | 순수 문학 |
사상적 경향 | 재일 조선인 문학 |
대표 작품 | 빛 속에 |
2. 생애
김사량은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의 소설가이자 희곡 작가로, 일본어와 조선어 모두 작품을 남겼다. 1914년 3월 3일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시창(金時昌)이다. 모친과 아내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1940년 재일 조선인을 다룬 단편소설 빛 속으로로 조선인 최초로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올랐다.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독일문학과를 졸업하고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독어 교사로 부임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다음 날인 1941년 12월 9일 예방검속법에 의해 구금되기도 했다.
1943년에는 소설 태백산맥과 바다의 노래를 발표했다. 태백산맥은 민족주의 작가로서 김사량이 시국 속에서 선택한 저항의 소산이었고, 바다의 노래는 통치 권력에 대한 협력 자세를 강화한 작품이었다.
1945년 5월, 학도병 위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옌안으로 탈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 의용군에 합류했다. 이때의 경험을 쓴 노마만리는 르포문학의 걸작이자 귀중한 사료로 꼽힌다.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비(非) 김일성계파였기에 작품집에 실릴 작품이 누락되는 등 부침을 겪었다. 1947년 시인 구상의 데뷔 작품집인 시집 《응향》 검열 위원으로 참여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종군 작가로 남하하여 종군기를 집필했으며, 같은 해 10월경 강원도 원주 문막 부근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3년 6월 25일, 북한 전승기념일에 북한 정부는 김사량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추서했다.[59]
2. 1.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1914년 ~ 1939년)
김사량(본명: 김시창)은 1914년 평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누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22]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일본에 대항하는 파업을 주도하여 퇴학당했으나,[2] 1947년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1932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3년 사가고등학교(현 사가 대학) 문과 을류에 입학했다.[26] 이때부터 일본어로 창작을 시작했다. 1935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에 진학하여 독일 문학을 전공했다.[28] 이듬해 친구들과 동인지 『제방』을 발간했다.[29] 1937년에는 조선 예술좌와 관련되어 검거되어 두 달 남짓 혼후지 경찰서에서 미결수로 지내기도 했다.[31]
1939년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독일문학과를 졸업하고(졸업 논문 주제는 하인리히 하이네), 같은 해 도쿄 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33] 대학원 재학 중 조선일보사 학예부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32] 1941년 도쿄 제국대학 대학원 독일어문학과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 2. 작가 활동 (1939년 ~ 1945년)
1936년, 김사량은 이마이 교헤이, 우메사와 지로, 신다니 도시오, 사와카이 스스무, 나카지마 요시히토와 함께 동인지 '제방'을 창간하고 동명의 잡지를 발행했다.[29] 1937년에는 무라야마 도모요시의 춘향전 공연 준비를 평양에서 도왔다.[31] 1938년에는 이광수의 소설 <무명>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모던일본에 게재했는데, 이 작품으로 이광수는 제1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1939년, 장혁주의 소개로 문예수도 편집장 야스타카 도쿠조에게 사사(師事)했다.[32] 이후 문예수도에 아쿠타가와 상 후보작인 빛 속으로 등을 발표했다.[34] 빛 속으로는 일본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조선 출신 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이 작품 외에도 토성랑, 기자림, 천마, 풀이 우거지다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일본에서 민족주의 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34] 천마는 친일 조선 지식인을 통렬하게 비판, 풍자한 작품으로, 평론가 김문집을 모델로 하고 있다.
1940년, 김사량은 단편 소설 빛 속으로로 한국인 작가 최초로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올랐다. 같은 해, 일본어로 쓴 단편 소설 천마와 풀이 우거지다가 발표되었다. 1941년에는 향수가 발표되었고, 첫 단편집 빛 속으로가 일본에서 출판되었다.[3]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와 같은 한국어 소설도 썼는데, 이 작품은 1941년에 발표되었다.[3]
태평양 전쟁 발발 다음 날인 1941년 12월 9일, 김사량은 가마쿠라 경찰서에 예방검속법으로 구금되었다가 다음 해 1월 말에 석방되었다.[37] 석방 조건은 불분명하지만, 이 시점에서 사상적, 정치적인 후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8] 1942년, 조선 방문에 나선 유아사 가쓰에, 야스타카 도쿠조, 나라사키 쓰토무, 미우라 이쓰오 등을 평양에서 맞이했다. 같은 해, 십장 꼽새와 단편집 고향을 출판했다.
1943년에는 소설 태백산맥과 바다의 노래를 발표했다. 태백산맥은 조선 말기 화전민들이 태백산맥에서 자유의 새로운 터전을 찾아 싸우는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 민족주의 작가로서 김사량이 시국 속에서 선택한 저항의 소산이었다.[43] 바다의 노래는 격렬한 분노와 절망감을 속에 품으면서 쓴 "선전 소설"로, 통치 권력에 대한 협력 자세를 강화한 작품이었다.[46]
1945년 5월, 김사량은 학도병 위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가족에게 남기는 편지를 시인 노천명에게 전달하고 옌안으로 탈출하여 조선독립동맹과 조선 의용군에 합류했다.[49] 이 때의 경험을 쓴 노마만리는 르포문학의 걸작이자 귀중한 사료로 꼽힌다.
2. 3. 해방 이후의 활동과 죽음 (1945년 ~ 1950년)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귀국한 후, 김사량은 북한에서 문학 조직 정치 활동, 대학 강의, 창작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비(非) 김일성 계파였기 때문에 작품집에 실릴 작품이 누락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53] 1947년에는 시인 구상의 데뷔 작품집인 시집 《응향》의 검열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이후 약 2년간 침묵을 지키다가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 작가로 남하하여 종군기를 집필했다.[54] 이때 "서울에서 수원으로", "우리는 이렇게 이겼다"와 같은 보고서를 썼다.[56] 같은 해 10월경, 마지막 작품인 전쟁 보고서 "바다가 보인다"를 완성한 후, 강원도 원주 문막 부근에서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낙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57][58]
1952년 3월 22일 자 중국 신문 "광명일보"에 실린 오마이(吳邁)의 기사를 통해 김사량의 사망 소식이 일본에 처음 알려졌다.[55] 이 기사는 일본에서 발행되던 조선어 신문 "해방신문"에 번역, 전재되었다.[55]
사망 후 북한에서 김사량의 모든 활동은 문학사에서 삭제되고 《종군기》만이 남았다. 황석영이 방북했을 때 김사량에 대해 질문했으나, 모두 모른다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한다.
2013년 6월 25일, 북한 전승기념일에 북한 정부는 김사량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추서했다.[59]
3. 평가 및 유산
김사량은 남한에서는 월북 문인이자 일본어로 글을 쓴 작가로,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반대한 연안파 출신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잊혀졌다.[17] 그러나 재일 한인 문학계에서는 그를 선구적인 작가로 꼽고 있으며, 이러한 재일 한인 문학계의 꾸준한 평가가 1984년 북한에서 김사량이 복권된 배경 중 하나로 추정된다.
남한에서도 일부 연구자들이 김사량에게 지속적으로 주목했으나, 월북 문인으로 분류되어 금지 대상이었다. 현재 남한에서는 김사량을 비록 일본어로 작품을 썼지만 민족 문학의 일원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과, 조선어와 일본어 양쪽 모두 창작 언어로 사용한 이중 언어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입장, 탈식민주의와 트랜스내셔널리즘 문학 이론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 등이 있다.[17]
북한에서는 김사량을 소시민적 안주에서 벗어나 민족적 양심을 지킨 작가로 분류한다.[17] 2013년 6월 25일, 북한 전승기념일에 공화국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김사량의 작품 다수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현실과 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5] 그는 주로 일본어로 작품을 썼지만, 식민지 국가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를 비판했다.[6][7] 또한 한국어와 일본어 모두로 활발하게 집필하고 번역하며, 이중 언어 사용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8]
재일 한국 문단에서는 김사량을 프롤레타리아 문학 작가로 분류했으며, 아쿠타가와상 후보로 지명된 후 널리 알려졌다. 북한에서는 1987년에 복권되어 양심적인 민족주의자로 재평가되었다.[17]
4. 작품 목록
발표 시기 | 제목 | 장르 | 언어 | 비고 |
---|---|---|---|---|
1939년 | 빛 속으로 | 단편소설 | 일본어 | |
1940년 | 풀 찾기 | 단편소설 | 일본어 | 역자 불명, 『문예(文芸)』 8권 7호 |
해당사항 없음 | 향수 | 단편소설 | 일본어 | |
해당사항 없음 | 풀숲 깊숙이 | 단편소설 | 일본어 | |
해당사항 없음 | 천마 | 단편소설 | 일본어 | |
해당사항 없음 | 도둑놈 | 단편소설 | 일본어 | |
해당사항 없음 | Q백작 | 단편소설 | 일본어 | |
해당사항 없음 |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 | 단편소설 | 조선어 | 오오무라 마스오 번역, 『조선 단편 소설선 하(朝鮮短篇小説選 下)』 이와나미 서점, 1984년 |
해당사항 없음 | 십장꼽새 | 단편소설 | 일본어 | |
1940년 ~ 1941년 | 태백산맥 | 장편소설 | 조선어 | 『국민문학』 연재 |
해당사항 없음 | 호접 | 희곡 | 조선어 | |
해당사항 없음 | 봇똘의 군복 | 희곡 | 조선어 | |
해당사항 없음 | 더벙이와 배뱅이 | 희곡 | 조선어 | |
1946년 | 노마만리 | 르포 | 조선어 | 안우식 번역, 아사히신문사 간행[12] |
해당사항 없음 | 칠현금 | 단편소설 | 조선어 | |
해당사항 없음 | 마식령 | 단편소설 | 조선어 | |
해당사항 없음 | 차돌의 기차 | 단편소설 | 조선어 | |
1953년 | 바다가 보인다 | 일본어 | 『신일본문학』 9월호 |
- '해당사항 없음'은 발표 시기가 명확하지 않은 작품
- 조선어 작품은 제목 뒤 '*' 표시 삭제 (표 안에서 구별 가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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