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형 (1914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석형(1914년)은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그리고 냉전 시대를 거치며 활동한 인물이다. 평안북도 박천 출신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며 요직을 역임했다. 1960년 서울에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30년 이상 수감 생활을 했으며, 1991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2006년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박천군 출신 - 송지영
송지영은 남경중앙대학 출신으로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한국번역가협회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등을 역임하며 언론 및 문화계에서 활동했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국토통일원 고문,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제11대 국회의원,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 박천군 출신 - 방일영
방일영은 평안북도 박천 출생으로 조선일보 사장 비서를 거쳐 경영권을 장악하고, 1980년대 발행 부수 1위 신문으로 성장시켰으며, 방일영장학회 등을 설립하여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했으나 권언유착 논란으로 비판받은 언론인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 신광수 (1929년)
신광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으로,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 전쟁 참전 후 루마니아에서 유학했으며, 1970년대부터 일본에서 대남 공작 활동을 하다 일본인 납치 사건에 연루되어 대한민국에서 체포, 복역 후 북송되었으나 일본 정부는 그의 송환을 요구하고 북한은 거부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 리두균
한국 전쟁 당시 체포되어 31년간 수감 생활을 한 비전향 장기수 리두균은 출소 후 탕제원을 운영하다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어 조국통일상을 수상하고 《로동신문》에 글을 발표하며 조선로동당과 김정일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 - 문세광
문세광은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 암살 미수와 육영수 여사 살해를 저지른 범인으로, 조총련의 영향을 받아 좌익 사상에 심취하여 범행을 계획했으며 사형 집행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 - 신광수 (1929년)
신광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으로,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 전쟁 참전 후 루마니아에서 유학했으며, 1970년대부터 일본에서 대남 공작 활동을 하다 일본인 납치 사건에 연루되어 대한민국에서 체포, 복역 후 북송되었으나 일본 정부는 그의 송환을 요구하고 북한은 거부하고 있다.
김석형 (1914년) | |
---|---|
기본 정보 | |
![]() | |
본관 | 김해 김(金海 金氏) |
호 | 백민(白民) |
생애 | |
출생 | 1914년 1월 9일 |
출생지 | 함경남도 함흥부 |
사망 | 2000년 9월 22일 (86세)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묘소 | 애국열사릉 |
학력 | |
학력 | 니혼 대학 법문학부 졸업 모스크바 대학교 대학원 졸업 |
경력 | |
주요 경력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려학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수상 | |
훈장 | 김일성훈장 로력훈장 |
상훈 | 인민상 |
기타 | 공화국영웅 칭호 |
2. 생애
김석형은 평안북도 박천군 덕안면 출신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만주국 신경신무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귀국, 박천수리조합에서 근무 중 요시찰 인물로 감시받았다. 일제강점기 말, 결혼식 주례 중 카를 마르크스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언급하여 체포되기도 했다.[2]
해방 후, 박천에서 적위대를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면당 비서로 활동했다. 이후 평안북도, 희천군, 강계군, 함경남도 등에서 요직을 맡았다. 한국 전쟁 기간에는 정보계통 특수부서에서 근무했다. 1949년 5월 9일 함경남북도 일대의 종교 시설을 탄압했다.[2]
1957년 국제여행사 함흥시 안내소장을 역임하다 1960년 남파되었으나, 1961년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자신을 특사라 주장했으나,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 선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30년 6개월간 수감되었다. 1991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북송되어 2006년 사망했다.[2]
2. 1. 초기 생애와 사회주의 활동
평안북도 박천군 덕안면에서 태어났다. 김석형의 가문은 지방 토호였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생활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의주의 신의주삼무중학교에 진학했다. 이 무렵 일본 유학을 다녀온 동네 선배들에게서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게 되어 소규모 농촌계몽운동 조직에서도 활동했다.만주국의 수도 신경에 있는 신경신무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에 귀국하여 박천수리조합에서 근무했다. 이때 이미 요시찰 인물이 되어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결혼식 주례에서 아들을 낳으면 카를 마르크스, 딸을 낳으면 로자 룩셈부르크 같이 키우라고 발언했다가 체포된 일이 있었다.
일제 패망 후 고향 박천에서 적위대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1946년 조선공산당 박천군 덕안면당 초대 면당비서가 되었다. 곧 능력을 인정받아 평안북도 군당 노동부장, 희천군 보안서 문화부서장, 강계군 정치보위부 부장, 함경남도 정치보위부 정보과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때도 후방에 있는 정보계통 특수부서에서 근무했다.
1949년 5월 9일, 함경남도 보위부장의 권위로 함경남북도 일대의 전 수도원과 수녀원을 습격하여 종교인을 체포 및 구금하고 종교 시설은 폐쇄 및 압수하였다.[2] 그 당시 집중적으로 탄압받고 살해당한 천주교 덕원자치수도원구의 대표적 수도원은 현재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다.[3]
2. 2. 해방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활동
일제 패망 후 고향 박천에서 적위대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1946년 조선공산당 박천군 덕안면당 초대 면당비서가 되었다. 곧 능력을 인정받아 평안북도 군당 노동부장, 희천군 보안서 문화부서장, 강계군 정치보위부 부장, 함경남도 정치보위부 정보과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한국 전쟁 때도 후방의 정보계통 특수부서에서 근무했다.[2]1949년 5월 9일, 함경남도 보위부장의 권위로 함경남북도 일대의 전 수도원과 수녀원을 습격하여 종교인을 체포·구금하고 종교 시설은 폐쇄·압수하였다. 당시 집중적으로 타압받고 살해당한 천주교 덕원자치수도원구의 대표적 수도원은 현재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다.[3]
1957년 자본주의 국가의 기업 임원에 해당하는 국제여행사 함흥시 안내소장을 맡았다가, 1960년 자원하여 서울에 남파되었다. 약 1년간 활동하던 중 1961년 6월 체포되었다. 김석형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정탐 목적의 간첩이 아니라 대한민국 지식인들과 대화하려는 특사로 왔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반공법 제6조 3항에 따라 사형이 선고되었다가,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총 30년 6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수감 중 전향을 강요받았으나 전향하지 않았다. 1991년 12월, 70세 이상으로 30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한 비전향 장기수에게 형집행정지 조치가 내려져 풀려났다.
대한민국에는 연고가 없어 어렵게 생활하다가,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여섯 번째로 2006년에 사망했다.
2. 3. 남파와 체포, 그리고 수감 생활
1957년 자본주의 국가의 기업 임원에 해당하는 국제여행사 함흥시 안내소장을 맡았다가, 1960년 자원하여 서울에 남파되었다. 약 1년간 활동하던 중 1961년 6월 체포되었다. 김석형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정탐을 목적한 간첩이 아니라 대한민국 지식인들과 대화하려는 특사로서 왔다고 주장했다.[2]처음에는 반공법 제6조 3항을 적용받아 사형이 선고되었다가,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총 30년 6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수감 중 전향을 강요받았으나 전향하지 않았다. 1991년 12월, 70세 이상으로 30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한 비전향 장기수에게 형집행정지 조치가 내려져 풀려났다.
2. 4. 북송과 사망
1991년 12월에 70세 이상으로 30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한 비전향 장기수에게 형집행정지 조치가 내려져 풀려났다. 대한민국에는 연고가 없어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거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여섯 번째로 2006년에 사망했다.[2]3. 저술 및 예술 작품
김석형은 비전향 장기수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송환》에 등장한다. 영화 속 김석형은 학식이 풍부하고 말솜씨가 좋은 인물로 묘사된다.[4] 이 영화의 감독 김동원은 친구의 부탁으로 김석형과 조창손을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거주지로 안내한 것을 계기로 《송환》을 촬영하게 되었다.[4] 처음에는 달변가인 김석형을 중심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으나, 차츰 사상이 투철한 김석형 대신 조금 더 인간적인 모습의 조창손으로 초점이 이동되었다.[4]
김석형은 구술 자료를 엮어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라는 수기를 남겼고, 이 책은 2001년에 출간되었다.
참조
[1]
뉴스
북송 비전향장기수 어떻게 살고있나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6-09-01
[2]
웹인용
한국전쟁과 Missionary Benedictines, 독일 선교사의 구금과 송환
http://blog.daum.net[...]
2015-11-23
[3]
웹인용
북으로 간 어느 노간첩의 이야기
http://blog.daum.net[...]
2015-11-23
[4]
뉴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생각한다 - 영화 <송환>의 김동원 감독과 행복한 대화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4-04-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