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식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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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용식은 일제강점기 일본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선수로 활약한 축구인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8강 진출에 기여했고,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하여 8강에 올랐다. 은퇴 후에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1954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으며, 1960년 AFC 아시안컵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양지 축구단, 신탁은행, 할렐루야 FC 등에서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대한축구협회 부회장과 기술지도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FIFA 국제심판 자격증 취득자이기도 하며, 2005년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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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 (축구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원어 이름 | 김용식 |
한자 표기 | 金容植 |
로마자 표기 | Gim Yong-sik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1910년 7월 25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황해도 신천군 |
사망일 | 1985년 3월 8일 (향년 74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신체 정보 | |
키 | 172cm |
몸무게 | 64.5kg |
포지션 | 수비형 미드필더 / 공격수 |
주발 | 알 수 없음 |
학력 | |
고등학교 | 儆新中学校 |
대학교 | 숭실전문학교 |
대학교 | 보성전문학교 |
대학교 | 와세다 대학 |
클럽 경력 | |
1933-1940 | 경성 축구단 |
1934 | 조선 축구단 |
1940-1942 | 평양 축구단 |
1946-1947 | 서울 축구단 |
1946-1950 | 조선전업 축구단 |
1950-1952 | 대한민국 육군 |
국가대표 경력 | |
일본 | 1936-1940 3경기 0골 |
대한민국 | 1948-1950 3경기 1골 |
감독 경력 | |
1953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54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59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60-1961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68-1969 | 양지 |
1969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70 | 한국신탁은행 |
1981-1982 | 할렐루야 FC |
수상 | |
1960 AFC 아시안컵 | 우승 (감독) |
2. 어린 시절
황해도 신천에서 아버지 김주역의 슬하 3남 2녀 중 셋째아들이자 막내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경기도 개성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이후 경성부에서 성장하였다. 경성 경신고등보통학교와 경성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본관은 김해 김씨이다.[23] 1910년 7월 황해도 신천군 출신이며, 부친은 목사로 비교적 유복한 가정이었다.[24] 부친은 조선신궁 참배 거부 등으로 여러 차례 투옥된 적이 있었다.
김용식은 1935년 경성 축구단 소속으로 전일본선수권대회(현재의 천황배)에서 우승하는 등 선수 시절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1936년 하계 올림픽에는 일본 대표로, 1948년 하계 올림픽에는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하였다. 특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조선인 선수로는 유일하게 축구 종목에 출전하여 '베를린의 기적'이라 불리는 8강 진출에 기여했다. 1952년 선수 은퇴를 하였다.
7-8세 무렵부터 공을 차기 시작하여[24], 13세에 경성부 (현재의 서울특별시)로 이사했다. 1926년 경신중학교에 입학한 후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25] 1929년 광주 학생 운동 당시 김용식은 데모를 주도하다가 경찰의 지명 수배를 받아 경신중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26] 1930년, 김용식의 축구 실력을 높이 산 교토부 내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약 2개월 만에 퇴학했고, 그 해 입학한 보성전문학교 (현재의 고려대학교)에서도 퇴학하여 경신중학교 복학을 희망했지만 복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6] 같은 해 '조선 사립 전문 육상 대항'이라는 육상 경기 대회에 출전하여 1500m와 5000m에서 우승했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에 재입학했다. 재학 중이던 1935년에 Kyungsung FC영어의 멤버로 제15회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 (현재의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또한, 같은 해에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전 조선 대회에 출전하여 1,500미터와 10,000미터 두 종목에서 우승했다.[27]
3. 선수 경력
3. 1. 클럽 경력
1935년 경성 축구단 소속으로 전일본선수권대회(현재의 천황배)에서 우승하였다. 경성 축구단 이후 조선전업 축구단(현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의 비공식 전신), 육군 축구단에서 활동하였다.
교통부 축구단(현 대전 코레일 축구단)에서도 잠시 활동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38]
3. 2. 국가대표팀 경력
김용식은 일본과 대한민국 양쪽에서 모두 선수로 활약한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1] 일제강점기에는 하계 올림픽에 일본 대표팀으로 차출된 유일한 한국인 선수였으며,[2]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대표로 올림픽에 참가했다.
연도 | 대회 | 소속 | 비고 |
---|---|---|---|
1936년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 일본 대표 | |
1940년 | 기원 2600년 봉축 동아 경기 대회 | 일본 대표 | |
1942년 |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동아 경기 대회 | 일본 대표 | |
1948년 | 1948년 런던 올림픽 | 대한민국 대표 |
3. 2. 1. 일본 국가대표팀 경력
1936년 하계 올림픽에 일본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조선 선수로는 유일하게 축구 종목에 출전하였다. 이 대회에서 〈베를린의 기적〉이라 불리던 8강 진출에 성공하였다.[37][39] 베를린으로 가는 배 위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영국의 축구 기술 서적을 읽고 축구는 체력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훈련하는 ‘1만 일 훈련’을 1936년 11월 15일에 시작해 1979년 1월 15일에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37][39]1936년 하계 올림픽 1라운드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일본의 승리에 기여했다.[3][4][5] 올림픽 이후, 김용식은 일본 국가대표 선수가 많았던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한국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1936년 4월 베를린 올림픽 일본 대표팀에 선출되었고,[28] 보성전문학교 교수들의 권유로 조선에서 유일하게 참가하는 멤버가 되었다.[29][30] 1936년 6월 20일 도쿄를 출발하여 기차를 갈아타고 1936년 7월 3일 베를린에 도착했다.[31] 1936년 7월 27일 SpVgg Blau-Weiß 1890 Berlin|SpVgg 블라우바이스 1890 베를린영어전에서 일본 대표로 처음 출전했다.[32] 올림픽 본선에서는 '베를린의 기적'으로 불리는 스웨덴 대표팀과의 경기와 이탈리아 대표팀과의 경기, 2경기에 선발 출전했다.[33] 베를린 올림픽 이후에도 동아 경기 대회 (1940년) 등의 대회에 일본 대표로 출전했다.[34]
3. 2. 2.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경력
1936년 하계 올림픽에 일본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조선 선수로는 유일하게 축구 종목에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일본은 〈베를린의 기적〉이라 불리던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김용식은 베를린으로 가는 배에서 우연히 영국의 축구 기술 서적을 접하고 축구는 체력이 아닌 기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1만 일 훈련'을 시작하여 1979년 1월 15일에 목표를 달성했다.[37][39]1948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하여 8강까지 진출했다.[6] 1954년 FIFA 월드컵에서는 감독으로 참가하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김용식 감독은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라는 말을 남겼다.[40]
김용식은 일본과 대한민국 양쪽에서 모두 선수로 활약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1] 일제강점기에는 하계 올림픽에 일본 대표팀으로 차출된 유일한 한국인 선수였다.[2] 1936년 하계 올림픽 1라운드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일본의 승리에 기여했다.[3][4][5]
일본의 식민 통치가 끝난 후, 1948년 하계 올림픽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멕시코를 상대로 한국 축구 역사상 첫 승리를 이끌었다.[6] 1952년 현역에서 은퇴했다.[35]
4. 지도자 경력
김용식은 은퇴 후 1954년 FIFA 월드컵과 1960년 AFC 아시안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며, 아시안컵 우승을 이끌었다.[6][7] 1968년에는 양지 축구단 감독을, 1980년에는 할렐루야 축구단 창단 감독을 맡았다. 1982년 2월에는 할렐루야 FC 감독으로 일본을 방문했다.[36]
연도 | 팀 | 직책 |
---|---|---|
1954년, 1960년, 1969년 1월-10월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감독 |
1968년 | 양지 | 감독 |
1970년 | 신탁은행 | 감독 |
1980년-1982년 | 할렐루야 FC | 초대 감독 |
5. 행정가 경력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겸 기술지도위원장을 지냈다.
6. 심판 경력
한국인 최초로 FIFA 국제심판 자격증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플레이 스타일
김용식은 빠른 속도, 정교한 기술, 높은 활동량을 갖춘 선수였다. 일본은 그의 능력을 간과할 수 없었고,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4] 그는 센터 하프로 뛰었지만, 공격에 관여하는 플레이메이커였다.[3][4]
8. 개인사
김용식은 근면했고 축구에만 몰두했다. 그는 인체에 해로운 것을 극도로 피했으며, 훈련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의 건강한 습관은 그가 40세까지 선수 생활을 지속하도록 했다.[3][6]
본관은 김해 김씨이다.[23] 1910년 7월 황해도 신천군 출신이며, 부친은 목사로 비교적 유복한 가정이었다.[24] 부친은 조선신궁 참배 거부 등으로 여러 차례 투옥된 적이 있었다.
7-8세 무렵부터 공을 차기 시작하여,[24] 13세에 경성부 (현재의 서울특별시)로 이사했다. 1926년 경신중학교에 입학한 후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25] 1929년 광주 학생 운동 당시 김용식은 데모를 주도하다가 경찰의 지명 수배를 받아 경신중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26] 1930년, 김용식의 축구 실력을 높이 산 교토부 내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약 2개월 만에 퇴학했고, 그 해 입학한 보성전문학교 (현재의 고려대학교)에서도 퇴학하여 경신중학교 복학을 희망했지만 복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6] 1930년에는 '조선 사립 전문 육상 대항'이라는 육상 경기 대회에 출전하여 1500m와 5000m에서 우승했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에 재입학했다. 재학 중이던 1935년에 Kyungsung FC영어의 멤버로 제15회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 (현재의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또한, 같은 해에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전 조선 대회에 출전하여 1,500미터와 10,000미터 두 종목에서 우승했다.[27]
1936년 4월 베를린 올림픽 일본 대표팀에 선출되었으나,[28] 보성전문학교 교수들의 권유로 인해 조선에서 유일하게 참가하는 멤버가 되었다.[29][30] 같은 해 6월 20일 도쿄를 출발하여 기차를 갈아타고 7월 3일 베를린에 도착했다.[31] 7월 27일 SpVgg Blau-Weiß 1890 Berlin영어전에서 일본 대표로 처음 출전했다.[32] 올림픽 본선에서도 후에 '베를린의 기적'으로 불리는 스웨덴 대표팀과의 경기와 이탈리아 대표팀과의 경기 2경기에 선발 출전했다.[33] 베를린 올림픽 이후에도 동아 경기 대회 (1940년) 등의 대회에 일본 대표로 출전했다.[3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한국 대표팀이 되어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 선수 겸 코치로 2경기에 출전했다. 1952년 10월 고려대학교 OB팀의 일원으로서 출전한 경기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35]
1954년 FIFA 월드컵에서는 한국 대표팀 코치를 맡았고, 이후 국내 클럽팀 감독 등을 역임했다.
1963년, 제1회 대한민국 체육상을 수상했다.[35] 1971년, 퇴학 처분을 받았던 경신중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생으로 증서를 수여받았다.[26]
1982년 2월 할렐루야 FC 감독으로 방일했다.[36]
1985년 사망 후 체육훈장 맹호장이 수여되었다. 2005년 차범근, 거스 히딩크 등과 함께 한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있는 월드컵 기념관에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9. 수상 내역
구분 | 대회 | 연도 |
---|---|---|
숭실대학 | 전조선 축구대회 | 1931[17] |
경성 FC | 전조선 축구대회 | 1936[18] |
천황배 전일본 선수권 대회 | 1935[3] | |
조선신궁 경기대회 | 1935[3] | |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 | 1935[3][19] | |
조선전업 |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 | 1949[20] |
대한민국 | AFC 아시안컵 | 1960년[14] |
양지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 1968년[20] |
AFC 챔피언스 리그 | 1969년 준우승[22] | |
개인 |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 2005[21] |
개인 | 체육훈장 맹호장 | 1985년[41] |
10. 기록
김용식은 1936년 하계 올림픽과 1948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했다.[8][9]
대회 | 출장 | 득점 |
---|---|---|
친선 경기 | 2 | 1 |
하계 올림픽 | 4 | 0 |
합계 | 6 | 1 |
1950년 4월 15일 홍콩에서 열린 홍콩과의 친선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했다.[8]
은퇴 후 1954년 FIFA 월드컵과 1960년 AFC 아시안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며, 1960년 아시안컵에서 대한민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다.[6][7]
팀 | 시작 | 종료 | 경기 | 승 | 무 | 패 | 승률 |
---|---|---|---|---|---|---|---|
대한민국 | 1953년 4월 | 1953년 5월 | 5 | 3 | 1 | 1 | |
1954년 5월 | 1954년 6월 | 2 | 0 | 0 | 2 | ||
1959년 11월 | 1959년 12월 | 2 | 1 | 0 | 1 | ||
1960년 9월 | 1961년 6월 | 5 | 5 | 0 | 0 | ||
1969년 9월 | 1969년 10월 | 4 | 1 | 2 | 1 | ||
통산 | 18 | 10 | 3 | 5 |
10. 1. 국가대표팀
김용식은 1936년 하계 올림픽과 1948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했다.[8][9]대회 | 출장 | 득점 |
---|---|---|
친선 경기 | 2 | 1 |
하계 올림픽 | 4 | 0 |
합계 | 6 | 1 |
10. 2. 감독 기록
김용식은 은퇴 후 1954년 FIFA 월드컵과 1960년 AFC 아시안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그는 조국을 아시안컵 우승으로 이끌었다.[6][7]팀 | 시작 | 종료 | 경기 | 승 | 무 | 패 | 승률 |
---|---|---|---|---|---|---|---|
대한민국 | 1953년 4월 | 1953년 5월 | 5 | 3 | 1 | 1 | |
1954년 5월 | 1954년 6월 | 2 | 0 | 0 | 2 | ||
1959년 11월 | 1959년 12월 | 2 | 1 | 0 | 1 | ||
1960년 9월 | 1961년 6월 | 5 | 5 | 0 | 0 | ||
1969년 9월 | 1969년 10월 | 4 | 1 | 2 | 1 | ||
통산 | 18 | 10 | 3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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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우리 축구사 복원 프로젝트 - 5화. '축구계의 손기정'을 한국은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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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 | 그라운드의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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