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정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정치공작대 총무를 역임하고, 해방 이후 건국실천원양성소 강사로 활동했다. 이후 단국대학교 제2대 학장을 지냈으며, 제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형사소송법 제정 관련 공청회 위원장을 맡는 등 입법 활동을 펼쳤다.
신익희는 건국의 기초와 지반이 될 행정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임시정부 의정원(임정의정원)의 결의에 따라 임정산하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의 조직에 착수했다. 김정실은 임시정부 동지로서 총무를 맡아 신익희와 뜻을 같이하며 정치공작대에서 적극적으로 조력하였다.[1]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김구가 귀국한 뒤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 강사로 활동하였다. 잠시 사업에 참여하다 단국대학교 재단설립 이사와 부학장을 거쳐 제2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경남 고성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1]
2.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2. 1. 임시정부 정치공작대
신익희는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에 따라 임정 산하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 조직에 착수했다. 정치공작대는 아무런 조직이 없던 임정 측 입장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구였다. 국가 수립의 기초가 될 이 정치공작대는 1946년 2월 지방조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정치공작대 조직 후,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얻어 국내의 70여 명 인사들로 구성된 행정연구반(行政硏究班)을 조직하였다. 행정연구반은 지방행정조직 담당 역할을 하는 기구였다.
신익희는 신망이 두텁고 유능한 각 지방의 인재를 포섭하여 정치공작대를 조직했는데, 김정실은 임시정부 동지로서 총무를 맡았다. 정치공작대의 중앙본부부장에는 신익희, 중앙본부차장은 강태동, 재정은 임병기, 조직은 조중서, 정보는 박문 등이었고, 그 밖에 중앙요원과 각 도를 담당하는 정치위원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처럼 김정실은 임정 시절부터 신익희와 뜻을 같이하며 정치공작대에서도 적극적으로 조력하였다.[1]
3. 해방 이후 활동
앞줄: 김구, 장형, 뒷줄: 장도빈, 엄항섭, 양주동, 김정실, 박정숙
3. 1. 건국실천원양성소 강사 활동
김정실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귀국한 뒤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의 강사로 활동하였다.[2][3][4]
건국실천원양성소는 1947년 김구가 자주정부 수립을 위해 준비한 단체로,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해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2][3][4]
1947년 3월 명예소장 이승만, 소장 김구, 이사장 장형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교육 내용은 독립운동사, 정치, 경제, 법률, 헌법, 역사, 선전, 민족문화, 국민운동, 철학, 약소민족문제, 농촌문제, 협동조합, 사회학, 공산주의 비판, 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으며, 교육 기간은 100명 내외로 1기는 2개월, 2~9기는 1개월이었다.[2][3][4]
조소앙, 신익희, 지청천, 양주동, 엄항섭 등 각계의 인사들이 강사로 참여하였는데, 이때 김정실은 친분이 있던 양주동, 엄항섭과 함께 강사로 참여하였다.[2][3][4]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된 후,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체되고 건물 원효사는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2][3][4]
3. 2. 단국대학교 설립 및 운영 참여
김정실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귀국한 뒤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 강사로 활동하였다.[1] 잠시 목재회사 중역으로 사업에 참여하다가 단국대학교 재단설립 이사와 부학장을 거쳐 단국대학교 제2대 학장을 맡았다.[1] 장형과의 인연으로 1950년 1월 16일부터 1952년 11월 23일까지 단국대학 제2대 학장을 맡아 단국대학교 발전에 기여하였다.[1]
3. 3. 대한민국 국회의원 활동
김정실은 제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과정에 참여하여,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와 관련해 인권 옹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5]
3. 3. 1. 형사소송법 제정 관련 활동
김정실은 제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1954년 1월 9일 오후 1시 45분 서울 태평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 한국전쟁이 끝난 뒤 국회의사당 건물로 쓰이던 곳)에서 열린 '형사소송법 초안에 대한 공청회'에서 위원장으로서 "법치국가에 있어서 법을 정비하는 데 국회뿐만 아니라 일반 여론이 되어 진행되고 있는 이 형사소송법은 인권 옹호에 중요한 성격을 갖인 것이올시다."라고 발언했다.[1]
인권에 중점을 둔 공청회는 오후 5시 20분까지 이어졌으며, 첫 안건은 '검사와 사법경찰관리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현재의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와 유사한 논쟁으로, 당시 국회에서는 '검찰 파쇼냐, 경찰 파쇼냐', '상호협력이냐, 상명하복이냐'와 같은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통령(검찰)과 동사무소 공무원(경찰)', '선생(검찰)과 학생(경찰)' 발언까지 등장했던 2011년 검찰-경찰 수사권 갈등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1][5]
4. 역대 선거 결과
참조
[1]
서적
위대한 한국인 신익희
태양출판사
1972
[2]
뉴스
"「建實(건실)」解散(해산)"
경향신문
1949-08-25
[3]
뉴스
"建國實踐員養成所(건국실천원양성소) 弘益大財團(홍익대재단)서 經營(경영)"
경향신문
1949-09-25
[4]
뉴스
서울대 법대 학장 지낸 민법학자 진승록
http://news.koreanba[...]
대한변협신문
2015-02-09
[5]
뉴스
경찰에 수사권을 줄까요 말까요?
http://h21.hani.co.k[...]
한겨레
2011-06-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